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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천년의 기억: Chapter 221 - Chapter 230

273 Chapters

222. 서로를 향한 속도의 차이

아침은 늘 공평하게 밝아왔지만, 사람의 마음속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이수는 창문을 열어둔 채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쓴맛이 입안에 오래 남았다.어쩐지 그 여운이 요즘의 마음과 닮아 있었다.며칠 사이, 그녀는 자신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확실한 변화라기보다는 결의의 방향이 미세하게 틀어진 느낌에 가까웠다.예전 같았으면 굳이 생각하지 않았을 감정들에 자꾸만 발이 걸렸다.도진.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일은 이제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하루의 중간중간, 숨을 고르는 틈마다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그 사실이 이수를 가장 경계하게 만들었다.오후가 되자 약속이 하나 잡혔다.출판사 미팅이 끝난 뒤, 도진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근처에 계시면-잠깐 얼굴 볼 수 있을까요?이수는 잠시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잠깐’이라는 말이 요즘 들어 묘하게 무겁게 느껴졌다.그래도 그녀는 답장을 보냈다.-네.-조금 늦어도 괜찮다면요.-물론이죠.그의 답장은 늘 빠르지만 조급하지는 않았다.그 점이 이수를 안심시키면서도 또 다른 생각을 불러왔다.카페는 낮보다 사람이 적었다.창가 자리에 앉은 도진은 서류를 정리하다가 이수가 들어오는 걸 보고 곧바로 일어섰다.“미팅은 잘 끝났어요?”“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늘 그렇듯 무난하게요.”“무난한 게 제일 어렵죠.”그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도진은 이수의 표정을 유심히 보았다.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얼굴에 남아 있었다.“피곤해 보여요.”“조금요.”이수는 솔직하게 말했다.“몸보다는… 생각이요.”도진은 그 말의 끝을 더 묻지 않았다.대신 컵을 밀어주었다.“차로 시켰습니다. 커피보다 나을 것 같아서요.”“고마워요.”그 배려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수는 순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이런 사소한 것들이 어느새 관계의 깊이를 증명하는 증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이수 씨.”도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혹시… 제가 너무 빠른 건 아닐까요.”그 질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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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흔들리는 쪽의 이름

밤새 비가 내렸다.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창을 두드리는 리듬이 일정하지 않아 이수는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깨었다기보다, 완전히 잠들지 못한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냈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아침이 되었을 때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젖은 흔적만 남기고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사람들은 출근했고, 차들은 신호에 맞춰 멈췄다.세상은 늘 이렇게 개인의 동요와 무관하게 정확한 속도로 돌아갔다.그 점이 이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원고 작업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문장은 분명히 머릿속에 있었는데,키보드 위로 내려오는 순간마다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났다.그녀는 몇 번이나 같은 문단을 지우고 다시 썼다.결국 이수는 노트북을 덮었다.“지금은 아니야.”말을 해도 방 안에는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그 고요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이수는 무의식적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도진의 이름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연락하고 싶은 이유는 분명했지만,연락해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는 선명하지 않았다.그 모호함이 그녀를 망설이게 했다.같은 시각, 도진은 체육관에서 묵묵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무리한 훈련은 아니었지만, 평소보다 더 오래, 더 집중해서 움직였다.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고, 호흡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그러나 가슴 안쪽에서 익숙한 압박감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그는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숨을 고르며 손바닥으로 흉부를 눌렀다.“지금은… 아니야.”누군가에게 말하듯, 혹은 자신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렸다.이 통증이 항상 나타나는 시점이 있었다.이수와 관련된 생각이 깊어질 때.혹은, 그녀와의 거리가 갑자기 가까워졌다고 느낄 때.도진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제는 부정하기 어려웠다.오후가 되자 예상치 못한 연락이 왔다.현이었다.-저녁에 시간 괜찮으십니까?-잠깐 이야기하고 싶습니다.도진은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짧게 답했다.-네.-가능합니다.답장을 보내고 나서 그는 이유를 곱씹었다.왜 망설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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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해질녘 애매한 빛 아래 생겨나는 기억의 그림자

해가 지기 전의 시간은 항상 애매했다.낮이라고 부르기엔 빛이 약했고, 밤이라 하기엔 아직 사람들의 기척이 남아 있었다.이수는 그 애매한 시간대를 유난히 싫어했다.무언가를 결심하기엔 부족하고,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엔 감정이 너무 또렷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그날도 그랬다.원고를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날일수록 머릿속에서는 문장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이수는 메모 앱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지금 적어두면, 그 문장들은 다시 ‘이야기’로 변해버릴 것 같았다.그녀는 지금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붙잡고 싶었다.도진의 목소리, 잠시 멈췄던 숨,그리고 “천천히 가자”라는 말에 담긴 그의 태도.그것들은 소설처럼 극적이지 않았고, 그래서 더 믿을 수 있었다.도진 역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평소보다 길게 느껴졌다.차 안에서 라디오를 켰다가 곧 껐다.어떤 목소리도 지금의 정적을 대신할 수 없었다.현과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다.’그 문장은 이상하게도 도진을 화나게 하기보다 경계하게 만들었다.그 말 속에는 경쟁의식보다 소유욕에 가까운 감정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도진은 이수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녀가 그 감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불편했다.며칠 뒤,이수는 출판사에서 미팅 요청을 받았다.현이 직접 나오는 자리였다.“부담되시면, 다른 편집자를”담당자가 말을 꺼냈지만 이수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괜찮지 않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피하는 것은 지금의 이수에게 선택지가 아니었다.회의실에서 현은 여전히 매끄러운 사람이었다.말투도, 표정도, 거리 조절도.“최근 원고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습니다.”그가 말했다.“독자 반응은 나쁘지 않아요.”이수가 대답했다.“그게 문제일 수도 있죠.”현은 미소를 지었다.“독자들이 좋아하는 건 언제나 ‘변화’니까.”이수는 그 말이 원고를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 구분하지 않았다.“현 대표님은,”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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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말해지지 않은 방향

비가 올 듯 말 듯한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닮아 있었다.결정되지 않은 감정은 언제나 가장 무거운 법이었다.이수는 창가에 서서 도시의 색이 조금씩 바래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빛은 여전히 많았지만, 그 빛들이 하나로 모이지 못한 채 각자의 자리에서 흩어지고 있었다.마치 지금의 자신처럼.그녀는 문득 도진과의 첫 만남 이후 얼마나 많은 ‘잠깐’을 지나왔는지 떠올렸다.잠깐 웃었고, 잠깐 침묵했고, 잠깐 서로를 이해한 것 같다가도 다시 거리를 두었다.그 모든 잠깐이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이수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선택은 늘 어떤 방향을 만들고 있었다.도진은 오전 회의를 마친 뒤 혼자 주차장에 서 있었다.시동을 걸지 않은 채 운전대에 손을 얹고 한동안 그대로였다.현의 이름이 회의 안건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 때,도진은 이유 없이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업계의 이야기였고, 전혀 개인적일 이유가 없었지만 가슴 어딘가가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경계해라.’그 말이 누군가의 음성처럼 머릿속에서 울렸다.그러나 그 ‘누군가’가 과거의 자신인지, 아직 기억나지 않는 무엇인지 도진은 알 수 없었다.그는 결국 차를 몰아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대신 이수가 자주 들르던 서점 근처에 차를 세웠다.이수는 그 서점 안에 있었다.새 책 냄새와 종이의 마찰음은 언제나 그녀를 조금씩 진정시켰다.책장을 넘기다 말고 휴대전화가 울렸다.-근처에 있습니다.-잠깐 볼 수 있을까요?그 메시지는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 그녀를 향해 있었다.이수는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고 짧게 답했다.-네.-여기예요.서점 앞에서 두 사람은 마주 섰다.말없이도 서로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갑자기 불러서 미안해요.”도진이 먼저 말했다.“괜찮아요.”이수가 고개를 저었다.“저도… 생각이 좀 많았어요.”잠시 침묵이 흘렀다.그 침묵은 어색함보다는 정리되지 않은 마음의 형태에 가까웠다.“오늘,”도진이 조심스럽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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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우산 없이 비를 맞으며 맞이한 결심과 두려움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건 예고도 없이였다.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는 일정하지 않았고, 그 불규칙함이 도시의 숨결처럼 퍼져나갔다.이수는 우산을 펴지 않은 채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비를 맞겠다는 선택이 아니라, 지금은 어떤 선택도 서두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빗방울이 어깨에 닿아 천천히 스며들었다.그녀는 생각했다.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과거를 끌어안고 살아온 시간과 지금 눈앞에 놓인 현재가 어느 지점에서 겹쳐지고 있는지.도진은 창밖을 바라보다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걸지 않았다.이수의 이름을 화면에 띄운 채로 한참을 그대로 두었다.그의 가슴에는 그날따라 통증이 없었다.그 대신 묘하게 텅 빈 느낌이 남아 있었다.통증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안도보다 불안을 먼저 불러왔다.그는 알았다.이 공백이 곧 무언가로 채워질 것이라는 걸.좋든 나쁘든, 지금의 균형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현은 늦은 밤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책상 위에는 이수의 원고 출력물이 정리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그는 몇 장을 넘기다 말고 손을 멈췄다.문장 하나가 눈에 박혔다.-사람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반복해서 선택하기도 한다.현은 그 문장을 두 번, 세 번 읽었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웃음은 소리 없이 입술에만 머물렀다.“그래서…”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건가.”그는 출력물을 덮었다.결론은 아직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방향은 이미 정해진 듯했다.며칠 뒤, 이수는 출판사로부터 행사 제안을 받았다.작가와의 공개 대담, 그리고 사인회.일정표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사람들 앞에 서는 일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그러나 피할 수도 없었다.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그 책임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그녀는 답장을 보냈다.-일정 확인 후-알려주세요.보내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그 짧은 문장 안에는 결심과 두려움이 함께 들어 있었다.도진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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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심장에 남은 자리

서울의 밤은 언제나 과도할 만큼 밝았다.유리로 둘러싸인 고층의 거실에서 내려다본 도시는마치 숨 쉬는 생물처럼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었지만, 도진에게 그 빛은 언제나 조금 늦게 도달했다.그는 창 앞에 서 있었다.정장은 단정했고,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으나 어깨선 아래로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숨을 들이마시려는 순간, 가슴 깊은 곳이 갑작스럽게 조여왔다.통증이었다.날카롭지도, 둔하지도 않은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압박감.마치 오래전 이미 끝난 상처가 기억만 남긴 채 다시 제 존재를 주장하는 것처럼.도진은 무의식적으로 심장 위를 눌렀다.손바닥 아래에서 박동이 어긋나 있었다.“……또.”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또 시작인가.”그는 병원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이상 소견 없음. 심장 박동 정상.스트레스성 통증일 가능성.그 모든 설명이 이 순간만큼은 하나도 닿지 않았다.왜냐하면 이 고통은 ‘지금’에서 시작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눈을 감자 어둠 속에 형체 없는 이미지들이 스쳤다.붉은 빛. 차가운 바닥.피 냄새와 함께 사라지지 않는 어떤 감각.그는 끝내 그것을 붙잡지 않았다.붙잡을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다는 걸 이미 수없이 경험했기 때문이다.도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유리창 너머의 도시는 여전히 평온했다.아무 일도 없다는 듯.그러나 그 평온함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때, 머릿속에 문득 한 얼굴이 떠올랐다.이수.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조이던 통증이 아주 미세하게 방향을 바꾸었다.줄어들지도, 사라지지도 않았지만 그 고통은 분명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도진은 그 사실이 무섭도록 선명해졌다는 것에 잠시 숨을 멈췄다.같은 시각,다른 곳에서 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모니터에는 이수의 소설 원고 일부가 떠 있었다.이미 여러 번 읽은 문장이었다.문장 하나하나를 외울 정도로. 그런데도 오늘은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손끝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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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이유 없는 불안 속에 울려 퍼진 도진의 이름

밤은 조용했지만, 이수의 방 안 공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창을 닫아두었는데도 바람이 스친 것처럼 커튼 끝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흔들림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그녀는 이유 없이 숨을 고르게 되었다.설명할 수 없는 예감이었다.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연락 하나, 소식 하나 도착하지 않았지만무언가가 어긋나고 있다는 감각만이 조용히 방 안에 눌어붙어 있었다.이수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열어둔 노트북 화면에는 미완의 문장이 남아 있었다.지금껏 수없이 고쳐 쓴 문장,그러나 오늘은 그 문장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그는 칼을 들지 않았다.그럼에도 세상은 베여 있었다.이수는 키보드 위에서 손을 떼었다.그 문장은 오늘의 마음을 담아내지 못했다.지금의 감정은 문장보다 먼저 몸의 안쪽에서 파문처럼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가슴 아래가 얇게 일렁였다.통증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옅었고, 불안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정확했다.“……도진.”그녀는 스스로도 놀라 그 이름을 낮게 불렀다.누가 들을 리 없는 밤이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이름은 공기 속에 잠시 머물다그녀의 가슴으로 되돌아왔다.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도시는 불빛으로 가득했지만 그 불빛들 사이에서 그녀가 찾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상하리만큼 또렷했다.아프다.그녀는 그 사실을 논리로 이해하지 않았다.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도진은 지금, 아프다.이수는 손을 움켜쥐었다.손끝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 힘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그저 자신이 아직 이쪽 세계에 단단히 서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였다.그녀는 알고 있었다.도진이 자신의 상태를 말로 꺼내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아픔조차 스스로 정리해 몸 안에 묻어두는 사람이라는 것도.그래서 더 불안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어떤 문장도 지금 이 감각을 정확히 담아내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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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닿지 말아야 할 선

현은 같은 문장을 세 번째로 읽고 있었다.이미 외워버린 문장이었고,그럼에도 다시 읽는 이유는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그 문장은 이수의 소설 속에 있었다.그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은 조용히 화면을 껐다.모니터가 꺼지자 방 안의 조명이 한층 더 차갑게 느껴졌다.“지킨다…”그는 낮게 웃었다.웃음이라기엔 숨에 가까운 소리였다.지킨다는 말은 언제나 선택받은 자의 언어였다.그리고 그 선택권을 현은 한 번도 남에게 준 적이 없었다.탁자 위에 놓인 자료철을 집어 들었다.이수의 일정. 출판사 미팅.사인회 이후의 인터뷰 요청들.그리고 그 사이,의도적으로 끼워 넣은 한 줄.도진 - 비공식 동행 추정현의 손끝이 멈췄다.“추정.”그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확실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사람을 더 미치게 만든다.그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일정 하나 비워둬.”잠시 침묵.“예, 대표님. 혹시 이유를 여쭤봐도”“묻지마.”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그러나 그 부드러움에는 대화를 끝내는 힘이 있었다.전화를 끊은 뒤 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창가로 가지 않았다.오늘은 도시를 내려다보고 싶지 않았다.대신 거울 앞에 섰다.말끔한 정장. 흐트러짐 없는 머리.누가 봐도 안정적인 얼굴.현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상하지 않나.”대답은 없었다.그러나 그는 말을 이었다.“나는 그녀를 처음 본 날부터 불편했어.”그 불편함은 사랑도, 증오도 아니었다.그보다는 ‘내 것이 아닌 무언가를 이미 가진 사람’을 마주했을 때의 감각에 가까웠다.현은 기억해냈다.백화점의 소음. 사인회장의 빛.그리고, 도진이 쓰러지던 순간.그 장면에서 이수는 단 한 번도 현을 보지 않았다.그 사실이 현의 마음을 가장 깊이 긁었다.그는 천천히 웃음을 지웠다.“확인해야겠지.”누가 먼저 그 선을 넘었는지.아니면, 이미 선이 없어진 건지.다음 날, 현은 이수를 찾았다.공식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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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괜찮아요"라는 대답에 스민 이수의 숨겨진 침묵

도진은 이수가 평소보다 말을 적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대화가 끝난 뒤에야 알아차렸다.말수가 줄었다기보다는,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이 달라져 있었다.예전보다 조금 더 길었고, 그 사이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 듯한 공기가 있었다.“오늘은… 좀 피곤해 보이네요.”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이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괜찮아요. 요즘 일정이 조금 겹쳐서.”괜찮다는 말은 늘 그렇듯대답이 아니라 마침표처럼 들렸다. 도진은 더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것이 배려일 때가 있다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걷고 있었다.저녁이 내려앉은 거리,유리창에 반사된 불빛들이 천천히 발밑으로 흘러갔다.“집까지 바래다줄게요.”“아니에요. 여기서 갈게요.”이수의 대답은 빠르지 않았지만 망설임도 없었다.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반 걸음 뒤에 섰다.그 순간, 그의 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어긋났다.아픔은 아니었다.익숙한 통증도 아니었다.대신, 공기가 바뀌는 감각.도진은 고개를 들었다.거리는 여전히 평온했고,사람들은 제각각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느꼈다.지금, 이 풍경 안에 이질적인 시선이 하나 섞여 있다는 것.그 시선은 노골적이지 않았다.따라오지도 않았고, 부딪히지도 않았다.그저 너무 정확하게,이수의 동선을 알고 있다는 느낌.도진은 멈췄다.이수는 몇 걸음 더 걷다가 그를 돌아봤다.“왜 그래요?”“아니요.”그는 짧게 답했다.그리고 시선을 돌려 반대편 유리창을 바라봤다.거울처럼 비친 자신의 얼굴.그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오래전 감각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지켜야 할 대상이 생겼을 때의 감각.도진은 그 감각을 설명할 수 없었다.그저 몸이 먼저 반응했다.“이수 씨.”그가 불렀다.“오늘은 제가 여기까지만 갈게요.”이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아까는 집까지”“오늘은 여기까지만.”그의 말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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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조용히 옮겨진 말

현은 전화를 끊은 뒤에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창밖에는 빛이 많았고, 그 빛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그는 책상 위에 놓인 얇은 파일 하나를 열었다.이수.이름 석 자 아래로정리된 기사, 일정, 평판,그리고 사람들.현은 그중 한 줄에 시선을 멈췄다.“가까운 지인: 도진(기업가)”지인이라는 단어는 참 편리했다.애매하고, 무해해 보이고, 그래서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바꿀 수 있었다.현은 비서를 불렀다.“믿을만한 기자 한 명 알아봐.”“입이 무거워야 하겠죠?”“응”현의 대답은 짧았다.“요즘 문화면 말고, 사회면으로도 이야기 하나 던질 수 있는 사람.”비서는 더 묻지 않았다.그는 이미 대표가 어떤 표정을 지을 때 어떤 질문이 금기인지 알고 있었다.잠시 후, 다른 전화가 연결됐다.“오랜만입니다.”상대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반가웠다.“요즘도 사람들 이야기 잘 쓰시죠.”현의 말투는 대화라기보다 날씨를 묻는 것처럼 가벼웠다.“덕분에요. 대표님 쪽은”“소설 하나가 있더군요.”현이 말을 잘랐다.“너무 현실적이라 사람들이 헷갈린다는.”상대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웃으며 말했다.“아, 그 작품이요. 요즘 화제죠.”“그런데.”현은 의자를 천천히 밀며 몸을 기대었다.“그 리얼함이 어디서 왔을까, 궁금해지지 않습니까.”“무슨 말씀이신지…”“작가의 경험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이야기인지.”현의 말은 단정이 아니라 질문처럼 포장된 암시였다.상대는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다.그러나 침묵이 길어졌다는 것은 이미 관심이 생겼다는 뜻이었다.“사실 여부를 확인해보면 재밌을 수도 있겠네요.”현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확인은 필요 없습니다.”그는 부드럽게 말했다.“그냥 의문이면 충분합니다.”전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현은 상대에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그저 의심이 자랄 토양만 남겼다.전화를 끊고 난 뒤, 현은 창가로 갔다.이번에는 도시를 내려다봤다.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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