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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천년의 기억: Chapter 101 - Chapter 110

128 Chapters

101. 달 아래 모여드는 발걸음들

중전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이수의 처소 안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문이 닫힌 뒤에도, 중전의 향이 남긴 잔향이 방 안에 얇게 깔려 있었다.궁녀들은 감히 숨을 크게 쉬지 못했고,이수조차 손끝을 조심스레 모은 채 생각과 숨을 정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숨은 정리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다.이수의 가슴 안에는 달빛 아래에서 흔들렸던 감정이 아직도 파문처럼 맴돌고 있었다.중전의 질문은 예리했다.답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대비와 마찬가지로이수의 감정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는 시선이었다.‘나는… 흔들렸던 걸까.’그녀는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그러나 묻는 순간, 그 흔들림이 더 또렷해지는 것이 두려워 끝내 입술을 닫았다.한편, 세자는 빈의 처소와 이어진 회랑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내관들이 뒤에서 조심스레 거리를 두고 따랐다.세자의 발걸음은 분노도 조급함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결속감이 섞인 걸음이었다.그의 옷자락이 바닥을 스칠 때마다 촛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떨림은 세자의 마음에도 그대로 반사되는 듯했다.내관이 입을 열었다.“저하… 중전마마께서 이미 빈마마의 처소를 다녀가셨다 하옵니다.”세자는 가볍게 눈을 내리뜨며 대답했다.“…중전마마께서 그러하셨다 하느냐.”그의 어투는 부드러웠으나 말끝에 아주 가벼운 서늘함이 피어올랐다.그 서늘함은 이수를 둘러싼 일들의 중심으로 세자의 시선이 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내관은 더 이상의 말을 삼갔다.세자가 빈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는 그 어떤 의미도 경솔히 덧붙일 수 없었다.이수의 처소에서는 중전이 떠난 뒤의 긴장이 아직 물러가지 않고 남아 있었다.궁녀 하나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마마… 물을 갈아드릴까요?”이수는 고개만 천천히 저었다.“…괜찮다. 조금만… 조용히 두어라.”그녀는 자리에 앉아 촛불의 기울어진 불꽃을 바라보았다.불빛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그 흔들림 속에서 오히려 깊은 결심이 스며나오고 있었다.‘어떠한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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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마음속의 안개

도진이 다쳤다는 말이 처소 안에 닿는 순간, 이수의 손끝이 떨렸다.떨림은 한순간이었으나 그 짧은 순간이 이수 자신에게조차 낯설게 느껴질 만큼 깊고 또렷했다.궁녀들은 두려움과 놀람 사이에서 눈치도 보지 못한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그러나 가장 침착해 보였던 사람은 오히려 세자였다.세자의 눈빛은 비록 크게 흔들리진 않았지만그 속 어딘가에서 작은 균열이 생겨 빛이 스며 나오는 듯한 깊은 결을 띠고 있었다.“…도진이 다쳤다 하였느냐.”세자의 음성은 낮았으나 내관의 어깨는 그 울림에 움찔했다.“예, 저하. 강무 도중 말에서 떨어지셨다 하옵니다. 부상이… 심하다고…”말꼬리가 떨렸다.단순한 말 실수나 사고라고 보기엔군영에서 일어난 일의 무게가 설명 없이도 느껴졌다.세자는 아주 미세하게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곧,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군영으로 가겠다. 길을 준비하라.”내관이 고개 숙여 물러나자 세자는 이수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빈.”짧은 호명이었지만 그 안에는 설명되지 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정치도, 의무도 아닌 다른 것이.이수는 자세를 낮추며 대답했다.“저하… 경께서 부상당하였다 하니 속히 가보시는 것이 옳사옵니다.”말의 형식은 빈의 예우였으나그 어투에는 놀림이나 동요를 억누르는 긴장이 있었다.세자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달빛도, 촛불도 아닌 오직 그의 시선만이 방 안의 온기를 바꿔놓았다.“…빈도… 놀라셨겠습니다.”말은 단정적이지 않았지만 알고 묻는 말이었다.이수는 잠시 멈칫했다.그러나 바로 고개를 숙였다.“도진 경은… 덕망 높은 분이옵니다. 다치셨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그 말은 반은 사실이고 반은 은폐였다.놀라움은 맞았지만 그 놀라움이 궁녀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종류였기 때문이다.세자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그러고는 천천히 돌아섰다.“빈은… 이만 쉬시지요 이 일로 마음까지 흔들릴 필요는 없습니다.”그 말은 도진의 부상이 이수에게 영향을 주어선 안 된다는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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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말 없는 두 남자의 그림자

부상으로 누운 도진의 방문이 천천히 닫히자, 남겨진 공기가 묘하게 흔들렸다.안쪽엔 짙은 약향과, 땀에 젖은 천의 냄새와, 싸늘하게 가라앉은 피비린 내의 잔향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현은 침상 옆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어둠에 잠긴 방은 조용했고, 그 적막만이 두 사람 사이의 오래된 공백을 대신했다.“도진… 이런 모습으로 누울 줄은 몰랐다.”그 말은 나직했으나, 목 안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것처럼 거칠었다.도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아직 움직이기 힘들었으나, 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몸이 곧게 굳는 걸 느꼈다.“저하… 놀라셨다면 송구하옵니다.”도진은 상투적인 말로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그의 어깨에는 여전히 통증이 남아 있었다.낙마가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상처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상처는 따로 있었다.현의 눈동자에 비친 ‘알 수 없는 것’의 그림자였다.현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도진의 몸을 살폈다.“기력이 돌아오면 다시 근위무사들과의 점검을 재개하라. 궁이… 요즘 자꾸 어수선하다.”그 말에 도진은 아주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명령 자체는 평범했지만, 말 끝에 스친 단어 어수선하다.도진은 그 기운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궁 안에서 자신이 모르는 흐름이 움직이고 있었다.“하루 빨리 회복하여 전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현은 대답을 듣고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오히려, 도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그 시선이 닿을 때마다 방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경은 언제나 ‘무탈하다’ 말만 하더구나.”이 문장은 이상하게 길게 여운을 남겼다.무탈하다고 말하지 않았던 날이 있었던가?그제야 도진은 깨달았다.요즘 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다.마치 뭔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현은 더 머물지 않았다.그러나 방문을 나서는 순간, 짧은 문장이 남았다.“경은… 빈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조심하라.”도진의 손이 이불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왜… 세자빈 마마의 이름이 여기서 나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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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입에 담기 어려운 말들

이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어 올렸다.천천히 손가락을 펴고 쥐기를 반복했다.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손목을 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어디론가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 때마다,그녀는 스스로를 다잡듯 작은 숨을 내쉬었다.'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야 할 사람인데.'세자빈이 된다는 것은 궁 안의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하물며 세자의 곁을 지키는 호위무사에게이상한 감정을 품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이치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이수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문 앞에서 아주 옅은 속삭임이 들려왔다.“…요사이 대비마마께서 유난히 빈마마 처소를 자주 물으시지 않으시냐.”“쉿. 입을 조심하라고 하였거늘…”궁녀들의 낮은 대화는 문틀에 부딪혀 희미하게 잘려 들어왔다.이수는 귀를 막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한마디 한마디가, 지금 자신을 둘러싼 공기의 결을 알려주는 것 같아서.잠시 뒤, 상궁의 목소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입 다물라 하지 않았더냐. 빈마마께 들으시면 어찌하려고 그리 떠들고 있느냐.”궁녀들이 허겁지겁 사라지는 기척이 났다.이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잠시 후, 상궁이 안으로 들었다.“마마, 불편하신 곳은 없사옵니까.”“괜찮다. 방 안 기척이… 오늘따라 더 시끄럽구나.”이수의 말에, 상궁은 순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그러나 이내 낮은 자세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용서하시옵소서. 다들 요사이 조심성이 없어져… 말을 삼가지 못하였사옵니다.”“무슨 말을 그리도 나누기에 그러느냐.”이수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그러나 답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심장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다는 듯, 서늘하게 쿵쿵 내려앉았다.상궁은 잠시 망설였다.“마마께 숨기려 하였사오나… 궁 안일을 마마께서 모르시고 계신다면,그 또한 옳지 않은 일 같아… 감히 말씀드리려 하옵니다.”그녀의 말투에는 진심이 서려 있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말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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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상궁의 목소리는 떨렸다.“마마께서 궁에 들어오신 것은 가문의 영예이옵고, 또한 나라의 복이옵니다.헛소문이 난다고 하여, 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사옵니다.”이수는 잠시 상궁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었다.“그러니 더더욱 조심해야겠지. 한 사람의 실수로, 몇 사람의 목숨이 날아가는 곳이 궁이니까요.”그 말에 상궁의 눈동자가 움찔였다.“마마…”“내 걱정은 하지 말라. 나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이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창호지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며, 바깥 어둠을 살폈다.정원에는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다.그러나 묘하게도, 나무 그림자는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오늘 밤, 문단속을 더 단단히 하라. 불필요한 출입은 모두 막고,밤중에 처소 근처로 오는 자가 있다면 이름을 반드시 알아두라.”상궁은 즉시 머리를 깊게 숙였다.“명심하겠사옵니다.”이수가 창가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덧붙였다.“그리고… 저하께서 혹 이곳으로 오시거나, 누군가 저하의 발길을 이곳으로 인도하려 한다면, 미리 내게 알리도록 하여라.”“예, 마마.”말은 그뿐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이제는… 누가 이곳으로 오는지만으로도 화근이 될 수 있다.상궁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이수는 창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달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그녀의 옆얼굴을 비췄다.그녀는 손을 뻗어 빗살무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천천히 이마를 창틀에 기댔다.'경은… 지금쯤 어떠한가.'마음속에 떠오른 이름을 그녀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이곳에서는 그조차도 죄가 될 것 같아서.다만, 낙마했다는 말 한마디가이토록 큰 파문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숨이 막힐 만큼 선명했다.그때, 문 쪽에서 아주 작은 기척이 났다.이수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누구냐.”“마마, 소녀이옵니다.”문이 살짝 열리고, 아까 꾸중을 들었던 어린 궁녀가 조심스레 얼굴을 들이밀었다.“허락도 없이 문턱을 넘는 자는 혼을 나야겠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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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뒤흔들린 새벽의 숨결

새벽은 아직 열리지 않은 문처럼 조용히 닫혀 있었다.궁의 기척은 밤과 낮 사이 어디쯤, 숨을 죽인 듯 미세하게 흔들렸다.도진은 조금도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검은 어둠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되살아났고,눈을 뜨면 세자의 음성이 귓가에서 멤돌았다.“경은… 빈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조심하라.”그 말 한 줄이 칼끝보다 더 깊게 가슴을 파고들었다.현이 자신을 의심하는 기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도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아직 왼쪽 어깨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더 누워 있을 이유가 없었다.방을 지키던 무사가 놀란 얼굴로 일어났다.“경께서는 아직 안정을 취하셔야”“괜찮다. 들라 하였느냐.”도진의 목소리는 평정했으나, 그 숨결에 스치는 냉기는 어둠 속에서 더 또렷했다.무사는 더 말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도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상처의 통증이 걷는 동작마다 묻어났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방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새벽 공기가 그를 맞았다.날선 공기 속에서 불길한 기척이 가는 실처럼 피어올랐다.궁이… 달라졌다.그는 즉시 알아차렸다.진흙 속 물결처럼, 보이지 않는 파문이 궁 전체에 퍼져 있었다.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는 새벽,그 안에서 더 많은 것들이 움직이고 있었다.이수는 밤새 거의 눕지 못했다.창호지 너머로 스며드는 어둠이 마치 자신을 조여 오는 듯했다.상궁이 준비한 쑥차는 식어 있었고,방 안의 등잔불은 끝까지 타들어 가며 빛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마마… 잠시라도 누우셨으면 하옵니다.”“괜찮다. 아직은…”하지만 이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입술에 붙은 바람처럼 말끝이 사라졌다.낙마했다는 소식 하나로 궁이 이토록 흔들릴 줄은 몰랐다.그녀는 손을 목덜미로 가져갔다.서늘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그때 문 밖에서 아주 은밀한 발걸음이 들렸다.상궁은 즉시 문 앞을 향해 돌아섰다.“누구냐.”“상궁마마, 소녀입니다.”어제 밤 그 궁녀였다.문이 열리자, 궁녀는 바짝 웅크린 자세로, 숨을 들이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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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저하께서 보고 계신 것

하지만 그는 손을 검으로 가져가지 않았다.지금은 무기를 허리에 두른 상황이 아니기도 했지만,무엇보다 지금 이 의심에서 먼저 칼을 꺼내는 순간,궁 전체가 더욱 어수선해질 것을 알았다.그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주위를 훑었다.그러나 그림자는 이미 사라진 듯,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도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이 궁은… 지금, 너무 많은 이가 서로를 훔쳐보고 있구나.'그는 스스로도 모르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마마… 그곳은 괜찮은겁니까.'그녀의 처소에 발길을 옮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음은 자꾸 그곳으로 향했다.그때 저 멀리서 군영의 북소리가 짧게 울렸다.새벽 훈련을 준비하는 소리.그러나 도진은 그 울림 속에 다른 의미를 읽었다.'궁이… 움직인다.'이수는 새벽녘이 되어도 잠들지 못했다.방 안은 진득한 침묵에 잠겨 있었고,이수는 등불이 꺼질 때까지 그 앞에 앉아 있었다.어둠과 시선이 만나면 무언가가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나는 지금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가문도, 명예도, 심지어 세자의 은총조차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지킬 수 있는 것이라곤 마음 뿐.그러나 바로 그 마음조차 지금 가장 숨겨야 할 것이었다.문득, 이수는 자신이 어젯밤 상궁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나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그러나 그녀의 속마음은 지금도 흔들리고 있었다.'경이… 다치지 않았다면.'그 생각이 찌르듯 올라왔다.이수는 바로 눈을 감았다.마음이 더 이상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그때 밖에서 짧은 발걸음이 들렸다.“마마. 저하께서 아침 조회 전에 빈마마의 안부를 묻고 계시옵니다.”그 순간, 이수의 손끝이 떨렸다.“저하께서…?”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혹은, 차마 예상하고 싶지 않았던 말.상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예, 마마. 저하께서… 빈마마의 ‘어젯밤 안위’를 물으셨사옵니다.”그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너무도 선명했다.세자는 이미 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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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모양을 갖는 소문

세자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움직이는 순간,더 많은 의심과 위험이 그녀에게 향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는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나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단 말인가.'도진의 속마음에 처음으로 ‘무력함’이라는 것이 스며들었다.그 서늘한 감정은, 다가오는 비극의 첫 진동처럼 그의 폐부 깊이 파고들었다.현은 침상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머리를 감싸 쥔 손끝이 창백했다.그는 방 안의 고요를 이기지 못한 듯 천천히 눈을 떴다.“…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그 말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도진일까, 이수일까. 아니면 그 자신일까.'그는 문득 도진을 보러 갔던 이상한 충동을 떠올렸다.'경에게 다친 이유를 확인하려고 간 것인가?'아니었다.그보다 더 깊고 어두운 이유가 있었다.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빈은… 지금 나를 피하고 있다.'그 생각이 들자 심장이 서늘하게 조여들었다.그리고 또 다른 생각이 스쳤다.'그녀는… 누구를 걱정하며 밤을 지새웠을까.'문득, 현의 시선이 방문 쪽으로 향했다.그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내가 직접 확인해야 한다.새벽의 끝, 무너지는 평온빈의 처소, 군영의 훈련장, 세자의 침전세 곳에서 동시에 숨이 멎은 듯한 기척이 흘렀다.잠들지 못한 사람들.멀리서 서로를 느끼는 그림자들.그림자 아래 감춰진 말들.궁은 아직 조용했다.그러나 그 고요는 태풍의 눈처럼 위험했으며,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질 듯한 얇은 막이었다.그리고, 새벽의 끝이 서서히 밝아오는 순간, 궁의 공기는 명확하게 달라져 있었다.무언가가 곧 변하기 시작할 것처럼.아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아왔다.그러나 아무 일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동틀 무렵의 햇빛이 처마 끝을 적실 때, 궁은 이미 여러 겹의 말들로 덮여 있었다.한밤중에도 깨어 있던 사람들의 입이 새벽 공기와 함께 천천히 열린 것이다.이수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길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지만,그녀의 시선은 자꾸 거울 뒤를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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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형체 없이 퍼지는 말들

“경은 이미 충분히 책임을 자각하고 있으니, 더 문책할 것까지는 없사옵니다.다만 군영의 기강을 다시 한번 다잡게 하시옵소서.”말만 들으면 벗을 감싸는 평범한 말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현의 목 안쪽에는,눈에 보이지 않는 쓴 맛이 올라오고 있었다.낙마… 실수.그는 그 단어들이 마음 한구석에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그리고 동시에, 낙마 소식을 들었을 때 얼굴빛이 식어버렸다는 어떤 소문도 기억 속 어딘가를 건드렸다.'누가… 그 얼굴을 보고 있었던 것이냐.'조회가 끝나고 대신들이 물러난 뒤에도, 현은 한동안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수렴청정의 형식은 이미 옅어졌으나, 대비의 영향력은 아직도 깊었다.왕이 일어나자, 대비의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이 멀찍이 방 밖을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그 시선이, 한순간 세자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사라졌다.현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이 궁은 지금, 누굴 보고 있는 것인가.'궁녀들에게 소문은 먼저 ‘형체 없이’ 퍼졌다.멀리서 보았다는 사람, 들은 것 같다는 사람,누군가에게서 들었다는 사람.“… 어제 밤에 말이야, 빈마마 처소 담장 쪽에 누가 서 있었다더라.”“아니, 누가 서 있었는지는 아무도 못 봤다잖아. 다만 사내의 옷자락이 보였다나.”그리고 그 말 사이사이에 새로운 조각들이 덧붙었다.“낙마하셨다는 경께서…그 근처를 자주 지나다니셨다지 않아.”“요사이 저하께서도 빈마마 처소 쪽으로 발길을 여러 번 옮기셨다더라.”도진의 이름과, 세자의 이름과, 세자빈의 처소가하나의 문장 안에 자연스럽게 묶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누군가는 호기심에서,누군가는 악의 없는 장난처럼,누군가는 자신의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그러나 이유가 어떻든, 그 말들이 향하는 곳은 늘 같은 곳이었다.빈의 처소.이수는 오전 내내 내전에서의 예를 지키느라 몇 번이고 사람들을 만났다.왕비, 후궁들, 나이가 있는 빈궁들.“빈은 요사이 잘 지내고 있느냐.”“안색이 예전보다 더 희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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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어찌 빈의 잘못뿐이겠습니까

도진의 목소리가 낮게 잘렸다.무관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죄송하옵니다, 경.”“더 말하면, 그 말이 진짜가 될 수도 있다.”도진의 말은 날카로웠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에 가까운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무관은 입술을 깨물며 물러났다.남겨진 자리에서, 도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이미… 이렇게 되었구나.'그는 처음부터 이 길의 위험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만큼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모양을 갖출 줄은 몰랐다.소문은 언제나 처음에는 모양이 없다.그러다 어느 날, 누가 한 번 더 선을 그어주면 갑자기 얼굴을 갖게 된다.그리고 그 얼굴은, 대개 한 사람을 향해 있다.'그 얼굴이… 마마를 향하고 있다.'점심을 조금 지난 시각,이수의 처소에 상궁이 다급한 얼굴로 돌아왔다.“마마. 대비전에서 빈마마를 뵙고 싶어 하신다 하옵니다.”이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바닥에 놓인 치맛자락을 정리했다.“지금 당장인가.”“예, 마마. 전갈이 많지 않아, 오히려 더 무서운 때이옵니다.”이수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옷매무새는 괜찮느냐.”“아주 단정하시옵니다.”“그렇다면… 갈 준비는 이미 된 것이겠지.”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수는 창을 한 번 돌아보았다.햇빛은 이미 높이 떠 있었다.그러나 방 안 공기는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대비전이라.대비에게 불려가는 길은 반갑기도, 안온하기도 어려운 길이었다.궁에서 누구든 대비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발걸음을 떼며, 이수는 상궁에게 조용히 물었다.“궁 안의 소문이… 대비마마의 귀에까지 들어갔느냐.”상궁은 대답 없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대비전 앞 마당의 공기는 다른 곳보다 한층 무거웠다.바람이 지나가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듯한 곳.세월과 권력이 한데 엉켜 딱딱하게 굳은 공기의 자리였다.이수는 규정된 자리까지 걸어가 정해진 예를 갖췄다.“빈, 뵙고 싶었다.”대비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이수는 머리를 조아린 채 답했다.“분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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