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주버니, 그 품에 중독되다: Chapter 111 - Chapter 120

264 Chapters

111장

“하랑아, 잘 가!” 어린 소녀 채원이 먼저 부모에게 픽업을 받아 떠나는 친구를 향해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하랑은 환하게 웃으며 채원의 손인사에 똑같이 환한 미소로 화답한 뒤,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데리러 올 차를 찾기 시작했다.최근 들어 준현이 자신의 딸에게 차갑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뒤로는, 집에서 하랑을 데리러 오는 사람들도 늘 늦곤 했다. 마치 자신들에게 하랑이라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매번 아이를 한참이나 기다리게 만들었다.심지어 친어머니인 서영조차 하랑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랑이 바로 서영이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남자, 시윤의 친딸이었기 때문이다.“안녕, 하랑아.”하랑의 바로 앞에 서 있던 낯익은 사람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또 아저씨예요?”어린아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시윤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웃었다.“아직 아무도 데리러 안 왔어?”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묵직하고 깊은 울림이 담겨 있었다.하랑은 짧게 고개만 저었고, 순진한 어린아이의 시선은 여전히 학교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는 데 쏠려 있었다.“그럼 아저씨가 집까지 데려다줄까?”시윤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싫어요.”하랑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고, 그 목소리에는 차갑고 퉁명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시윤은 다시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속으로는 저 까칠하고 퉁명스러운 태도가 서영과 정말 똑같다고 생각했으며, 이 아이가 자신의 딸이자 서영의 딸이라는 것은 이제 100% 확실했다. “너는 웃는 법을 모르니?”시윤은 하랑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하랑이 그제야 남자를 바라보았다.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쭉 내밀고 날카롭게 눈을 가늘게 뜬 채, 아이답지 않게 까칠한 말투로 대답했다.“아저씨가 누군데요? 그냥 하랑이 엄마 친구일 뿐이잖아요.”“그러니까 더 예의 있게 행동해야지.”시윤은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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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장

은선도 함께 걸음을 멈췄다. 방금 자신들이 들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깨닫자, 그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사모님…”그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그 안에는 지아를 향한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지아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가슴이 꽉 조여오는 것처럼 답답한 데다 배도 은근하게 조여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며, 마치 뱃속에 있는 작은 태아마저 자신과 똑같은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지아는 천천히 손을 내려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들었지, 아가.”지아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 집안에서는 아무도 너를 환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넌 꼭 강해야 해. 엄마는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은선은 무겁게 침을 삼킨 뒤 조금 앞으로 나섰다. 마치 아직 지아의 얼굴 앞에서 직접 내뱉지도 않은 말들로부터 이 여린 몸을 대신 지켜주려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사모님, 우리 뒤쪽 별채로 가요.”은선이 부드럽게 권하며 두 손으로 지아의 어깨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떨림까지도 달래주려는 듯한 손길이었다.지아는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눈빛은 텅 빈 듯했으며, 가슴속에 너무 무거운 무언가를 애써 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그러다 지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순순히 은선을 따라 복도를 지나 뒤쪽 별채로 향했다.그곳에 들어서자 공기가 한결 편안하게 느껴졌다. 주변도 훨씬 조용했고, 조금 전까지 저택 안에서 들었던 말들과 시선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숨을 조금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경희는 마침 빨래를 널어놓는 일을 막 끝낸 참이었다. 지아를 발견한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활짝 번졌다.“어머, 막내 사모님?”따뜻하게 인사를 건넨 경희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지아를 짧게 끌어안았다. 짧은 포옹이었지만 그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임신한 거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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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장

지아는 숨이 턱 막혔다. 가늘게 떨리는 손이 천천히 배 위로 내려가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고, 그 순간 아이를 지키려는 본능이 저절로 솟아올랐다.“싫어.”지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분명한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이 아이는 내 아이야. 난 절대로 이 아이를 지우지 않을 거야. 설령 오빠가 직접 부탁한다고 해도.”수현이 차갑고 경멸적인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 아이는 내 친자식이 아니야. 그렇다고 진씨 가문의 혈육도 아니고.”그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그런데도 그 아이를 여기서 키우겠다고? 이 집안에서?”수현의 두꺼운 눈썹이 서로 맞닿을 듯 깊게 찌푸려졌다.지아는 무겁게 침을 삼켰다. 가슴은 안쪽에서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답답하게 조여왔고, 그 압박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오빠가 나한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라고 했잖아.”지아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이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워주겠다고 말한 것도 오빠였어.”지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말을 이어가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그런데 왜 이제 와서 마음이 변한 거야? 이 아이는 이미 내 뱃속에 있어. 처음부터 오빠가 원했던 일이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야?”수현은 지루한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짧게 코웃음을 쳤다.“처음에는 그랬지.”그가 차갑게 대답했다.“하지만 지금은 다시 생각해봤어. 그리고 결론은 분명해. 그 아이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그 말이 지아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후려쳤다.“우리 집안 환경은 우리 핏줄도 아닌 아이를 위한 자리가 아니야.”수현이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었다.“나중에 혹시라도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는 건 질색이거든.”“오빠…”지아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잘 들어.”수현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그 아이는 내 친자식이 아니야. 이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도 아니지. 그러니까 지워.”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협상의 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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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장

“순희 이모가 준 약초 아직 있잖아? 왜 안 먹어?” 도현이 무덤덤하게 물었다. 그의 시선은 잠들기 전에 임산부용 우유 한 잔을 다 마시고 있는 지호에게 향해 있었다.“우유가 더 맛있어요, 여보. 약초는 쓰잖아. 나 그런 거 싫어해요.”지호는 살짝 입술을 내밀며 응석을 부리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도현이 이런 행동에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역시나 도현은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는 침대 위로 올라가 자신의 자리 쪽에 놓인 베개와 긴 쿠션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별다른 말도 없이 늘 해오던 작은 습관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우유를 다 마신 지호도 뒤따라 침대에 올라왔다. 그녀는 남편의 왼쪽에 누운 뒤 이불을 끌어올려 몸을 덮었다.“아직 8개월이나 남았으니 까마득하긴 해.”도현이 천장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지금부터 아이 이름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지호가 도현을 돌아보았다. 입가에는 어느새 작은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이미 있어요, 여보.”도현이 시선을 돌렸다.“뭔데?”“테오.”잠시 침묵이 흘렀고, 도현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네.”대답은 너무나 짧았다. 지호는 침을 삼켰고, 그 짧은 대답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도현이 늘 보여주는 이런 차갑고 필요한 말만 하는 태도를 마주하는 것이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다.“그럼 여보는?”지호가 손가락 아래의 이불을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품고 있는 아이의 친아버지도 아닌 남자에게 그저 형식적인 이야기를 건네고 있을 뿐이었다.“우리 아이한테 무슨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요?”도현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나도록 아무 말이 없었고, 마치 정말로 이름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남자아이라면 태석.” 잠시 후 도현이 대답했다.“여자아이라면 이서.”“이서, 태석.”지호가 작게 이름을 되뇌었다. 입가에는 억지로 지은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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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장

“지우라고?” 그 말은 조용히 떨어졌지만, 준현의 가슴에는 거세게 내리꽂혔다.준현은 말없이 굳어 있었다. 잠시 동안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눈빛만큼은 서서히 어둡고 위험하게 변해 있었다.“수현 오빠가… 이 아이는 이 집안에서 태어날 자격이 없대요.”지아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자기 친자식이 아니기 때문이래요. 이 아이가 진씨의 후손이 아니라고 생각한대요.”지아는 다시 흐느꼈고, 가느다란 어깨가 작게 떨렸다.“아주버님…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지아의 목소리가 거의 끊어질 듯 가늘어졌다.“저는 그저 이 아이가 태어나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그것뿐이에요.”지아가 가쁜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꽉 조여 오는 듯 답답했지만, 애써 말을 이어갔다.“설령 이 아이가 남자아이라고 해도, 진씨 가문의 유산을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고 해도 저는 괜찮아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아는 자신을 두렵게 만드는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하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저 좀 도와주세요.”그녀가 나직하게 애원했다.“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주버님뿐이에요. 게다가… 이 아이는 아주버님의 친자식이기도 하잖아요.”방 안을 무거운 침묵이 뒤덮었다.준현은 지아의 턱에서 천천히 손을 내렸다. 턱 근육은 팽팽하게 굳어 있었고 숨소리마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애써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그 자식이 감히 너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낮고 억눌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짙은 분노가 배어 있었다.지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수현 오빠는 이게 부탁이 아니라고 했어요.”지아가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명령이라고요. 예전에도 그랬어요. 저한테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라고 했을 때도요. 저는 이미 싫다고 했는데도 명령이라고 했어요.”지아의 몸이 거세게 떨리더니 결국 억눌러왔던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그런데… 수현 오빠는 이 아이를 자기 친자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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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장

진료실 안은 서늘했다. 에어컨을 그리 낮은 온도로 설정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할 만큼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곳은 그랜드 진 종합병원이 아니라 시티 종합병원이었다.준현은 일부러 지아를 자신의 가문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문의 병원과 여전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다른 병원으로 데려가지도 않았다.지아는 진료용 침대에 누운 채 자신의 배 위에서 초조하게 손가락을 맞물리고 있었다. 준현은 침대 오른쪽에 서서 단 한 번도 지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들을 진료하는 산부인과 의사는 차분한 표정의 중년 여성이었다. 의사는 지아의 배에 차가운 젤을 바른 뒤 초음파 기기를 갖다 댔다. “천천히 숨 쉬세요, 산모님.”의사가 부드럽게 말했다.모니터에 희미하게 움직이는 회색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사는 집중하듯 눈을 가늘게 떴고, 진료실 안은 고요한 가운데 초음파 기계가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지아에게는 그 몇 초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선생님?”준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억눌린 기색이 역력했다.“제 아내의 상태는 어떻습니까?”준현이 의사에게 지아를 자신의 아내라고 말하는 순간, 지아는 목이 턱 막히는 듯 숨을 삼켰다.이 남자가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아내라고 인정한 것인가?왜 굳이 거짓말을 해야 하지?의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초음파 기기를 조금 옮긴 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습니다.”마침내 의사가 입을 열었다.“아직 태아가 굉장히 작아서 임신 5주 정도로 보이네요. 이 시기에는 심장 박동이 아직 선명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지만, 아기집은 정상적으로 보입니다.”지아는 그제야 지금까지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금 전보다 마음이 놓였고, 눈가에는 안도감과 함께 눈물이 맺혔다.사실 지아는 이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일이 벌어진 것은 오늘 아침이었지만, 그날 밤이 되자 준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곧장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왔다.“그럼… 아침에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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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장

“준현아, 왜 이 일을 나한테 먼저 상의하지 않은 거니?” 명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날카로운 시선이 준현을 찌르듯 향했고, 나이 든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감정을 억누르느라 턱까지 굳어 있었다.“상의요?”준현이 비스듬히 미소 지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한마디는 묵직하게 내리꽂혔다.“임산부의 안전을 언제부터 상의해서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습니까?”명희가 움찔했다.“말 돌리지 마! 네 마음대로 내가 정한 규칙을 바꿀 수는 없어. 이 집에는 가정부 두 명이면 충분해. 나머지는…”명희가 그 말을 유난히 강조했다.“며느리들이 해야 할 일이야.”준현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지호를 지나 서영에게까지 천천히 향했다. 느릿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시선만큼은 날카로웠다.“어느 며느리 말입니까, 어머니?”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막내 제수씨요?”준현이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그러니까 어머니 말씀은, 이 집안에 며느리는 막내 제수씨 하나뿐이라는 겁니까?”그는 다시 지호와 서영, 두 여자를 차례로 바라보았다.“그럼 나머지는 뭡니까? 비싼 장식품입니까?”지호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고, 서영은 이를 악문 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준현을 노려보았다.“제가 회사에 출퇴근하면서 지금까지 본 며느리는 딱 한 명뿐입니다.”준현이 차갑게 말을 이었다.“빗자루를 들고 청소하고, 걸레질하고, 주방에 들어가고,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전부 시중드는 며느리 말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용하지만 서늘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아니면 제가 이 집 CCTV 녹화본이라도 보여드릴까요? 진짜 일하는 사람이 누구고, 뒷짐 지고 앉아서 대접만 받으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 같이 확인해 보시죠.”명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숨이 목구멍에 턱 걸린 듯했다.준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가 뿜어내는 압박감이 그대로 공간을 짓눌렀다.“정말 이 집 규칙이 며느리들에게 일을 시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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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장

준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의 시선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무슨 뜻이지?”도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잠시 저택 현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형을 바라보았다.“형님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막내 제수씨를 대하는 방식이 너무 눈에 띄어요. 너무 노골적이야. 이러다가 누군가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그는 준현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당황하는 기색을 찾아내고 싶었지만, 돌아온 것은 오히려 흔들림 없는 평온함뿐이었다. 예전부터 늘 그 남자에게 자연스럽게 따라붙어 있던 위엄 또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그래?”준현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지적해 줘서 고맙군. 하지만 나는 애초에 숨길 생각이 없었어.”도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그러니까… 일부러 그랬다는 겁니까?”준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일부러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야.”그의 입가에 비뚤어진 미소가 걸렸다.“나는 그저 모르는 척하지 않기로 한 것뿐이다. 무언가를 숨기려는 게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는 것보다 더 시끄러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거든.”도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설마… 내가 이미 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건가요?”“물론이지.”준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이 저택 CCTV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니까.”도현의 턱이 굳게 다물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심지어 경고의 의미로 서로의 비밀을 하나씩 꺼내 던질까 하는 생각까지 잠시 스쳤지만, 준현의 태연한 모습 앞에서는 그 모든 의도가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몇 초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준현은 손목시계를 힐끗 바라본 뒤 셔츠 소매의 커프스를 정리했다.“난 먼저 가보지.”도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흠, 나도.”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준현은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고, 도현 역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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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장

은선은 경희에게서 집안에 새로 들어온 가정부 네 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준현이 친어머니와 대립각을 세우며 아내와 제수, 그리고 새로 온 가정부들 앞에서 지아의 편을 당당히 들어주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더욱 그랬다.“와, 정말 다행이네.”은선이 안도한 듯 중얼거렸다.“이제 막내 사모님한테도 자기 편이 생겼어. 우리처럼 그저 가정부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집안의 가장이 직접 나서서 말이야.”“그러게.”경희가 활짝 웃으며 맞장구쳤다.“이제 우리 둘은 막내 사모님만 모시면 되잖아. 일도 훨씬 수월해졌고, 일하면서 속으로 투덜거릴 일도 없겠다.”“맞…”은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현이 주방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은선은 순간 경희를 날카롭게 바라보며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무슨 일이십니까, 막내 도련님?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신가요?”은선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한층 사무적인 말투를 취했다.수현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두 사람을 차갑게 바라보았다.“작은형수와 지아에게 줄 임산부용 우유 잊지 말고 준비하세요.”그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리고 내 아내에게는 오늘 파인애플을 준비해 주시고. 방금 나한테 그렇게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은선과 경희는 아주 잠깐, 정말 찰나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곧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도련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두 사람의 대답이 거의 동시에 겹쳤다.수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입가를 살짝 들어 올린 뒤 몸을 돌려 주방을 빠져나갔다.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경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막내 도련님이 사모님한테 이렇게 신경을 쓰다니, 정말 별일이네.”은선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이 입덧을 하나 봐.”그러고는 목소리를 한층 낮췄다.“그런데 사모님은 파인애플이 유산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모르잖아.”경희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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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장

“드디어 막내 사모님 방도 다 끝났네.”경희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구석구석을 만족스럽게 살폈고, 입가에는 어느새 환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오늘부터 바로 지내면 되겠어.”“맞아.”곁에 서 있던 새 가정부 도희가 대답했다.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막내 사모님은 어떤 분이야?”경희가 작게 웃었다.“조금 있으면 여기로 오실 거야. 아무튼 제일 예쁘고, 제일 착하고, 붙임성도 좋으면서 거만하지도 않은 분이지. 직접 만나 보면 바로 알게 될 거야.”도희는 여전히 궁금한 표정으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마침내 방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지아가 은선과 함께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은선은 마지막 남은 여행 가방 하나를 끌고 있었다.도희는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순간, 경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지아는 정말 아름다웠다.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에, 걸음걸이 하나에서도 단번에 착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는 미인이었다.“어서 오세요, 사모님.”경희가 마치 먼 길을 다녀온 사람을 맞이하듯 밝게 인사했다.지아는 그런 환영이 조금 어색한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경희의 곁에 서 있는 낯선 여인에게 시선을 옮겼다.“이분은…?”“저는 김도희입니다, 사모님.”도희가 재빨리 대답하며 손을 내밀었다.“여기 새로 들어온 가정부예요.”지아는 내밀어진 손을 예의 바르게 맞잡았다.“저는 손지아예요. 이 집에서 일하게 된 걸 환영해요, 이모님.”도희는 그제야 안심한 듯 환하게 웃었다.“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그럼 이제 됐어요.”은선이 경희와 도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이제 막내 사모님은 쉬셔야 하니까, 옷장 정리는 제가 해드릴게요."경희는 곧바로 그 뜻을 알아들었다.“그럼 저랑 도희는 먼저 실례할게요, 사모님. 다시 일하러 가야 해서요.”“네, 이모님.”지아가 조용히 대답했다.경희와 도희가 방을 나가자, 은선은 준현이 네덜란드에서 사준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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