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한 날, 엄마 수첩에 재벌 남편의 이름이 있었다의 모든 챕터: 챕터 31 - 챕터 40

53 챕터

미끼

복도 끝의 발소리는 일정한 속도로 가까워졌다.서윤은 본능적으로 녹음기 앞에 섰다.태오가 그녀보다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는 문 쪽을 보면서도 서윤을 가리지 않았다.기록보관실 문이 열렸다.회색 작업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문턱에서 멈췄다. 목에 걸린 출입카드에는 재단 시설관리팀이라고 적혀 있었다.그는 태오를 알아보고도 바로 인사하지 못했다.“여긴 출입 승인 구역입니다.”태오가 낮게 물었다.“이 장비, 누가 옮겼습니까.”남자의 시선이 책상 위 녹음기로 향했다. 잠깐 망설이던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원래 있던 장비 아닙니까?”“아니죠.”태오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반출 스티커는 7년 전인데, 책상 위 먼지는 이틀도 안 됐습니다.”서윤도 그제야 보았다.녹음기 바닥 주변의 먼지는 누군가 손으로 쓸어 낸 듯 반달 모양으로 비어 있었다. 반면 책상 바깥쪽에는 오래된 먼지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시설관리팀 직원의 얼굴이 굳었다.“오늘 저녁에 보안점검 물품이라고 해서 들어왔습니다.”“누가 지시했습니까.”“서면 지시는 없었습니다. 전략지원팀에서 전화가 왔고….”그가 말을 흐렸다.“내선이 아니라 개인 번호였습니다. 저는 그냥 장비만 옮겼습니다.”서윤은 녹음기 뒷면의 스티커를 다시 보았다.반출 담당, 윤재헌.그리고 오늘 이곳으로 옮기라는 전화.누군가는 자신들이 윤재헌의 이름을 따라 여기까지 올 걸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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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를 위한 카메라

“혼자 왔군요, 한서윤 씨.”서윤은 전조등을 정면으로 받으며 걸음을 멈췄다.검은 세단의 뒷좌석 창문 너머로 낯선 남자가 보였다. 잘 맞춘 정장과 느슨한 넥타이. 감정 없는 얼굴. 원본을 쥔 사람보다는 누군가의 말을 전하러 나온 사람 같았다.코트 주머니 속 휴대폰은 아직 태오와 연결돼 있었다.“원본은요.”남자는 대답 대신 차문을 한 번 두드렸다.“타시죠. 여기서 길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그럼 말하지 마세요.”서윤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원본을 보여 줄 생각이 없으면, 저도 더 들을 말 없어요.”남자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한미정 씨 따님답네요.”주머니 속에서 숨을 죽인 기척이 미세하게 울렸다. 태오가 듣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서윤은 그 기척에 기대지 않았다.“제 엄마 이름은 왜 꺼내요.”“원본 녹취는 남아 있습니다.”“어디에 있죠?”“그걸 먼저 알려드리면, 한서윤 씨는 우리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지겠죠.”남자가 창문 틀에 팔을 걸쳤다.“오늘 밤 안으로 차태오 본부장이 재단 일에서 손을 떼게 하십시오. 내일 기자들 앞에도 서지 마세요.”서윤의 눈빛이 식었다.“그러면요?”“원본이 있는 장소를 알려드리겠습니다.”서윤은 짧게 웃었다.“7년 전에도 그랬겠네요.”남자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이번에는 다릅니다.”“뭐가요. 내 인생을 값으로 매기는 방식은 똑같아 보이는데.”주차장 천장등 하나가 깜빡였다. 서윤은 남자 어깨 너머의 붉은 점을 발견했다.운전석 뒤쪽 기둥에 붙은 초소형 카메라.렌즈는 정확히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서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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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분의 시차

오전 열한 시가 되기 직전, 기자회견장 앞 복도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카메라와 조명, 낮게 오가는 질문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기석은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서윤은 복도 벽면의 생중계 모니터를 바라보며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화면 속 단상은 아직 비어 있었다.“들어가기 전에 말할게요.”곁에 선 태오가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안으로 들어오지 마세요.”“서윤 씨.”“당신이 보이면 질문은 전부 당신한테로 가요. 재벌가 전남편, 관계 회복, 거래. 그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로요.”태오는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알겠습니다.”서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어젯밤 정리한 자료는 기자회견이 시작되는 시각에 맞춰 발송되도록 설정돼 있었다.한미정의 응급 이송 기록.한기석의 채무 정리 각서.그리고 그 사이에 찍힌 시간.23분.서윤은 그 숫자를 다시 보지 않았다.엄마가 들것에 실려 들어가던 날, 아버지는 병원 복도에서 계속 전화를 받고 있었다.그때는 회사가 어려운 줄만 알았다.이제는 안다.누군가의 목숨이 흔들리던 시간에도, 아버지는 자신에게 남을 것을 먼저 계산했다.“대신 하나만 해줘요.”“말하세요.”“누가 내 이름으로 당신을 끌어들이면, 그때만 막아줘요.”태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그건 막겠습니다.”태오가 잠시 모니터 속 단상을 보았다.“자료가 나가면, 아버님은 회견을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면 더 좋아요.”서윤은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아버지 말을 막지 않을 거예요. 끝까지 하게 둘 거예요.”그가 가족을 위해서였다고 말할수록,엄마가 쓰러지던 날의 시간이 더 선명해질 테니까.그 말이 남길 흔적까지, 오늘은 모두 카메라에 남겨야 했다.그것이 아버지가 고른 무대였으니까.기자회견장 문이 닫히고, 복도 벽면의 생중계 모니터에 화면이 켜졌다.한기석은 단상 앞에 서 있었다. 며칠 새 더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구겨진 셔츠 소매와 붉어진 눈가가 화면에 선명하게 잡혔다.“이 자리는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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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한 사람

“엄마가 응급실로 이송되기 23분 전, 아버지는 누구의 채무를 정리하는 각서에 서명했어요?”한기석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회견장 안의 공기가 눈에 보일 만큼 가라앉았다. 마이크 가까이에서 들리던 그의 거친 숨만 스피커를 타고 번졌다. 누구도 다음 질문을 서두르지 못했다.앞줄의 기자 하나가 휴대폰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대표님, 여기 각서에는 대표님 개인 보증 채무와 회사 채무가 함께 적혀 있습니다. 한미정 씨 치료비와는 별개라는 뜻입니까?”한기석의 시선이 흔들렸다.“그건… 당시 회사 사정이었습니다.”서윤은 눈을 감지 않았다.질문은 누구의 채무였느냐였다.그런데 아버지는 스스로 회사 사정이라고 말했다.“회사 사정이요?”그녀가 마이크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엄마가 쓰러진 날에도, 아버지한테 먼저였던 건 회사였네요.”“서윤아.”한기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그때 나는 우리 가족을 살리려고—”“엄마 이름으로 변명하지 마세요.”서윤의 말이 그의 목소리를 끊었다.회견장 뒤쪽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가족을 살리려던 사람이, 왜 엄마가 응급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내 이름을 조건으로 올렸어요?”한기석의 입술이 굳었다.“그 결혼은 네가 동의한 일이야.”“제가 본 계약서에, 엄마 자료를 덮는 조건도 있었어요?”서윤은 아버지의 손에 구겨진 종이를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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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을 지우러 오는 사람

“지금 바로 반박문 내지 말아요.”서윤이 말했다.기자들은 아직 복도에 남아 있었다. 휴대폰 화면마다 잘린 영상이 떠 있었다. 누군가는 한기석의 회견보다 그 영상을 먼저 기사 제목으로 올렸다.“그 영상이 퍼질수록, 먼저 설명해야 하는 쪽은 우리가 됩니다.”“그래서요.”“설명하지 말고, 저쪽이 움직이게 해요.”서윤은 휴대폰을 꺼내 짧은 글을 작성했다.[유포된 영상은 사실관계와 무관한 편집본입니다.저는 차량에 탑승하지 않았고, 어떠한 거래도 하지 않았습니다.해당 영상의 촬영 장치와 현장 자료는 보존 절차를 진행 중입니다.]태오의 시선이 마지막 문장에 멈췄다.“촬영 장치요.”“지하 3층 기둥에 붙어 있던 카메라요.”“지금 그걸 공개하면, 상대도 움직일 겁니다.”“그게 목적이에요.”“그 문장만으로도 기자들은 원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원본이 있다고 쓴 적 없어요.”서윤의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하지만 그걸 가장 불안해할 사람은, 영상을 잘라 올린 사람이겠죠.”그녀는 기자들 눈에 띄지 않게 화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그 불안을 견디지 못하면, 반드시 움직일 테니까.”태오의 눈빛이 낮아졌다.“누군가 회수하러 올 거라고 보는 겁니까.”“이미 어젯밤, 그들은 내가 차에 타기만 기다렸어요.”“이번엔 내가 기다리게 만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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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주의 대상

태오는 자신의 휴대폰과 서윤의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하나는 권한 정지, 하나는 계약 취소였다. 문장은 달랐지만, 둘 다 상대가 앞으로 어디에 설 수 있는지부터 계산한 사람의 문장이었다.“스튜디오로 갈게요.”서윤은 알림을 지우지 않은 채 안전벨트를 풀었다. 태오는 곧바로 밴 문을 열지 않았다.“내 변호사가 외부 인력 철수와 확보물 인계를 정리하겠습니다. 당신 회사 일에는—”“태경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알겠습니다.”대답이 너무 빨라서, 서윤은 잠시 그를 보았다. 예전의 태오라면 이미 호텔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계약 하나쯤은 되돌릴 수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대신 하나만 해줘요.”태오의 시선이 멈췄다.“당신 권한 정지 통지. 누가 올렸는지, 어떤 결재선을 탔는지 보존해요. 내 계약 취소도 같은 손에서 나왔는지 확인할 수 있게.”“내 이름을 쓰지 않고?”“당신 이름이 보이면, 저쪽은 자료를 지울 거예요.”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개인 변호사 통해서 하겠습니다.”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직원들은 작업대 앞에 모여 있었다. 꽃은 이미 물을 먹고 있었고, 호텔 로비에 들어갈 봄 장식 도면은 벽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취소 통보 한 줄이 그 공간 전체를 멈춰 세운 듯했다.“예약금은요?” 서윤이 물었다.“아직 입금 전입니다. 그런데 호텔 쪽에서 오늘 중으로 자재 반출도 보류해 달라고 했어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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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 사람 없는 통지

“RM-17.”태오는 노트북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가 멈췄다.“화면을 봐도 됩니까.”서윤은 대답 대신 노트북을 그의 쪽으로 돌렸다. 태오는 손대지 않고, 통지서 하단의 분류 코드만 오래 바라봤다.“거래보증사 코드가 아닙니다.”“알아요?”“태경 내부 리스크 문서에 붙는 관리 표기입니다. 외부 기관 통지서에 들어갈 이유가 없어요.”서윤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혼인 계약 추진 문서 가장자리에서 본 기호였다. 자신의 이름 아래 붙어 있던,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처리 순서로 바꾸던 표기.“그럼 누군가 복사했다는 거네요.”“정확히는, 누군가 외부 시스템이 스스로 판단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태오는 휴대폰을 꺼내 개인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는 낮고 짧았다.“거래보증사에 보존 요청 넣어 주세요. 한서윤 플라워 스튜디오 관련 주의 통지의 생성 시각, 입력 원문, 발신 대행 계정, 수정 이력까지요. 호텔과 납품처에는 연락하지 마십시오.”통화를 끊은 뒤에도 그는 서윤을 보지 않았다. 그녀가 허락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스스로 다시 확인하는 사람처럼.서윤이 말했다.“거래보증사는 자기들이 보낸 통지라고 할 거예요.”“그래서 통지 내용이 아니라, 통지가 만들어진 순서를 보존하는 겁니다.”그때 직원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대표님, 다른 거래처에서도 같은 메일이 왔어요. 다만 여기에는 담당자 이름이 비어 있어요.”서윤은 화면을 받아 들었다. 제목도 문구도 같았다. 그러나 첨부 파일의 속성 창에는 발신 기관과 다른 이름이 남아 있었다.TK-H EVENT OPS.태오의 눈빛이 좁아졌다.“태경호텔 행사 운영 대행 계정입니다.”“호텔이 직접 보낸 거예요?”“아니요. 호텔 직원이 쓸 계정이 아닙니다. 외부 행사 자료를 올리고, 협력사에 배포할 때만 쓰는 계정이에요.”서윤은 취소된 봄 시즌 공간 연출 계약을 떠올렸다. 계약서와 도면, 납품 목록까지 넘긴 뒤였다. 누군가는 호텔의 이름을 빌려 거래처를 끊고, 그녀의 작업 자료까지 들여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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