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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Chapters

111. 기록

그날 밤 이후로, 지연의 하루는 조금 달라졌다.무언가 특별한 일이 생겨서가 아니라, 특별하지 않은 일들까지 전부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아침에 집을 나설 때 문을 잠그는 손의 각도,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보는 시간,회사 앞에서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는 습관.예전에는 그저 불안이라고 넘겼던 행동들이 이제는 자기 보호라는 이름으로 정리되고 있었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지연은 휴대폰을 확인했다.준혁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어제는 내가 너무했다.-손대려고 한 건 아니었어.지연은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는 말은 ‘할 수도 있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지연은 그 메시지를 새 폴더에 저장했다.[접촉 시도- 신체적 위협 암시]폴더 이름을 정하는 순간, 문장은 더 이상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게 됐다.점심시간, 지연은 회사 근처 카페가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사람이 많은 곳이 오히려 편했다.시선이 있다는 사실이 안전처럼 느껴졌다.자리에 앉자 이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은 어때요.지연은 짧게 답했다.-괜찮아요. 기록 중이에요잠시 후, 전화가 걸려왔다.“잘하고 있어.”이수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지금 네가 하는 건 버티는 게 아니라 쌓는 거야.”“쌓아서… 뭐가 달라질까?”“사람이 아니라 상황이 바뀌어.”그 말은 지연에게 이상한 안정감을 줬다.퇴근 무렵, 회사 보안팀에서 연락이 왔다.“지연 씨,”“어제 로비에서 불편한 상황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지연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사실대로 말했다.“제 배우자입니다.”“현재… 접촉을 원하지 않는 상태예요.”그 말은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낸 선언이었다.보안팀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바로 말씀 주세요.” “기록 남겨두겠습니다.”지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풀리는 걸 느꼈다.혼자만 알고 있던 일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언어를 얻은 느낌이었다.그날 저녁, 지연은 장미 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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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자기 가면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

지연은 그날 아침, 회사로 가는 발걸음이 조금 느렸다.몸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급해질수록 상대의 리듬에 말려들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회사 건물 앞에서 잠시 멈춰 서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오히려 선이 또렷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동료 몇 명과 눈이 마주쳤다.예전 같았으면 괜히 표정을 정리했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자기 얼굴을 자기 손으로 관리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지연 씨.”누군가 조심스럽게 불렀다.“어제… 괜찮았어요?”그 질문에는 호기심보다 경계가 섞여 있었다.사람들은 이미 무언가를 눈치채고 있었다.“네.”지연은 짧게 대답했다.“괜찮아요.”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오전 회의 도중, 준혁의 이름이 처음으로 회의실 안에서 나왔다.직접 언급된 건 아니었다.대신 “외부 인사 출입 관리 강화”라는 건조한 안건으로 포장돼 있었다.지연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이 상황이 개인사의 범위를 이미 넘어섰다는 걸 느꼈다.기록은 이렇게 작동했다.소리를 키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공식 언어 안으로 스며든다.점심시간, 지연은 회사 근처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휴대폰이 진동했다.강준혁이었다.-왜 이렇게까지 해?-회사까지 움직이게 만들고.지연은 그 문장을 읽으며 처음으로 상대의 초조함을 선명하게 느꼈다.예전 같았으면 그 초조함이 자기 책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지금은 달랐다.지연은 답장을 하지 않고 메시지를 저장했다.오후 12:43 - 책임 전가 시도그날 오후, 회사 로비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준혁이 경비에게 막혀 한동안 언성을 높였다는 소문이었다.지연은 그 장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묘하게도 상상이 정확했다.공공장소, 통제가 안 되는 상황,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그는 그런 공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퇴근 무렵, 보안팀에서 지연을 다시 불렀다.“오늘도 접촉 시도가 있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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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울리지도 떨리지도 않았던 첫 문장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시작됐다.지연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옷을 입고 정해진 길로 출근했다.의식적으로 일상을 유지하려 애썼다.일상이 무너지면 사람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지연은 그 단계로 가지 않겠다고 이미 마음먹은 상태였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메일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개인 요청]보낸 사람은 강준혁이었다.제목만 봐도 공식과 사적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지연은 메일을 열지 않았다.열지 않고도 내용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대신 메일 헤더를 캡처했다.보낸 시각, 수신 대상, 참조 여부.기록은 이제 습관이 됐다.오전 업무를 처리하던 중, 관리팀에서 지연을 불렀다.“지연 씨,”“개인적인 문제로 업무에 불편이 있으면 말씀 주세요.”그 문장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선 긋기였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미 보안팀과 공유 중입니다.”그 말에 상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이제 지연은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조치가 진행 중인 당사자였다.점심시간이 지나자 준혁에게서 문자가 왔다.-메일 확인했어?-이렇게까지 만들고 싶지 않았어.지연은 그 문장을 읽으며 손가락을 멈췄다.‘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말은‘지금 만든 건 네 책임’이라는 논리의 변형이었다.지연은 답하지 않았다.대신 장미 미용실로 향할 시간을 확인했다.퇴근길, 지연은 일부러 사람 많은 지하철을 탔다.비좁았지만 그 밀도가 지금은 필요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분명해졌다.장미 미용실 문을 열자이수와 하빈이 이미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지연은 말없이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메일 보냈지.”이수가 먼저 말했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메일.”“경계 넘었어.”하빈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이제 공식 기록으로 묶을 수 있어.”이수는 노트를 펼쳤다.“지금부터는,”그가 말했다.“네가 반응하지 않아도 사건이 진행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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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공백

신고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지연의 하루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전화도 없었고, 문자도 오지 않았다.준혁의 이름이 화면에 뜨지 않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달라 보였다.지연은 그 조용함을 의심부터 했다.무언가를 준비하는 침묵인지, 아니면 정말로 멈춘 건지 아직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지연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가다시 내려놓았다.확인할 게 없다는 사실이 낯설었다.지난 몇 주 동안은 늘 뭔가를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했는데,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이게 정상인데.’지연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정상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멀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회사에 도착했을 때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보안팀에서 연락이 오지도 않았고, 동료들 역시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지연은 자기 자리에서 업무를 처리하며 시간이 흐르는 걸 느리게 체감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건 오랜만이었다.점심 무렵, 이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은 별다른 접촉 없었나요?지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장을 보냈다.-네. 지금까지는 아무 연락도 없어요.곧 답장이 왔다.-그렇다면 오늘은 그대로 유지하시면 됩니다.-괜히 먼저 움직이실 필요는 없어요.지연은 그 문장을 읽으며 숨을 내쉬었다.‘유지하라’는 말이 이렇게 편안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퇴근 무렵, 준혁에게서 처음으로 이틀째 아무 소식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 났다.지연은 회사 건물을 나서며 주변을 둘러봤다.그는 없었다.늘 서 있던 자리도,늘 눈에 밟히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그 사실이 안도라기보다는 공백으로 느껴졌다.지연은 그대로 장미 미용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수는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있었다.“오셨어요.”이수가 먼저 말했다.“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어요.”이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잘 지나가신 겁니다.”“지금 단계에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게 가장 중요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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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공백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조용한 날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지연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걸 느꼈다.어제와 똑같은 풍경이었는데, 공기가 조금 달랐다.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불안이라기보다는 주의에 가까운 감각이었다.출근길, 지연은 일부러 휴대폰을 가방에 넣어두었다.화면을 들여다보는 습관은 상대를 앞서 생각하게 만든다.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었다.회사에 도착해 업무를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관리팀에서 메시지가 하나 왔다.-지연 씨, 오늘 오후에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지연은 그 문장을 읽으며 바로 답하지 않았다.무슨 용건인지 묻지도 않았다.묻는 순간, 자기가 먼저 상황을 좁히는 셈이 되니까.-네, 가능합니다.그렇게만 답장을 보냈다.오후 두 시, 관리팀 회의실에서 짧은 면담이 있었다.담당자는 말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최근에 외부인 출입과 관련해 추가로 접수된 내용이 있습니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강준혁 씨로부터,”“회사 쪽으로 몇 차례 연락이 있었습니다.”지연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어떤 내용이었나요?”“지연 씨와 직접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업무 관련 문의를 가장해 면담을 요청했습니다.”그 문장은 이미 익숙한 방식이었다.사적인 요구를 공식 언어로 포장하는 시도.“회사에서는,”담당자가 말을 이었다.“해당 요청을 모두 거절했고, 추가 접촉 시 보안 규정에 따라 조치할 예정입니다.”지연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회의실을 나서며 지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이제 자기 말이 아니라, 타인의 보고서에 그의 행동이 남고 있었다.퇴근길, 지연은 장미 미용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수는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오늘,”지연이 먼저 말했다.“회사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이수는 지연을 바라보며 의자를 권했다.“어떤 내용이었을까요.”지연은 면담 내용을 차분히 전달했다.말을 마치자, 이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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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피하는 게 아니라 응답하지 않는 것

아침부터 비가 오지는 않았다.하늘은 흐렸지만, 어제와는 다른 회색이었다.지연은 창문을 열어 잠깐 바깥 공기를 들였다.서늘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이제는 날씨를 이유로 마음이 먼저 흔들리지 않았다.출근길, 휴대폰은 가방 안에서 가만히 있었다.진동도, 알림도 없었다.그 침묵이 더 이상 불길하지 않다는 사실이 지연을 놀라게 했다.‘오늘도 기록이 하나 더 쌓이겠지.’그 생각은 기대가 아니라 예측에 가까웠다.오전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 메신저에 낯선 메시지가 도착했다.외부 협력사_강○○지연은 바로 읽지 않았다.발신자를 확인하고, 시간을 확인하고, 스크린샷을 먼저 찍었다.그 다음에야메시지를 열었다.-지연 씨, 업무 관련으로 잠깐 통화 가능하실까요.업무라는 단어가 이렇게 공허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지연은 메신저를 닫았다. 답하지 않았다.점심 무렵, 관리팀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지연 씨, 외부 협력사 명의로 연락이 간 것 같아서요.”지연은 차분히 답했다.“네, 확인했습니다.”“개인적인 접촉으로 보입니다.”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해당 계정도 접근 제한 조치하겠습니다.”지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감았다.자기 설명 없이 상황이 처리되는 경험은 여전히 낯설었다.퇴근 후, 지연은 장미 미용실로 향했다.문을 열자 이수는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오셨어요.”이수가 말했다.“네.”지연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오늘 있었던 일을 차분히 설명했다.이수는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모든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이제,”이수가 말했다.“접촉 방식이 완전히 분산되고 있어요.”“분산이요?”“전화, 문자, 회사 메일, 외부 계정.”“한 가지가 막히면 다른 통로를 쓰는 건 통제 욕구가 강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패턴입니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지금 이건…”“누적입니다.”이수는 단정하게 말했다.“하나하나는 사소해 보여도, 지금은 의도가 선명해지고 있어요.”하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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