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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우연

준혁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았다.확인하면 전날의 선택이 오늘의 일정으로 굳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는 그 굳어짐을 조금 더 미루고 싶었다.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셔츠를 고르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어제, 닿지 않았던 손의 거리. 멈춘 순간의 공기.그 기억은 후회가 아니라 재현 욕구에 가까웠다.회사에 도착한 뒤, 준혁은 의외로 일을 잘했다.집중력이 높아졌고, 회의에서는 말을 줄였다.말을 줄이는 건 마음을 숨길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점심 무렵, 휴대폰이 진동했다.예약 알림.장미 미용실. 며칠 전 그가 직접 잡아둔 시간이었다.그는 그 알림을 지우지 않았다.지우지 않는다는 선택이 이미 오늘의 방향을 정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이수는 그날, 일부러 미용실 문을 조금 일찍 열었다.바쁘게 보이지 않게, 한산해 보이게.우연히 들러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그 분위기는 준비된 우연의 기본값이었다.하빈은 카운터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그녀를 봤다.“오늘 들어올 거야.”“알아.”“네가 먼저 연락한 건 아니지.”“아니.”이수는 일정표를 넘기며 말했다.“그가 만든 약속이야.”하빈은 그 말에 표정을 굳혔다.“자기가 만든 약속이면 책임도 자기 몫이지.”“그래서 더 빨리 가.”이수는 머리끈을 정리하며 덧붙였다.“우연처럼 보여야 해.”준혁은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일찍 도착했다는 사실이 그를 안심시켰다.자발적이라는 착각은 사람을 대담하게 만든다.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수는 창가 쪽 정리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고개를 들지 않았다.고개를 들지 않는 건 환영보다 더 강한 신호였다.예상했다는 뜻.“오셨어요.”그 말은 확인에 가까웠다.“네.”준혁은 의자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오늘은 사람이 없었다.그 공백이 그를 편하게 만들었다.머리를 감고, 정리하는 동안 대화는 많지 않았다.이수는 질문을 하지 않았고, 준혁도 설명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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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감각의 잔존

비는 생각보다 빠르게 굵어졌다.카페의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대화 사이사이에 끼어들었고,그 소리는 시간을 늘리는 대신 결정을 재촉하는 것처럼 들렸다.준혁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이런 날은 집에 바로 가기 애매하죠.”그 말은 질문처럼 들렸지만, 이미 결론을 포함하고 있었다.이수는 잔을 비우지 않았다.비우지 않는다는 선택은 밤을 길게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비 그치면 움직이죠.”그녀의 대답은 조건이었고, 조건은 선택을 미룬다.준혁은 그 미루기를 허락으로 받아들였다.비가 조금 잦아들 즈음,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수는 계산대 쪽으로 먼저 걸었고, 준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문을 나서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둘 사이로 밀려들었다.준혁은 우산을 펼쳤다.그리고,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이수 쪽으로 확실하게 기울였다.그 동작은 배려처럼 보였고, 그래서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이수는 우산 아래로 조금 더 들어왔다.이번에는 조금이 아니었다.어깨가 닿았다.닿았다는 사실을 둘 다 명확히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준혁은 몸을 떼지 않았다.떼지 않는다는 선택은 행동이었다.골목을 걷는 동안, 그는 자기 손이 어디에 있는지 의식하고 있었다.의식하고 있다는 건 이미 넘고 있다는 뜻이었다.그의 손이 이수의 팔꿈치 근처로 왔다가 멈췄다.완전히 닿지는 않았지만, 비를 핑계로 거리 조절은 가능했다.이수는 그 움직임을 피하지 않았다.피하지 않는다는 건 허락처럼 보인다.그 오해를 그녀는 정정하지 않았다.골목 끝에서, 이수는 멈춰 섰다.“여기서 갈게요.”그 말은 분명한 경계였다.준혁은 그제야 자기 손을 거두었다.거두는 동작이 늦었다.그 지연이 사진에는 충분히 남을 시간이었다.하빈은 맞은편 차 안에서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아직은 이수의 선택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준혁은 한 걸음 다가왔다.이번에는 망설임이 적었다.“잠깐만.”그가 말했다.그 말은 잡아두고 싶다는 뜻이었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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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파장

준혁은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손의 감각이 먼저 떠올랐고,그 다음에는 그 손을 거두지 않았던 짧은 지연이 반복됐다.그는 그 지연을 의도라고 부르지 않았다.실수라고도 부르지 않았다.그저 ‘잠깐’이었다고 생각했다.잠깐이면 지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아침이 되자 그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알람이 울리기 전이었고, 집 안은 아직 조용했다.아내는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준혁은 그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익숙한 얼굴이었다.그래서 어디서부터 낯설어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그는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와 부엌으로 향했다.커피를 내리면서도 손이 자꾸 멈췄다.물의 양, 필터의 위치,평소라면 자동으로 하던 동작들이 그날은 자꾸 어긋났다.통제는 이런 순간에 필요해진다.준혁은 컵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확인했다.알림은 없었다.그 사실이 그를 안심시키지 못했다.회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는 어제의 동선을 머릿속으로 되짚었다.카페, 골목, 우산, 어깨.그중 가장 오래 머문 건 어깨였다.닿았다는 사실보다, 닿아 있었다는 시간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불안은 사람을 두 가지 방향으로 몰아간다.숨기거나, 통제하거나. 준혁은 후자를 택했다.그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좀 늦을 것 같아.아무 이유도 덧붙이지 않았다.이유를 붙이지 않는 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그는 그 문장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먼저 보내는 메시지는 주도권을 되찾았다는 착각을 준다.장미 미용실에서, 이수는 아침 내내 손이 느렸다.바쁘지 않았고, 일정도 비어 있었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어제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지워질 필요도 없었다.그건 이미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하빈은 미용실 문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왔다.“아침부터 메시지 왔어.”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뭐래.”“오늘 늦는다고.”이수는 그 말을 예상했다.예상된 행동은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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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침묵의 기록

준혁은 그날 아침, 아내보다 먼저 일어났다. 의도는 없었다.잠이 깼고, 다시 잠들지 못했을 뿐이었다.그는 부엌으로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마실 것도 없었고,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지만가만히 서 있기에는 몸 안이 너무 시끄러웠다.아내는 그가 커피를 내리는 소리를 듣고도 일어나지 않았다.그 사실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예전 같았으면“일찍 일어났네?”한마디쯤은 있었을 텐데, 오늘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준혁은 커피잔을 들고 거실에 서서 잠긴 방문을 바라봤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이 이렇게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선명해졌다.아내는 일부러 늦게 나왔다.시계를 본 것도 아니고, 시간을 계산한 것도 아니었지만지금은 마주치는 타이밍을 조절해야 한다는 감각이 있었다.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준혁 앞에 섰다.“오늘 일찍 나가네.”준혁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그래서 더 의미가 있었다.“어제 말했잖아.”그가 말했다.“요즘 좀 바빠.”아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쉽게.“그래.”그녀가 말했다.“그럼 오늘도 늦겠네.”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준혁은 그 확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그가 물었다.“뭐 할 말 있어?”아내는 잠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사실 이미 생각은 끝난 뒤였다.“아니.”그녀가 말했다.“그냥 요즘 당신이 집에 없는 시간이 늘어서.”그 문장은 공격이 아니었다.그래서 방어하기도 어려웠다.준혁은 잔을 내려놓았다.“괜히 예민하게 굴지 마.”그가 말했다.“별일 아니야.”그 말은 상대를 달래는 말이 아니라, 상대를 규정하는 말이었다.아내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기록이었다.준혁은 집을 나서며 뒤를 한 번 돌아봤다.아내는 현관까지 나오지 않았다.예전에는 꼭 그랬다.귀찮다는 말을 하면서도 끝까지 따라 나와“조심히 다녀와.”한마디는 남겼다.그 부재가 그를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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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기록

지연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었고, 그 늦음에는 이유가 없었다.일부러 만들지도 않았고, 굳이 설명할 생각도 없었다.집 안에는 이미 불이 켜져 있었다.준혁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앞에는 식지 않은 음식들이 놓여 있었고, 그 배치가 묘하게 정돈돼 있었다.“늦었네.”그가 말했다. 책망이 아니라 확인이었다.지연은 신발을 벗으며 그 말을 흘려들었다.“조금.”그녀는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그 동작 하나하나가 예전보다 느렸다.준혁은 그 느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요즘은 자주 그래.”그 말은 관찰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경고에 가까웠다.지연은 그제야 그를 바라봤다.“자주?”“응.”그가 대답했다.“예전엔 이런 적 없었잖아.”예전엔이라는 말 속에는 기준이 숨어 있었다.그 기준은 항상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사람은 바뀌어.”지연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준혁은 그 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사람이 바뀐다는 말은 자연스러운 말이지만, 그에게는 통제 밖의 선언처럼 들렸다.“갑자기?”“갑자기는 아니야.”지연은 차분하게 말했다.“당신이 못 느꼈을 뿐이지.”그 순간, 준혁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지연을 똑바로 봤다.“무슨 뜻이야.”질문이었지만 답을 요구하는 방식은 아니었다.해명을 기대하는 톤이었다.지연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그냥.”그녀는 말을 골랐다.“요즘 당신이 집에 없는 시간이 늘어서.”같은 문장이었다.아침에 했던 말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그러나 밤에 들리는 그 말은 무게가 달랐다.준혁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그건 일 때문이야.”“알아.”지연은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반응이 준혁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런데도 불편해?”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조심스럽다는 건 이미 불안하다는 뜻이었다.지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불편하다기보다는…”“…익숙하지 않아.”익숙하지 않다는 말은 거부가 아니라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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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기록의 시발

지연은 노트를 꺼내는 데까지 한참이 걸렸다.사려던 건 아니었다.메모 앱도 있었고, 휴대폰으로 적는 게 더 빠를지도 몰랐다.그래도 종이를 택했다.기록이라는 건 남기기 전에 먼저 손에 걸리는 게 필요했다.첫 장은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한참을 넘겼다.하얀 종이가 괜히 무거워 보였다.그날 저녁, 준혁은 약속한 시간보다 삽십 분 늦게 들어왔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는 예전과 같았지만, 신발을 벗는 동작이 조금 성급했다.“미안.”그가 말했다.“회의가 길어졌어.”지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괜찮아.”그녀는 싱크대 앞에서 말했다.“밥은 남겨놨어.”준혁은 그 ‘남겨놨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예전에는 같이 먹자는 말이 먼저였고, 요즘은 ‘남겨두는’ 쪽으로 바뀌었다.그는 의자에 앉으며 지연의 얼굴을 살폈다.“오늘은 별일 없었어?”지연은 수건으로 손을 닦다가 잠시 멈췄다.“별일.”그녀가 되뇌듯 말했다.그 말 하나로 준혁은 이미 답을 듣고 있었다.“요즘,”그가 말을 이었다.“너도 좀 예민한 것 같아.”지연은 천천히 돌아섰다.“예민해졌다는 말.”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그게 어떤 뜻인지 알아?”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그 단어를 설명하지 않고 쓰는 쪽이었다.“내가,”지연은 말을 골랐다.“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내가 틀렸다는 뜻인지.”준혁은 의자를 조금 당겼다.“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그래서 지금까지는 생각 안 했어.”지연은 그를 바라봤다.시선은 낮았지만 피하지는 않았다.“근데 요즘은 생각이 자꾸 나.”준혁은 그 말을 가볍게 넘기려 했다.“사람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지.”지연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대답하지 않는 선택이 대답보다더 많은 걸 남긴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그날 밤, 준혁은 지연이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챘다.불은 꺼져 있었고, 방 안은 조용했다.그 조용함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다음 날, 지연은 노트의 첫 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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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확인

준혁은 지연의 휴대폰이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걸 아주 자연스럽게 발견했다.발견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그는 찾고 있었으니까.지연은 샤워 중이었고, 욕실 문은 닫혀 있었다.물소리가 일정하게 흘러나왔다.그 소리는 준혁을 조금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그는 컵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마실 생각은 없었지만,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지 않으면 가만히 서 있기 어려웠다.휴대폰 화면은 꺼져 있었다.준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예전에는 이런 걸 망설인 적이 없었다.서로의 휴대폰을 자유롭게 쓰던 시절이 있었고, 그 기억이 지금의 행동을 정당화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잠금 화면이 켜졌다.비밀번호는 여전히 같았다.그 사실이 그를 안심시키는 동시에 불편하게 만들었다.‘숨기는 게 없다면 왜 불안하지.’그는 자기 생각을 정리하지 않았다.정리하는 순간, 자기가 선을 넘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니까.메시지 창을 열었다.눈에 띄는 건 없었다.지인들, 회사 단체방, 가족 단톡.그런데 아주 아래쪽, 최근 사용 기록에 낯선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이수준혁은 그 이름을 몇 초 동안 바라봤다.처음 보는 이름이었다.회사 사람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그가 알고 있는 지연의 친구도 아니었다.대화는 짧았다.-어제, 늦게 들어왔어요.-이유는 회의.그리고 그 아래.-지금처럼만 하세요.-질문하지 말고, 설명하지도 말고.준혁의 손이 잠시 멈췄다.그 문장은 조언처럼 보였고,동시에 지시처럼 느껴졌다.‘지금처럼만 하세요.’마치 지연의 행동을 누군가가 관리하고 있다는 인상이 들었다.그 순간, 준혁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생각이 또렷하게 자리를 잡았다.‘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그가 그 문장을 불륜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았다.아직은.하지만 확인해야 할 대상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그는 휴대폰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지연이 욕실에서 나오는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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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동선의 이탈

지연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다.밤새 온 알림은 없었고, 그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했다.준혁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부엌에서 나는 소리가 평소보다 컸다.의자를 끄는 소리, 컵을 내려놓는 소리. 굳이 내지 않아도 될 소리들이었다.지연은 잠시 침대에 앉아 숨을 고르다 일어났다.“오늘,”준혁이 먼저 말했다.“몇 시에 나가?”지연은 물 한 컵을 따르며 그 질문을 들었다.“아직.”그녀가 대답했다.“정해진 건 없어.”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했다.정해지지 않은 일정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예전에는 대략이라도 알고 있었고, 그걸 기준으로 하루를 설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래도,”그가 말을 이었다.“요즘은 좀 일찍 나가는 것 같아서.”지연은 컵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왜?”“그냥.”준혁은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았다.“괜히 걱정돼서.”걱정이라는 말은 항상 안전한 단어였다.통제도, 간섭도 그 말 뒤에 숨으면 부드러워 보였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그녀가 말했다.“오늘은 늦지 않게 올게.”그 말은 약속이 아니라 회피였다.준혁은 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아니, 느끼지 않으려 했다.그날 오후,지연은 약속도 없었고 특별히 갈 곳도 없었다.그래서 이수가 말한 ‘우연’을 떠올렸다.-오늘은 평소 가던 동선에서 조금만 벗어나 보세요.지연은 평소라면 가지 않았을 마트에 들렀다.집과 회사 사이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곳이었다.장바구니를 들고 통로를 걷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고개를 들자 낯선 여자가 카트를 밀고 서 있었다.지연은 그 여자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았다.딱히 화려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얼굴.그런데 이상하게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혹시,”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이거 어디 있는지 아세요?”손에 든 건 소스 병이었다.지연은 자기도 잘 모르는 물건이었지만 고개를 저어 같이 진열대를 살폈다.“저도 잘 몰라서요.”“아.”여자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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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목격

지연은 그날도 일부러 집을 조금 일찍 나섰다.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머리를 맑게 했다.가던 길이 아닌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었고, 그 선택이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마트 앞을 지나는데 어제 봤던 여자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안녕하세요.”그 인사는 반갑다기보다 익숙했다.지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오늘도 이 시간이에요?”여자의 질문은 가볍게 던져졌지만,지연은 그 안에서 묘한 규칙성을 느꼈다.“네. 그냥.”“저도요.”여자는 웃으며 말했다.“이 시간에 마트 들르는 게 버릇이 돼서.”그 말은 일상을 공유하는 말처럼 들렸다.그래서 경계가 느슨해졌다.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각자의 장바구니에는 비슷한 물건들이 담겼고,그 사소한 공통점이 대화를 이어가게 했다.“집에서 요리 자주 하세요?”“아니요.”지연은 솔직하게 답했다.“그냥 해놓지 않으면 말이 생겨서.”여자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잠깐 표정을 바꿨다.“아.”그녀가 말했다.“그렇구나.”그 반응은 공감처럼 보였고, 그래서 지연은 더 말하지 않았다.마트를 나와 각자의 방향으로 갈라서려는 순간, 여자가 말했다.“다음에 커피라도 한 잔 해요.”지연은 그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이수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결정은 항상 한 박자 늦게.“다음에요.”지연은 그렇게 말했다.그 말은 거절도, 수락도 아니었다.그 장면을 준혁은 차 안에서 보았다.우연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 우연을 믿지 않았다.그는 회사로 가는 길을 조금 바꿨을 뿐이었다.그리고 그 바뀐 길에서 아내를 본 것이다.낯선 여자와 나란히 걷는 모습.멀리서 보면 친해 보였고,가까이서 보면 설명하기 애매한 거리였다.준혁은 차를 세우지 않았다.대신 속도를 늦췄다.그는 아내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웃고 있었다.크게 웃지는 않았지만, 집에서는 보지 못한 느슨한 얼굴이었다.그 순간, 준혁의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확실하게 돌아갔다.‘저 여자는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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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지배의 가시화

지연은 그날 밤, 불을 끄지 않았다.거실의 조명은 켜둔 채 소파에 앉아 있었고,TV는 꺼져 있었지만 리모컨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무언가를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그저 아무것도 보지 않는 상태로 혼자 있고 싶었다.준혁은 침실에서 나와 그 모습을 한 번 훑어보고는 아무 말 없이부엌으로 향했다.컵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오늘,”그가 말했다.부엌에 선 채였다.“앞으로는 퇴근하고 바로 들어와.”지연은 리모컨을 내려놓고 그를 보았다.“왜?”“괜히.”그는 물을 마시며 말했다.“요즘 너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 같아서.”여기저기. 지연은 그 단어가 얼마나 넓게 쓰이는지 알고 있었다.마트, 동네, 집 근처. 모두 그의 기준 밖에 있으면 ‘여기저기’가 된다.“나,”지연은 천천히 말했다.“퇴근하고 집에 바로 오는 날이 더 많아.”“그래도.”준혁은 말을 이었다.“앞으로는 약속 없으면 바로 와.”지연은 잠시 말을 고르다 물었다.“약속이 있으면?”“그럼 미리 말해.”“누구랑.”“누구랑이 아니라,”그는 말을 고쳤다.“언제, 어디서.”지연은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다시 배열해 보았다.누구와 만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시간과 장소를 보고하라는 말.그건 부부 사이의 배려라기보다는 생활 규칙에 가까웠다.“그게,”지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꼭 필요해?”준혁은 그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우리가 부부잖아.”그는 항상 그 말로 마무리했다.부부라는 단어는 동의도, 질문도 덮을 수 있는 단어였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은 논쟁할 타이밍이 아니었다.그날 밤, 지연은 노트를 펼쳤다.○월 ○일 / 규칙앞으로는 퇴근 후 바로 귀가.약속은 사전 공유. 이유는 부부니까.글을 적으며 지연은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에 가까운 떨림이었다.그녀는 그 감정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남겼다.다음 날, 준혁은 지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몇 시에 끝나?지연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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