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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Chapters

272. 더 이상 애매한 선 위에 서고 싶지 않다

아침은 어제의 밤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덮어버렸다.젖어 있던 거리도, 흐트러졌던 마음도 출근 시간의 소음 속에서 억지로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정리된 것은 없었다.이수는 엘리베이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어제보다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어제와 같은 얼굴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표정은 그보다 한 박자 늦게 따라온다.회사에 도착하자 이미 몇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출판 일정, 인터뷰 요청, 그리고, 현의 이름이 적힌 회의 요청 메일.이수는 마우스를 쥔 손을 잠시 멈췄다.거절할 이유도, 미룰 이유도 없었다.그래서 더 불편했다.오후 세 시, 가능하신지요.그 문장은 업무적인 예의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이수는 알고 있었다.이 만남이 업무로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도진은 체육관 한쪽에 서 있었다.샌드백을 친 것도 아니고, 러닝머신 위에 오른 것도 아니었다.그저 운동을 하다 말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몸은 충분히 단련되어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요즘 들어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이 잦아졌다.이유는 명확했다.이수.그녀와의 대화, 그녀가 남긴 말,그리고 말하지 않은 것들.도진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가 다시 넣었다.연락하고 싶은 마음과 참아야 한다는 판단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늘 오후에 잠깐 볼 수 있을까요.이수였다.도진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네. 시간 말씀 주세요.답장을 보내고 나서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선택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현은 회의실에 앉아 있었지만 자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어젯밤의 장면이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나란히 걷던 두 사람.짧은 거리. 그러나 그 사이에 흐르던 공기.현은 그 공기를 잘 알고 있었다.그건 관심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회의가 끝나자 그는 이수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회의 시간, 변동 없겠져?.”“네.”이수의 대답은 담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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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흔들림의 방향

비는 도시를 균등하게 적셨다.누구에게도 편을 들지 않는 얼굴로,그저 위에서 아래로 같은 속도로 떨어질 뿐이었다.도진과 이수는 카페를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말이 없었지만 침묵은 무겁지 않았다.오히려 말이 필요 없는 종류의 시간에 가까웠다.비에 젖은 보도블록 위에서 이수의 발걸음이 잠시 느려졌다.“도진 씨.”그녀가 불렀다.목소리는 낮았고, 조심스러웠다.“아까 말한 것… 변해도 괜찮다는 말.”도진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쉽게 한 말은 아닙니다.”“알아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더 묻고 싶었어요.”잠시 숨을 고른 뒤 그녀는 말했다.“그 말의 끝에는 어디까지가 들어 있는 건가요.”도진은 비를 맞은 채 서 있었다.우산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이 질문 앞에서 보호막은 의미가 없었다.“제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입니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좋은 결말이 아니어도, 적어도 도망치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이수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런 사람을…”그녀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믿어도 되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그건 제가 증명해야 할 문제겠죠.”도진의 말은 설명도, 다짐도 아니었다.그저 현재형의 사실에 가까웠다.이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존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시각,현은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불을 끄지 않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비가 내리는 도시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 보였다.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사람의 마음은 도시처럼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회의실에서의 이수. 그녀의 눈빛. 선명하게 긋던 선.저를 선택의 대상으로 두지 않는 것.그 문장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그건 거절이었지만 완전한 단절은 아니었다.현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애매함.그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이수에게도, 도진에게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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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지금 여기까지는 와도 된다는 허락

밤은 도시의 소음을 한 겹 덮어두고 그 위에 다시 생각을 올려놓는 시간이었다.낮에는 흘려보냈던 감정들이 밤이 되어서야 제자리를 찾는 것처럼.도진은 집 안의 불을 모두 끈 채 창가에 서 있었다.유리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은 질서정연했지만,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오늘 하루 동안 자꾸만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카페에서, 비 오는 거리에서, 그리고 마지막에 이수가 남긴 그 눈빛.부탁도 아니고, 확답도 아닌 시선.그건 ‘지금 여기까지는 와도 된다’는 조심스러운 허락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자신이 언제부터 사람의 눈빛을 이렇게 오래 들여다보게 되었는지기억해보려 했지만, 생각은 끝까지 닿지 않았다.대신 가슴 안쪽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천천히 자리 잡았다.그는 휴대전화를 다시 들었다가 이번에도 내려놓았다.말을 걸고 싶은 마음과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지금은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다.이수는 침대 위에 앉아 노트북을 켜 놓고 있었지만 아무 글자도 입력하지 못하고 있었다.커서는 깜박였고, 그 깜박임이 마치 재촉처럼 느껴졌다.글은 늘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어떤 문장도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그녀는 노트북을 덮고 등을 대고 누웠다.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고른다.도진의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반복됐다.-변해도 괜찮습니다.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선언처럼 들렸고, 그래서 더 마음을 흔들었다.이수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상처받는 일이 아니라 상처를 주는 일이 아닐까 문득 생각했다.누군가에게 기대가 된다는 것.그 기대를 끝까지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비가 그친 뒤의 공기가 차갑게 밀려들었다.“조금만 더…”이수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작게 중얼거렸다.“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그 말이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그녀 스스로도 확실하지 않았다.현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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