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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천년의 기억: Chapter 91 - Chapter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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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그 낮고 고른 음성 아래에는

궁문 밖에서 울리던 북은 점점 더 묵직한 울림으로 바뀌어궁의 바람과 기척을 모두 끌어당기고 있었다.기척이 모여들수록 공기는 더 얇아졌고, 누구도 깊게 숨을 들이쉬지 못했다.마치 숨을 크게 쉬는 것조차 궁의 예를 흐리는 일이 되는 듯이.전각을 향해 걷던 이수도 자신의 걸음이 묘하게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발걸음이 가벼운 건 설렘 때문이 아니라 몸이 ‘준비’라는 긴장에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었다.궁에서의 긴장은 언제나 심장을 바닥으로 끌어당기며 시작되었다.궁녀들이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경계가 섞여 있었지만이수의 얼굴은 마치 안개 위에 얹힌 새벽의 그림자처럼 단정하고 흔들림이 없었다.그러나 그 단정함 아래에는 아무도 모르는 파문이 아주 가늘게 일렁이고 있었다.‘오늘…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겠지.’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녀는 입 밖에 낼 수 없었다.아니, 낼 필요도 없었다.말이라는 형태가 붙는 순간 그 마음은 더 위험해지니까.궁은 숨조차도 기록되는 곳이기에 ‘마음의 방향’조차 드러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궁문 너머에서는 무사들의 발걸음이 큰 물결처럼 몰려오고 있었다.정제된 발소리는 어지럽게 뛰는 심장의 박동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모두가 숨을 삼킨 채 그 소리를 들었다.군영에서는 그 소리를 누구보다 또렷하게 듣는 사람이 있었다.도진.그는 검집을 고쳐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세자의 행렬이 들어오는 길을 향해 촉을 세운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지만가슴 한가운데에서는 말할 수 없는 무게가 차올랐다.석윤이 그의 곁에 멈춰 섰다.“경. 곧 행렬이 도착한다 하옵니다. 대비전에서도 방금 마지막 전갈이 내려왔다 하오니경께서는 오늘… 그 어떤 표정도 드러내시면 아니 된다 하였습니다.”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이 필요 없었다.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오늘은 검을 드는 일보다 가슴을 다스리는 일이 더 어려운 날이라는 것을.석윤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궁이… 빈마마의 일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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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흔들림을 숨긴 얼굴들 사이로

세자는 전각 앞에 멈춰 서 있었다.그의 서늘한 그림자가 햇빛을 가르며 내려앉자 궁의 숨결이 눈에 띄게 고요해졌다.무엇 하나 소리를 내서는 안 될 것처럼, 바람조차도 조심스레 움직이는 듯했다.이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무탈하시옵니까, 저하.”그 말은 정확했고, 절제되어 있었다.하지만 정확함과 절제만으로는 감춰지지 않는 떨림이 있었다.아주 깊고, 오래된 상흔처럼 그녀의 목소리 끝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결이 남아 있었다.세자는 그 결을 놓치지 않았다.현의 시선이 이수의 얼굴을 잠시 머물렀다.그 머묾은 궁중 예를 지키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그 안에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정적이 있었다.“예로다.”현은 조용히 답했다.말투는 예우를 갖추었으나, 눈빛에는 읽히지 않는 무언가가 잠시 스쳤다.그 미세한 순간이 이수의 심장을 한 번 깊게 파문치게 했다.‘왜… 어째서 그 눈빛이 이렇게 낯설지 않은가.’현은 이어서 말을 붙였다.“궁은 그대가 궐무에 빈틈을 남기지 않았다 하였다. 잘 지낸 듯 하여 안심입니다.”칭찬이었지만 그 말 속에는 어딘가 짙은 의미가 섞여 있었다.칭찬과 확인 사이, 예우와 경계 사이의 어중간한 결.이수는 그 결을 알아차렸으나 따라 묻지 않았다.“…저하께서 부재하신 동안 궁이 어지러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소첩의 도리였사옵니다.”말은 완벽했다.그러나 이수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한순간 아주 부드러운 흔들림이 그 말의 끝자락에 닿아 있었다.현은 그 흔들림을 느낀 듯 시선을 잠시 고정시켰다.그러나 이내 아무 일 없듯 걸음을 옮겼다.“전각에서 다시 보도록 합시다.”세자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행렬이 뒤따랐고, 궁 안의 모든 시선이 그가 지나가는 길에 붙잡혔다.그러나 이수의 시선은 그 길을 끝까지 쫓지 못했다.그녀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다른 곳에서 걸려버렸기 때문이다.도진.그는 군영의 무사들과 함께 서 있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다른 이들과 선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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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충분히 보았다는 서늘한 한 마디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궁의 기운은 낮과는 전혀 다른 결을 띠기 시작했다.햇빛이 사라지면 늘 찾아오던 고요였지만오늘의 고요는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곳곳에서 조용히 당겨지고 있는 듯한 긴장으로 촉수가 세워져 있었다.대비전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수는 걸음 한 번마다 심장에 작은 돌이 얹히는 것 같은 묵직함을 느꼈다.발걸음은 단정했고, 호흡은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이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더 자극하고 있는 듯했다.궁녀가 뒤에서 속삭였다.“마마… 대비마마의 기분이 오늘… 사뭇 다르다 하옵니다.”그 말에 이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러나 속으로는 파문 하나가 천천히 깊어져 갔다.‘오늘… 나의 작은 떨림 하나조차 그분들에게는 시험이 될 것이다.’그녀는 손끝에 힘을 담아 소매 속으로 조용히 손을 모았다.이 검은 심지가 꺼지지 않도록 마음의 불꽃을 붙잡기 위한 몸짓이었다.대비전 안은 낮과 달리 더 깊고, 탁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향 냄새도, 불빛도, 전각의 숨결도 오늘만큼은 모두 이수를 향해 색을 바꾸고 있는 듯했다.대비는 천천히 차를 내려놓았다.“빈이 왔구나. 자리로 들라.”이수는 예를 갖추고 앉았다.대비의 눈빛은 어떠한 온기도 담지 않은 채 이수의 얼굴을 곧게 바라보았다.“오늘 저하를 배향할 때 그 얼굴이… 대단히 평온해 보이더구나.”말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그 속뜻은 너무도 뚜렷했다.평온을 유지한 자에게 던지는 말은 그 평온을 의심한다는 뜻이었으니까.“빈. 오늘 궁의 모든 시선이 그대의 걸음과 표정을 살핀다는 것을 몰라서 그리 태연했겠느냐.”이수는 짧은 호흡을 삼켰다.“…태연한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도리를 잊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을 뿐이옵니다.”대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매서운 선이었다.“마음이란… 겉으로 다 잡을 수 있을 때는 속이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그 말은 이수의 가슴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그러나 그녀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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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밤이 깊을수록 드러나는 그림자의 결

행렬이 지나가고, 궁의 그림자가 길어지고,저녁 바람이 시들어가는 시간이었지만그의 가슴속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석윤이 뒤에서 다가왔다.“경… 저하께서 환궁하신 뒤의 분위기가심상치 않사옵니다.”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대답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심상치 않은 이유는 궁의 정세 때문만이 아니었다.석윤은 잠시 머뭇거렸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빈마마의 처소로상궁들이 여러 차례 들락거렸다 하옵니다.대비전에서도 계속 사람을 붙였다 하오니…”도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그러나 그는 그 굳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검집을 천천히 쓸어내렸다.“오늘 하루는 모두의 시선이… 너무 많이 움직였구나.”그 말은 누구에게 한 말인지조차 불명확했다.석윤에게 한 말이면서도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고, 또한 꽤 먼 곳을 향해 날아가는 말 같았다.가야 할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석윤이 다시 말했다.“경. 오늘… 표정을 숨기신 것, 정말… 어려우셨지요.”도진은 잠시 멈췄다.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숨기지요. 숨길 수 없는 것들이 드러나기 전에.”그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 걸음은 군영에서의 단단함을 지키려 했지만그 안쪽에서는 오늘 하루 누적된 파문이 마침내 형태를 가지려는 듯한 묵직한 울림을 품고 있었다.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궁의 등불이 하나둘 켜질 때궁 전체에는 서로 다른 세 사람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결을 만들며 흘러가고 있었다.이수의 흔들림,세자의 이상함,도진의 가라앉지 않는 파문.그 결들은 아직 서로 닿지 않았지만 이미 같은 방향으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그리고, 그 흐름은 머지않아 궁의 밤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저녁 무렵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궁은 전혀 다른 얼굴로 변했다.낮에는 규율과 예법으로 움직이던 공간이 밤이 되자 숨겨진 속내와 균열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전각 사이사이에 켜진 등불은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밝아진 것이 아니라오히려 어둠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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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달이 너무 밝아서 잠들지 못하는 밤

상궁은 고개를 숙였다.대비는 계속해서 낮게 말했다.“빈은… 마음을 숨기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숨기는 자는…더 쉽게 흔들리기도 하지.”그 말에는 경계와 의심,그리고, 일종의 기묘한 기대감까지 섞여 있었다.“그대들, 기록하라. 저하께서 빈의 얼굴을 보았을 때의 표정도…빈이 그 표정을 받았을 때의 눈빛도.”상궁들이 일제히 대답했다.이날 밤 궁은 이미 또 하나의 기록을 쌓고 있었다.군영의 등불 아래 도진은 검을 닦고 있었다.그의 손놀림은 평소보다 조금 더 조용하고 조금 더 신중했다.하지만, 검을 아무리 닦아도 가슴속의 응어리는 전혀 닦이지 않았다.석윤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경… 정말 괜찮으십니까.”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검집을 닫는 손가락만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석윤은 한 걸음 더 다가섰다.“오늘… 저하께서 빈마마를 오래 보셨다는 말이 궁에 파다하옵니다.”도진의 눈빛이 아주 잠시 멈췄다.그러나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리 말이 돌아다닌다면 궁이 곧… 어지러워지겠지.”그 말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감정을 삼킨 목소리였다.석윤은 그 말에서 묻어난 깊은 결을 자신도 모르게 읽어버렸고 다시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그러나 물러서기 전에 그는 한 가지를 더 건넸다.“…경. 오늘 빈마마의 발걸음이 자꾸 전각을 향하더이다.”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말이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감정인지막아야 할 위험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빈마마가… 오늘 하루 얼마나 무거웠을까.’그는 그 생각을 떨쳐내려 했으나 떨쳐내려 할수록 더 깊이 박혀들었다.그리고, 그 깊이 박힌 생각이 그의 마음 안에서 조용한 결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그 결은 언젠가 형태를 가질 것이다.밤이 깊어지자 세자는 아주 잠시 혼자만 남겨진 전각에서 등불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왜인지 오늘 하루 중 단 한 순간만이 계속해서 마음에 남아 있었다.빈과 눈을 마주쳤던 그 순간.특별한 말이 오간 것도 아니었다.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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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나는 흔들리면 안 된다

그 침묵이, 그저 침묵이었음에도이수의 마음을 더 많이 흔들어놓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두려웠다.궁녀가 물었다.“마마… 저하께서… 오늘 빈마마를 유독 오래 보셨다는 말이 궁 전체에… 널리 번지기 시작했사옵니다.”이수는 움직이지 않았다.그러나 그 말 한 줄이 가느다란 실처럼 마음을 당겼다.“…그 말이… 어찌하여 번지는 것이더냐.”“상궁들이… 대비전에서 오늘 마마의 얼굴을 여러 번 이야기하였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숙였다.“…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도 아닌데.”그러나 잘못의 문제가 아니었다.궁은 언제나 사람의 ‘표정’을 먼저 문제 삼는 곳이었으니까.이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야겠구나.”그녀의 손끝이 자기도 모르게 떨렸다.그 시각, 전각의 깊은 방에서 세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등불 아래에서 잔잔하게 떨리는 불빛이 그의 얼굴과 손등을 금빛처럼 비추고 있었다.현은 책을 펼쳐놓고 있었으나 글자는 단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은 단 하나의 장면뿐이었다.세자빈.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숙였을 때 아주 짧게 드리운 그 표정.그 표정은 분명 예우와 겸손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궁중의 얼굴이었다.그런데 왜 그 표정이 마음속에 남는 것일까.왜 ‘익숙하다’는 말을 스스로도 모르게 떠올린 것일까.현은 책을 덮었다.덮는 소리가 밤의 고요 속에서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도대체… 무엇이 이리 어지러운가.”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전각 너머 달빛이 고요한데 그 달빛 아래에서 자신의 마음만 흐트러지고 있었다.그 흐트러짐은 무엇 때문인지 끝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그러나, 그 감정이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현 스스로 알고 있었다.군영에서는 도진이 아직 잠들지 않고 있었다.그는 검을 벽에 걸어두고 천천히 바람이 드는 쪽을 향해 섰다.밤바람은 차갑고 얇았다.그 바람에 스치는 풀잎 소리조차 그의 귀에는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석윤이 조심스레 다가왔다.“경. 아직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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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새벽을 흔드는 발걸음

새벽이 궁에 스며들기 전의 가장 깊은 시간. 어둠은 아직 물러나지 않았고달빛은 방의 모퉁이를 얇게 적시고 있었다.온 세상이 잠들어 있는 듯했지만 궁은 잠든 적이 없는 공간이었다.그리고, 오늘 새벽의 궁은 유난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이수는 끝내 잠들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창호지 너머로 바람이 스치면 그 바람 끝에서누군가의 마음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그녀의 손끝은 언제부턴가 느린 떨림을 품고 있었다.‘오늘… 무엇을 보게 하려는 것일까.’대비전에서의 말들, 세자의 눈빛,궁 안에서 파도처럼 번져가는 소문들.이 모든 것이 어떤 형태로 모여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지 이수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궁녀가 다가왔다.새벽빛조차 닿지 않은 얼굴이었다.“마마… 방금 대비전에서 전갈이 내려왔사옵니다.”이수의 속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전갈이라.”궁녀는 작은 종이를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이른 새벽에 내려온 전갈은 기본적인 문안이 아니었다.대체로 시험, 확인, 또는 의심의 명이었다.궁녀가 조심스레 펼쳐 읽었다.“빈은… 새벽이 밝기 전 후원에 들라.이르기를… 궁의 새벽을 보는 눈이 누구를 향하는지… 내가 확인하고자 함이니.…라고 하였사옵니다.”이수의 가슴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대비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자에게 항상 새벽 시험을 내렸다.새벽은 사람의 가장 속된 감정이 드러나는 시간.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이는 시간.대비가 보고 싶어 했던 것은 이수의 ‘새벽’이었다.이수는 입술을 다물었다.“…준비하겠다.”궁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벽 시험은 궁 안에서 가장 잔혹한 시험이라는 것을.같은 시각 전각 깊은 곳에서 세자는 잠들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그는 책도 펼치지 않았고 등불도 그의 얼굴을 제 역할로 비추지 못하고 있었다.현은 한 가지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빈의 눈빛은… 왜 이토록 낯설지 않지 않았다.’그 낯섦은 기억의 조각이 아니라 감정의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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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달이 물 위에서 어떻게 흔들리는지

새벽의 첫 기척이 궁에 스미기 직전, 후원으로 이어지는 길은 안개로 잠식되어 있었다.등불이 두어 개 놓여 있었지만그 등불조차 안개를 뚫어내지 못해 빛은 고요한 물결처럼 허공에 퍼지기만 했다.이수의 걸음은 그 안개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그녀는 궁녀 둘을 데리고 있었지만 혼자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새벽의 시험은 언제나 당사자만을 겨냥한 것이기에 동행은 침묵의 그림자에 불과했다.이후 걸음을 옮길수록 발밑에서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새벽과 안개, 그리고 시험이라는 단어가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며 이수의 가슴 안에 조용한 떨림을 만들었다.‘오늘… 대비마마께서 보고자 하신 것은 내 얼굴이 아니라… 내 마음이겠지.’그러나 마음이란 감출수록 어딘가에서 들리는 법.그녀는 소매 끝을 잡으며 마음을 다독이는 동작으로 떨림을 가라앉히려 했다.“마마… 여기서 더 가면 후원입니다.”궁녀의 목소리는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 아주 낮게 울렸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말거라. 새벽은… 언제나 나에게 가장 냉정한 스승이었으니.”그 순간 후원 입구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천천히 나타났다.대비였다.그녀의 곁에는 기록을 맡은 상궁과 몇몇의 내관들이 조용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이수는 멈춰 서서 예를 올렸다.“대비마마… 분부하신 뜻을 받들어 찾아뵈었사옵니다.”대비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천천히 이수를 바라보았다.마치 이 새벽이 허락한 모든 감정을 그녀의 얼굴에서 읽어내려는 듯한 눈빛으로.그리고.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빈.”그 한 마디는 새벽 안개를 가를 만큼 날카로웠다.“사람의 진심은 어둠과 빛 사이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법이지. 특히… 오늘 같은 새벽에는.”그 말은 단순한 경구가 아니라 이 시험의 목적을 정확히 찌르는 칼날이었다.대비는 뒤돌아 안개 속의 후원을 가리켰다.“저기… 호수의 끝에 서 보아라. 달이 물 위에서 어떻게 흔들리는지… 내가 보고 싶구나.”달의 흔들림을 본다는 말.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이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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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안개가 지나간 자리에서

새벽의 물이 막 걷히기 시작할 무렵,후원에 드리워졌던 안개는 어느새 사라지고 대비의 발걸음만이 조용히 정전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시험의 끝은 언제나 말보다 눈빛으로 전해지는 법,이수는 대비가 남긴 마지막 시선이 아직도 어깨 위에 얹혀 있는 듯한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처소로 돌아온 뒤, 문이 닫히는 소리는 평소와 다름없는 얇은 울림이었지만그 울림이 가슴 속에서 미묘하게 크게 번졌다.새벽의 물안개가 사라져도 마음의 흔들림은 쉽게 걷히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궁녀가 따뜻한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마마… 조금이라도 긴장이 풀리시길 바라옵니다.”이수는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말로는 답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그녀가 감당해온 모든 흔들림을 보여주는 듯했다.차잔을 둔 손끝이 아주 조금 떨리는 것을 궁녀는 보았으나, 감히 입에 올리지는 못했다.이수는 손바닥을 찻잔에 가까이 대며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오늘… 대비마마께서 보고자 하신 건 내 대답이 아니라, 흔들리는 순간이었겠지.’그 생각을 거두려 애썼으나달빛 아래에서 흔들리던 자신의 그림자가 자꾸만 떠올랐다.무엇보다도‘혹… 그 바깥에서 누군가 보고 있진 않았을까.’그녀는 깊이 떨리는 마음을 다잡아 번지는 생각을 접어두려 했다.하지만 마음이란 다잡을수록 더 깊이 번지는 법이었다.같은 시간, 군영의 울타리 너머에는 아직도 새벽 냉기가 남아 있었다.도진은 방금 전 상궁이 전하고 간 말을 곱씹듯 되뇌고 있었다.강무를 이어가라는 전갈.검을 잡은 채 밤을 새우라는 명령.그 명령이 무슨 의미인지 그는 바로 깨달았다.빈의 처소 근처 그는 며칠간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그 사실은 검끝보다 더 깊고 빠르게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그는 검을 뽑아 한쪽으로 기울여 들었다.날 위로 비친 자신의 얼굴은 늘 그렇듯 차가웠지만눈빛만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슬픔처럼 흔들렸다.‘마마께서… 홀로 새벽을 견디셨다.’그 생각이 도리를 넘어 감정으로 번져가는 것이 도진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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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달이 흔들린 것이온데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은 바람도, 기척도 허락하지 않는 무게를 품고 있었다.중전의 행차는 원래 소리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궁인은 중전의 발소리만 들어도그날 궁이 어떤 색으로 물들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그 존재감은 크고 우러르는 것이었다.하지만 오늘의 발걸음은 우러름이 아니라 의심과 조사의 무게를 머금고 있었다.궁녀들은 숨소리조차 낮추며 이수의 뒤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떨고 있었다.그들의 떨림은 이수의 등을 향해 스며들었고그 떨림이 오히려 이수를 더 견고하게 만들고 있었다.문이 천천히 열렸다.촛불이 흔들리며 중전의 옷자락을 어둠 속에서 떠올렸다.비단을 스치는 소리는 꽉 닫힌 방 안에서 마치 검의 면을 긋는 소리처럼 날카롭게 퍼졌다.“빈.”중전의 목소리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그러나 말끝마다 가려진 칼날이 살짝 비치는 듯한 기운이 있었다.이수는 자세를 낮춰 예를 올렸다."중전마마… 어인 일이시옵니까.”그 말은 허위가 아니었다.중전이 오리라 그녀는 새벽의 시험이 끝난 순간부터 예감하고 있었다.중전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이수를 한 번, 아주 길게 바라보았다.그 눈길은 사람을 읽으려는 것이 아니라 흐트러짐이 있는지를 찾아내려는 듯했다.“새벽에… 대비마마를 뵈었다 들었다.”중전의 목소리는 평온해 보였지만 은근한 경계가 꿸 듯이 스며 있었다.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예, 마마. 분부하신 대로 찾아뵈었사옵니다.”중전의 손끝이 천천히 공중을 스쳤다.허공을 스치는 손짓 하나에도 그녀의 권력이 담겨 있는 듯했다.“빈이 새벽 물가에 섰다더구나. 달빛 아래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고도 하고.”그 말은 이미 소문이 궁 전체에 퍼졌다는 뜻이었다.소문은 언제나 사실보다 빠르고, 사실보다 깊은 상처를 만든다.이수는 잠시 침묵했다.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조차 중전의 귀에 닿을까 조심스러웠다.“달이 흔들린 것이온데… 소첩의 마음이라 생각하셨는지요.”그 말은 세련되었지만 순진하지 않은 답이었다.중전의 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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