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한 날, 엄마 수첩에 재벌 남편의 이름이 있었다의 모든 챕터: 챕터 21 - 챕터 30

53 챕터

엄마의 꽃집

“목적지 바꾸겠습니다.”기사는 백미러로 서윤을 한 번 보았다.“어디로 모실까요?”서윤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그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문이 열리는 기분이었다.“미정 플라워요.”기사는 곧바로 내비게이션을 조작했다.“현재는 폐업한 곳으로 나오는데, 맞습니까?”“맞아요.”짧게 대답한 뒤, 서윤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비에 젖은 도시는 낯설었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로 길게 번졌고, 차창에 맺힌 물방울들이 계속 흘러내렸다.미정 플라워.엄마의 꽃집이었다.서윤이 처음 꽃을 만진 곳.엄마가 꽃 이름을 하나씩 가르쳐 주던 곳.그리고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가 가장 먼저 정리해 버린 곳.그때 앞좌석에서 기사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기사는 화면을 확인하지 않았다.그러나 서윤은 알 수 있었다.차태오일 것이다.서윤은 낮게 말했다.“차태오 씨한테 연락하지 마세요.”기사가 잠시 멈칫했다.“대표님 안전 때문에…”“제가 필요하면 직접 연락할게요.”기사는 더 말하지 않았다.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서윤은 가방을 끌어안았다. 안에는 엄마의 영수증, 계약서 사본, 녹취 파일이 들어 있었다.이제 하나만 더 찾으면 된다.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긴 목소리.윤재헌은 그것을 들으면 자신이 버티지 못할 거라고 했다.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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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남긴 이름

“엄마가 너한테 꼭 말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윤은 녹음기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래된 기계 안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노이즈가 섞여 있었고, 숨은 자주 끊겼다. 그런데도 서윤은 알 수 있었다.그건 엄마가 마지막 힘을 다해 남긴 목소리였다.“차태오.”서윤의 손끝이 굳었다.그 이름이 왜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지,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녹음 속 엄마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그 사람을 믿으라는 말이 아니야. 용서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고.”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다만, 네가 미워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는 정확히 알았으면 해.”치직.잡음이 짧게 끼어들었다.서윤은 녹음기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엄마는 차태오를 만난 적이 없어.”서윤의 눈이 흔들렸다.“그날 면담장에 나온 사람들은 계속 그 사람 이름을 말했어. 차태오 본부장 뜻이다. 본부장님도 알고 계신다. 이미 결정된 문제다.”꽃집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런데 이상했어.”엄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이어졌다.“정작 그 사람은 없었어.”서윤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러니까.엄마는 알고 있었다.차태오의 이름이 누군가에게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서윤아.”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언젠가 네가 그 사람을 마주하게 되면 물어봐. 정말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자기 이름으로 네 인생이 결정되는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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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사람

“그 부분까지 들으셨습니까.”윤재헌의 목소리는 낮고 공손했다.그래서 더 불쾌했다.서윤은 녹음기를 품 안쪽으로 더 깊이 끌어안았다. 오래된 꽃집 안에는 아직 엄마의 목소리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윤재헌은 그 공기마저 밟고 들어왔다.젖은 구두 끝에서 떨어진 빗물이 먼지 쌓인 바닥 위로 번졌다.서윤은 그 물자국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늦은 건 당신이 아니에요.”윤재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서윤은 말했다.“엄마한테 너무 늦었죠.”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윤재헌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감정 없는 눈이었다. 미안함도, 당황도 없었다.“그 녹음기는 한서윤 대표님께 위험한 물건입니다.”“내가 판단해요.”“이미 많은 걸 잃으셨습니다.”윤재헌이 한 걸음 다가왔다.“더 잃기 전에 멈추시는 게 좋습니다.”서윤은 물러서지 않았다.“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그녀의 손끝이 녹음기를 움켜쥐었다.“아빠도, 회장님도, 당신도.”윤재헌은 조용히 말했다.“그분들은 각자 방식으로 대표님을 보호하려 했을 겁니다.”서윤은 웃었다.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보호요?”그 말이 이렇게 역겨울 수 있다는 걸, 서윤은 처음 알았다.“엄마 병원비를 거짓말로 만들고, 내 결혼을 거래로 묶고, 엄마가 남긴 목소리까지 숨긴 게 보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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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된 목소리

“당신이 한 말, 처음부터 전부 녹음됐습니다.”태오의 목소리가 꽃집 안으로 낮게 들어왔다.윤재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놀라지 않았다.그는 늘 그랬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먼저 표정을 지우는 사람.“본부장님.”윤재헌이 공손하게 말했다.“경찰까지 부르셨습니까.”태오는 젖은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그의 뒤로 경찰 두 명이 함께 들어섰다. 낡은 꽃집 안에 젖은 구두 소리와 무전기 잡음이 섞였다.서윤은 녹음기를 품에 안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태오는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먼저 확인하지도, 손을 뻗지도 않았다.그는 윤재헌과 서윤 사이에 서지 않고, 조금 옆으로 비켜 섰다.마치 이 싸움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경찰이 물었다.“신고하신 분이 누구십니까.”태오가 입을 열려는 순간, 서윤이 먼저 말했다.“저예요.”태오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에게 닿았다.서윤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제가 신고한 건 아니지만, 제가 피해자입니다.”윤재헌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서윤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이 사람은 제 어머니가 남긴 녹음기를 알고 이곳까지 찾아왔고, 그 녹음을 덮으라고 했습니다. 방금 전 제 아버지와 태경그룹 관련 문서 원본이라고 말한 봉투도 제게 보여 줬습니다.”경찰의 시선이 작업대 위 봉투로 향했다.윤재헌은 낮게 말했다.“회사 기밀 문건입니다.”태오가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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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도 되는 곳

윤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대답이었다.서윤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화가 나야 했다.소리를 질러야 했다.왜 그랬냐고, 왜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냐고, 왜 내 인생을 돈과 서류 사이에 끼워 넣었냐고 물어야 했다.그런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말보다 먼저, 몸이 그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경찰이 봉투를 증거 봉투에 넣었다.녹음기와 메모도 촬영됐다. 서윤의 휴대폰에 남은 녹음 파일도 확인됐다.“한서윤 씨, 이후 진술이 필요합니다. 지금 바로 어려우시면 보호자나 변호인과 함께 출석하셔도 됩니다.”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윤재헌은 경찰에게 둘러싸인 채 꽃집 문 쪽으로 걸어갔다.나가기 직전, 그는 서윤을 돌아보았다.“한서윤 대표님.”서윤은 녹음기를 품에 안은 채 그를 보았다.윤재헌은 여전히 공손했다.“저는 경고했습니다.”서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그 경고도 녹음됐어요.”윤재헌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온기가 사라졌다.딸랑.그가 나가자 낡은 문종이 울렸다.곧 경찰의 발소리도, 무전기 소리도, 젖은 구두 소리도 멀어졌다.꽃집 안에는 서윤과 태오만 남았다.오래된 먼지 냄새.마른 꽃잎 냄새.그리고 녹음기 안에서 멈춘 엄마의 목소리.서윤은 그제야 손끝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녹음기를 상자 안에 다시 넣으려 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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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그래도 서명해야 했다.”그 말이 꽃집 안에 떨어졌다.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던 눈물조차 멈춰 있었다. 울음은 슬픔이 있을 때 나는 것이라는 걸, 서윤은 그제야 알았다.지금 그녀 안에 남은 건 슬픔이 아니었다.차갑게 굳어 가는 무언가였다.“왜.”입술 사이로 겨우 한 글자가 나왔다.수화기 너머에서 한기석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그때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TV 뉴스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렸다.사람이 죽어 가던 날을 말하는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버지는 평온했다.“회사가 무너지기 직전이었어. 네 엄마 병원비도, 직원들 월급도, 채권자들도 전부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서윤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서 있었다.“그래서 엄마를 버렸어?”“버린 게 아니다.”한기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가족을 살리려고 한 거야.”서윤은 웃었다.소리는 나지 않았다.가족.그 단어가 이렇게 더러울 수 있다는 걸, 서윤은 처음 알았다.“그날 아빠가 살린 건 가족이 아니야.”서윤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아빠 자신이었지.”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태오는 뒤돌아선 채 서 있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윤은 알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그의 휴대폰도 녹음 중이라는 것을.그가 대신 말하지 않아도, 이 통화가 사라지지 않게 붙잡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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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의미

네 결혼은 대가가 아니라, 입막음이었다.서윤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입막음.그 단어는 이상하게 조용했다.소리를 지르는 말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멱살을 잡는 말도 아니었다.그런데 그 어떤 말보다 잔인하게 서윤의 삶을 설명하고 있었다.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역시 문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서윤은 천천히 다음 장을 넘겼다.마른 종이가 손끝에서 바스락거렸다.태경메디컬재단 희귀질환 지원사업 관련 내부 제보.환자 동의서 위조 정황.지원금 유용 의혹.외부 감사 회피를 위한 자료 회수 지시.글자는 건조했다.그래서 더 끔찍했다.사람의 병과 죽음이, 종이 위에서는 정리된 항목이 되어 있었다.서윤은 목 안쪽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엄마가…”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이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태오는 조심스럽게 문서 하단을 가리켰다.“이건 내부 제보 양식입니다.”서윤의 시선이 그곳으로 내려갔다.문서 번호.작성 일자.보안 등급.그리고 담당 부서.태경메디컬재단 전략지원팀.그 아래 작은 글씨가 있었다.실무 담당: 강유라.서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강유라.그 이름은 빠지는 곳이 없었다.회의실에서 서윤을 리스크라 부르던 여자.녹취 파일을 잠가 두었던 여자.그리고 엄마가 쥐고 있던 제보서 속 담당자.처음부터 그녀는 알고 있었다.태오는 낮게 숨을 내쉬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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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편은 아니다

차태오 본부장과의 혼인 계약 추진.서윤은 문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엄마의 병원비.아버지의 채무.태경메디컬재단의 자료 회수.그리고 자신.한서윤.누군가에게는 딸도, 아내도 아니었다.처리해야 할 리스크였다.“서윤 씨.”태오가 낮게 불렀다.“말하지 마세요.”그의 입이 다물렸다.미안하다는 말일 것이다. 몰랐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어느 쪽도 듣고 싶지 않았다.서윤은 문서 끝을 눌러 폈다. 구겨진 종이 위로 ‘처리 방안’이라는 글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당신도 몰랐을 수 있어요.”태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하지만 저는 달라요.”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당신 이름이 이용당한 거라면, 나는 내 인생이 이용당했어요.”태오의 얼굴이 굳었다.“당신도 차명환 회장한테 속았을 수 있겠죠. 그런데 당신은 적어도 몰랐다는 말을 할 수 있어요.”목이 잠겼다. 그래도 끝까지 말했다.“저는 몰랐다는 말조차 못 해요. 그 결혼 안에서 살았으니까.”꽃집 안이 조용해졌다.태오는 한참 뒤에야 고개를 숙였다.“맞습니다.”변명 없는 대답이었다.“나는 당신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서윤의 손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겠습니다. 당신이 정한 방식으로.”서윤은 가만히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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