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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천년의 기억: Chapter 1 - Chapter 10

32 Chapters

1. 비가 내리기 시작한 오후, 그가 울었다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는 섬의 해풍처럼 가벼웠고,어떤 비는 전쟁터의 피비린내를 머금기도 했고,어떤 비는 이런 오후처럼 조용하고 무표정했다.평소였다면, 그는 단 한 번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늘은 무엇인가가 그의 움직임을 붙들고 있었다.그건 빛도, 소리도 아닌 한 장의 홍보지였다.백화점 유리벽에 큼직하게 붙어 있는 홍보물.누군가의 얼굴이 크게 담긴 사진.그리고 선명한 글씨.‘천년의 기억’이수 작가 단독 사인회도진의 시선이 단단히 그 자리에 박혔다.처음에는 우연이었다.다음 순간, 호기심이었다.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다.사진 속 여자의 얼굴. 잔잔한 웃음.단정한 자세. 그런데, 미묘하게 외롭고, 어딘가 간절한 느낌이 엮여 있었다.도진은 이유도 모른 채 숨을 깊게 들이켰다.폐 안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는데,마치 오래된 상처를 건드린 것처럼 가슴 한쪽이 날카롭게 조였다.잠시 후, 그의 눈이 뜨겁게 흔들렸다.그리고, 아무런 경고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천천히, 한 방울. 그 다음, 연달아.그는 눈을 깜빡이며 황급히 얼굴을 닦았다.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왜 이러지.”중얼거림은 숨처럼 새어나왔다.울어본 기억이 없었다.물론 인간이었을 때는 울었겠지만,그는 이미 오랫동안 인간적인 감정을 잃고 살았다.기쁨은 오래 머물지 않았고,슬픔은 닿기도 전에 사라졌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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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그를 잡으려 했지만 닿지 못했다.그의 의식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꺼졌다.쓰러지는 순간, 그의 시야 속에서 어둠이 천천히 펼쳐졌다.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한 빗소리가 들렸다.궁의 처마, 비가 스며들던 풍경.하얀 장옷을 입은 여인이 울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도진……그 목소리가 천년을 돌고 돌아오늘 이곳에서 다시 그를 데리러 온 듯했다.그의 의식은 시간의 층을 무너뜨리고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떨어졌다.새벽은 아직 완전히 밝지 않았다.산등성이 너머로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지만,궁을 둘러싼 담장은 여전히 밤의 색을 품고 있었다.새벽안개는 기와지붕 아래를 얇게 흐르며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들어가는 사람도, 나오는 사람도 거의 없는 시각.하지만 궁 안쪽 깊은 곳에서는 이미 하루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아직 촛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은 처마 아래에서경계를 서는 무사들의 갑옷이 은빛 새벽에 부딪혀 자그마한 광택을 만들었다.피마가 햇살을 먼저 맞는 동쪽 마당에서는 군사들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돌바닥 위에서 나무창 끝이 부딪히는 소리가 짧고 단단하게 메아리쳤다.그 가운데, 한 남자의 발걸음이 다른 이들과 달리 조용했다.검은 도포 아래에서 움직이는 그의 걸음은 바람이 스치는 결처럼 가볍고 단정했다.밝아오는 새벽빛을 등지고 서 있는 그의 실루엣은 그때의 누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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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천 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이 빈 공간처럼 울렸다.현은 조용히 말했다.“내게 허물을 묻지 않더라도, 너에게는 말해두어야 할 것 같아서 부른 것이다.”그 말에는 친구에게만 보이는 맨얼굴이 아주 조금 드러나 있었다.도진은 고개를 들었다.“저하께서… 걱정하시는 것이 있으시옵니까.”이현의 시선이 촛불을 향했다.촛불의 빛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기묘하게 흔들렸다.“간택이 기쁜 일이라면… 좋겠지.”그의 말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선명했다.기쁨과 불안, 의무와 책임이 한데 섞여 있는 목소리.“하지만…”이현은 말을 잠시 멈췄다.“마음이란 게, 말처럼 되는 것이 아니더구나.”그 말에 도진은 가슴이 묘하게 조여들었다.이유는 알 수 없었다.도진은 몰랐다.아직은. 이 문장을 시작으로 천 년에 걸쳐 엇갈릴 운명이이미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새벽은 어느새 부드러운 빛을 한 겹 더 두르고 있었다.기와 위에 남아 있던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였다.그리고 그 순간 궁의 정적을 깨는 듯한 여인의 가마가 먼 쪽 문에서 조용히 들어오고 있었다.그 가마가 도진의 시선에 닿기도 전에,그의 가슴 어딘가에서 미묘한 떨림이 아주 작게 일었다.그 떨림은 아직 이름이 없었다.아직 시작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하지만, 천 년을 돌아 다시 이어질 이야기의 첫 페이지는그렇게, 새벽과 빛과 조용한 떨림 사이에서 서서히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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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운명의 첫 그림자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이수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사람은세자가 아니라 그 옆에서 묵묵히 서 있는 무사 한 사람이었다.“마마를 뵙사옵니다.”현의 목소리가 조용히 내려왔다.이수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예를 올렸다.그의 음성은 부드럽고 명확했다.왕세자의 위엄을 갖추었으나, 그 아래에 복잡한 감정이 한 겹 숨겨져 있었다.그녀가 얼굴을 들기도 전에, 그 옆의 무사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그는 절도 있게,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 모르게 자신도 모를 무게를 지닌 표정으로 말했다.“세자빈마마의 걸음을 인도하라는 전하의 분부가 있었습니다.”현이 낮게 웃었다.“오늘 하루쯤은 네가 함께 모셔도 괜찮겠지.”이수는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찰나였지만, 그 순간 세상은 아주 얇은 막처럼 흔들렸다.그의 눈은 깊었다.바람 없는 날의 연못처럼 고요했지만,그 속에서는 오래된 상처의 그림자 같은 것이 문득 스치는 듯했다.그리고, 그 눈이 그녀를 보는 순간 이수는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잠시 잊어버렸다.‘이 사람을 본 적이… 있었던가?’말이 되지 않는 생각이었다.하지만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세상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마음이 이렇게 낯설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이쪽으로 드시옵니다.”그의 음성이 가까이에서 들렸다.저음이었고, 담담했으며,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차갑지도 않았다.그저 묘하게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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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열리지 않는 상자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처럼 고요하고,그 고요 아래에는 언제든 벼락을 내릴 수 있는 힘이 감추어져 있었다.하지만, 이수는 그 힘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저 사람… 도대체…’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의 심장 한쪽이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을 만들어냈다.두근거림이라기엔 너무 날카롭고, 긴장이라기엔 지나치게 깊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던 기억이 몸속 어딘가에서 일어나듯한 감각.이수는 그 감정을 애써 숨기며 궁의 끝없는 회랑을 바라보았다.복도 양쪽에는 붉은 단청이 그려진 기둥들이 규칙적으로 이어져 있었고,그 위에는 구름과 봉황 문양이 고요히 펼쳐져 있었다.무수한 사람들의 숨과 발자국이 스며든 공간.그 중심 어딘가에 자신이 ‘세자빈’이라는 이름으로 놓여 있다는 사실이 아직은 믿기지 않았다.그러던 중, 도진이 불쑥 걸음을 멈췄다.이수는 움찔하며 멈칫했다.그의 뒷모습이 갑자기 가깝게 느껴졌다.마치 그가 멈추자 내가 숨 쉬는 공기도 같이 멎어버린 것처럼.도진은 고개를 반쯤 돌린 채 말했다.“마마.”짧은 부름이었지만 그 속에는 조심스러움과 낯섦,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한 겹의 감정이 묻어 있었다.이수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예… .”도진의 눈이 잠시 그녀의 눈과 닿았다.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마주침은 이수에게 작고 기묘한 전율을 남겼다.허리춤이, 손끝이,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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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시선의 감옥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비가 그친 뒤의 공기는 조금 더 투명해졌고, 바람은 기와 사이를 흘러가며 은은한 서늘함을 남겼다.이수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숨은 곧장 가슴 깊이 내려가지 못하고 목울대 어딘가에 머물렀다.숨을 고르는 일조차 조심해야 하는 자리,그녀는 이제 처음으로 세자와 눈을 마주하게 될 순간을 앞두고 있었다.전각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문 안쪽에는 고요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빛이 차등처럼 내려앉아 바닥을 부드럽게 비추고, 멀리 높은 자리에는 현이 앉아 있었다.세자는 말 없이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그 시선은 생각보다 차갑지도, 지나치게 따뜻하지도 않았다.그러나 분명히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눈이었다.그는 이수가 궁의 대문을 넘어오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했다.이수는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갔다.비단 치마가 바닥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며 미세한 속삭임 같은 소리를 냈다.그녀가 예를 올리려는 순간, 현이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세자빈이라 불러야 하는 날이 올 터이니, 굽히는 예는 오래 보지 않겠소.”그는 담담하게 말했으나 그 담담함에는 어떤 무게가 있었다.이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었다.“감히 저하 앞이오나… 감사한 마음뿐이옵니다.”현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히 외모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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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밤이 삼킨 경계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그의 온몸이 아주 작게 굳어졌다가 다시 풀리는 느낌.도진은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고 말했다.“…어울림은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옵니다.”잠시 멈춘 뒤, 그가 덧붙였다.“인연이 판단하는 것이지요.”이수의 심장이 조용히 내려앉았다.그 말은 너무 단순했고, 너무 담담했으나마치 오래전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문장 같은 기묘한 익숙함이 있었다.그녀는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했다.그냥, 도진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카메라로 찍힌 것처럼 두 사람의 그림자가 햇빛 아래 길게 나란히 이어졌다.그 순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아주 작은 ‘기울어짐’이 시작되었다.현에게서, 이수에게서, 그리고 무엇보다 도진에게서.천천히, 아주 천천히 비극의 첫 균열이 바람 속에서 조용히 생겨나고 있었다.햇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있었다.서쪽 하늘은 잔잔한 붉음을 남기고 기와 너머로 천천히 사라졌고, 궁 전체가 서늘한 회색빛으로 덮였다.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의 그 짧은 틈 아침과 밤이 서로의 숨을 들이마시는 시간.바람은 낮보다 얇아졌고, 소리는 밤을 향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이수의 처소는 넓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그러나 각 공간마다 정갈하게 놓인 장식들이 기품을 품고 있었다.촛불이 방안을 비추기 시작하자 섬세한 그림자들이 벽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이수는 혼자였다.궁인들은 모두 물러나고 오직 바람과 촛불만이 방 안을 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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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둠이 새긴 흔적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그것은 동의도, 부정도 아니었다.궁에서 오래 산 사람만이 가진 조용한 체념 같은 것이었다.이수는 그의 그런 반응이 더 마음에 깊게 스며들었다.“그대 이름이 무엇이오..”그녀가 조용히 불렀다.도진은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예, 마마. 소인 도진이옵니다.”“저하께서… 나와 잘 어울린다 생각하오?”그녀는 그가 낮에 대답을 뭉개고 지나갔던 질문을 다시 묻고 있었다.도진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는 숨을 들이쉰 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 판단을… 제가 하는 것은 옳지 않사옵니다.”“그대가 보기에는 어떠하오?”이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도진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이 흔들렸다.무사의 눈이 흔들릴 일은 거의 없었다.그러나 지금 그는 마음이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어울림이란,”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서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옵니다.”“그대 눈에는…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소?”그 질문은 예리했고, 도진은 갑작스럽게 말을 잃었다.그 순간 문 너머 어둠의 끝에서 낮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도진이 고개를 돌리며 본능적으로 허리에 손을 댔다. 그리고 문 앞에 한 사람이 조용히 섰다.세자 현이었다.그의 눈빛은 빛과 어둠 사이에 서 있는 듯한 냉정하고 고요한 색을 띠고 있었다.도진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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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금지된 이름의 파문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그러나 현은 쉽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이수는 그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촛불이 세자빈의 얼굴을 반쯤 밝히고, 현의 얼굴은 그 절반쯤을 어둠이 덮고 있었다.“마마.”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지만, 말의 한 끝은 어딘가 단단히 잠겨 있는 듯했다.“오늘… 낯선 것이 많았을 터이다.”이수는 대답하지 못했다.낯설었던 것이 무엇인지,그중에서도 어떤 것이 가장 마음을 흔들었는지 말로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현은 조금 다가왔다.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으나그 조심 속에 감춰진 소유하려는 마음이 이수에게는 아주 어렴풋하게 느껴졌다.“두려움이 있다면… 전하시오. 마마를 지키는 것은 제 몫이니.”그 말은 본래라면 위로가 될 말이었다.그러나 이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흔들렸다.마치 누군가가 조용히 문 뒤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듯한 불안.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염려해주어 고맙소.”그 말 너머로 둘 사이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그러나 말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만들고 있었다.현의 눈빛은 잠시 이수의 얼굴에 머물렀다.그 표정에는 ‘알고 싶다’는 욕망과,‘놓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그리고 이수는 깨달았다.이 밤, 이 조용한 순간부터 세 사람의 운명은아무도 모르게 다른 방향으로 기울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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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름을 가둔 가슴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가장 크게 흔들렸다.이유는… 이유는 분명했다.왜…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토록 가슴이 뛰었던가.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좀 전, 이수가 찻잔을 내려놓고 창호를 바라보던 모습이 갑작스레 떠올랐다.그저 마마께서 첫날이라… 도리를 다해 조심히 모신 것뿐이다.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도 신뢰할 수 없는 변명 같았다.바람이 스쳤다.달빛이 어딘가 일렁였다.그 순간, 누군가의 발소리가 뒤에서 다가왔다.규칙적이지 않았다.궁인도, 무관도 아닌 조금 더 조심스러운,조금 더 무겁고 깊은 걸음을 가진 발자국.도진은 몸을 돌렸다.그곳에는 세자 현이 서 있었다.달빛 아래 선 현의 얼굴은 낮보다 더 선명하게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고요해 보이지만, 고요함 속에 ‘덮여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왜 그리 멀리 나와 있느냐, 도진.”그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그 속에는 이유를 묻는 것 이상의 뜻이 있었다.도진은 단정히 고개를 숙였다.“저하의 분부에 따라 근처를 살피고 있었사옵니다.”“그래.”현은 도진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오늘은… 여러모로 낯선 일들이 있었지.”그 말이 떨어진 순간, 도진의 심장은 묘하게 조여왔다.마치 그 ‘낯선 일들’이 방금 전 이수의 처소에서 있었던 대화특히 그녀가 자신을 부른 그 순간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는 듯한 뉘앙스였다.현의 발걸음이 가까워졌다.도진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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