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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 Chapter 271 - Chapter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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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태하는 이 어색하고 싸늘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듯,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다들 진정 좀 해. 나 지금 환자거든? 그리고 은하도 그때는 제정신 아니었고, 다행히… 살았잖아.”이현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그 눈동자는 힘겹게 태하를 향했다.“얼마나… 얼마나 다쳤었는데.”“머리에 출혈이 심했어. 수술은 잘 됐는데 입원 기간이 좀 길었고.”이현은 그저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보았다.민희는 한참 동안 이현과 은하를 번갈아가며 노려보다가, 결국 고개를 돌려버렸다.“하아…답답해 죽겠네. 은하가 반 년을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백이현 너는 뭐했는데? 아무것도 몰랐잖아.”“민희야… 제발 그만…”“나는 진짜… 이제 진짜 모르겠다. 니들 마음대로 해.”민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병실 안 한쪽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여전히 퉁명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눈에는 걱정과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그런 민희를 향해 이현이 다가갔다.“정민희,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민희가 고개를 홱 돌려 이현을 노려봤다.“뭐? 고맙다고? 지금 이 상황에?”“나 없는 동안 강은하 옆 지켜줘서.”이제야 민희가 울먹거렸다.“야! 아무리 그런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우린 친구 아니었어? 어?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는 게 친구냐? 내가 은하 아팠을때만 생각하면 진짜…”목소리가 떨렸다. 화가 나서, 그리고 서운해서. 이현은 그런 민희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미안해. 근데, 나 이제 강은하 옆에서 한시도 안 떠날 거니까 화 좀 풀어주라.”은하 역시 그런 민희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민희의 어깨를 감쌌다.“민희야. 화 그만 내. 응? 태하 보러 온 거잖아.”“하여튼 한 번만 더 은하 아프게 하면, 그땐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그냥 죽여버릴거야.”“그럴 일 없을 거야. 약속할게.”세잠시 어색했던 공기가 조금씩, 아주 천천히 풀려가고 있을 때였다.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던 태하가 말없이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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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한참을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던 중, 민희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이현에게 물었다. “야 맞다, 가희는? 가희는 뭐하고 지내?” 모두의 시선이 이현에게로 흘렀다. 하지만 여동생에 대한 질문에 이현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 그 지지배는 진짜… 한숨만 나온다니까.”“왜? 요즘 뭐 하는데?”“떠나고 싶네 어쩌네 하더니, 지금은 미국이랑 한국 왔다갔다 해.”“와… 역시 부잣집 딸래미는 다르구나.”이현의 시선이 태하에게로 향했다.“정태하.”“응?”“아직도 네 안부 묻더라.”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게 안, 잠시 정적이 흘렀다.태하는 조금 놀란 듯 했지만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 보였다.“그냥 궁금한가 보지 뭐.”민희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레 말했다.“아직도 태하 좋아하는 거 아니야? 고딩때 대단했잖아. 태하 오빠앙~”“그만해라.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태하의 말에 민희는 입을 다물었고, 은하는 살짝 시선을 떨궜다.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이들과 다시 함께 걷는 앞으로의 시간이 서로에게 늘 위로와 행복이 되기를, 남은 시간만큼은 진정한 웃음으로 채워지기를.테이블 위에 쌓여가는 술병처럼, 지나온 추억과 기억이 그들의 밤을 깊게 물들였다. ***햇살이 좋은 어느날, 베인파트너스 대표실.회의를 마친 이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말끔히 정리된 셔츠와 달리 느슨하게 풀린 넥타이. 오늘따라 그에게서는 어딘가 여유로운 기류가 풍겼다. 그는 은하가 있는 방 문을 열곤 머리만 쑤욱 들이밀었다.“강은하, 바빠?”“아니? 왜?”이제서야 성큼성큼 다가가 은하가 앉아 있는 의자를 돌리고는, 허리를 숙여 얼굴을 마주 보았다. 순식간에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 당황한 은하의 목소리가 떨렸다.“…백이현?”“나 할 말 있는데, 이렇게 해야 들을 거 같아서.”진심인지, 농담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의 표정과, 당황하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는 은하의 눈동자가 맞부딪혔다.“무슨 할 말. 빨리 해.”이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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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고 은하는 차창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생각보다 더 차가우신 분이네. 그래도 이해는 돼.”이현은 운전대를 잡은 채 짧게 대답했다.“이해 안 해도 돼. 본인부터 가정에 무책임하셨던 사람인데 뭐.”그 말에 은하의 시선이 곧장 이현를 향했다.“백이현,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운전중이었던 이현은 고개를 돌리진 않았지만, 평소와 다른 은하의 말투에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은하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물론 너도 상처 받았겠지. 그래서 아버님께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도 잘 알겠어. 근데, 그렇게 단정 짓지 마. 부모님 마음도 제대로 모르잖아.”“모르지. 그러니까 더 어렵고, 더 서운하지.”그의 목소리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한때는 아버지를 동경했었고, 그 기대가 무너진 뒤 남은 건 오래된 불신과 실망이었다.“나는 네가 적어도 인간 관계이 있어서는 정의부터 내리며 선 긋는 대신, 이해부터 하려는 사람이었으면 해. 나도 그럴 거야.”“강은하, 오늘 좀 어른 같네?”“원래 내가 더 성숙했거든?”“알겠어. 노력할게.”그날 밤, 이현은 처음으로 마음속에 묵혀 있던 ‘가족’이라는 단어를 꺼내 다시 한 번 들여다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은하는 분명, 그 단어의 무게를 함께 들어줄 사람이었다.***며칠 후, 두 사람은 우주의 집을 찾았다.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은하는 눈 앞에 보이는 풍경에 입을 틀어 막았다.거실 테이블 위에는 그릇이 꽉 찰 정도로 푸짐한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잡채, 갈비찜, 각종 전, 매콤한 해물탕까지. 마치 작은 명절 같았다.“오빠! 식당에서 만나자니까! 무슨 명절도 아니고 이게 다 뭐야! 괜히 설희 언니만 고생했겠네!”은하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치자,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른 우주가 능청스럽게 말했다.“이현이 집밥 좋아하잖아, 고기랑 국 있는 거.”설희도 웃으며 덧붙였다. “어차피 외식해도 조미료 들어가서 속 안 좋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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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봄 기운이 만연하던 어느 날, 경찰서 유리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이내 시끄러운 고성과 고함이 들려왔지만, 태하의 귀에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소리였다. 어지간한 민원이나 시비는 늘상 있는 일이었기에, 그는 아무렇지 않게 서류 정리에 집중했다.그때, 그 소란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꽂히는 목소리 하나.“어디 싸가지 없이 어르신한테!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고개를 돌려보니, 그 곳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눈을 치켜뜬 그 모습은 당당하고 시끄럽고, 익숙했다.“…백가희?”믿기지 않는 듯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고, 그 이름은 수 년간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한 시절을 끌어올렸다. 가희는 여전히 눈을 부라리고 있었지만,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을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둘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가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던졌다.“태하 오빠?”태하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가희를 향해 다가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미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보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이 자식이 자기 때문에 어르신이 넘어졌는데, 사과도 안 하고 그냥 가는 거 있지?”가희의 옆에는 웬 젊은 남성 한 명이 눈을 피하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눈에 띄게 불편한 표정이었다.“그래서 불러 세워서 사과 좀 하라고 했더니, 대뜸 침을 뱉으면서 내 멱살을 잡는 거야! 이게 사람 새끼야? 인간 맞냐고!”태하는 가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남자 쪽을 향해 성큼 걸어갔다.표정은 순식간에 경찰로 돌아간 모습이었다.“방금 진술은 다 들었고, CCTV만 확인하면 되니까 일단 정식으로 조사부터 받으시죠.”태하의 말에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뭐야? 경찰이 아는 사람이야? 설마 지인 봐주기냐?”가희가 발끈하며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널 봐주고 있다 이 자식아! 한 대 맞아 볼래!?”가희의 손이 허공을 가르려는 찰나, 태하가 당황하며 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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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그날 저녁, 민희네 감성 주점.오늘은 은하와 이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은하의 얼굴엔 편한 웃음이 어렸다.육회에 젓가락을 들이밀며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오늘따라 퇴근이 늦었던 태하가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태하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이현을 바라보았다.“백가희 한국 왔더라?”이현의 젓가락질이 뚝 멈췄다. “뭔 소리야? 백가희 한국 왔어?”“…동생 맞냐?”“백가희가 그렇지 뭐. 갑자기 훅 나타나고, 또 말 없이 사라지고.”두 사람의 대화에 민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근데 정태하 넌 어떻게 알았어? 가희 귀국한 거?”“말도 마, 경찰서에 진상 하나 데려왔더라. 고등학생 때랑 똑같아. 목소리 크고, 말 안 듣고,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고.”“경찰서? 가해자로 간 거 아니지?”“응. 다행히도.”네 사람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태하는 자신도 모르게 은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하 역시 환하게 웃고 있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은하의 웃음이 서운하지 않았다. 그저 요즘 많이 행복하구나 싶었다.이젠 백이현이 은하의 곁을 다시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어 버렸다.테이블 위에서는 잔 안의 술이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태하의 감정도 그렇게 잔잔해지는 중이었다.***드레스 피팅 날.청담동의 조용한 드레스 숍, 커튼이 열리는 순간 이현의 입이 떡 벌어졌다."공주다!"진짜였다.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묶였고, 가느다랗고 새하얀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심플한 오프숄더 드레스는 움직일 때마다 하늘하늘 흘러내리며 마치 살아 있는 숨결처럼 찰랑거렸다.은하는 어색한 듯 손끝으로 치맛단을 매만지며 얼굴을 붉혔다.“좀 과해 보이지 않아?”이현은 아예 넋을 잃어버렸다.자꾸만 목이 탔다. 심장이 아팠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멀어지는 것 같아서. “백이현?”그제야 눈을 깜빡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본능처럼 손을 내밀어 은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너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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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결혼식 당일, 청담의 고급 호텔. 하객들로 북적이는 로비에는 샴페인 잔을 든 사람들과 사방에서 들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가득했다. 태하는 한 켠에 진열된 두 사람의 웨딩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한없이 부드럽고 편안해보였다.그때, 어느샌가 다가온 가희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었다.순간적으로 태하의 고개가 가희를 향해 돌아갔다. “백가희!”“태하 오빠앙!”가희는 오늘도 해맑게 웃고 있었다.유난히 잘 어울리는 단정한 브라운 계열의 원피스, 정갈하게 넘긴 머리카락, 은은하게 빛나는 귀걸이까지. 태하는 어쩐지 낯선 사람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오빠는 뭐 타고 왔어? 경찰차? 삐용삐용?”태하가 가희의 이마에 톡, 가볍게 꿀밤을 내렸다.“아야! 왜 때려!”“시끄러워 죽겠어.”“우리 결혼식 끝나면 한강 놀러 갈래? 날씨 엄청 좋은데? 한강 라면 콜?”태하는 대꾸 없이 한숨을 쉬었지만, 가희가 낀 팔짱을 풀어내진 않았다.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뿌리쳤을 거리감이었지만, 오늘은 가희의 애교와 따뜻한 체온이 불편하지 않았다.잠시 후, 식장 안.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 가운데, 은하와 이현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하얀 조명이 베일 너머로 부드럽게 쏟아졌고, 이현은 은하를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떨리지는 않았지만, 벅찼다.은하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긴장돼?”“아니. 근데 사실… 눈물이 날 것 같긴 해.”“응? 벌써부터?”“강은하.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너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해. 아니, 안 해.”은하는 대답 대신 이현의 손을 더 꼭 붙잡았다.우주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펑펑 울고 있었고, 설희는 별이를 안고 멍한 눈으로 우주를 바라보았다. “자기야… 좀 심해… 언제까지 그렇게 울 거야? 어?”“흑… 은하가… 우리 은하가 벌써… 결혼을 하잖아… 너무 행복해 보이지 않아? 흐흐흑…”이제는 체념만이 정답이었다. “에휴, 별이는 아빠 체면 때문에 울지도 못하는데, 진짜 한심해서…”민희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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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1년 뒤, 한 산부인과.찢어질듯한 비명 소리가 병실 가득 울려 퍼졌다.“꺄악! 백이현! 나 죽어! 나 죽는다고오!”“강은하!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숨 쉬어, 숨! 우리 연습 했잖아!”은하의 손을 붙잡은 이현은 마치 자신이 아이를 낳는 사람처럼, 이마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그리고 은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목이 터질듯이 비명만을 질러댔다.“숨을 쉬라고!? 야! 내가 너 때문에 진짜! 하아아악! 으아앙…!”“은하야, 지금은 진정부터 해야 해! 일단 후, 하, 후, 하…”“그 입 다물라고! 꺄아앙!”잠시 후, 내진을 마친 의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모 분만실로 옮깁니다!”이현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같이 있을래요. 같이 갈래요!”간호사가 이현을 막아섰다.“남편분, 진정 하시고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은하는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분만실로 옮겨졌고, 이현은 복도를 서성거리며 입술을 떨었다.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괜찮을까. 괜찮아야 돼. 아 돌겠네… 아 미치겠네…”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희가 머리를 쥐어뜯었다.“야! 지금 진통 하는 건 우리 은하거든? 왜 저래 진짜!”“나도 그만큼 아프단 말이야. 마음이…”그 옆으론 걸음마를 시작한 별이가 뚱땅뚱땅 걸어 다녔고, 설희는 볼록한 배로 그런 별이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별아! 거기 엘리베이터야! 안 돼!”그리고 우주는 오늘도 예외 없이 울고 있었다.“우리 은하가… 진짜 엄마가 되네… 아… 이거 진짜 눈물 난다…”“강우주!! 그만 울고 제발 애 좀 봐!”우주는 그제야 눈물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별이를 안아 들었다.“미안해… 나 왜 이렇게 눈물이 나냐.”그때, 뒤늦게 헐래벌떡 복도를 가르며 달려오는 태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태하의 옆엔 가희가 함께였다.“백이현! 아기는? 아기 나왔어?”“오빠? 오빠가 애 낳았어? 어머, 얼굴에 땀좀 봐.”이현은 두 사람의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여전히 복도를 서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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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의 이혼 소식이 들려왔다.생각해 보니 늘 그랬던 것 같다. 엄마는 늘 짙은 화장을 하고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었고, 아빠는 늘 일에 파묻혀 가족 간에 대화는 항상 부족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았던 적이 언제였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았다.가희는 어젯 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이 소식을 듣고 결국 학교를 가지 못했다.그저 침대 안에 몸을 웅크린 채 하나둘 떠오르는 기사들을 확인했다.[속보] 한성그룹 백상현 회장, 이혼 소장 접수. 세기의 이혼에 재산 분할은 어떻게 될까?[속보] 아내의 외도에도 백회장은 여전히 침묵 중.그 순간, 팝업창에 단톡방 알림이 정신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2학년 4반] 이라는 이름의 채팅방.누군가가 캡처한 기사를 올렸고, 이모티콘과 ‘헐’ ‘진짜냐’ 같은 반응이 연이어 올라왔다.[그래서 결석한 거 아님?][백가희, 보고 있냐? 실화냐?][대답 바람. 오버.]당연히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가십이 된다는 것, 그들에게 남의 상처는 가십 따위에 불가하다는 걸. 그래서 상처는 늘 숨기게 되는 약점이고, 이런 구경거리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끌려 나온다.그대로 츄리닝 바지를 꿰어 입고 후드 지퍼를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목적지는 없었지만, 지금은 집 안에 있는 시간이 더 끔찍했다. 이상하게 집 안을 맴도는 가정부들조차 오늘따라 유독 더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놀이터에 앉아 애꿎은 모래만 발로 차던 무렵, 핸드폰이 울리며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손가락이 망설였다. 받기 싫으면서도, 또 받지 않자니 나쁜 딸이 되는 것만 같아서 결국 슬라이드를 밀었다.“왜.”“어디니.”엄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날카로웠고, 그 속에 뭔가를 참는 듯한 숨소리도 섞여 있었다.하지만 가희는 이미 그 숨소리의 정체를 알 만큼 커버렸다. 아마도 자기 체면을 구기기 싫은 사람의 숨소리같았다.“그냥 밖에 잠깐 나왔는데, 왜?”“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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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그날 저녁, 한참을 떠돌다 집으로 향하니 익숙한 실루엣이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오빠 백이현이었다.어느 때보다 그늘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지만, 당연히 이혼 소식 때문일 거라 생각하고 곧장 고개를 돌렸다.그대로 방으로 향하려던 순간, 이현이 말을 걸어왔다.“야, 학교도 안 가고 어디 갔다 오냐?”“그냥. 집에 있기 싫으니까.”“내일부턴 학교 빠지지 말고 가라. 그리고 나, 새벽에 프라하로 출국해.”그제야 멈춰서 고개를 돌려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어이가 없었다. 자기 혼자 도망이라도 치려는 건가 싶어서.“갑자기? 왜? 학교는?”“아버지 일. 그리고 너, 백가희.”“말해.”“힘들더라도 일단 버텨.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하니까.”가희는 그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일이 이렇게 큰 사명처럼 들릴 줄은 몰랐다. “갔다가… 언제 오는데?”“모르겠다. 아직은.”“그럼 은하 언니는?”“….”이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단지 고개를 숙인 채 손끝으로 셔츠 자락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이, 정적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아… 프라하는 도망가는 게 아니라 억지로 가는 거구나, 은하 언니도 이 사실을 모르는구나. 하지만 더는 물을 수 없었다. 오빠의 출국이 정말 아버지의 결정이라면 그건 이 집에서는 이미 법과도 같았으니까. “잘 다녀와.”가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으로 향했고, 이현은 아무 말 없이 가희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오빠는 결국 프라하로 떠났고, 학교생활은 당연히 지옥이었다. 누군가의 시선, 속삭임, 자신이 지나갈 때면 갑작스레 조용해지는 상황들. 입술을 꾹 다물고 걸어도, 등 뒤로 스치는 수군거림은 지워지지 않았다.“야, 저기 백가희 지나간다.”“기사 본 사람?”“엄마가 그러는데, 쟤네 집 완전 박살났대.”그들의 말처럼 인생이 산산이 박살 난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누구 하나 옆자리에 앉지 않았지만 차라리 그게 더 편했던 것 같다. 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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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1화

대학교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하지만 수능 성적에 맞춰 넣은, 관심조차 없던 유아교육과에 흥미라곤 있을 리 만무했다.아이들을 좋아하냐는 교수님의 질문에 매번 ‘네’라고 대답했지만, 그 대답엔 어떠한 감정도 담지 못했다.좋아하긴 무슨, 길거리에서 만나는 아이들조차 소리나 빽빽 질러대는 모습을 볼 때면 미간이 먼저 찌푸려지는데.학과 친구들과의 대화는 얇고 둥글었다. 어디에도 깊이 끼어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어디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그냥 적당히 웃고, 적당히 대꾸하고, 가끔은 메신저에 표정 이모티콘을 붙이며 공허함을 덮었다.그러던 어느 날,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과제가 있든 말든 상관이라곤 없던 평소 같던 어느 날. 편의점 앞에서 캔맥주를 잔뜩 사서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 ROTC 제복을 입은 남학생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 너 유아교육과지?”“저 아세요? 초면부터 왜 반말이세요?”날카로운 대답에도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아 미안, 교양 수업 때 책에서 학번을 본 것 같아서. 너 1학년 아니야? 난 3학년 이거든.”“맞는데요? 그래서요?”“말 되게 잘하네? 수업 땐 매번 조용하기만 하던데.”“그건 말을 아낀 게 아니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서였고요.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인데요?”“오케이. 사람 잘못 건드렸나 보다. 미안.”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손을 들어 굿바이 제스처를 보이곤 사라졌고, 가희는 말없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손에 쥔 봉투 안에서 캔맥주가 달그락거렸다.“뭐가 좋다고 저렇게 실실 쪼개는 거야? 참 마음 편하게 사나 보다.”***오늘따라 과 동기생 한 명이 유독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꽤나 예쁘게 생긴 여학생, ‘이단비’였다. “가희야, OT도 안 오더니 이번 MT도 안 간다며? 선배들이 싫어하지 않을까?”가희는 귀찮다는 듯 책상에 엎드린 채, 핸드폰 화면만 내려다보며 대답했다.“무슨 상관이야? 선배들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다고 취업을 시켜 주는 것도 아니잖아.”그 무뚝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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