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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조금 덜 외로운 밤

Author: 이레나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5 10:42:27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설화는 테이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작은 진동이 손끝에서 어깨까지 번졌다. 술기운 탓인지, 기다림 탓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한참 뒤, 낮고 느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이야.

“대표님… 어디세요?”

설화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혀끝에 술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흔들리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 ……왜.

“그냥… 시간 되시면, 저랑 술 한잔, 하실래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거절도 허락도 아닌 침묵이었다. 설화는 그 침묵 속에서 숨을 삼켰다. 손가락이 휴대전화 모서리를 더 세게 붙잡았다.

— 거기 어디야.

마침내 들려온 대답은 짧고 낮았다. 설화는 그제야 눈을 감았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여기, 고깃집 바로 옆 포장마차예요.”

— 끊어.

전화는 그렇게 끝났다. 귓가에는 그의 목소리만 희미하게 남았다. 설화는 헛웃음을 삼키며 잔에 남은 소주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과연 올까.

나 같은 전화 한 통에 움직일 사람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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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오전, 미래드림 회의실은 평소보다 훨씬 무겁고 숨 막히는 정적으로 가득했다.길게 놓인 대리석 테이블 위로 임원들의 노트북이 일제히 열려 있었다. 공기청정기 팬이 돌아가는 소리조차 유난히 크게 들렸다. 상석에 앉은 강현은 만년필을 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유리를 느릿하게 두드리고 있었다.딱, 딱.일정한 소리가 이어질수록 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점점 굳어갔다.“보고 시작하세요.”재무팀 최 과장이 서둘러 스크린에 화면을 띄웠다.“정상 대출 라인과 별도 펀드 운용 건은 손실 없이 정리했습니다. 잔여 리스크는 현재 기준으로 없습니다.” “현재 기준?”강현의 시선이 스크린에서 최 과장의 굳은 얼굴로 옮겨갔다. 단 두 단어가 떨어졌을 뿐인데, 회의실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최 과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예. 외부 변동 가능성까지 감안하면 추가 확인이 필요합니다만, 내부 처리 기준으로는 문제없습니다.” “리스크 대응은요.” “지난주 정치권 요청 건은 해외 차명계좌를 통한 송금 절차까지 처리됐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자문료와 행사 후원금으로 분산 처리되어 추적 가능성은 낮습니다.”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찻잔을 들어 올렸지만 입술을 대지는 않았다. 잔 너머로 최 과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차분했다.“낮은 거지, 없는 게 아닙니다. 다시 확인하세요.” “예.”마케팅팀장의 보고가 먼저 이어졌다.“신규 사업 홍보 일정은 다음 달 첫째 주로 잡았습니다. 사전 보도자료는 이번 주 안에 배포하고, 주요 매체 인터뷰도 순차적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강현이 보고서에서 시선을 들었다.“그 일정은 앞당기세요.” “언론 노출 시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전체 일정이요. 사전 홍보부터 투자자 대상 설명회까지 일주일 당기세요.” “준비 기간이 빠듯할 수 있습니다.” “빠듯한 건 일정이 아니라 준비가 부족한 겁니다. 진행하세요.”마케팅팀장이 황급히 메모했다. 이어 전략기획팀장이 화면을 넘겼다.“신규 사업 관련 투자자 대응 자료입니다.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67화 잠긴 폴더

    세차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처마 끝을 때리던 요란한 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더니, 일정한 간격을 두고 툭, 툭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골목의 정적을 채웠다. 젖은 도로 위로 가로등의 붉은 불빛이 길게 번졌고, 이따금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아스팔트 위 물웅덩이가 낮게 일렁였다.설화는 좁은 처마 아래에 서서 한동안 그 젖은 풍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비가 완전히 그쳤다고 하기엔 공기가 축축하고 무거웠고, 더 쏟아질 것 같다고 하기엔 밤하늘이 옅게 개어 있었다.강현은 아무 말 없이 비에 젖은 재킷 소매를 툭툭 털어냈다. 흐트러진 앞머리 끝에 맺힌 물방울 하나가 그의 턱선을 타고 흘러내리다 셔츠 깃 안쪽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설화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괜히 시선을 돌렸다.“이제 그치려나 봐요.”설화가 처마 밖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창백한 손바닥 위로 미세한 빗방울이 스치듯 닿았다가 금세 허공으로 흩어졌다. 강현은 대답 대신 젖은 도로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택시 잡아줄 테니까 타고 가.”“……대표님은요?”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설화는 아차 싶어 입술을 다물었다. 물어봐야 할 말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판단할 수 없었다. 저 오만하고 빈틈없는 남자에게 제 알량한 걱정 따위를 건네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짓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어이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말았다.강현의 입꼬리가 픽 비틀렸다.“누가 누굴 걱정해.”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덜 아픈 건 아니었다. 사람을 흔들어 놓고도 자신은 늘 한 발 뒤에 서는 사람. 들어올 틈을 주는가 싶다가도 손을 뻗는 순간 벽부터 세우는 사람이었다.강현이 손을 들자, 빈 택시 한 대가 갓길에 붙었다. 그는 뒷문을 열고 설화를 바라봤다.“뭐 해. 기사님 기다리시잖아. 타.”설화는 더 말하지 않고 차에 올랐다. 젖은 치맛자락이 시트 가장자리에 닿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고개를 돌리자, 빗물 어린 차창 너머로 강현이 그대로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66화 기억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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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65화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것

    겉보기엔 가벼운 농담이 오가는 술자리였지만, 설화는 숨이 막힐 듯 불편했다. 태연한 얼굴의 진우와 달리, 강현은 유독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소주잔을 쥔 그의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옅게 솟아올라 있었다.설화가 조용히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갈 무렵, 맞은편에 앉은 진우가 턱을 괸 채 그녀를 응시했다.“자선 파티 때부터 생각했는데.”불쑥 던져진 말에 설화가 눈을 깜빡였다. 진우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설화 씨는 왜 그렇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어요.”시선은 설화를 향해 있었지만, 날이 선 말끝은 다분히 강현을 겨누고 있었다.그 순간 강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잔을 움켜쥔 긴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진우는 그 굳은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입가만 느슨하게 풀었다.“보통 그런 자리는, 제대로 준비된 사람들만 넣지 않나. 꽤 위험한데.” “…….” “설화 씨를 굳이 거기 둔 이유가, 난 좀 궁금해서.”테이블 위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위험한 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밀어 넣은 강현의 모순을, 진우가 노골적으로 파고들어 균열을 내고 있었다.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입꼬리만 아주 얕게 비틀었다. 웃음인지 경계인지 모를 서늘한 무표정이었다. 짧고 숨 막히는 대치 끝에 의자가 바닥을 거칠게 긁는 마찰음이 울렸다. 강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잠깐 바람 좀 쐬고 오지.”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든 강현이 턱짓했다. 명백히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강현이 먼저 등을 돌리자, 진우는 물을 한 모금 삼킨 뒤 설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심기 불편한가 본데, 금방 다녀올게요.”***가게 밖 흡연구역에 선 강현은 말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짧은 순간에도 손끝이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뚜껑이 딸깍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64화 가까운 사람

    강남대로의 화려한 불빛들이 조각조각 흩어지며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퇴근길 대로변은 분주했지만 약속 장소인 ‘한우일품’ 입구에는 기다리는 사람들과 식당 안에서 번지는 웅성거림이 따뜻하게 겹쳐 있었다.설화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비싸겠다.”그때 멀리서 진우가 손을 흔들었다.“여기예요.”설화가 다가가자, 진우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고기 굽는 소리와 테이블마다 이어지는 대화가 한꺼번에 귀에 들어왔다.자리에 앉은 설화는 습관처럼 주위를 둘러봤다. 찾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시선이 입구 쪽에 한 번 더 머물렀다. 그 모습을 본 진우가 피식 웃었다.“찾아오는 데는 어렵진 않았죠? 강현이도 곧 올 겁니다.”괜히 속을 들킨 기분에 설화는 물잔부터 집어 들었다.“워낙 유명한 곳이잖아요. 방송에서도 봤어요.” “그런 뜻으로 물은 건 아닌데.”진우의 웃음이 짙어졌다. 설화는 못 들은 척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직원이 정갈하게 밑반찬을 놓고 불판을 준비했다. 설화가 메뉴판의 가격을 흘긋 확인하는 사이 진우가 주문을 끝냈다.“여기 고기가 그렇게 맛있어요?” “맛은 누구랑 먹느냐에 따라 꽤 달라지죠.” “또 이상한 말하시네요.” “검사라서 그래요. 말을 있는 그대로 하면 재미가 없어서.”설화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려던 순간, 가게 문이 열렸다. 키가 훤칠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짙은 슈트 차림에 넥타이까지 반듯하게 맨 모습은 어제 차 안에서 보았던 흐트러진 얼굴과 전혀 달랐다. 강현은 테이블에 앉은 설화를 발견하고 찰나의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표정을 감추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잠시 흐르던 정적을 깬 건 진우였다.“설화 씨는 내가 불렀어. 괜찮지?”설화는 조심스럽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63화 처음 고른 선물

    어둠이 내려앉은 텅 빈 집으로 설화가 조용히 들어왔다. 현관문을 닫고 전등을 켜자 LED 조명이 몇 번 깜빡인 뒤 느릿하게 방 안을 밝혔다. 늦가을 밤의 서늘한 공기가 집 안에도 그대로 고여 있었다.설화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 눈을 감자 조금 전 차 안에서 보았던 강현의 희미한 웃음과 강현의 낮고 메마른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기억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조용히 저려 왔다.방 안의 차가운 공기보다 조금 전 안겼던 그의 품이 더 따뜻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누군가의 애정을 받아본 기억조차 희미한 자신이, 강현을 위로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오만이었다.“정말, 웃기지도 않아. 내 주제에 뭘 어떻게 그 사람을 위로하겠다고.”자조 섞인 실소를 흘리며 설화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낡은 가방 안에서 작은 벨벳 상자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가 남기고 간 핑크빛 귀걸이였다. 상자를 열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은은한 불빛 아래 작은 금속이 유난히 외로워 보였다.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이 피부에 닿는 순간, 차 안의 기억이 다시 스쳐 갔다. 낯선 여자의 향수 냄새와 강현의 낮고 메마른 목소리가 함께 떠올랐다.‘선물.’‘갑자기요?’‘다시 왔잖아.’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짧은 대답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저려 왔다. 설화는 손바닥 위의 귀걸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예쁘다.”그때 스마트폰이 짧게 울렸다.[K은행 1,547,000원 입금]보름 동안 백화점에서 쉴 새 없이 일한 대가가 선명한 숫자로 찍혀 있었다. 그동안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처음으로 온전히 제 손에 들어온 돈이었다.설화는 화면을 바라보다 옅게 웃었다. 빚만 갚으며 하루를 버티던 때와는 분명 달랐다. 예전 같으면 입금된 돈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이번 달 이자와 생활비부터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잠깐 다른 생각이 들었다. 텅 빈 일상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으로 채우고 싶었다.이 모든 게 그 사람이 없었다면 가능했을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2화 아버지가 죽었다

    일상적인 며칠이 지나갔다. 여름 햇살의 열기는 여전했고, 매미 소리도 여전히 귀가 따가울 만큼 울어댔다. 골목을 채운 낡은 빌라들, 담벼락 위로 엉켜 늘어진 전선, 쓰레기봉투 옆을 지나쳐가는 고양이까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다른 건 하나뿐이었다.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고, 낯선 사람들이 집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압수수색영장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낮고 딱딱한 목소리가 좁은 현관을 파고들었다. 설화는 처음에는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압수수색. 영장. 협조. 뉴스에서나 들었을 법한 단어들이, 갑자기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1화 평범했던 여름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여름의 문턱을 먼저 넘어와 있었다. 인문관 계단은 오후 햇살을 오래 머금어 뜨끈했고, 문을 나서는 순간 에어컨의 냉기는 금세 뒤로 밀려났다. 잔디밭 위로 흘러가는 바람마저 미지근했다. ​"아… 더워. 진짜 여름 됐네." ​설화는 손에 든 과제물을 부채처럼 파닥이며 인문관을 나섰다. 프린트 가장자리가 손바닥을 스칠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까지 강의실 안에서 교수님 목소리에 졸음 섞인 집중을 붙들고 있던 애들이 맞나 싶게 캠퍼스는 벌써 한껏 풀어진 분위기였다. 잔디밭에는 삼삼오오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4화 미래드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사무적인 목소리. 정중한 척했지만, 그 안에 숨기지 못한 냉랭함이 섞여 있었다. 설화는 허리를 들고 돌아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서류가방을 든 남자가 슈트 차림 그대로 서 있었다. 딱 봐도 용건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얼굴이었다."네, 맞는데요.“남자는 설화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안 볼을 혀로 밀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가방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 설화 앞으로 내밀었다."내용증명입니다. 확인해 보시죠.“흰 종이 위에는 채무자 유설화라는 이름이 박혔고, 그 아래로 선명하게 찍힌 주식회사

  • 우는 너를 보고 싶었다.   3화 빚만 남기고

    ​경기도 외곽에 자리한 사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빈소 안에는 향 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문객보다 빈 곳이 더 많았다. 한때는 아버지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나던 사람들조차 아무도 없었다. 이름도 낯선 몇 명만이 어색한 얼굴로 다녀갔다. ​설화는 영정 사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생전에 집 안에서 쉽게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온화한 미소가 이상하게 낯설어서, 설화는 헛웃음만 나왔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거면서. 이렇게 다 놓고 갈 거면서. 그동안 엄마와 나를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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