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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륜해드립니다.: Chapter 101 - Chapter 110

116 Chapters

101. 균열

준혁은 그날 밤을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보냈다.차 안에서 나와 호텔 방으로 들어갔지만, 불을 끄지 않았다.어둠은 지금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창밖의 불빛을 바라보며 그는 자기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장면을 지우지 못했다.닫힌 문. 열리지 않는 문.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들리던 지연의 목소리.차분했고, 흔들리지 않았고, 돌아오라는 말이 아니었다.그 사실이 그를 가장 자극했다.아침이 오자 준혁은 회사에 가지 않았다.대신 오래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를 눌렀다.“오늘 잠깐 볼 수 있어?”상대는 짧게 대답했다.“어디로?”그는 대답을 망설이다가 바를 하나 말했다.이름도,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다.지연은 그날 아침 처음으로 문자를 받았다.-어제는 미안했어. 내가 흥분했어.사과였다.하지만, 지연은 그 사과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이건 반성이 아니라 수습이었다.지연은 답하지 않았다.대신 메시지를 캡처해 이수에게 보냈다.-사과 시작.답은 곧 왔다.-네. 다음에는 변명할거에요장미 미용실에서는 이수와 하빈이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이제 패턴이 보이네.”하빈이 말했다.“응.”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사과.”“이유.”“책임 전가.”“그리고,”하빈이 말을 이었다.“관계 회복 시도.”이수는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그 시도가 실패하면,”“그 다음은 위협이야.”하빈은 잠시 말이 없었다.“지연,”“괜찮을까.”이수는 고개를 들었다.“괜찮아질 거야.”“지금은 흔들려도.”“너는?”이수는 잠시 망설였다.“나는,”“익숙해.”그 대답이 하빈의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준혁은 바에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낮인데도 조명은 어두웠고, 그 어둠이 그에게는 필요한 보호처럼 느껴졌다.상대가 맞은편에 앉자 그는 말을 바로 꺼냈다.“요즘,”“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상대는 잔을 기울이며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허락처럼 느껴졌다.“누가,”“내 뒤에서 뭘 하고 있는 느낌이야.”그 말은 자기 행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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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방향을 바꾸는 사과의 말들

준혁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제 보냈던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사과.경솔했다는 말.흥분했다는 인정.문자창에 남아 있는 그 문장들이 이제는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사과는 시간이 지나면 늘 방향을 바꾼다.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했나.그 질문은 자기 반성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다.이미 누군가에게 책임을 나누기 위한 준비였다.지연은 그날 오전 변호사 사무실에 다시 들렀다.서류를 추가로 제출하는 일이 있었고, 그 과정은 놀랄 만큼 건조했다.“상대방 쪽에서 조만간 입장을 낼 겁니다.”변호사의 말에 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말이 바뀔 수도 있어요.”“기억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고요.”지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하게 말했다.“그건 예상했어요.”준혁은 점심 무렵 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니었다.목소리로 뭔가를 전달해야 할 것 같았다.지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 사실이 그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곧이어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지연의 어머니였다.지연은 오후에 어머니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준혁이가 전화했더라.”그 한 문장만으로도 지연은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뭐라고 했어?”“네가 너무 예민해졌다고.”“누가 옆에서 부추기는 것 같다고.”지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상했던 말이었고, 그래서 더 숨이 막혔다.장미 미용실에서, 이수는 지연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챘다.“말 바뀌었지.”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이제는 내가 문제래.”하빈이 조용히 말했다.“제3자 끌어들였네.”“응.”이수가 답했다.“이 단계에서 항상 그래.”“왜 꼭 부모부터 건드릴까.”“자기 말을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거야.”이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내 말만이 아니라 주변도 그렇게 본다’는 식으로.”지연은 의자에 앉아 손을 내려다보았다.손이 떨리지는 않았지만, 속이 불편했다.“내가,”지연이 말했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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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기울기

지연은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바람이 들어왔고, 그 바람이 어제의 공기를 밀어냈다.밤새 생각이 많았던 탓인지 몸은 무거웠지만, 머리는 오히려 또렷했다.휴대폰을 확인하자 새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너 요즘 너무 변했어.-예전 같지 않아.지연은 그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읽으면서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대신 어딘가 익숙한 구조가 보였다.‘변했다’는 말은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지연은 답장을 쓰지 않았다.대신 메시지를 캡처해 폴더에 넣었다.날짜. 시간. 문장.이제는 감정이 아니라 자료였다.준혁은 출근길에 지연의 답장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그 침묵이 그를 점점 예민하게 만들었다.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차선 변경을 할 때마다 괜히 속도를 냈다.회사에 도착해서도 집중하지 못했다.회의 중, 상사가 질문을 했을 때 그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강 팀장?”“아, 네.”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모였다가 흩어졌다.그 짧은 순간이 준혁의 자존심을 긁어냈다.이 모든 게 지연 때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장미 미용실에서는 이수와 하빈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이수는 지연이 보낸 메시지 캡처를 보고 있었다.“톤이 바뀌었어.”이수가 말했다.“이제는 걱정보다 평가야.”“‘너답지 않다’는 말.”하빈이 덧붙였다.“제일 위험하지.”“응.”“상대를 정상에서 밀어내는 말이야.”하빈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지연은 지금 어때?”“흔들리진 않아.”이수가 말했다.“대신 정리 속도가 빨라졌어.”그 말은 안심이자 경고였다.그날 오후, 지연은 어머니를 만났다.약속한 건 아니었지만, 이야기를 꺼내야 할 시점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이혼 얘기,”지연이 먼저 말했다.“준혁이한테서 들으셨죠.”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너무 성급한 건 아닐까 걱정돼서.”지연은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말했다.“성급하지 않아.”“오래 생각했고,”“이미 결정했어.”어머니는 잠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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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안에서 문을 잠그는 일

지연은 그날 아침 휴대폰을 들고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알림은 없었지만, 곧 울릴 거라는 예감이 있었다.그 예감은 이제 감정이 아니라 패턴에 가까웠다.침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다 말고 손을 멈췄다.거울 속 얼굴이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해 보였다.울지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다.그게 지연에게는 가장 큰 변화였다.예감은 틀리지 않았다.준혁에게서 전화가 왔다.지연은 받지 않았다.잠시 후 다시 울렸다.이번에도 받지 않았다.전화가 멈춘 뒤, 메시지가 도착했다.-왜 전화를 안 받아.-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지연은 그 문장을 읽고 고개를 숙였다.필요의 기준을 누가 정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는데,그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지연은 메시지 입력창에 짧게 문장을 썼다.-앞으로는 변호사를 통해 연락해.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이 문장이 상대를 더 자극할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도 보냈다.그게 지금 지연이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말이었다.준혁은 그 메시지를 보자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기만 했다.-변호사.그 단어가 이제야 현실처럼 느껴졌다.-나를 상대방으로 보겠다는 거야?그 생각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신호음조차 오래 가지 않았다.-차단.그 사실을 깨닫는 데 몇 초면 충분했다.준혁은 사무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분노가 천천히 올라왔고, 그 분노는 곧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당혹. 그리고 상실.그는 지금까지 지연이 떠날 수 없다고 믿어왔다.떠나지 않는 게 아니라 떠날 수 없다고.그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붙잡으려 한다.장미 미용실에서, 이수는 지연에게서 온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차단했어.이수는 그 한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왔다.”이수가 말했다.하빈은 고개를 들었다.“차단?”“응.”“말로 하는 경계는 끝났고,”“이제 행동으로 들어갔어.”하빈은 잠시 침묵하다가 숨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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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정해

초인종은 짧게 울렸다.한 번. 그리고 조금의 간격을 두고 다시 한 번.지연은 소파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놀라지 않았다.예상보다 빠르긴 했지만, 이 방향으로 올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시계를 보니 밤 열한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이 시간에 찾아오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초인종이 다시 울렸다.이번엔 조금 더 길게.지연은 일어나지 않았다.대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문 열어.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잖아.지연은 그 문장을 차분히 읽었다.‘아니다’라는 말과 ‘아니었잖아’라는 말의 차이를 이제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지연아.”이름을 부르는 톤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섞여 있었다.열어줄 거라는 확신. 결국은 자기 쪽으로 돌아올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잠깐이면 돼.”“말만 좀 하자.”지연은 현관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대신 집 안쪽으로 한 발짝 더 물러섰다.그 움직임이 지금 이 상황에서가장 중요한 선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준혁은 문 앞에 서 있었다.차단된 이후 처음으로 직접 얼굴을 들이민 자리였다.전화도, 메시지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문 하나만 열리면 모든 게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믿고 싶었다.“지연아,”그가 다시 말했다.“이건 너답지 않아.”그 말은 습관처럼 나왔다.‘너답다’는 말로 상대를 정의해왔던 시간들이 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지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을 한 번 고르고 현관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문을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였다.문에 기대지 않은 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를 냈다.“이제 그런 말 하지 마.”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말하는 목소리는 이상하게 또렷했다.“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정해.”잠시 문밖이 조용해졌다.준혁은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지금,”그가 말했다.“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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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반동

다음 날 아침, 지연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알람이 울리기 전이었고, 창밖은 아직 회색이었다.밤새 잠을 설친 흔적이 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문 앞에 서 있던 얼굴이 꿈처럼 겹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지연은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몸을 움직이면 어젯밤의 선택이 현실이 될 것 같아서였다.휴대폰을 확인했다.부재중 전화는 없었고,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불안했다.준혁은 이렇게 조용한 사람이 아니었다.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일수록 말이 많아지는 쪽이었다.지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메시지 창을 열었다가 닫았다.보내지 않았다.보내지 않는 선택을 오늘도 유지하기로 했다.샤워를 하며 어젯밤의 대화를 하나씩 되짚었다.‘너답지 않아.’‘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그 말들이 물소리 사이로 다시 떠올랐다.지연은 그 문장들이 왜 그렇게 불편했는지 이제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그 말들은 자기를 이해하려는 말이 아니라, 자기를 원래 자리로 되돌리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외출 준비를 마친 뒤, 지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장미 미용실로 향했다.머리를 자를 생각은 없었다.염색도, 스타일링도 필요 없었다.그냥 사람이 있는 공간에 잠시 앉아 있고 싶었다.장미 미용실 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맞았다.드라이기 열기,샴푸 향,그리고, 아주 미세한 긴장감.이수는 거울 앞에서 정리를 하고 있었다.지연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이 필요 없다는 걸 바로 알아차린 표정이었다.“어제,”지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왔어.”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문 앞까지.”“응.”그 짧은 대화만으로 상황은 충분히 전달됐다.지연은 의자에 앉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앉으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고, 지금은 짧게 말하고 싶었다.“무서웠어?”이수가 물었다.지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이상하게… 차분했어.”그 말에 이수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그럼,”이수가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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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 침묵의 방패

준혁의 메시지는 밤새 멈추지 않았다.처음에는 사과였고, 그다음은 설명이었고, 새벽을 넘기자 질문이 되었다.-왜 연락을 안 받아?-이렇게까지 무시할 이유는 없잖아.지연은 그 메시지들을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읽지 않았다.읽는 순간, 반응하게 될까 봐서였다.반응은 그에게 여지를 준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휴대폰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 네 통이 찍혀 있었다.지연은 그 숫자를 보며 이상하게도 숨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어젯밤 이수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랐다.‘오는 건 다 받아.’‘대신, 아무것도 돌려주지 마.’지연은 메모 앱을 열었다.오전 6시 12분 - 전화 1회오전 6시 18분 - 전화 2회오전 6시 23분 - 전화 3회오전 6시 41분 - 전화 4회기록을 하자 상황이 감정에서 데이터로 바뀌었다.감정은 흔들리지만, 데이터는 말을 바꾸지 않는다.출근 준비를 하면서 지연은 평소보다 천천히 움직였다.서두르지 않았다.서두르면 상대의 속도에 맞춰버리게 된다.회사에 도착했을 무렵, 준혁에게서 새로운 메시지가 왔다.-회사야?-잠깐 얘기하자.그 문장은 부드럽게 쓰여 있었지만, 지연은 그 안에 섞인 조급함을 읽어냈다.지연은 답장하지 않았다.대신 스크린샷을 찍고 시간을 적었다.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뒤, 전화가 다시 울렸다.이번에는 회사 번호였다.지연은 잠시 손을 멈췄다.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어디까지 넘어서고 싶은지 확인하는 순간이었다.받지 않았다.그날 오후, 회사 로비에서 그를 봤다.준혁은 평소보다 말끔한 차림이었다.재킷을 입고 있었고, 머리도 정리돼 있었다.‘사과하러 왔을 때의 모습’이었다.지연은 그를 보자마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피하지도, 다가가지도 않았다.그는 지연을 발견하자 곧바로 다가왔다.“지연아.”그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공공장소라는 점을 의식한 톤이었다.“잠깐만.”“진짜 잠깐만 얘기하자.”지연은 그를 바라봤다.예전 같았으면 이쯤에서 사람들 시선을 의식해 따라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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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균열

준혁의 태도는 하루 만에 바뀌었다.어제까지는 목소리를 낮추고,사람들 눈을 의식하며, ‘대화’를 가장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 날 아침부터는 말의 결이 달라졌다.회사까지 가게 만들지 마.이런 식으로 나오면 너도 편하지 않을 거야.지연은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지 않았다.한 번만 읽고, 시간을 적고, 파일에 저장했다.오전 8시 07분 - 위협성 메시지그렇게 분류하자 문장은 의미를 잃었다.출근길 지하철에서 지연은 문득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비슷한 상황에서 늘 먼저 사과하던 사람.상대의 감정이 격해지기 전에 자기 말을 줄이던 사람.그때의 지연은 그게 ‘관계 유지’라고 믿었다.지금은 안다.그건 관계 유지를 가장한 일방적인 양보였다는 걸.회사에 도착했을 때, 분위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동료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지연 씨,”“어제… 남편분 다녀가셨어요?”그 말 한마디에 지연은 순간 상황을 이해했다.준혁은 ‘집’이 아니라 ‘회사’라는 공간에서 이미지를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무슨 얘기 하던가요?”지연이 담담하게 물었다.“아니… 그냥,”“요즘 많이 힘들어 보이신다고.”지연은 짧게 웃었다.힘들어 보인다는 말은 늘 가해자의 편에 붙는다.점심시간, 이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회사 쪽 움직임 있었어?'지연은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서 보냈다.'동정 여론 만들기 시작한 것 같아. ''나를 예민한 아내로.'곧바로 답장이 왔다.예상된 수순이야.이제부터는 네 말보다 그 사람 행동이 말하게 될 거야.퇴근 무렵, 준혁에게서 전화가 왔다.이번에는 받지 않았다.대신 문자 하나가 왔다.'이수라는 사람, 너한테 뭐야?'지연의 손이 잠시 멈췄다.그 이름이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다.지연은 장미 미용실로 향했다.문을 여는 순간, 이수는 지연의 얼굴을 보고 바로 알아챘다.“이름 나왔어?”이수가 먼저 물었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빨라.”하빈이 낮게 말했다.“아니,”이수가 고개를 저었다.“빠른 게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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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문 연 사람과 문 안 연 사람의 차이

그날 밤, 지연은 잠들지 못했다.불을 끄고 누워 있었지만 눈은 감기지 않았고, 천장 위로 낮에 들었던 말들이 느리게 떠올랐다.'남편분이 많이 힘들어 보이셨어요.'그 문장은 동정처럼 포장돼 있었지만, 사실은 방향을 정해두고 던지는 말이었다.누가 불쌍한지, 누가 설명해야 하는지,이미 답이 정해진 질문.지연은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피곤함보다 경계가 먼저였다.자정이 조금 넘었을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메시지였다.-지금 잠깐 얘기할 수 있어?-이번이 마지막이야.‘마지막’이라는 말은 언제나 상대의 마지막이 아니다.자기가 마지막이라고 정하고 싶은 순간에만 꺼내는 단어다.지연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대신 이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지금 연락 왔어. 마지막이라고.잠시 뒤, 전화가 걸려왔다.“받지 마.”이수의 목소리는 짧고 단정했다.“지금은 전환 단계야.”“전환?”“말로 안 되니까 행동으로 바꾸려는 순간.”지연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예고 없는 소리였다.지연은 몸이 먼저 반응했다.어깨가 굳었고, 숨이 짧아졌다.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준혁은 늘 이렇게 왔다.‘얘기만 하자’는 얼굴로, 그러나 대화의 출구를 미리 닫아둔 채로.지연은 문을 열지 않았다.대신 현관 불을 켜고, 문 뒤에 서서 말했다.“지금은 안 돼.”문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지연아.”“문 열어.”“이런 식으로 끝내고 싶어?”그 문장은 협상이 아니었다.죄책감을 던지는 말이었다.지연은 손에 힘을 줬다.“돌아가.”“지금 이건 기록 남길 거야.”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리고, 문 너머에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너,”그가 낮게 말했다.“진짜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 줄 몰랐다.”그 말은 자기 감정을 지연의 책임으로 옮기는 방식이었다.지연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확신이 들었다.이 사람은 지금 관계를 붙잡으러 온 게 아니라, 자기 위치를 되찾으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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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그만하자는 말은 늘 자기 기준의 마침표라

다음 날 아침, 지연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잠을 못 잔 건 아니었지만, 깊이 잠들지도 못한 상태였다.눈을 뜨자마자 전날 밤의 장면이 아직 방 안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문 앞에서 들리던 목소리,문을 두드리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그럴 수 있었던 기척.지연은 잠시 침대에 앉아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어제 문을 열지 않은 건 옳은 선택이었을까.’그 질문은 곧 다른 질문으로 바뀌었다.‘어제 문을 열었더라면 지금은 어땠을까.’그 상상은 끝까지 가지 않아도 됐다.지연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휴대폰을 확인하자 준혁에게서 새로운 메시지가 와 있었다.-어제는 미안했다.-너무 흥분했어.지연은 그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숙였다.사과라는 단어는 있었지만,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는 없었다.그는 늘 그렇게 사과했다.‘흥분해서’라는 말은 책임을 상황으로 밀어내는 표현이었다.지연은 메시지를 저장했다.오전 9시 02분 - 사과 가장 메시지회사에 도착했을 때, 지연은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이수에게 연락했다.-오늘 사과 메시지 왔어.곧바로 전화가 왔다.“사과는 늘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준비야.”이수의 말은 단정했다.“이번엔 어떤 조건이 붙을지 봐.”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조건은 늘 뒤따랐다.점심 무렵, 예상대로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오늘 저녁에 만나자. 이제 그만하자.지연은 그 문장을 읽으며 처음으로 분노가 아닌 피로를 느꼈다.‘그만하자’는 말은 늘 자기 기준의 마침표였다.지연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퇴근 시간 즈음, 회사 로비에서 준혁을 다시 마주쳤다.이번에는 어제보다 조금 더 다가온 거리였다.“지연아.”그가 말했다.“잠깐이면 돼.”지연은 걸음을 멈췄다.피하지 않았다.“여기서 할 말이면 하고.”“아니면 돌아가.”그는 잠시 주위를 살폈다.사람들이 있다는 걸 의식한 표정이었다.“우리 사이에,”그가 낮게 말했다.“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지연은 그를 바라봤다.“지금 이 말도,”지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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