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아침은 어제와 다르지 않게 밝았다.그러나 어제와 같은 아침은 아니었다.이수는 커튼을 걷으며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비가 씻어낸 공기는 유난히 맑았고, 그 맑음이 오히려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를 말리던 중, 어젯밤의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비 소리라도 같이 듣고 계세요.그 문장은 밤보다 오래 남아 있었다.그저 배려일 뿐이라 생각하려 했지만,그 배려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이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다 낮게 중얼거렸다.“이러면 안 되는데…”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은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도진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회사에 도착해 있었다.회의는 오후였고, 굳이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었다.그럼에도 집에 머무는 것이 오늘은 유난히 버거웠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층수를 올려다보며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조급해졌는지 생각했다.답은 간단했다. 이수였다.어젯밤, 그녀의 답장은 짧았지만 그 뒤에 이어지지 않은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다가왔다.그 침묵이 거절인지, 아니면 망설임인지 도진은 확신할 수 없었다.사무실 문을 열며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오늘은… 괜히 나서지 말자.”그러나 마음은 이미 한 발 앞서 있었다.현은 회의실에서 보고서를 넘기며 집중하려 애쓰고 있었다.그러나 글자들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어젯밤 통화 이후,도진의 이름이 이상할 정도로 자주 떠올랐다.그리고 그 이름 뒤에는 늘 이수가 있었다.현은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왜 하필 지금이지…”그는 자신이 불편해하는 이유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질 감정도 아니었다.잠시 후, 비서가 회의 종료를 알렸다.“대표님, 다음 일정은 점심 미팅입니다.”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그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이수를 직접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유는 합리적으로 꾸밀 수 있었다.출판 관련 논의,다음 프로젝트, 어떤 명분이든 가능했다.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창을 두드리는 소리는 규칙적이었고, 그 규칙이 오히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이수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잠은 오지 않았고,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부를 생각도 없었다.오늘 하루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흘러갔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분명했다.이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 오히려 낯설어질 거라는 걸.휴대전화 화면이 다시 한 번 켜졌다 꺼졌다.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의 메시지일지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번에는 바로 열지 않았다.기다림은 의도적인 선택이었다.이 감정이 조급함인지, 아니면 정말로 천천히 가고 싶은 마음인지 스스로에게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잠시 후, 이수는 결국 휴대전화를 들었다.-괜찮으세요?-오늘 하루가… 조금 걱정돼서요.도진의 문장은 늘 그렇듯 선을 넘지 않았다.그러나 선을 넘지 않으려는 그 태도 자체가이미 경계 가까이 와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이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답장을 썼다.-괜찮아요.-비 오는 밤이라서 잠이 안 올 뿐이에요.보내고 나서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거짓은 아니었지만 전부도 아니었다.도진은 메시지를 확인한 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잠이 안 온다’는 말이 그녀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가슴에 걸렸다.그는 그 말의 이유를 묻고 싶었고, 동시에 묻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지금의 관계는 너무 많은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그는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다시 쓰고 또 지웠다.결국 남은 문장은 아주 단순했다.그러면 잠이 올 때까지 비 소리라도 같이 듣고 계세요.보내고 나서 도진은 피식 웃었다.어딘가 어색했고, 그 어색함이 자신답다는 생각이 들었다.창밖을 보니 비가 더 굵어지고 있었다.그 소리를 들으며 그는 처음으로 이 밤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같은 시간,현은 회사 근처의 바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잔은 이미 두 번 비워졌지만 취기는 거의 오르지 않았다.술은 마음을 흐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수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도시는 밤이 되면 사람의 표정을 닮는다.밝은 척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항상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문을 열자 집 안은 고요했다.불을 켜지 않은 채 신발을 벗고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았다.오늘 저녁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다시 천천히 재생되고 있었다.확인하고 싶었다고 했던 도진의 말.그리고 같다고 대답했던 자신의 목소리.그 말은 고백도 아니었고 약속도 아니었다.그러나 그 어떤 고백보다 더 무거웠다.이수는 소파에 앉아 손바닥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데, 마치 무언가를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처럼 손끝이 저릿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오늘의 만남으로 되돌릴 수 없는 선 하나를 조용히 넘었다는 것을.도진 역시 잠들지 못한 채 거실 불을 켜두고 앉아 있었다.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오늘의 대화는 계획했던 것보다훨씬 적은 말로 끝났지만, 그 적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부딪히고 있었다.-저도… 같아요.그녀의 말은 확신도, 설명도 없었지만 도진의 마음속 어딘가를 정확히 건드렸다.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이 감정이 지금의 삶에서 생긴 것인지,아니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인지.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하나만은 분명했다.이제는 모른 척할 수 없다는 것.다음 날,이수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원고를 펼쳤지만 문장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단어 하나를 쓰고 지웠다.다시 쓰고 또 지웠다.글은 늘 그녀에게 솔직했지만,오늘만큼은 글마저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이번에도 도진이었다.-어제는… 고맙습니다.이수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보다가 답장을 썼다.-저도요.짧은 대화였지만 그 짧음 속에 서로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암묵적인 이해가 담겨 있었다.현은 아침 회의 내내 집중하지 못했다.회의 자료는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갈 뿐,의미를 남기지 않았다.회의가 끝나자 그는 자리에서 일
아침은 전날 밤의 침묵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덮어버렸다.도시는 늘 그렇다.어떤 균열도 출근 시간의 신호등 앞에서는 잠시 의미를 잃는다.이수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커피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지만 다시 데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이 온도쯤이 지금의 마음과 비슷했다.휴대전화가 진동했다.번호를 확인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도진이었다.그녀는 곧바로 받지 않았다.전화를 받지 않는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그저 이 휴대폰이 어떤 선을 넘어오는 순간이 될 것 같아서 잠시 숨을 고르고 싶었을 뿐이다.진동이 멎었다.그리고 잠시 후,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괜찮으시면, 오늘 저녁에 잠깐 뵐 수 있을까요.짧고 단정한 문장.그 안에는 조심과 망설임이 겹겹이 접혀 있었다.이수는 메시지를 한 번 더 읽었다.그의 말투는 늘 그랬다.상대를 밀어붙이지 않으면서도 뒤로 물러나지는 않는 방식.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지금, 만나도 되는 걸까.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만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오히려 그 반대였다.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잠시 후, 그녀는 답장을 보냈다.-네. 저녁에요.보내고 나서야 숨이 조금 편해졌다.마치 미뤄두었던 선택 하나를 마침내 내려놓은 기분이었다.도진은 메시지를 확인한 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단순한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회의실로 들어가자 현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오늘 저녁에 일정 있나요?”현이 자연스럽게 물었다.도진은 순간 망설였다.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개인적인 약속이 하나 있습니다.”현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러나 그 변화는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놓쳤을 정도였다.“그래요?”현은 웃으며 말했다.“요즘 바쁘시더니.”“그렇지도 않습니다.”도진은 담담하게 답했다.현은 더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대신,
밤은 유난히 조용했다.소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소음조차 숨을 죽인 밤이었다.이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불을 끄지 않은 건 잠들기 싫어서가 아니라,눈을 감는 순간 어디로 끌려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자신의 숨소리를 세어 보았다.하나, 둘. 숨은 고르고, 심장은 평온했다.그런데도 마음 한편에서는 분명히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이름을 부르지 않았다.오늘 하루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생각은 했지만, 소리로 만들지는 않았다.마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무언가가 깨어날 것처럼.이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커튼 사이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만약 지금, 그 사람이 이곳에 있다면 그 생각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상상은 언제나 현실보다 더 잔인했기 때문이다.도진은 거실 불을 모두 끈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텔레비전도, 음악도 없었다.오직 자신의 호흡과 벽시계 초침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지하에서 느꼈던 그 미세한 떨림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물리적인 진동이 아니라, 감각의 여운에 가까웠다.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왜 내려갔지.답은 단순했다.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을.하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확신은 오히려 더 큰 질문을 남겼다.도진은 소파에서 일어나 물 한 잔을 따랐다.유리컵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크게 들렸다.컵을 입술에 가져갔을 때,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괜찮다.”그는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그러나 그 말은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말이었다.그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화면에는 최근 통화 목록이 떠 있었다.이수의 이름은 그 위쪽에 있었다.누르지 않았다.그저 그 이름이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현은 집이 아닌 곳에 있었다.오래 거래하던 지인의 갤러리.늦은 시간이라
이수는 새벽에 잠에서 깼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고, 기억이라고 하기엔 너무 낯설었다.숨을 들이쉬는 순간, 마치 오래된 물속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가슴이 잠깐 조였다.통증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몸이 먼저 알아차린 무언가가 있었다.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커튼을 열었다.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도시 위로 희미한 불빛들이 떠 있었다.그 불빛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각자의 사연을 품고 흔들리고 있었다.이상하다.그 생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떠올랐다.전에는 이상함이 곧 불안으로 이어졌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오히려 이상함이 어딘가로 돌아온 느낌에 가까웠다.이수는 스스로를 놀라게 한 그 감각을 애써 무시하지 않았다.도망치듯 덮어두면 언젠가 더 크게 돌아온다는 걸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아침이 되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인터뷰 요청이었다.이번엔 방송 쪽이었다.“이번 작품이요, 독자들 반응이 정말…설명하기 힘든 쪽이에요.”담당자의 목소리는 흥분과 당혹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다들 공통적으로 말해요. 읽고 나면 이유 없이 슬프다고. 그런데 또, 그 슬픔이 싫지 않다고요.”이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 말은 어쩌면 가장 정확한 설명이었기 때문이다.“조금… 생각해볼게요.”그녀는 그렇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난 뒤, 이수는 책상 위에 놓인 원고 파일을 바라봤다.아직 공개하지 않은 부분. 그리고 스스로도 끝까지 쓰지 못한 장면들.칼. 밤. 피.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 부서지는 목소리.그녀는 손을 떼어냈다.지금은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아니, 돌아가서는 안 됐다.도진은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리 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어딘가 조금 달라 보였다.피곤한 것도 아니고,표정이 변한 것도 아니었다.그런데도 낯설었다.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 얼굴로 살아온 적이 있는 것처럼.그는 무의식적으로 가슴께를 눌렀다.어제보다 통증은 덜했지만, 대신 기억의 잔향 같은 것이 남아 있었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