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o / 로판 / 천년의 기억 / Capítulo 261 - Capítulo 270

Todos los capítulos de 천년의 기억: Capítulo 261 - Capítulo 270

273 Capítulos

262. 선이 누구 기준인지가 문제지

도진은 차 안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엔진은 꺼져 있었고, 계기판의 불빛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휴대전화 화면은 이미 꺼졌지만, 이수의 마지막 말이 여전히 귓가에 머물러 있었다.-저 혼자가 아니잖아요.그 말은 의지처럼 들렸고, 동시에 경고처럼 들렸다.도진은 고개를 젖혀 차 천장을 잠시 바라봤다.예전 같았으면 그 말 한마디에 이미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지켜야 한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지키는 것과 넘어서는 것 사이에 분명한 선이 있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선…”도진은 아무도 없는 차 안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그 선을 넘는 순간, 자신은 이수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그는 시동을 걸었다.차는 부드럽게 움직였고, 도시는 아무 일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받아들였다.이수는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대충 말린 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수건 끝에서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조차 신경 쓰이지 않았다.현의 말, 도진의 침묵, 그리고 자신의 대답들.하나하나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가슴 안에서 부딪히고 있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어 도진의 이름 위에 손가락을 잠시 올려두었다가 결국 누르지 않았다.확인받고 싶어서 전화하는 건 아니야.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다.대신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오늘은 괜찮아요.-걱정하지 마세요.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마음 한쪽이 조금 가벼워졌다.그 시각, 현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사무실 불은 이미 꺼졌지만 그는 여전히 그 공간에 있었다.정확히는, 그 공간에 남아 있는 생각들 속에.책상 위에는 이수의 소설 단행본 초판이 펼쳐져 있었다.그는 무심코 한 문장을 다시 읽었다.기억은 사라졌지만, 감정은 남아 있었다.현의 손끝이 책장을 천천히 눌렀다.“그래서…”그는 낮게 웃었다.“넌 아직도 그 감정 쪽을 택한 거군.”그 감정의 끝에 누가 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유리창에 비친 자신
Leer más

263. 균열은 소리 없이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공기는 묘하게 젖어 있었다.서울의 밤은 늘 그렇듯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도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재킷을 벗어 소파 위에 던졌다.불을 켜지 않은 채 창가로 걸어가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고층에서 내려다본 야경은 항상 비현실적이었다.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이 저 작은 점들 안에 모두 들어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숨 막히게 느껴졌다.그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익숙한 통증이 스쳤다.“…….”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확실했다.심장이 아니라, 그보다 더 안쪽.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서 무언가가 긁히듯 지나갔다.그는 손을 움켜쥐었다.손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검을 쥐고 있던 감각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또…”도진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이제는 놀라지도 않았다.650년이라는 숫자를 알지 못해도,이런 감각이 오래전부터 자신을 따라다녔다는 것만은 본능처럼 알고 있었다.그는 등을 창에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때, 아주 짧은 장면이 번쩍이며 스쳤다.붉은 색. 비단처럼 번지는 피.그리고 차갑게 식어 있던 손.“……이수.”입 밖으로 나온 이름에 도진 스스로가 잠시 멈칫했다.왜 그 이름이 이 장면과 함께 떠오르는지 이성은 설명하지 못했지만, 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그는 눈을 떴다.야경은 여전히 변함없었다.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이수는 책상 앞에 앉아 원고 파일을 열어놓은 채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커서는 깜빡이고 있었고, 그 깜빡임이 마치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다.그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문장을 지웠다.다시 썼다. 또 지웠다.“아니…”이수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소설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그녀는 파일을 닫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몸을 일으키는 순간, 현의 얼굴이 원하지 않게 떠올랐다.-선을 넘지 않는다고 했죠.그 말은 부드러웠지만 정확히 칼날 같은 위치에 있었다.이수는 창문을 열었다.차가운
Leer más

264. 도시의 어둠 아래 조용히 퍼져나가는 운명의 균열

카페를 나선 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작별 인사는 짧았다.“조심히 들어가세요.”“네, 도진 씨도요.”그 말들이 특별하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특별했다.이수는 몇 걸음쯤 걷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도진은 이미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그의 뒷모습은 도시의 밤과 잘 섞여 금세 흔적을 잃었다.그런데도 이수의 시선은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왜 이렇게… 익숙할까.익숙하다는 감각은 기억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머리는 알지 못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하는 종류의 것.그녀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심장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뛰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래전부터같은 리듬을 기다려왔다는 듯한 묘한 안정감이 남아 있었다.도진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잡지 않았다. 굳이 걷고 싶었다.사람들의 목소리, 신호등 소리,도로 위를 스치는 바람까지 모든 것이 자신을 지금 이곳에 붙잡아두는 증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저 사람을 지키고 싶다.이유는 없었다.논리도 없었다.그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도진은 자신이 이런 종류의 감정을 오래 피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붙잡는 순간, 무언가를 잃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 때문이었다.하지만 이수는 그 예감조차 다른 방향으로 비틀어놓는 사람이었다.집에 도착하자 다시 가슴이 조였다.이번엔 조금 더 분명했다.통증은 아니었고, 압박에 가까웠다.“…….”도진은 벽에 손을 짚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눈을 감는 순간, 이번엔 장면이 더 또렷했다.돌바닥. 밤. 칼날 위로 떨어진 따뜻한 액체.그리고 자신의 손등을 덮고 있던 작은 손.“……아니야.”도진은 눈을 뜨며 고개를 저었다.환각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감각적이었다.그러나 기억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그는 이 감각이 언젠가는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갈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그 시각,현은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서울의 야경을 내
Leer más

265. 되돌아오지 않는 감각

이수는 새벽에 잠에서 깼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고, 기억이라고 하기엔 너무 낯설었다.숨을 들이쉬는 순간, 마치 오래된 물속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가슴이 잠깐 조였다.통증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몸이 먼저 알아차린 무언가가 있었다.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커튼을 열었다.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도시 위로 희미한 불빛들이 떠 있었다.그 불빛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각자의 사연을 품고 흔들리고 있었다.이상하다.그 생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올랐다.전에는 이상함이 곧 불안으로 이어졌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오히려 이상함이 어딘가로 돌아온 느낌에 가까웠다.이수는 스스로를 놀라게 한 그 감각을 애써 무시하지 않았다.도망치듯 덮어두면 언젠가 더 크게 돌아온다는 걸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아침이 되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인터뷰 요청이었다.이번엔 방송 쪽이었다.“이번 작품이요, 독자들 반응이 정말…설명하기 힘든 쪽이에요.”담당자의 목소리는 흥분과 당혹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다들 공통적으로 말해요. 읽고 나면 이유 없이 슬프다고. 그런데 또, 그 슬픔이 싫지 않다고요.”이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 말은 어쩌면 가장 정확한 설명이었기 때문이다.“조금… 생각해볼게요.”그녀는 그렇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난 뒤, 이수는 책상 위에 놓인 원고 파일을 바라봤다.아직 공개하지 않은 부분. 그리고 스스로도 끝까지 쓰지 못한 장면들.칼. 밤. 피.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 부서지는 목소리.그녀는 손을 떼어냈다.지금은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아니, 돌아가서는 안 됐다.도진은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리 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어딘가 조금 달라 보였다.피곤한 것도 아니고,표정이 변한 것도 아니었다.그런데도 낯설었다.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 얼굴로 살아온 적이 있는 것처럼.그는 무의식적으로 가슴께를 눌렀다.어제보다 통증은 덜했지만, 대신 기억의 잔향 같은 것이 남아 있었
Leer más

266. 괜찮다

밤은 유난히 조용했다.소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소음조차 숨을 죽인 밤이었다.이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불을 끄지 않은 건 잠들기 싫어서가 아니라,눈을 감는 순간 어디로 끌려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자신의 숨소리를 세어 보았다.하나, 둘. 숨은 고르고, 심장은 평온했다.그런데도 마음 한편에서는 분명히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이름을 부르지 않았다.오늘 하루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생각은 했지만, 소리로 만들지는 않았다.마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무언가가 깨어날 것처럼.이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커튼 사이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만약 지금, 그 사람이 이곳에 있다면 그 생각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상상은 언제나 현실보다 더 잔인했기 때문이다.도진은 거실 불을 모두 끈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텔레비전도, 음악도 없었다.오직 자신의 호흡과 벽시계 초침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지하에서 느꼈던 그 미세한 떨림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물리적인 진동이 아니라, 감각의 여운에 가까웠다.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왜 내려갔지.답은 단순했다.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하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확신은 오히려 더 큰 질문을 남겼다.도진은 소파에서 일어나 물 한 잔을 따랐다.유리컵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크게 들렸다.컵을 입술에 가져갔을 때,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괜찮다.”그는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그러나 그 말은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말이었다.그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화면에는 최근 통화 목록이 떠 있었다.이수의 이름은 그 위쪽에 있었다.누르지 않았다.그저 그 이름이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현은 집이 아닌 곳에 있었다.오래 거래하던 지인의 갤러리.늦은 시간이라
Leer más

267. 닿지 않은 말의 무게

아침은 전날 밤의 침묵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덮어버렸다.도시는 늘 그렇다.어떤 균열도 출근 시간의 신호등 앞에서는 잠시 의미를 잃는다.이수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커피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지만 다시 데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이 온도쯤이 지금의 마음과 비슷했다.휴대전화가 진동했다.번호를 확인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도진이었다.그녀는 곧바로 받지 않았다.전화를 받지 않는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그저 이 휴대폰이 어떤 선을 넘어오는 순간이 될 것 같아서 잠시 숨을 고르고 싶었을 뿐이다.진동이 멎었다.그리고 잠시 후,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괜찮으시면, 오늘 저녁에 잠깐 뵐 수 있을까요.짧고 단정한 문장.그 안에는 조심과 망설임이 겹겹이 접혀 있었다.이수는 메시지를 한 번 더 읽었다.그의 말투는 늘 그랬다.상대를 밀어붙이지 않으면서도 뒤로 물러나지는 않는 방식.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지금, 만나도 되는 걸까.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만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오히려 그 반대였다.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잠시 후, 그녀는 답장을 보냈다.-네. 저녁에요.보내고 나서야 숨이 조금 편해졌다.마치 미뤄두었던 선택 하나를 마침내 내려놓은 기분이었다.도진은 메시지를 확인한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단순한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회의실로 들어가자 현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오늘 저녁에 일정 있나요?”현이 자연스럽게 물었다.도진은 순간 망설였다.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개인적인 약속이 하나 있습니다.”현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러나 그 변화는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놓쳤을 정도였다.“그래요?”현은 웃으며 말했다.“요즘 바쁘시더니.”“그렇지도 않습니다.”도진은 담담하게 답했다.현은 더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대신,
Leer más

268. 돌아서지 못하는 선을 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수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도시는 밤이 되면 사람의 표정을 닮는다.밝은 척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항상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문을 열자 집 안은 고요했다.불을 켜지 않은 채 신발을 벗고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았다.오늘 저녁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다시 천천히 재생되고 있었다.확인하고 싶었다고 했던 도진의 말.그리고 같다고 대답했던 자신의 목소리.그 말은 고백도 아니었고 약속도 아니었다.그러나 그 어떤 고백보다 더 무거웠다.이수는 소파에 앉아 손바닥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데, 마치 무언가를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처럼 손끝이 저릿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오늘의 만남으로 되돌릴 수 없는 선 하나를 조용히 넘었다는 것을.도진 역시 잠들지 못한 채 거실 불을 켜두고 앉아 있었다.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오늘의 대화는 계획했던 것보다훨씬 적은 말로 끝났지만, 그 적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부딪히고 있었다.-저도… 같아요.그녀의 말은 확신도, 설명도 없었지만 도진의 마음속 어딘가를 정확히 건드렸다.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이 감정이 지금의 삶에서 생긴 것인지,아니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인지.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하나만은 분명했다.이제는 모른 척할 수 없다는 것.다음 날,이수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원고를 펼쳤지만 문장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단어 하나를 쓰고 지웠다.다시 쓰고 또 지웠다.글은 늘 그녀에게 솔직했지만,오늘만큼은 글마저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이번에도 도진이었다.-어제는… 고맙습니다.이수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답장을 썼다.-저도요.짧은 대화였지만 그 짧음 속에 서로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암묵적인 이해가 담겨 있었다.현은 아침 회의 내내 집중하지 못했다.회의 자료는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갈 뿐,의미를 남기지 않았다.회의가 끝나자 그는 자리에서 일
Leer más

269. 돌아오지 않는 질문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창을 두드리는 소리는 규칙적이었고, 그 규칙이 오히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이수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잠은 오지 않았고,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부를 생각도 없었다.오늘 하루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흘러갔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분명했다.이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 오히려 낯설어질 거라는 걸.휴대전화 화면이 다시 한 번 켜졌다 꺼졌다.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의 메시지일지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번에는 바로 열지 않았다.기다림은 의도적인 선택이었다.이 감정이 조급함인지, 아니면 정말로 천천히 가고 싶은 마음인지 스스로에게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잠시 후, 이수는 결국 휴대전화를 들었다.-괜찮으세요?-오늘 하루가… 조금 걱정돼서요.도진의 문장은 늘 그렇듯 선을 넘지 않았다.그러나 선을 넘지 않으려는 그 태도 자체가이미 경계 가까이 와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이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답장을 썼다.-괜찮아요.-비 오는 밤이라서 잠이 안 올 뿐이에요.보내고 나서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거짓은 아니었지만 전부도 아니었다.도진은 메시지를 확인한 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잠이 안 온다’는 말이 그녀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가슴에 걸렸다.그는 그 말의 이유를 묻고 싶었고, 동시에 묻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지금의 관계는 너무 많은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그는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다시 쓰고 또 지웠다.결국 남은 문장은 아주 단순했다.그러면 잠이 올 때까지 비 소리라도 같이 듣고 계세요.보내고 나서 도진은 피식 웃었다.어딘가 어색했고, 그 어색함이 자신답다는 생각이 들었다.창밖을 보니 비가 더 굵어지고 있었다.그 소리를 들으며 그는 처음으로 이 밤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같은 시간,현은 회사 근처의 바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잔은 이미 두 번 비워졌지만 취기는 거의 오르지 않았다.술은 마음을 흐리
Leer más

270. 제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아침은 어제와 다르지 않게 밝았다.그러나 어제와 같은 아침은 아니었다.이수는 커튼을 걷으며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비가 씻어낸 공기는 유난히 맑았고, 그 맑음이 오히려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를 말리던 중, 어젯밤의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비 소리라도 같이 듣고 계세요.그 문장은 밤보다 오래 남아 있었다.그저 배려일 뿐이라 생각하려 했지만,그 배려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이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다 낮게 중얼거렸다.“이러면 안 되는데…”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은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도진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회사에 도착해 있었다.회의는 오후였고, 굳이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었다.그럼에도 집에 머무는 것이 오늘은 유난히 버거웠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층수를 올려다보며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조급해졌는지 생각했다.답은 간단했다. 이수였다.어젯밤, 그녀의 답장은 짧았지만 그 뒤에 이어지지 않은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다가왔다.그 침묵이 거절인지, 아니면 망설임인지 도진은 확신할 수 없었다.사무실 문을 열며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오늘은… 괜히 나서지 말자.”그러나 마음은 이미 한 발 앞서 있었다.현은 회의실에서 보고서를 넘기며 집중하려 애쓰고 있었다.그러나 글자들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어젯밤 통화 이후,도진의 이름이 이상할 정도로 자주 떠올랐다.그리고 그 이름 뒤에는 늘 이수가 있었다.현은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왜 하필 지금이지…”그는 자신이 불편해하는 이유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질 감정도 아니었다.잠시 후, 비서가 회의 종료를 알렸다.“대표님, 다음 일정은 점심 미팅입니다.”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그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이수를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유는 합리적으로 꾸밀 수 있었다.출판 관련 논의,다음 프로젝트, 어떤 명분이든 가능했다.
Leer más

271. 닿지 않는 마음의 거리

저녁이 내려앉은 도시는 낮보다 더 솔직했다.빛은 많았지만, 그 빛 아래 숨길 수 없는 그림자들이 각자의 발밑에 또렷이 드러나 있었다.이수는 카페를 나와 천천히 걸었다.현과의 대화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상태로 가슴 한켠에 남아 있었다.중요한 인연.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그러나 중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머물 수 없는 자리도 있다는 걸이수는 너무 오래 살아오며 배웠다.휴대전화가 진동했다.도진이었다.-어디 계세요?-제가 가도 될까요.이수는 한참을 서서 화면을 바라봤다.답장은 간단했지만 그 한 줄이 오늘 밤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집 근처예요.-잠깐이면 괜찮아요.보내고 나서 이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이 만남이 어떤 의미가 될지 아직은 모른 척하고 싶었다.도진은 차를 몰며 라디오도,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았다.도시는 익숙했고 길도 알았다.집중해야 할 것은 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었다.이수와 단둘이 마주하는 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그러나 이번은 달랐다.이제 그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이 끌림이 우연도, 단순한 호감도 아니라는 것을.차를 세우고 그녀를 발견했을 때, 도진은 본능적으로 숨을 고르며 차에서 내렸다.“오래 기다리셨어요?”“아뇨.”이수가 고개를 저었다.“방금 나왔어요.”둘 사이에는 차가운 공기와 말하지 않은 말들이 같이 서 있었다.도진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이수도 그 옆에 나란히 섰다.“오늘…”그가 입을 열다 말고 잠시 멈췄다.“힘드셨죠.”질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말이었다.이수는 작게 웃었다.“힘들지 않은 날이 더 드물죠.”그 대답은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긴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잠시 후, 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현 대표를 만나신 건가요.”이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피하지 않았다.“네.”그 짧은 대답에 도진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괜찮으세요?”이번에는 이수가 되묻는 차례였다.도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Leer más
ANTERIOR
1
...
232425262728
ESCANEA EL CÓDIGO PARA LEER EN LA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