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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천년의 기억: Chapter 241 - Chapter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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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도망치지 않을게요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아침을 건너왔다.신호등은 제 시간을 지켰고, 카페의 문은 늘 하던 대로 열렸으며,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을 아무 설명 없이 안고 걸었다.그러나 이수의 하루는 이미 어제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거울 앞에 잠시 섰다.화장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머리카락도, 옷차림도. 달라진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뿐이었다.도진은 현관 옆에 서 있었다.신발을 신은 채, 문을 먼저 열지 않고 기다리는 자세로.“같이 나갈 겁니까.”그가 물었다.“네.”이수는 주저 없이 답했다.“오늘은 숨기고 싶지 않아요.”도진은 그 말의 무게를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의 선택이 사소한 동행이 아니라는 것도. 문을 나서자 바람이 먼저 스쳤다.이수의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그 순간,도진은 아주 짧게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익숙하지 않은 공기의 밀도.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공간에 남아 있는 듯한 기척.“잠깐.”그가 걸음을 멈췄다.“왜요?”“그냥 확인하고 가죠.”도진은 골목 끝을 한 번,건너편 유리창에 비친 반사를 한 번, 그리고 이수의 등 뒤를 한 번 더 살폈다.아무것도 없었다.적어도 보이는 것들 중에는.“괜찮습니다.”그는 말했지만, 목소리는 조금 더 낮아져 있었다.차에 오르자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문화면의 짧은 코너였다.“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행보에 대해 업계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이수는 손을 뻗어 라디오를 껐다.“오늘은 그 이야기 안 듣고 싶어요.”“안 들어도 됩니다.”도진은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요.”차창 밖으로 사람들이 흘러갔다.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통화를 하며, 누군가는 아무 표정 없이 길을 건넜다.이수는 그 풍경을 보다가 문득 말했다.“도진 씨.”“네.”“만약에요.”그녀는 문장을 한 번 접었다가 다시 펼쳤다.“이 모든 게 더 커진다면, 당신까지 잃게 된다면”“그 가정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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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흔들리는 쪽은 언제나 마음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밝은 복도의 소음이 한 박자 늦게 밀려들었다.구두 소리, 낮은 인사, 서류가 스치는 소리들.모두 일상의 얼굴이었다.그러나 이수에게는 그 일상이 유리처럼 얇아 보였다.“이쪽입니다.”직원이 길을 안내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도진은 반 걸음 뒤에서 자연스럽게 위치를 잡았다.그 배치는 누가 정한 것도, 누가 요구한 것도 아니었지만둘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익숙한 거리였다.회의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안쪽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자였다.아니, 기자들.“오늘은 사진도 같이”“질문은 사전에”“SNS 반응이”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미 이야기는 이수의 것이 되어 있었다.손잡이에 손을 얹은 순간,이수는 자신의 심장이 생각보다 차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괜찮겠습니까.”도진이 낮게 물었다.“네.”이수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이제는 괜찮아요.”문이 열렸다.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플래시가 터졌고, 순간적으로 공기가 뜨거워졌다.이수는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그 말 하나로 소음은 조금 가라앉았다.그녀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앉으면 방어처럼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오늘은 질문을 많이 받지 않겠습니다.”기자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대신 제가 먼저 말씀드릴 게요.”도진은 회의실 벽 쪽에 서서 그 모든 반응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이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제 소설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기억이기도 합니다.”그 말에 누군가 펜을 멈췄다.“그리고 그 기억은 제가 선택해서 쓴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들이었습니다.”질문이 나오기 전, 그녀는 말을 이었다.“그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저와 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그녀는 잠깐 시선을 옮겼다.도진을 향해.“그 관심이 어디까지 허락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긋고 싶습니다.”회의실의 공기가 눈에 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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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말하지 않은 것은 아직 선택의 영역에 있다

차는 도심을 벗어나 조금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빌딩의 유리면이 사라지고, 나무가 늘어선 도로가 나타났다.속도가 느려지자 이수의 숨도 조금씩 제 박자를 찾았다.창밖을 보던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이상하죠.”“무엇이요.”“말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오히려 하지 않은 말들이 더 무겁게 남아 있어요.”도진은 잠시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풀었다.“말하지 않은 것은 아직 선택의 영역에 있다는 뜻입니다.”“선택…”“네. 말해버리면 되돌릴 수 없지만, 말하지 않으면 아직 지킬 수 있죠.”이수는 그 말의 끝을 천천히 되짚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더 버거운 걸지도 모르겠어요.”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잠시의 정적. 엔진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경적만이 공기를 채웠다.그때 도진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그는 화면을 힐끗 보았다.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무슨 일이에요?”“확인해야 할 게 생겼습니다.”“지금요?”“예.”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당신과 관련된 건 아닙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이수는 그 말에서 ‘당장’이라는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현 씨 쪽이죠.”도진은 부정하지 않았다.“그 사람의 움직임이 조금 빨라졌습니다.”신호가 바뀌었고, 차는 다시 출발했다.이수는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조용히 물었다.“제가 부담이 되는 건 아니죠.”도진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엔진을 껐다.“이수 씨.”그는 처음으로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부담이라면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 겁니다.”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그럼…”“지켜야 할 선택입니다.”도진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당신이 이야기를 선택했듯이, 저는 당신 곁에 있는 걸 선택했습니다.”그 말은 과장도, 각오의 선언도 아니었다.이미 내려진 결정을 그대로 옮긴 문장이었다.이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저는요.”그녀가 말했다.“지금도 가끔 겁이 나요. 당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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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바람이 지나간 자리

해가 완전히 저물자 공원의 공기는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사람들의 발걸음은 뜸해졌고,남은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차량의 마찰음뿐이었다.이수는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손끝이 조금 시렸지만 말하지 않았다.도진은 그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예전에는,”이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밤이 이렇게 조용하면 안심이 됐어요.”도진이 고개를 돌렸다.“지금은요.”“지금은… 조용한 밤이오히려 무섭게 느껴져요.”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숨김이 없었다.도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벤치에 함께 앉았다.“조용한 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그가 말했다.“일어나기 직전의 숨 고르기일 때가 많습니다.”이수는 그 말을 이해했다.그래서 반박하지 않았다.“도진 씨는 언제부터 이런 느낌을 알게 됐어요.”“아주 오래전부터요.”그 대답은 자연스러웠지만그 안에 말해지지 않은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수는 더 묻지 않았다.지금은 알아야 할 때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잠시 후, 도진의 휴대전화가 다시 진동했다.이번에는 그가 바로 받지 않았다.“안 받아도 돼요.”이수가 말했다.“아닙니다.”도진은 전화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화를 나눴다.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빨라져 있었다.“현 씨가,”이수가 먼저 물었다.“예.”“뭔가… 결정한 것 같죠.”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극단적인 선택을 떠올리기 시작합니다.”“그리고 그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고요.”“중요한 건 자신이 잃고 있다는 감각을 멈추는 것이니까요.”이수는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죠.”“흔들리지 않으면 됩니다.”도진은 차분하게 말했다.“그가 원하는 건 당신의 불안이고,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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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모르는 채로 잠드는 게 축복일 때도 있다

차가 도심으로 다시 들어섰을 때, 창밖의 불빛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늦은 시간의 거리에는 각자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그 모습은 이수에게 잠시 현실감 없는 장면처럼 느껴졌다.“저 사람들은,”이수가 낮게 말했다.“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을 끝내겠죠.”“대부분은 그렇습니다.”도진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에는 오래된 체념이 섞여 있었다.“모르는 채로 잠드는 게 축복일 때도 있죠.”“도진 씨는 그 축복을 가진 적 없죠.”그의 손이 핸들 위에서 잠시 멈췄다.그러나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아주 오래전부터요.”차는 이수의 집 근처에 멈춰 섰다.엔진 소리가 꺼지자 갑작스럽게 고요가 내려앉았다.그 고요 속에서 이수는 문을 열지 않은 채 잠시 머뭇거렸다.“오늘은… 여기까지죠.”“네.”도진은 곧장 내리려 하지 않았다.이수는 그가 아직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는 걸 느꼈다.“이수 씨.”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앞으로 한동안, 일상이 조금 더 불편해질 겁니다.”“위험해진다는 뜻이죠.”“그렇습니다.”“그래도”이수는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뒤 다시 말했다.“그래도 당신이 곁에 있다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그 말은 의존이 아니었다.동행을 선택하는 사람의 태도였다.도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그 말 하나면 충분합니다.”이수는 차에서 내렸다.문을 닫기 전, 그녀가 다시 몸을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오늘뿐만이 아닙니다.”그의 대답에 그녀는 작게 웃었다.집으로 들어간 뒤, 이수는 신발을 벗고도 한동안 서 있었다.집 안은 너무 조용했다.공원의 밤보다도, 차 안보다도 더 고요했다.불을 켜지 않은 채 거실 창가로 다가갔다.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어딘가 낯설었다.“괜찮아.”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그러나 가슴 안쪽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그 시각, 도진은 차를 몰아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라디오도, 음악도 켜지 않았다.침묵 속에서 그는 몸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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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닿지 않은 경계

밤은 끝내 잠으로 흘러가지 않았다.이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불을 끄고 한참이 지났지만 눈은 좀처럼 감기지 않았다.생각이 많아서가 아니라, 감각이 깨어 있어서였다.창밖에서 어디선가 문 닫는 소리가 났다.아파트의 일상적인 소음이었다.그러나 그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리는 밤이었다.이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부엌으로 가 물을 따랐다.컵을 쥔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괜찮아.”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대신 속으로만 몇 번이나 되뇌었다.물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그 애매함이 오히려 마음에 남았다.그녀는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불 켜진 창들이 규칙 없이 이어져 있었다.각자의 삶이 각자의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 같았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진동이었다.이수는 화면을 보지 않고도 누군지 알았다.도진.전화를 받자 잠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그 침묵이 이상하지 않았다.“잠 못 이루셨군요.”도진이 먼저 말했다.“도진 씨도요.”“예.”짧은 대답. 그러나 그 안에는 같은 밤을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이 담겨 있었다.“무슨 일 있었어요?”“특별한 건 없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다만 이상하게 집이 너무 조용해서요.”이수는 작게 웃었다.“저도요. 조용해서 오히려 잠이 안 와요.”전화기 너머에서 그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이수 씨.”“네.”“오늘은 경계가 유난히 얇습니다.”그 말은 설명 같기도, 경고 같기도 했다.“그래서 제가 전화한 겁니다.”“확인하려고요?”“아니요.”그는 조용히 말했다.“당신이 괜찮은지.”이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괜찮다는 말이 너무 가벼워 보였고, 괜찮지 않다는 말은 너무 무거워 보였다.“지금은… 버틸 수 있어요.”그녀가 말했다.“그걸로 충분합니다.”도진의 목소리는 확신에 가까웠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이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조금 단단해 보였다.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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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제 삶의 중심을 설명하지 않겠다

아침은 예상보다 맑았다.구름은 높았고, 햇빛은 날카롭지 않았다.마치 오늘이 평범한 하루일 수 있다고 도시가 먼저 말해주는 듯했다.이수는 창을 열어 환기를 했다.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며 밤의 잔여를 밀어냈다.그러나 머릿속까지 말끔해지지는 않았다.전날 밤의 통화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도진의 목소리, 그가 말한 ‘경계’라는 단어. 그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이수는 커피를 내리며 손잡이를 꼭 쥐었다.뜨거운 김이 올라왔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오늘이구나.”그녀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말했다.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메시지 하나.오전 11시,그때 이야기합시다.-현이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이미 거절하지 않겠다는 뜻은 침묵으로 전해진 상태였다.그 시각, 도진은 집을 나서며 현관 앞에서 잠시 멈췄다.이유 없이 발걸음이 느려졌다.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오늘은 몸보다 감각을 더 믿어야 하는 날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차에 오르기 전, 그는 이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연락 오면 바로 알려주세요.잠시 후, 짧은 답이 왔다.-알겠어요.그 두 글자만으로도 도진은 지금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차분하려 애쓰는 사람의 톤이었다.오전은 느리게 흘렀다.이수는 집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다.약속까지 두 시간 남짓. 무엇을 해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결국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너무 단정해 보이지 않게, 그러나 흔들려 보이지도 않게.“설명하지 말 것.”“변명하지 말 것.”그녀는 속으로 몇 가지를 정리했다.“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 것.”약속 장소는 사람이 많지 않은 호텔 라운지였다.공개적인 장소. 현이 고른 이유는 명확했다.이수는 먼저 도착했다.자리에 앉아 물 한 잔을 주문했다.손끝이 유리잔을 스칠 때 아주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잠시 후, 현이 들어왔다.정장은 단정했고, 표정은 놀랍도록 온화했다.“기다리게 했군요.”그는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아니에요.”이수는 짧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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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돌아오지 않는 온도

도진은 차 문을 닫은 뒤에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엔진 소리는 이미 멎었고, 거리의 소음만이 유리창 너머에서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이수는 그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말없이, 그러나 도망치지 않은 자세로.두 사람 사이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간은 말로 채워지지 않았다.말은 필요할 때만 존재해야 했다.지금은 아직 아니었다.“추웠어요?”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낮았고, 평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아니요.”이수는 고개를 저었다.“햇빛이 있었어요.”그 대답은 사실이기도 했고, 사실이 아니기도 했다.햇빛은 있었지만, 그 온도는 마음까지 닿지 않았다.도진은 차를 출발시켰다.부드럽게, 그러나 망설임 없이.“현 씨와는…”그가 말을 꺼내다 멈췄다.묻는 순간, 이미 경계가 흔들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끝냈어요.”이수는 짧게 말했다.“정확히 말하면 선을 다시 그었어요.”도진은 그 말을 곱씹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당신 얼굴이 이렇게 단단해 보이는군요.”“단단해 보이나요?”“예.”그는 시선을 도로 위에 둔 채 말했다.“무너질 사람은 저런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이수는 잠시 웃었다.그러나 그 웃음은 가볍지 않았다.“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얼굴일 수도 있죠.”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차의 속도를 아주 조금 낮췄다.“오늘은 집에 바로 들어가세요.”“왜요?”“오늘은…”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도시의 공기가 너무 좋습니다.”이수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의도가 많은 날이라는 뜻이었다.“도진 씨는요.”“저는 잠깐 다른 데 들렀다 가겠습니다.”그 말은 설명이 아니었다. 선언에 가까웠다.차가 이수의 집 앞에 멈췄다.엔진 소리가 다시 잦아들었다.이수는 문을 열다 말고 도진을 돌아봤다.“오늘… 와줘서 고마워요.”“당연한 일입니다.”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리고,”이수가 말을 이었다.“혹시라도 오늘 제가 흔들려 보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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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연결되지 않는 선택이 유일한 대답이었다

비가 오지는 않았다.그러나 공기는 비가 내리기 직전처럼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이수는 창을 닫고 커튼을 반쯤 내렸다.밖의 빛을 전부 차단하지는 않았다.오늘은 어둠보다 현실이 더 불편했기 때문이다.주방 시계가 짧게 울렸다.시간은 분명히 흐르고 있었지만 그 속도가 몸에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그녀는 컵에 물을 따르다 말고 손을 멈췄다.물결이 잔 안에서 아주 작게 흔들렸다.“괜찮아.”이번엔 소리 내어 말했다.말은 공기 속에서 금방 사라졌지만 그 여운만큼은 가슴 아래에 남았다.문득 도진의 말이 떠올랐다.오늘은 경계가 얇다.그 문장은 예언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그래서 더 무거웠다.휴대전화 화면이 다시 켜졌다.이번엔 메시지가 아니라 부재중 전화 표시였다. 현의 번호였다.이수는 화면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바로 뒤집어 두었다.연결되지 않는 선택이 지금은 유일한 대답이었다.그 시각,도진은 차를 세워 두고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이수의 집 근처였다.눈에 띄지 않는 거리. 그러나 필요하다면 곧바로 닿을 수 있는 위치.그는 손목의 시계를 보았다.숫자는 의미가 없었다.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변화의 징후였다.도시는 지극히 평온했다.평온함은 때로 가장 위험한 위장이다.도진은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그러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익숙한 긴장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아직은…”그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말로 규정하는 순간 현실이 그 방향으로 움직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때 전화가 울렸다.이번엔 그의 것이었다.이수였다.“도진 씨.”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아주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지금… 집 앞에 계세요?”도진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예.”“역시.”그녀는 웃으려 했으나 웃음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그냥… 확인하고 싶었어요.”“무슨 일 있었습니까.”“아니요. 아직은.”아직이라는 말이 둘 사이에 잠시 머물렀다.“현 씨한테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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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밤이 말을 삼킬 때

밤은 생각보다 빠르게 깊어졌다.도시는 여전히 불을 켜고 있었지만,그 빛들은 서로를 비추지 못한 채 각자의 자리에서만 반짝였다.이수는 불이 꺼진 거실에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손바닥은 차분했지만 심장은 그 차분함을 따라오지 못했다.휴대폰 화면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알림은 없었다.그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마음을 놓이게 했다.아무 소식도 없다는 건 아직 누군가의 결정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숨이 가슴 아래로 내려가며 한 번 더 머뭇거렸다.이런 밤이면 기억은 의지와 상관없이 문을 두드린다.닫아 두었다고 믿었던 방에서 발소리가 난다.이수는 눈을 감았다.낯선 냄새. 돌바닥의 차가움. 말발굽 소리.그리고,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던 한 사람의 등.“아직은.”그녀는 혼잣말처럼 말했다.과거를 밀어내려는 말이 아니라, 현재를 붙잡기 위한 말이었다.지금은 여기다. 지금은 끝나지 않았다.그 시각, 도진은 차 안에서 불을 끈 채 앉아 있었다.라디오도, 엔진도 모두 멈춘 상태였다.주변의 소음이 차체를 스치며 지나갔지만그는 그 소리들 속에서 낯선 틈을 찾고 있었다.경계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는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이 가장 신경 쓰였다.손목을 천천히 풀었다.근육은 준비된 상태였다.그러나 그 준비는 폭력을 향한 것이 아니라 지연을 위한 준비였다.이 밤을 무사히 넘기는 것.그것이 지금 그의 목표였다.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이번에도 이수였다.“괜찮아요?”그녀가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주변을 배려하는 톤이었다.“예.”도진은 주변을 한 번 더 훑었다.“문은 잠갔습니까.”“두 번이나요.”“잘하셨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 덧붙였다.“창문은 커튼까지 치십시오.”“이미요.”짧은 웃음이 수화기 너머로 스쳤다.“도진 씨가 예상하는 것보다 저도 조금은 준비가 된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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