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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륜해드립니다.: Chapter 91 - Chapter 100

116 Chapters

91. 접촉

준혁은 그날 저녁,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차선을 한 번 더 바꿨다.신호는 늘 같은 자리에 있었고, 그가 멈추는 위치도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익숙함은 결정을 가볍게 만든다.민지의 메시지는 짧았다.-지금 와도 괜찮아요.괜찮다는 말은 무엇이 괜찮은지 설명하지 않았다.설명하지 않는 말은 상상으로 채워지기 쉽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민지는 부엌에 있었다.불은 환하지 않았고, 조명은 낮았다.의도적으로 만든 분위기처럼 보였지만,준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오늘은,”그가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좀 피곤해.”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물컵을 하나 건넸다.그 침묵이 그를 조금 더 안쪽으로 끌어들였다.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하기엔너무 정확한 간격이었다. 준혁은 컵을 내려놓으며 손등을 문질렀다.이상하게도 손끝이 차가웠다.“괜찮아요?”민지가 물었다.그 질문은 걱정처럼 들렸지만 확인을 요구하지 않았다.“응.”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여기 오면 좀 괜찮아져.”그 말은 이제 습관처럼 나왔다.습관은 진실보다 먼저 자리를 잡는다.민지는 그의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대신 조금 더 가까이 앉았다.그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았고, 그래서 더 분명했다.준혁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몸을 피하지 않았다.피하지 않는다는 건 선택이었다.그 순간, 지연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아침에 보았던 눈, 아무것도 묻지 않던 표정.준혁은 그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이러면 안 되는데.”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고, 그래서 더 약했다.민지는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안 되면,”“여기까지 하면 돼요.”그 말은 멈춤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넘어가도 된다는 신호였다.준혁은 눈을 뜨고 민지를 바라봤다.그 사이의 공기는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그의 손이 민지의 손목에 닿았다.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손은 곧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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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거울 뒤에 숨겨진 얼굴

준혁은 그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게 하루를 시작했다.아침에 눈을 떴고, 샤워를 했고, 옷을 골랐다.어제의 밤이 무슨 의미였는지 굳이 되짚지 않았다.되짚는 순간, 그건 실수가 되니까.그는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고쳐 맸다.손놀림은 익숙했고, 표정은 차분했다.스스로를 속이는 데 이만한 얼굴은 없었다.민지는 문 앞까지 배웅하지 않았다.그녀는 부엌에 서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고,준혁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나섰다.작별 인사가 없는 관계는 늘 오래 간다. 기대가 없으니까.차에 올라 시동을 걸자 강준혁의 휴대폰이 울렸다.지연이었다.그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거절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다.받지 않는다는 선택은 언제나 상대에게 더 많은 말을 하게 만든다.장미 미용실에서는 이수가 조용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거울 앞이 아니라 창가 쪽 테이블.사진 몇 장과 시간이 적힌 메모,동선이 표시된 지도.하빈은 그 옆에서 하나씩 확인하고 있었다.“여기.”그가 말했다.“어제 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민지 집.”“귀가 기록 없음.”“사진은?”“아직.”이수는 차분하게 답했다.“노출은 급하게 하면 금방 무너져요.”하빈은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찍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언제 드러내느냐였다.지연은 그날 오후 회사에서 조퇴를 했다.몸이 아픈 건 아니었지만, 마음이 더 이상 업무에 붙어 있지 않았다.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익숙한 거리였지만, 이제는 다른 눈으로 보였다.‘여기서 그는 나를 기다리지 않았겠지.’그 생각은 서글프지 않았다.대신 명확했다.집에 돌아왔을 때, 지연은 탁자 위에 놓인 자기 휴대폰을 바라봤다.부재중 전화 하나. 강준혁.시간은 오전이었다.지연은 그 기록을 지우지 않았다.이제는 남겨두는 게 자기 역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저녁 무렵, 준혁은 다시 민지에게 향했다.이번에는 조금 더 당당했다.이제는 설명해야 할 대상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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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대면

지연은 봉투를 가방 안에 넣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봉투의 각이 걸을 때마다 가방 안쪽을 톡톡 건드렸다.아프진 않았지만, 있다는 사실을 계속 알려주는 방식이었다.문을 열자 집 안은 조용했다.불은 켜져 있었고, 거실은 정리돼 있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날처럼.지연은 신발을 벗고 가방을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지는 않았다.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필요해지는 순간을기다릴 뿐이었다.준혁은 조금 늦게 들어왔다.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발소리가 났다.지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르다 말고 그 소리를 들었다.“왔어?”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그 평소 같음이 강준혁을 안심시켰다.“응.”그는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오늘 좀 바빴어.”지연은 그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흘려보냈다.이제는 어떤 말이 이어질지도 알고 있었으니까.“저녁은?”“밖에서 먹었어.”그 문장은 거짓이었고, 그래서 짧았다.지연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피곤해 보여.”그 말은 관심처럼 들렸지만 확인이 아니었다.준혁은 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좀 쉬려고.”그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지연이 맞은편에 앉는 걸 기다리지도 않았다.지연은 그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지금 사진을 꺼내면 모든 게 끝날 수 있었다.말은 많아질 테고, 목소리는 높아질 테고,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건 자기가 원한 방식은 아니었다.“준혁아.”지연이 그를 불렀다.“응?”“요즘 집에 잘 안 들어오지.”그 말은 질문이 아니라 사실 확인이었다.준혁은 잠시 멈칫했다.그리고 곧바로 대답했다.“일 때문에.”“알잖아.”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그 짧은 동의가 그를 더 편하게 만들었다.“근데,”지연이 말을 이었다.“나한테 묻는 게 많아졌어.”준혁은 순간 표정을 굳혔다.“그건 걱정돼서 그래.”지연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대신 조용히 물었다.“내가 뭘 숨긴 적 있어?”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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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이탈의 경계선

준혁은 그날 아침, 침실 문을 열지 않았다.거실에서 눈을 떴고, 소파에 걸쳐둔 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 잠시 멈춰 서 있었다.집 안은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어젯밤의 대화를 다시 끌어올렸다.지연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문틈으로 보이는 침실의 불빛은 꺼져 있었고, 그 사실이 그를 안도하게 만들었다.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아침. 그는 그게 필요했다.지연은 준혁이 현관을 나서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문이 닫히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제는 작은 소리에도 의미가 붙었다.그녀는 눈을 뜬 채로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발걸음이 멀어지는 시간까지 굳이 세지 않았다.이제는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준혁은 회사로 향하지 않았다.차를 몰아 익숙한 방향으로 나갔고, 신호 앞에서 핸들을 다시 틀었다.그 선택은 어제보다 조금 더 쉬워져 있었다.민지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손을 멈췄다.‘말을 해야 하나.’그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말을 꺼내는 순간, 이 선택에 의미가 붙을 테니까.그는 그냥 갔다.지연은 아침을 먹지 않았다.부엌에 서서 물만 한 컵 마셨고,식탁 위에 놓인 준혁의 컵을 치우지 않았다.치운다는 건 정리라는 뜻이었고, 아직은 정리할 단계가 아니었다.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들었다.장미 미용실로 향할 생각이었다.말을 해야 할 사람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이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연을 보고 바로 알았다.표정이 아니라, 걸음에서.머뭇거림이 없었고,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왔어요.”“네.”지연은 의자에 앉자마자 숨을 고르지 않았다.이미 충분히 정리된 얼굴이었다.“그가,”지연이 말했다.“아침에 말 없이 나갔어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탈이에요.”“도망이 아니라요?”“도망은,”이수가 말했다.“붙잡힐 걸 알 때 해요.”“이탈은 붙잡히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때 하죠.”지연은 그 말이 정확하다는 걸 느꼈다.준혁은 민지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민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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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정리

지연은 그날 오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문을 열기 전,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잠시 멈췄다.숨을 고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이미 마음은 다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문을 여니 집 안은 조용했다.너무 조용해서 누군가 먼저 와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분명해졌다.거실 소파에 준혁이 앉아 있었다.외투는 벗어두었고, 넥타이도 풀려 있었다.집에 있을 때의 얼굴이었다.그 얼굴이 지연에게는 오래전부터 낯설었다.“왔어?”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지연은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에야 그를 봤다.“응.”그 대답에는 반가움도, 놀람도 없었다.그저 사실 확인에 가까웠다.준혁은 지연이 바로 묻지 않는 게 오히려 불안했다.“어제,”그가 먼저 말했다.“회사 일이 좀 있어서.”설명은 습관처럼 나왔다.붙잡히기 전에 먼저 말을 채우는 방식. 지연은 그 말을 끊지 않았다.대신 식탁 쪽으로 걸어가 의자 하나를 당겨 앉았다.“앉아.”그 말은 부탁이 아니었다.도망칠 여지를 주지 않는 톤이었다.준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맞은편에 앉았다.“사진 봤어.”지연이 담담하게 말했다.준혁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연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무슨 사진?”그는 아직도 모른 척을 선택했다.지연은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탁자 위에 올려두었고, 봉투는 아직 열리지 않은 채였다.“이거.”준혁은 봉투를 보지 않았다.대신 지연의 얼굴을 봤다.“지연아.”그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이건,”“오해야.”지연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오해는,”“설명하면 풀려.”“근데,”“넌 설명을 안 했어.”준혁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지금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그 말을 하는 순간 모든 게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잠깐,”그가 말했다.“잠깐 흔들린 거야.”지연은 그 문장을 조용히 반복해 보았다.“잠깐.”“응.”“진짜야.”지연은 웃지 않았다.그 대신 봉투를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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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마음이 끝난 자리에

지연은 아침이 왔다는 걸 창밖의 빛으로 먼저 알았다.알람이 울리기 전, 눈이 떠졌다.어제보다 조금 가벼운 몸이었다.잠을 많이 잔 건 아니었지만, 뒤척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부엌으로 나와 물을 끓였다.주전자에서 나는 소리가 집 안을 채웠고,그 소리는 이 집에 이제 혼자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만들어 주었다.컵을 꺼내려다 잠시 손이 멈췄다.두 개를 꺼내는 습관이 몸에 남아 있었다.지연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컵 하나를 다시 찬장에 넣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동작 하나로 하루의 방향이 정해졌다.준혁은 회사 근처 호텔 방에서 눈을 떴다.익숙하지 않은 천장이었고, 공기에는 어제의 술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침대에 앉아 잠시 멍하니 있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메시지도 없었다.그 사실이 그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불안하게 만들었다.연락이 없다는 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이미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까.준혁은 지연에게 문자를 쓰다가 지웠다.-어제는… 미안해.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어느 문장도 끝까지 남지 않았다.지금 어떤 말을 해도 이미 늦었다는 감각이 손끝에 먼저 와 닿았다.지연은 장미 미용실로 향했다.예약은 없었다.그럼에도 문을 열었다.머리를 하러 오는 공간이라기보다는,생각을 정리하러 오는 곳에 가까웠기 때문이다.미용실 안은 조용했고, 거울은 여전히 많았다.지연은 의자 하나에 앉아 자기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울지 않은 얼굴. 무너지지 않은 표정.그게 이수의 말이었다.“울지 않으신 게 중요해요.”“지금은 감정이 아니라, 판단의 시기예요.”지연은 그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어제의 대면은 끝이 아니라 선 긋기였다는 것도.잠시 후, 이수가 들어왔다.앞치마를 두르지 않은 채였고, 머리도 묶지 않았다.일을 하러 온 모습이 아니었다.“괜찮아요?”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이수는 그 대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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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통보

지연은 아침을 먹지 않았다.먹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굳이 챙겨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냉장고를 열었다가 닫고, 컵에 물만 따라 식탁에 앉았다.물은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머리를 맑게 만들었다.오늘은 결정을 내리는 날이 아니라, 결정을 전달하는 날이었다.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준혁은 출근길에 이상하게도 신호에 자주 걸렸다.빨간 불 앞에 설 때마다 마음이 먼저 멈췄고,다시 출발할 때마다 무언가를 놓친 기분이 들었다.회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지연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았다.오늘 저녁, 얘기하자. 집에서. 짧은 문장이었다.물어보는 말도, 선택지를 주는 말도 아니었다.준혁은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집에서.그 단어 하나가 그를 하루 종일 불안하게 만들었다.지연은 장미 미용실에 들렀다.문을 열자 이수와 하빈이 이미 와 있었다.둘은 말없이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고,그 침묵은 일을 하기 전의 침묵이었다.“오늘,”지연이 먼저 말했다.“말할 거예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말로 꺼내는 게 제일 어렵고,”“제일 중요한 날이죠.”하빈은 지연을 보며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오늘은,”“붙잡힐 가능성도 있어요.”지연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알아요.”“그래도,”“이제는 피하지 않을래요.”이수는 지연 앞에 서류 봉투 하나를 밀어두었다.“이건,”“오늘 바로 쓰지 않아도 돼요.”“하지만,”“말을 꺼낸 뒤에 마음이 흔들리면,”“그때 이게 기준이 돼요.”지연은 봉투를 열지 않았다.그 대신 손으로 한 번 눌러보았다.종이의 감각이 분명하게 느껴졌다.저녁이 되었을 때, 지연은 집에 먼저 와 있었다.불을 켜지 않았다.어둠 속에서 창밖의 불빛만 들어오게 두었다.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집 안이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다.“왔어.”지연이 거실에서 말했다.준혁은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무슨 얘긴데.”지연은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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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돌아갈 수 없는 선

준혁은 아침에 일어나 잠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거실 소파. 담요는 반쯤 흘러내려 있었고, 목이 뻐근했다.집이었다. 분명히 집이었는데, 더 이상 자기 자리가 아니라는 감각이 먼저 들었다.방 문은 닫혀 있었다.지연의 방문이었다.준혁은 그 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면대로 향했다.거울 속 얼굴은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어색했다.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지연은 이미 집을 나선 뒤였다.장미 미용실로 바로 가지 않고, 근처 변호사 사무실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책상과 서류들. 이수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여기부터는 감정이 아니라, 기록이에요.”지연은 손에 쥔 가방 끈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았다.도망치지 않겠다는 몸의 신호처럼.사무실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에어컨 소리만 낮게 흘렀고, 서류를 넘기는 소리도 조심스러웠다.변호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절차를 설명했다.“이혼 사유는 명확합니다.”“증거도 충분하고요.”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놀라지도, 안도하지도 않았다.이미 마음으로 한 번 끝낸 일이었기 때문이다.“여기,”변호사가 종이를 밀어주며 말했다.“확인하시고 서명하시면 됩니다.”지연은 펜을 들었다.종이 위에는 이름, 날짜,그리고, 그동안의 결혼 생활이 몇 줄의 문장으로 정리돼 있었다.손이 떨리지는 않았다.오히려 생각보다 안정적이었다.서명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는 순간,지연은 자기 숨소리가 이상하게 또렷하게 들리는 걸 느꼈다.같은 시각, 준혁은 회사에서 변호사에게 전화를 받고 있었다.“네, 말씀하세요.”“오늘 서류가 접수됐습니다.”그 문장은 예고 없이 떨어졌다.준혁은 잠시 말을 잃었다.“접수…요?”“네.”“아내분 쪽에서 정식으로 진행하셨습니다.”준혁은 전화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럼,”“저는 어떻게 해야”“곧 통지서가 갈 겁니다.”“그 전에 상담을 권해드려요.”전화를 끊고 나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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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흔적

준혁은 통지서를 접고 나서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서류에 적힌 날짜와 이름이 눈에 익숙해질수록 속이 더 뒤틀렸다.분노가 먼저 오지 않았다.대신 의심이 천천히 자라났다.누가 언제부터 어디까지.질문은 자기 자신을 향하지 않았다.항상 그래왔듯, 답은 밖에 있다고 믿었다.그는 지연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대신 회사 주차장에서 차에 앉아 오래 시동만 켜두었다.내비게이션 화면이 켜진 채로 꺼지지 않았다.결국 지연의 동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미용실. 낯선 여자.그리고 자기보다 먼저 알고 있는 누군가.준혁은 그제야 ‘설계’라는 단어를 떠올렸다.누군가가 지연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편리한 가설.지연은 그날 오후 집에 들르지 않았다.약속도 없었고, 갈 곳도 정해두지 않았지만 집은 피하고 싶었다.그래서 장미 미용실로 갔다.문을 열자 이수 혼자였다.“왔어?”지연은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상해.”지연이 말했다.“갑자기 내가 잘못한 것 같아.”이수는 가위를 내려놓고 지연을 봤다.“그건,”“그 사람이 지금부터 할 행동이야.”“연락 올 거야.”이수가 말했다.“사과가 아니라, 확인하려고.”“확인?”“네가 누구랑 얘기했는지.”“어디까지 알고 있는지.”지연은 그 말을 듣고 손을 꽉 쥐었다.’“무섭다기보다는,”“기분 나빠.”“그게 정상.”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무서운 단계는 그 다음이야.”같은 시각, 준혁은 지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요즘 자주 가는 데가 어디야?-그냥 궁금해서.지연은 그 메시지를 바로 보지 않았다.미용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한 번 더 확인한 뒤에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이수가 작게 말했다.“지금은 답하지 마.”“그럼 더”“괜찮아.”“침묵도 기록이야.”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장미 미용실 문이 닫히고, 하빈이 들어왔다.“통지서 간 날이야?”“응.”이수가 말했다.“그리고, 바로 반응 왔어.”하빈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숨을 내쉬었다.“의심 시작됐네.”“지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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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문 너머에 멈춘 발소리

준혁은 결국 차에서 내렸다.아무 계획도 없었고, 미리 정해둔 말도 없었다.그저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감각 하나뿐이었다.현관 앞에서 잠시 멈췄다.초인종을 누르기에는 아직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했고,그렇다고 돌아서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휴대폰을 꺼내 지연의 이름을 눌렀다가 다시 화면을 껐다.문득 이 상황이 자기에게는 ‘확인’이 아니라‘회수’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자기 삶에서 빠져나간 무언가를 다시 끌어당기려는 행동.지연은 그날 밤 집에 있었다.불은 켜두지 않았고, 커튼도 반쯤만 쳐두었다.완전히 숨을 생각은 없었다.다만 보여줄 필요도 없었을 뿐이다.현관 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을 때, 지연은 바로 알아챘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문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만지는 소리.지연은 소파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가지 않았다.대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이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왔어.답은 금방 왔다.-문 열지 마.-지금부터 우리가 본 걸 그대로 남겨.준혁은 몇 번 더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결국 초인종을 눌렀다.한 번.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한 번.“지연아.”그가 말했다.문을 사이에 두고 낮은 목소리로.“나야.”대답은 없었다.그 침묵이 그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잠깐만 얘기하자.”“나 화 안 났어.”그 말은 이미 자기가 화가 나 있다는 증명이었다.지연은 문 너머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상하게도 차분해졌다.예상했던 말들이었고, 예상했던 톤이었다.그리고, 이수의 말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돌아가.”지연은 문을 열지 않은 채 말했다.그 목소리는 문틈을 통과해 분명하게 전달됐다.준혁은 그제야 지연이 집 안에 있다는 걸 확신했다.“왜 이렇게까지 해?”그가 물었다.“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지연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답했다.“이제는 그 질문이 의미 없어.”그 말은 준혁을 자극했다.“의미 없어?”“그럼 누구 말이 의미 있는데?”그는 자기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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