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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천년의 기억: Chapter 111 - Chapter 120

128 Chapters

111. 소문이 가리키는 등불

“무엇을 말하고 싶으냐.”“사람들의 눈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면…사실은 금세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눈동자는 여전히 조용했지만, 그 안에 스치는 빛은 흔들리지 않았다.“빈은… 어느 누구와도 밤을 함께 한 적이 없사옵니다.”그 말은 명백한 부정이었다.대비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빈.”한참 뒤, 대비가 입을 열었다.“세자저하의 마음은 너뿐 아니라, 이 나라의 것이다. 저하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곧 이 나라의 기강이 된다.”손가락이 찻잔을 다시 한 번 천천히 돌았다.“빈이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억울함만이 아니다.저하의 얼굴과 나라의 체면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그 말은 곧, 빈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고였다.이수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분부… 명심하겠사옵니다.”“그래. 앞으로는 빈의 처소 앞에 드나드는 그림자들이 더 이상 말을 낳지 않도록 하거라.”그 말에 선명하게 어젯밤 담장 너머의 그림자가 떠올랐다.'누가… 그 앞에 서 있었던 것인가.'이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침묵이 곧 순종인 양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대비전에서 물러나며, 이수는 바닥만 보며 걸었다.상궁이 옆에서 나지막이 물었다.“마마…”“괜찮다.”이수는 짧게 잘랐다.“지금은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얼굴을 해야 할 때다.”그 말 뒤에, 그녀는 아주 조용히 한 마디를 더했다.“소문이… 이제 모양을 갖추었구나.”그 시각, 군영으로 돌아가던 도진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아침부터 들려오는 말들이 하나의 방향을 향해 모이고 있었다.세자, 세자빈, 그리고 자신.셋의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는 동안, 누군가의 얼굴은 점점 더 선명한 혐의로 물들어 갈 것이다.'그 얼굴이… 어디를 향할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도진은 하늘 한 번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은 맑았다.그러나 눈을 감고 나면 그 빛 너머로 어제 세자의 눈빛이 겹쳐 보였다.'저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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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네가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도진은… 어디에 있을까.'그 질문은 소문보다 더 위험했다.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도진은 군영 근처 언덕에서 말에게 풀을 뜯기게 하며 서 있었다.곧 어두워질 하늘이 붉은 빛을 천천히 거두어가고 있었다.“경.”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도진은 천천히 돌아봤다.무관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오늘… 궁 안이 어수선하옵니다.”“들었다.”도진의 대답에는 공기의 온도가 섞여 있었다.서늘하고, 단단하고, 언제든 칼날이 될 수 있는 온도였다.무관은 잠시 주저했다가, 마침내 속내를 드러냈다.“경, 궁에서도 말이 나도는 것 같습니다.”“무슨 말이.”“…빈마마 처소와…경을 함께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사옵니다.”그 순간 바람이 지나갔다.도진의 옷자락이 흔들렸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런 말이 어디에서 나왔다.”“아무도 모릅니다.”무관이 고개를 더욱 숙였다.“누군가는 보았다 하고, 누군가는 들었다 하고…아마도, 경께서 다치신 그날 저하께서도 그 근처로 가셨다 하여…”도진의 눈빛이 아주 가늘어졌다.“…저하께서?”“예, 경. 그 말 때문인지 사람들은 더 쉽게 이야기를 만들고 있사옵니다.”바람은 연회를 좋아하지 않는다.그러나 소문은 늘 연회를 벌인다.하나의 말이 사람들의 입을 옮겨 다니면 그 말 주변으로 그럴싸한 장식이 붙는다.그리고 그것이 모양을 가지는 순간,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도진은 말고삐를 쥔 손을 살짝 힘주어 쥐었다.“저하께서… 어디로 가셨다는 말이 퍼졌느냐.”무관은 답하기를 망설였다.“말 그대로라 하옵니다. 빈마마 처소 담장 근처를… 잠시 거닐었다 하오나실은 본 사람이 있는지도 명확지 않사옵니다.”도진은 한 번 눈을 감았다.어젯밤, 세자의 시선이 자신을 꿰뚫듯 바라보던 순간이 떠올랐다.'저하께서… 이미 무엇을 결론내리신 것이 아닐까.'궁에서 ‘결론’은 곧 ‘의심’이었다.의심은 곧 ‘처벌’이었다.처벌은 곧 ‘죽음’이었다.도진은 눈을 천천히 뜨며 말했다.“빈마마의 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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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그가 흔들리고 있다

밤이 깊어질수록, 궁은 오히려 더 많은 기척으로 가득 찬다.낮에는 말하지 못한 생각들이 어둠 속에서 비로소 형체를 갖기 때문이다.촉 하나가 깜박일 때마다 누군가의 의심과 계산이 동시에 숨을 토한다.그런 밤이 다시 찾아왔다.이수는 잠시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다.바람이 종종 창호지를 건드렸고, 그 작은 파문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은 덜컥 흔들렸다.'왜 오늘은… 모든 것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듯한가.'뒤에서 상궁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마마, 오늘은… 온종일 말들이 가볍지 않았사옵니다.심신이 편치 않으실까 염려되어… 잠시 누이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알고 있다.”이수는 짧게 답했다.그리고 그 답만으로도 상궁은 마마가 얼마나 깊이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도진 경과 관련된 말들이”“그 말은… 하지 말거라.”이수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끊었다.표정은 잠잠했으나, 손끝은 아주 약하게 떨렸다.“그 사람과 나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안다.”상궁은 그 말의 속내를 이해했다.궁은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 들으면 이미 사실처럼 움직이기 시작하는 곳이다.그리고 사실이 아니어도, ‘누구에게 이롭냐’가 중요할 때가 더 많았다.“마마… 저하의 마음이 어떠신지, 혹 아시는 바가”“모른다.”이수가 답했다.그러나 모르는 건 아니었다.모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세자, 현은 요즘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고 있었다.그 변화는 미세하지만 결국 어떤 결론을 향해가고 있음은 분명했다.'그 결론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그는 이수의 남편이었다.그러나 남편이라는 이름은 너무 쉽게 의심으로 바뀌어 언제든 칼날이 될 수 있었다.한편, 도진은 궁의 외진 회랑을 따라 걷고 있었다.어둠이 그의 옷깃에 스며들었고, 그 어둠 속에서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그의 마음에는 방금 세자가 말한 문장이 계속 남아 있었다.“빈을 향한 움직임이 있다.”'누가? 왜? 어떤 방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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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붉게 저무는 징조

밤이 깊어갈수록 궁은 더더욱 얇은 숨을 내쉬었다.마치 거대한 짐승이 잠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는 듯,기척 하나, 그림자 하나가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다.그날도 그러했다.이수는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있었다.촛불 아래 놓인 찻잔은 식어가고 있었고, 방 안은 온전히 고요했으나그 고요가 더 큰 폭풍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상궁이 기척을 줄이며 다가왔다.“마마… 오늘은 말이 유난히 오르내렸사옵니다.몸도 마음도 성가셨을 터이오니, 잠시 눕혀 드릴까요.”그 말에는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궁의 공기를 오래 들여다본 사람이 느끼는 묘한 경계가 배어 있었다.이수는 고개를 아주 느리게 저었다.“괜찮다. 오늘은… 잠이 쉽게 들 것 같지 않구나.”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눈동자 속에는 누군가를 계속 떠올리며 무너지는 조용한 물결이 있었다.그 시각, 도진은 군영 근처의 마른 흙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낙마로 다친 다리는 아직 묵직한 통증을 남기고 있었으나그보다 더 무겁게 그를 짓누른 것은 세자가 남긴 단 하나의 문장이었다.“빈을 향한 움직임이 있다.”그 문장은 단순한 정보도, 조언도 아니었다. 경고였다.그리고 그 경고가 향하는 대상은 하나였다.이수.도진은 숨을 내쉬었다.숨은 바람에 흘러가며 아주 작은 떨림을 남겼다.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나는 그녀를 얼마나 지킬 수 있는가.'지켜야 한다는 마음과 지키려 할수록 더 위험해지는 현실이서로의 목을 조르는 듯 얽히고 있었다.그는 자신조차 답을 내릴 수 없었다.궁에서는 더 빠르게 말들이 번졌다.“저하께서 빈마마 처소 근처를 다녀가셨다지?”“경께서도 그 부근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더라.”“그렇다면 둘 사이의 일이”“입 닫아라. 죽고 싶지 않으면.”그러나 그런 꾸지람조차 이야기꾼들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오히려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궁에서는 곧 ‘이미 일어난 것이다’라는 뜻이 되곤 했다.그리고 그 모든 소문은 자연스레 단 한 사람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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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내 목소리가 아니옵니다

밤공기는 더욱 차가워졌다.마당을 스치는 바람은 깊은 새벽의 숨을 품은 듯 무겁고어디선가 적막을 깨는 기척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그 기척은 이수의 처소에 가까워질수록마치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벽을 타고 스며드는 듯 냉기가 서려 있었다.상궁이 문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긴장으로 굳은 목소리를 냈다.“이 시각에… 누가”그러나 그 말은 문 바깥에서 들려온 낮지만 억눌린 숨소리에 묻혔다.이수는 눈을 좁히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문밖의 그림자가 조용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서두르지도 않고,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마치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기척만 남긴 채 주변을 맴도는 움직임.이수는 숨을 삼켰다.저하의 근위가 움직였다…도진이 낙마한 날 밤 이후로, 궁 안의 흐름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그리고 지금 들려오는 이 발소리악의를 숨기지 않은 것도, 드러내놓은 것도 아닌 묘하게 감춰진 긴장.이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상궁, 문 열지 말라. 아직…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았다.”상궁은 떨리는 손을 가만히 내려 문을 꼭 붙잡았다.마마를 향한 바람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다.그 생각이 상궁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다.문밖의 그림자는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조용히 사라졌다.그러나 기척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발끝의 소리만 멀어졌을 뿐,어둠 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궁을 훑고 있었다.이수는 조용히 숨을 내쉬고 창밖으로 스친 달빛을 바라보았다.'궁이 이렇게 조용한데도… 왜 마음속의 파문은 멈추질 않는가.'그녀의 손끝이 스르르 떨렸다.같은 시각, 궁 뒤편의 어둠 속 도진은 자신의 그림자조차 무겁게 느껴졌다.부상으로 쑤시는 다리를 억눌렀지만 그의 시선은 단 하나의 방향에 꽂혀 있었다.저하의 근위. 이리 늦은 시각에 움직이는 이유 빈마마의 처소 때문이다.도진은 벽을 타듯 조용히 움직이며 어둠 속에서 근위들의 동선을 살폈다.그들은 모두 물 흐르듯 움직이고 있었고 그 흐름의 중심은 명확히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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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고요 위에 선 칼끝

문밖에서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처소 안에는 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이수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잠깐의 일인 듯했지만, 손끝에는 아직도 긴장이 남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상궁이 조심스레 물었다.“마마… 방금 그 목소리, 분명 이 몸의 목소리를 흉내낸 것이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다. 그래서 더 두렵지.”누군가가 상궁의 얼굴과 목소리까지 흉내낼 정도라면,단순한 호기심이나 장난이 아니었다.그건 ‘빈의 처소’라는 공간 자체를 조심스럽게 두드려보는 첫 번째 시험에 가까웠다.“마마께서 직접 문을 여셨더라면…”상궁의 목소리가 떨렸다.“무슨 일을 당하셨을지 알 수 없사옵니다.”“그래서 문을 열지 않은 것이다.”이수는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게 말했다.“내가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사실이 아니다.이 궁은… 눈으로 본 것마저도 사실이 아닐 때가 많지만.”그 말에는 스스로를 향한 쓴웃음이 섞여 있었다.그때, 문 밖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마마, 도진이옵니다.”방 안의 공기가 순간 움직였다.상궁이 먼저 이수를 돌아봤다.이수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가 곧 다시 가라앉았다.“열어라.”문이 서서히 열렸다.달빛이 복도 끝에서부터 길게 미끄러져 들어왔고, 그 빛의 끝에 도진이 서 있었다.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다만 어깨에 걸친 옷자락이 약간 흐트러져 있었고,부상 탓인지 한쪽 다리를 디디는 각도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하지만 이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의 표정이었다.조용하지만, 날이 서 있었다.“마마.”그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상궁이 조심스레 물러서며 자리를 비켰다.이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밖이… 어수선한가 보구나.”“예, 마마.”도진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방금 이곳으로 누군가 접근하였습니다.상궁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문을 열라 했사옵니다.”“나도 들었다.”이수는 담담하게 말했다.“문을 열지 않은 건, 문 밖의 기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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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같은 곳을 향하고 있사옵니다

잠시 후, 도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마마, 오늘 이후로는 이곳 출입을 되도록 삼가하겠사옵니다.”이수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변했다.“…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예.”그는 숨을 삼켰다.“제가 머무는 자리에 소문이 따라 붙습니다. 제가 지키려 하는 자에게 칼이 먼저 겨누어집니다.”그 말은 그의 오래된 경험에서 나온 결론 같았다.이수는 그를 바라보았다.“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해 멀어지겠다는 것입니까.”“예, 마마.”그 대답은 너무도 선명했다.그러나 이수의 가슴 어딘가에서는 무언가가 느리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도진..”그녀가 먼저 그의 호칭을 불렀다.언제부턴가 그 호칭은 그들 사이의 모든 감정 위에 놓여간신히 선을 유지하게 하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정말로… 멀어지는 것이 지키는 길이라 믿으십니까.”그 질문에는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그 망설임은 도진의 가슴을 정면으로 찔렀다.그는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것이 늘 옳은 길도 아니었다.“믿고 싶지 않습니다, 마마.”그가 낮게 말했다.“허나… 지금 이 궁은 제 마음보다, 마마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곳이옵니다.”“그럼 나의 안위와, 경의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입니까.”그 질문은 너무도 조용했지만,이 밤 그 어떤 칼보다 더 날카로웠다.도진의 답은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그렇지 않사옵니다.”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마마의 안위와 제 마음은… 언젠가부터 같은 곳을 향하고 있사옵니다. 그래서, 더 위험해졌사옵니다.”그 말은 그의 내면을 거의 다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이수의 목 안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숨이 걸렸다.언젠가부터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그 고백은 직접적인 사랑의 언어보다 훨씬 더 무겁고 잔인했다.“그러니,”도진이 말을 이었다.“저하의 마음이 더 굽기도 전에, 궁의 칼끝이 더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그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제가 먼저 멀어져야 하옵니다.”이수의 손이 옷자락 안쪽에서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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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가장 쉽게 베이는 칼

북소리가 멎은 뒤에도, 궁은 한동안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이수의 처소에는 다시 등불이 켜져 있었으나불빛은 낮게 깎인 듯 조심스러웠다.상궁이 방 안을 한 바퀴 돌아 문단속을 확인한 뒤, 조용히 이수 쪽으로 다가왔다.“마마… 이 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몸은 더 상하신 곳 없으시옵니까.”이수는 작은 웃음을 흉내 냈다.“몸이야 온전하다. 오늘 다친 것은… 마음이겠지.”그 말에는 스스로를 향한 자조가 얇게 깔려 있었다.상궁은 감히 그 말을 이어받지 못하고,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아까, 도진 경께서 물러나신 뒤 복도 쪽에 근위들의 기척이 잠시 더 머물렀사옵니다.”“저하의 사람들인가.”“그리 보였사옵니다. 빈의 처소를 세는 듯한 발걸음이었사옵니다.들락날락이 아니라… ‘여기를 기억한다’는 식으로.”이수는 눈을 감았다 떴다.그 한 번의 동작에 많은 생각이 오갔다.“궁이… 이제 그대를 지켜보겠구나.”그녀가 말한 ‘그대’가 도진인지, 자신인지 상궁은 알 수 없었다.“마마.”상궁이 낮게 물었다.“마마께서는… 이제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어찌한다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있던가.”이수는 손가락으로 이불 자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오늘 밤, 도진 경은 멀어지겠다고 했다. 나는 따르겠다 했고...”상궁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정녕… 그리 하실 생각이십니까, 마마.”“그래야 한다.”이수는 단호하게 말했다.하지만 그 단호함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방패에 불과하다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이 궁에서 사람이 가까워지는 순간…언제나 누군가는 무너져 내렸다.”말끝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나의 가문은… 언제든지 빌미 하나로 무너질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눈앞에서 보며 살아왔다.”상궁은 입술을 깨물었다.위로할 말이 없었다.“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아니라, 내가 감당해야 할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다.”그녀는 곧게 앉은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그 자세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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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은 원래 그의 곁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빈은 그의 반려로서, 도진은 그의 검으로서.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두 존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엇나가기 시작했다.언젠가부터, 나보다 더 서로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그는 그 생각에서 도망치려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었다.“저하.”문 밖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대비마마께서 잠시 뵙고 싶어 하시옵니다.”현의 눈매가 아주 얇게 변했다.“…이 밤에.”“예, 저하. 궁 안에 말들이 오르내려 대비마마께서 염려가 크시옵니다.”현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알겠다. 준비하라.”그는 겉옷을 걸치며 창밖을 한번 바라보았다.달은 구름 뒤로 가려졌고, 궁의 지붕들만 윤곽만 남아 어둑했다.'대비가 움직인다는 것은… 이제 이 일에 ‘궁 전체의 눈’이 달라붙겠다는 뜻이겠지.'현은 조용히 걸음을 내디뎠다.그의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다.다만, 이번에 나아가는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누가 쓰러지게 만들지 아직 본인조차 모를 뿐이었다.등불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불빛 아래를 지나가는 현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단정했다.“저하.”대비의 상궁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대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대비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고, 눈매에는 피곤이 어려 있었지만 그 눈동자는 여전히 날카롭고 맑았다.“저하.”대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밤이 깊었는데, 발걸음을 재촉하게 하였구나.”“아니옵니다, 대비마마.”현이 조심스럽게 예를 올렸다.“궁이 어수선하니 마마께서 염려하시는 것이 당연하옵니다.”대비는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그래, 궁이 조용할 날이 없구나.”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오늘… 네 빈의 처소 앞에서 소란스러운 말이 오갔다 들었다.”현의 손끝이 아주 약하게 움찔했다.“아룁니다. 근위에게 보고를 받았사옵니다.”“네 생각은 어떠하냐.”대비의 질문은 간단했다.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몇 겹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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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그림자가 먼저 흔들리는 밤

밤바람이 길게 스며들었다.궁은 고요했으나, 그 고요가 마치 숨을 삼키는 듯했다.하루 사이에 일어난 여러 겹의 파문이 아직도 가라앉지 못한 채 어딘가 떠다니는 느낌이었다.도진이 처소를 떠나고 문이 닫힌 뒤, 방 안은 한층 더 조용해졌다.촛불의 불꽃조차 조금 낮게 흔들렸다.이수는 자리를 오래 떠나지 못했다.그의 뒷모습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가슴 아래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천천히 번지는 듯했다.상궁이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마… 경께서는, 아마도… 마마를 염려하여 그런 말씀을 하신 듯하옵니다.”이수는 그 말에 눈을 내리뜬 채 조용히 찻잔을 만졌다.차는 이미 식어 있었고, 잔 표면에는 미세한 김조차 남지 않았다.“알고 있다.”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그가 왜 멀어지려 하는지…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그러나 부드러움 아래에는 날카로운 슬픔이 움직이고 있었다.“허나…”이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마음이 함께 있는 사람이 먼저 물러나는 것을 보는 일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구나.”상궁은 말을 잇지 못했다.위로도, 조언도 할 수 없는 종류의 슬픔이었다.말을 더했다가는 이수의 마음속에 억눌린 감정들이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묵직함이 있었다.“경에 대한 소문이 더 번지겠지.”이수가 조용히 말했다.“오늘 있었던 한 번의 소동만으로도 궁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곳이다.”상궁은 눈을 내리깔았다.“마마의 처소에 누군가 접근했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은 온갖 모양의 추측을 만들어낼 것이옵니다.애초에, 궁은 허심탄회한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곳이니…”“그래.”이수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니 그가 물러나겠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겠지.”하지만 그 미소는 촛불 아래 금세 흐려졌다.그 시각, 궁 바깥 정전 복도. 돌아가는 길에 도진은 한동안 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다.방금 전 이수가 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한 줄씩 천천히 되뇌어졌다.'정말로 멀어지는 것이 지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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