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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천년의 기억: Chapter 231 - Chapter 240

273 Chapters

232. 시작됐네요

이수는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집을 나섰다.그 이유를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그저 집 안의 공기가 어제보다 무거워진 것 같았고, 그 무게를 더 견디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엘리베이터 거울 속의 얼굴은 익숙했지만 낯설었다.눈가에는 피로가 엷게 남아 있었고, 입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이미 무언가를 설명한 뒤처럼 굳어 있었다.밖으로 나오자 아침의 소음이 쏟아졌다.차들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졌다.이수는 그 흐름 속으로 조용히 섞였다.휴대전화가 울렸다.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이수 작가님이시죠.”낯선 여자 목소리였다.공손했지만, 조심스러움보다는 확신이 먼저 느껴졌다.“네, 맞습니다.”“저는 ○○매거진입니다. 짧게 인터뷰 요청을 드리려고 연락드렸어요.”이수는 잠시 말을 고르다 정중히 대답했다.“인터뷰는 현재 일정이”“아, 알고 있습니다.”상대가 말을 끊었다.“그래서 이번엔 작품이 아니라 ‘작가님의 경험’에 대해 여쭤보려 했어요.”이수의 발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경험이요?”“네. 소설에 등장하는 감정선이 너무 생생하다는 이야기가 많아서요.”말투는 여전히 공손했다.그러나 질문은 이미 방향을 정해두고 있었다.이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제 작품은 상상과 조사에 기반한”“그럼 모델은 없으신 거죠?”질문이 더 짧아졌다.그 순간, 이수는 깨달았다.이 통화는 대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응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인터뷰는 어렵겠습니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전화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끊긴 뒤에도 이수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서 있었다.사람들이 옆을 지나쳤고, 누군가는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그 시선들 속에 아직 적의는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느꼈다.이제부터는 그 시선들이 조금씩 의미를 갖게 될 거라는 것을.출판사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조금 더 조심스러웠고,눈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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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이수는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돌아오지 못했다.집 앞에 도착했을 때 건물 입구에 서 있던 사람 하나가 그녀를 불렀기 때문이다.“이수 작가님.”처음에는 자신을 부른 줄도 몰랐다.이름이 불리는 순간까지 그 목소리는 너무 일상 속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잠시만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남자는 기자증을 꺼내 보이지 않았다.그건 이미 필요 없는 단계라는 듯한 태도였다.“사적인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이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손끝이 가방끈을 조금 더 세게 쥐고 있었다.“알고 있습니다.”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질문은 하나만 드리려고요.”그 하나가 얼마나 많은 말을 불러올지 이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요.”남자의 시선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수의 얼굴을 훑었다.“지금 곁에 계신 그분인가요.”그 질문은 확정처럼 던져졌다.이수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그 짧은 침묵은 기자의 눈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부정은 아니군요.”남자는 부드럽게 말했다.그 순간, 이수는 깨달았다.이 사람은 답을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침묵을 기록하기 위해 온 것이라는 것을.“더 이상 말씀드릴 건 없습니다.”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그러나 남자는 따라오지 않았다.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이미 이수의 얼굴에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으니까.그 시각, 도진은 차 안에 앉아 있었다.엔진은 꺼져 있었고, 라디오는 켜지지 않았다.그는 멀리서 건물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수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그리고 잠시 뒤 기자가 등을 돌리는 모습.그 장면을 보는 동안 도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지금부터는 이수가 ‘작가’로만 남을 수 없다는 것을.도진은 차에서 내렸다.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수를 만났을 때, 그녀는 먼저 말을 꺼냈다.“봤어요?”“네.”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이수는 웃으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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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어둠 속의 청명과 아직 꺼내지 않은 칼

그날 밤,도진은 집에 돌아와 지하로 내려갔다.불을 켜지 않았다.어둠 속에서도 그는 그 자리를 알고 있었다.벽 한가운데, 장식처럼 꽂혀 있는 검.청명.도진은 검을 만지지 않았다.다만 그 앞에 서서 아주 낮게 말했다.“아직은.”그 말은 검에게 한 말이기도 했고,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아직은 칼을 꺼낼 때가 아니다.그러나 칼이 필요해지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그날 아침, 이수는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않았다.이전 같았으면 무의식처럼 손이 먼저 움직였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지금 화면을 켜는 순간, 자신이 더 이상 ‘작가’로만 불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창밖에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소음이 흘러들었다.차 소리, 사람 목소리, 아침을 시작하는 도시의 숨.세상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빛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 빛이 오늘은 유난히 날카롭게 느껴졌다.휴대전화가 울렸다.이번에는 무시할 수 없는 번호였다.편집장이었다.“…네.”이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작가님.”편집장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지금 기사 하나가 더 올라왔요.”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하지 않아도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이번엔… 조금 더 직접적입니다.”잠시 정적.“실명은 아니에요. 하지만, 누구나 알 수 있게 쓰였어요.”이수는 침대 끝에 앉았다.손바닥이 천천히 매트리스에 닿았다.“…링크 보내주세요.”잠시 후, 화면에 기사가 떴다.제목은 짧았다.‘베스트셀러 작가의 사랑,소설보다 현실이 더 닮았다’기사 속 문장들은 조심스러운 척 정제되어 있었지만, 방향은 하나였다.‘측근에 따르면’‘주변에서는 이미’‘사실상 공개 연인’이수는 스크롤을 내리지 않았다. 이미 충분했다.편집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작가님, 당분간 외부 일정은”“취소하죠.”이수는 짧게 말했다.“모두요.”“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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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말하기 전의 침묵 

요청은 항상 정중한 얼굴을 하고 온다.거절하기 어렵게, 화를 내기 애매하게,그러나 분명히 선 하나를 넘으라고 요구하는 방식으로.이수에게 도착한 첫 공식적인 요청도 그랬다.메일 제목은 단정했다.‘작가님 인터뷰 관련 제안 드립니다.’보낸 이는 대형 언론사 문화부 데스크였다.말투는 공손했고, 문장은 지나치게 예의 바랐다.그러나 문단 사이사이에 깔린 의도는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현재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작가님의 직접적인 입장이 혼란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사생활에 대한 해명보다는 작품 세계관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작가님의 철학을 듣고 싶습니다.”이수는 메일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요지는 하나였다.말하라. 침묵하지 말라. 이야기를 완성하라.그녀는 노트북을 덮었다.그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전화가 울렸다.이번에는 출판사 대표였다.“작가님.”상대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부드러웠다.부드러움 속에 숫자와 계산이 섞인 음색.“지금 상황이 출판 쪽에서도 조금 민감해졌습니다.”이수는 말하지 않았다.대표는 그 침묵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물론 작가님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그 말이 나오면 그 다음 문장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다만, 다음 신간 일정과 해외 판권 계약을 생각하면 지금의 오해를 정리하는 편이…”“정리라는 게,”이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무엇을 의미하죠?”잠시 침묵.대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최소한 작품과 현실은 분리된다는 입장 정도는 공식적으로 밝혀주시면”이수는 조용히 웃었다.“그럼 거짓말이 되겠네요.”대표의 숨이 전화 너머에서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작가님.”“제가 쓴 이야기가 현실과 닮았다는 걸 부정하면,”이수는 차분하게 이어 말했다.“그건 제 작품을 부정하는 겁니다.”대표는 그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잠시…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고 난 뒤,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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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해명도, 부정도 하지 않겠습니다

침묵은 늘 가장 먼저 변질된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설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의심은 사실처럼 번진다.이수는 그 원리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 오래 말하지 않았다.아침이 밝았을 때, 그녀의 휴대전화에는 이미 수십 개의 부재중 알림이 쌓여 있었다.언론, 출판사, 번호를 숨긴 전화들.그리고 하나의 메시지.-오늘 오후 4시.작가님 의사에 따라 비공개 간담회를 제안드립니다.보낸 이는 문화재단 명의였다.‘비공개’라는 말은 언제나 가장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방식이었다.이수는 메시지를 읽고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도진은 주방에서 물을 따르다 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거기 가실 겁니까.”질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어조였다.이수는 컵에 담긴 물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가야겠죠.”“선택이 아니라.”“네.”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이제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마주하는 단계인 것 같아요.”도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그 자리에 함께 서겠다는 뜻을 굳이 말로 반복하지 않았다.간담회 장소는 재단 건물의 소회의실이었다.외부에서는 기자들이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었다.방 안에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 몇 개, 그리고 녹음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녹음은 공식 기록용입니다.”담당자가 말했다.“원치 않으시면 중단하셔도 됩니다.”이수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그녀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서 있는 쪽을 택했다.그 선택 하나로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작가님께서 최근 상황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이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시작했다.“저는 설명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해명도, 부정도 하지 않겠습니다.”누군가 펜을 쥔 손을 멈췄다.“다만 분명히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이수는 시선을 들었다.“제가 쓴 이야기는 허구이기도 하고, 사실이기도 합니다.”그 문장은 의도적으로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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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흔들리는 선택의 무게

밤은 언제나 생각보다 빠르게 내려앉았다.도진의 집 거실에는 불이 하나만 켜져 있었다.창밖의 불빛이 유리창에 부딪혀 실내로 번지며 사람의 윤곽을 흐리게 만들었다.이수는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몸은 쉬지 못하고 있었다.손끝이 무의식적으로 무릎 위를 스쳤다.“오늘은 잠들기 어려울 겁니다.”도진이 말했다.마치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익숙해요.”익숙하다는 말은 강함을 의미하지 않았다.그저 반복되어 왔다는 뜻일 뿐이었다.도진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조금 더 당겼다.외부의 시선이 완전히 차단되자 공기는 한결 조용해졌지만,그 조용함이 안전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현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겁니다.”그의 목소리는 단정했다.“오늘은 탐색이었고, 다음은 개입일 겁니다.”이수는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그는 늘 그런 방식이었어요.”그 말 속에는 설명되지 않은 시간들이 겹겹이 숨어 있었다.“다가와서, 확인하고, 확신하면 그땐 멈추지 않죠.”도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두렵습니까.”이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두려움은 이미 지나갔어요.”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지금 느끼는 건… 무게예요.”“무게.”“네.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그 무게요.”도진은 그 말이 얼마나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것인지 알 것 같았다.잠시 침묵.그 침묵을 깬 것은 도진이었다.“그럼 하나만 묻겠습니다.”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제가 이 선택에 끝까지 함께해도 되는지.”이수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로 옮겨왔다.그 눈빛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함께하고 계세요.”“그건 제가 정한 겁니다.”도진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하지만 저는 당신의 선택을 확인하고 싶습니다.”이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도진 씨가 곁에 있지 않았다면 오늘, 그 자리에 서지 못했을 거예요.”그 말은 감사의 표현이 아니었다.사실의 진술이었다.“그러니까”그녀는 숨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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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이제 칼을 쥔 사람이 누군지 드러나는 겁니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불었다.도시의 소음이 잠시 멎은 틈 사이로 낯선 고요가 스며들었다.그 고요 속에서 세 사람의 선택은 조용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아직은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다.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은 지나 있었다.아침은 어제와 다르지 않게 시작되었다.햇빛은 같은 각도로 창을 스쳤고, 물은 같은 온도로 끓었다.그러나 이수는 어제와 다른 속도로 숨을 쉬고 있었다.말하지 않은 말들이 몸 안에서 자꾸만 자리를 바꾸고 있었기 때문이다.부엌에서 도진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잔에 물을 붓는 손길은 차분했지만, 그의 시선은 몇 번이나 창밖으로 향했다.“오늘은 밖에 나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그의 말은 권유에 가까웠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그러나 알고 있다는 말과 지킬 수 있다는 말은 늘 같지 않았다.그녀는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어젯밤 저장해 둔 문장이 화면 위에 그대로 떠 있었다.‘침묵은 회피가 아니다.’이수는 커서를 그 문장 끝에 두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도진이 맞은편에 앉았다.“오늘 연락이 더 올 겁니다.”“네.”“대답을 정해두셨습니까.”이수는 잠시 생각했다.“정해두지는 않았어요.”“그럼?”“어디까지 말하지 않을지만.”그 대답에 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가장 중요한 결정입니다.”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이수는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미 경계가 올라가 있었다.도진이 먼저 문으로 향했다.“택배입니다.”낯선 목소리. 그러나 너무 일상적인 말투.도진은 문을 완전히 열지 않았다.도어락을 건 채 문을 조금만 열었다.작은 상자 하나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보낸 사람 + 없음.도진은 상자를 들여다보았다.가볍지만, 내용물을 짐작할 수 없는 무게.“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이수는 이미 무엇이 들었을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제가 볼게요.”도진은 말리지 않았다.대신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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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오후 네 시가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이상하게 늘어졌다.시계 초침은 분명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데,그 사이사이에 불필요할 만큼 많은 생각이 끼어들었다.이수는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노트북은 닫혀 있었고, 그 옆에는 휴대전화 하나만 놓여 있었다.공식 입장. 말을 하겠다고 결정한 순간부터 그 말은 이미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어떤 문장은 잘리고, 어떤 어조는 왜곡되고, 어떤 침묵은 의도와 상관없이 해석될 것이다.도진은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서성이지도, 앉지도 않았다.마치 이 공간 전체를 몸으로 감각하고 있는 사람처럼.“지금이라도 형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그가 말했다.“서면으로만 전달하거나, 질문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이수는 고개를 저었다.“그럼 사람들은 더 물을 거예요.”“그래도 지금보다는”“아니에요.”이수는 도진을 바라보았다.“지금은 애매함이 제일 위험해요.”그 말은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었다.잠시 후, 휴대전화가 울렸다.재단 담당자였다.“작가님, 준비되셨을까요.”“네.”이수는 짧게 대답했다.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도진은 그녀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제가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그는 이수가 말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그러나 바로 밖에 있을 겁니다.”이수는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좋아요.”현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비공개라는 말은 입구까지만 유효했다.카메라, 노트북, 작게 켜진 녹음기들.이수는 지정된 자리에 섰다.의자에는 앉지 않았다.“오늘 이 자리는 질문을 받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그녀의 첫 문장은 분명했다.“제 이야기를 제 목소리로 전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입니다.”몇몇 기자가 서둘러 메모를 시작했다.“최근 제 작품과 제 사생활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이수는 숨을 고르고 이어서 말했다.“저는 작품의 진정성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그 문장은 순간 공기를 바꾸었다.“그러나 작품을 이유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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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그 선은 함께 정해도 됩니다...

차는 한동안 시동을 끄지 않은 채 멈춰 있었다.엔진이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얇게 긁고 있었다.도진은 창밖을 다시 한 번 살폈다.차 안의 어둠과 차 밖의 어둠은 비슷한 색을 하고 있었지만 성질은 전혀 달랐다.“내려보겠습니다.”그는 조용히 말했다.확인이라기보다는 이미 정해진 동작을 입 밖으로 옮긴 말에 가까웠다.“혼자”“잠깐이면 됩니다.”이수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의 움직임을 막지 않는 것이 지금의 선택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도진이 차문을 닫자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그 소리는 괜히 크게 느껴졌고, 그만큼 이 밤이 예민하다는 뜻이기도 했다.그는 천천히 차량 쪽으로 걸어갔다.도발하지도, 숨지도 않는 중간의 속도였다.차 안에서는 누군가 내릴 기척이 없었다.“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도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잠시 뒤, 조수석 창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안쪽에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젊지도, 늙지도 않은 얼굴.감정을 최대한 지운 표정.“도진 씨죠.”질문처럼 들렸지만이미 알고 있다는 어조였다.“무슨 용건입니까.”“확인차 왔습니다.”“무엇을.”남자는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고른 뒤 말했다.“작가님이 오늘 하신 선택이 어떤 의미인지.”도진은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그 의미를 당신이 판단할 필요는 없겠지요.”남자는 작게 웃었다.“보통은 그렇죠.”그는 창을 더 내리지 않았다.거리는 그대로 유지된 채였다.“하지만 누군가는 그 선택 이후를 관리해야 합니다.”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진은 충분히 이해했다.“돌아가시죠.”도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남자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차창이 다시 올라갔고, 차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도진은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차 안에서 이수는 그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문이 열리고 도진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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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선택은 말보다 먼저 온다

새벽은 언제나 먼저 도착한 사람처럼 조용히 집 안을 채웠다.불을 켜지 않아도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이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밤새 그대로였다.잠들지 못했다기보다는 잠들지 않기로 선택한 자세에 가까웠다.부엌 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컵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그리고 아주 짧은 숨.도진이었다.“잠이 안옵니까?.”그는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책망도, 염려도 아닌 사실 확인에 가까운 말투였다.“도진 씨도요.”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답했다.도진은 그녀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조금 비켜 선 채 창가에 기대 섰다.그 거리에는 의도적인 계산이 담겨 있었다.“오늘은 연락이 올 겁니다.”“누구에게서요.”“어제 그 사람들.”이수는 잠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풀었다.“조건을 제시하겠죠.”“네.”“저를 빼고?”도진은 즉답하지 않았다.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가능성이 큽니다.”이수는 작게 웃었다.웃음이라기보다는 한 번 숨을 고른 표정에 가까웠다.“그럼 제가 해야 할 선택은 이미 정해진 거네요.”도진이 고개를 돌렸다.“아직은 아닙니다.”“도진 씨.”이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사람들이 원하는 건 항상 비슷해요. 조용해지라는 것. 말하지 말라는 것. 혼자 있으라는 것.”그녀는 시선을 들었다. 눈동자가 맑았다.“하지만 그건 선택이 아니에요. 지워지는 과정이죠.”도진의 턱선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래서 제가 옆에 있는 겁니다.”“옆에 있으면 당신이 위험해져요.”“이미 그 선은 넘었습니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그 담담함이 오히려 확고했다.잠시 후,이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예상보다 빠른 연락이었다.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그녀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왔어요.”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받으세요.”이수는 스피커를 켰다.“말씀하세요.”상대의 목소리는 정중했다.그러나 정중함 아래에는 명확한 방향이 있었다.“작가님께서 최근 공개적인 발언을 하신 이후, 여러 방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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