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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천년의 기억: Chapter 51 - Chapter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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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서로 다른 방, 같은 밤

그 고백이 입술 끝에서 비틀거리며 사라졌다.그 시각 회랑을 떠난 도진은 호위무사들이 모여 있는 전각의 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그러나 그의 걸음은 평소의 정갈한 발걸음과 달랐다.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그의 중심이 조금, 아주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숨이 깊어지고 어깨가 미묘하게 일렁이는 것이 지나가는 무사들의 시선에도 감지될 정도였다.그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그저 이수의 떨린 숨이 떠올랐고 세자의 시선이 떠올랐고 그 둘 사이에 선 ‘자신’이 떠올랐다.'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그 질문도 대답되지 않았다.답할 수 없는 감정만이 조용히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궁 전체의 바람은 이미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회랑에서 있었던 장면은 누군가의 입에서 또 다른 입으로 번졌다.“빈마마께서 얼굴이 사색이더라.”“저하의 눈빛이… 예전에 없던 빛이라더라.”“장군 나으리가 곁에 있었다지 않느냐.”“그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냐.”“쉿, 함부로 입 놀리면 목이 날아간다!”그러나 목이 날아갈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그만큼 오늘 회랑은 평범한 하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바람은 이미 내명부 깊은 곳과 무사들이 모여 있는 전각그리고 후궁들의 침소까지 서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그리고 그 바람은 결국 누군가를 향한 비극의 전조가 될 것이다.처소 안에서 이수는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조용히 떨리는 숨을 누르며 혼잣말처럼 속삭였다.“…이리 흔들리면… 안 되옵니다.”그러나 그녀의 손끝은 떨림을 멈추지 못했다.그리고 그 떨림은 세 남녀의 얽힌 운명이더 깊은 비극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밤은 오래도록 내려앉아 있었다.궁 전체가 물속에 잠긴 듯 고요했고, 등불만이 미약한 숨결처럼 흔들렸다.그런 밤의 깊은 결에서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방에서 서로 다른 고독을 견디고 있었다.빈의 침소는 너무 조용했다.이수는 등불 하나만 켜둔 채 침상 가장자리에서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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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중첩의 잠식

그는 그녀의 이름을 완전히 부르지 못했다.그저 숨결에 닿는 정도의 음으로 이름의 앞부분만 가볍게 불렀을 뿐이었다.그러나 그 가벼움이 오히려 더 큰 울림이 되어 그의 가슴을 채웠다.도진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마음이 조금씩 형태를 드러내는 것을 느꼈다.그러나 그 형태를 감히 이름 붙일 수는 없었다.세자의 침전은 밤이 깊었음에도 한 점의 어둠도 허락하지 않은 듯 등불이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세자는 외투를 벗지도 않은 채 자리 한복판에서 앉아 있었다.그의 눈은 수정처럼 맑았으나 안쪽 깊은 곳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그는 조용히 생각했다.'왜… 그대가 그렇게 떨리고 있었던 것이오.'빈의 모습은 세자의 눈에서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그녀의 숨이 흔들리고,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손끝이 차갑게 떨리던 모습.그 모든 것이 그의 가슴을 묘하게 죄었다.그리고, 그 모습 곁에 서 있던 도진의 그림자.세자는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주먹 안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뜨거움과 서늘함이 함께 뒤엉켜 있었다.'나는… 도진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입술이 작게 떨렸다.'하지만… 그대에게 가까워지는 모든 것들은 내게 위협이 되는구나.'그는 그 위협이 도진 때문인지, 혹은 자신의 마음 때문인지를 차마 말하지 못했다.그는 빈의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도 못하고 조용히 입술만 움직였다.“…빈…”그 음절이 가슴에서 떨어지는 순간 한 가지 사실이 또렷하게 선명해졌다.'나는… 이미 흔들리고 있구나.'그 흔들림은 세자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에게 치명적인 결함이었다.그러나 그는 그 흔들림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눈을 돌릴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이 마음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그는 두 손을 내려 무릎 위에 올리고 작게, 아주 작게 내뱉었다.“그대를 잃을까… 두렵구나.”그 말은 바람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작았지만그 속에 담긴 감정은 세자가 스스로에게조차 숨기고 싶었던 가장 깊은 핵이었다.밤은 그렇게 궁의 세 곳에서 서로 다른 고독을 품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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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시선의 무게

이수는 몸을 일으키며 한순간 중심을 잃을 뻔했다.궁녀가 부축하려 하자 그녀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괜찮다. 스스로 서겠노라.”그러나 그 말은 그녀의 의지일 뿐,무너지려는 마음까지 세울 수는 없었다.수련장에는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도진은 가장 먼저 나와 검을 들고 서 있었다.어제 밤의 흔들림을 그는 여기서 잘라내려 했다.검 끝에서 밤사이 얼어붙은 찬 기운이 느껴졌다.그는 자세를 가다듬고 검을 들어 올렸다.슥~단칼이 허공을 가르자 바람이 얇게 찢어졌다.그러나 칼끝은 곧 흐트러졌다.그의 중심이 미세하게 흔들린 것이다.그는 자신이 흔들린 것을 알고 눈을 감았다.'이 무슨 일인가. 칼을 든 이래 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던 중심이…'도진은 검을 다시 들었다.이번에는 더 강하게 휘둘렀다.허공이 크게 갈라졌으나 그 힘 또한 일정하지 않았다.그는 잠시 검을 내리고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마침내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던 문장을 속으로 인정했다.'빈마마가… 어제 그렇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인가.'그는 그 떨림을 떠올리며 손끝이 서늘해졌다.그녀가 아픈 듯 보였고, 위태로워 보였고, 홀로 버티는 모습처럼 느껴졌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저릿했다.왜 그러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러나 그 떨림이 지금 그의 검끝까지 흔드는 것은 분명했다.도진은 자신의 혼란을 잘라내려는 듯 검을 다시 높게 들었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이 아침, 그의 수련은 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동궁의 복도에는 아직 태양이 완전히 비추지 않았다.그러나 궁인들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웠다.저마다 속삭이는 듯한 기류가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어제 회랑에서… 저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지요?”“빈마마께서도 얼굴이 좋지 않으셨다고…”“도진 나으리께서 곁에 계셨다는데…”“쉿, 그 입 다물지 못하겠느냐. 지금 전각들은 모두 예민하니”그러나 소문은 바람과 같다.막으려 해도 틈새로 스며들어 더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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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맹세의 침묵

대비전의 문이 열리자 그 안의 공기는 더 서늘하고 단단했다.향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으나 향이 주는 편안함은 없고오히려 긴장감을 조종하는 듯한 기운이 감돌았다.대비가 앉아 있었다.그 눈은 늘 한결같아 보였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더 깊은 바닥이 드러난 듯했다.이수는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소첩, 대비마마를 뵈오니 삼가 평안을 기원하나이다.”대비의 시선이 느리게 이수에게 닿았다.그 한순간이 유달리 길었다.“…어제 회랑에서 있었던 일, 빈 또한 알고 있겠지.”이수의 심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녀는 대답을 준비하려 했으나 대비가 이어 말했다.“소문은 빠르다. 그날 회랑의 바람이 어떤 이들에겐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나… 내명부는 다르다.빈의 표정 하나, 저하의 걸음 하나가 하루 만에 전각 전체를 흔든다.”이수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소첩의 경솔함으로 궁이 시끄러워졌다면, 머리 숙여 사죄드리옵니다.”대비는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면 그 흔들림은 누구보다 먼저 눈 밝은 자들의 관심에 오르기 마련이다.빈의 뜻이 어떠했든, 저하의 마음이 어떠했든 궁은 이미 조용치 않다.”그 말은 이수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살짝 스쳤다.대비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빈. 너는 누구의 마음에도 그늘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말의 의미가 너무 명확했다.심지어, 그 말이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수는 모를 수 없었다.세자. 그리고, 도진.숨이 가라앉지 않았다.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옷자락이 스치는 기분이 들었다.대비는 마지막으로 짧게 덧붙였다.“오늘도 너를 살피려는 눈들이 많을 것이다. 그 눈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빈이 먼저 알아라.”그 말은 충고였으나, 동시에 무겁게 내린 경고이기도 했다.이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명심하겠사옵니다, 마마.”그 말을 내뱉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한 번 더 세게 조여 왔다.전각을 나오며 햇빛이 비로소 궁 담장 위에 걸리기 시작했다.이수는 한 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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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소외된 시선

도진과 이수는 본능처럼 동시에 몸을 돌려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그러나 세자는 그 둘을 바라보는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조용히 움직이는 눈빛 속에는 말로 담지 못한 감정이 서늘한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침묵은 길지 않았으나 세 사람의 가슴에는 아주 길게 흘러갔다.세자는 이수에게도, 도진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곁을 지나쳤다.그러나, 그 지나침 속에는 수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그리고, 그 무언의 아침이 끝나자궁에서 눈 밝은 자들은 또 다른 바람을 맡기 시작했다.세자가 곁을 스쳐 지나간 뒤,회랑에는 잠시 아무도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이수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세자의 옷자락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감히 눈을 들지 못했다.옆에 선 도진 또한, 언제나와 같은 자세로 예를 취하고 있었지만그의 어깨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멀어져 가는 세자의 뒷모습에는 단 한 마디의 말도 남지 않았다.그러나 말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빈마마.”먼저 몸을 가다듬은 쪽은 도진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이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수는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방금 전까지도 대비전에서 들었던 말들이 아직 귀 안에서 잔향처럼 맴돌고 있었다.궁의 바람이 거칠어진다.눈들이 너를 보고 있다.누구의 마음에도 그늘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그 말들이, 방금 눈앞을 지나간 세자의 침묵과 함께 묵직하게 겹쳐졌다.“많이… 곤란하셨사옵니까.”도진의 목소리는 낮았다.감정을 내세우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그 낮음 속에 고여 있었다.이수는 잠시 대답을 찾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경께서 보시기에는… 어떠하였사옵니까.”마치, 자신이 어떤 얼굴로 서 있었는지 그의 눈을 빌려 확인하고 싶다는 듯한 물음이었다.도진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눈앞의 그녀는 이미 마음을 추스른 얼굴이었지만,조금 전 세자의 기척이 스쳐 지나갈 때 미세하게 굳어버린 그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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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음(音)의 유예

이미 보고도 다시 묻는 질문이었다.내관은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도진 나으리가 곁에 있지 않았사옵니까.”세자의 시선이 짧게 흔들렸다.잠깐 눈앞이 허옇게 번지듯 흐려졌다.그는 바로 시선을 거두며 창가로 다가갔다.창틀 너머로 해가 이미 어느 정도 떠올라 있었다.그러나 빛이 환한 만큼, 그 안에서 숨고 싶은 마음도 짙어졌다.“저하는…”내관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도전 나으리를 조금 전에도 찾으려 하시지 않았사옵니까.”세자는 대답 대신 입술만 굳게 다물었다.그를 찾으려 했었다. 정말로 그랬다.회랑에서 본 장면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었다.그 눈빛은 무엇이었는지,그 표정은 무엇을 가리는 것이었는지.하지만 입술 사이로 나가려던 명령은끝내 음으로 완성되지 못한 채 목 안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세자는 자신의 그 머뭇거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그는 대신, 조용히 다른 말을 꺼냈다.“…전하께 올릴 보고가 있다 하지 않았느냐.”“예, 저하. 잠시 후 정해진 시각에… 상참 전하러 가셔야 하옵니다.”세자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알았다. 준비하겠다. 나머지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나중. 그 말은 곧, ‘지금은 감정을 정리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도진은 수련장에 다시 나와 있었다.아침 햇빛이 비스듬히 수련장 바닥으로 떨어지며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그 그림자 위에 그가 서 있었다.검을 쥔 손은 겉보기에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으나손목 안쪽 깊은 곳에서 아주 희미한 떨림이 느껴졌다.그는 다시 한 번 자세를 취했다.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발을 굳게 내딛었다.“하압”검이 허공을 베었다.공기가 칼끝에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그러나 그는 그 소리가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오늘 베어야 할 것은 눈앞의 허공이 아니라,가슴 안에서 자꾸 자라나는 모호한 감정이었기 때문이다.머릿속에는 회랑에서 마주친 이수의 얼굴이 여러 번 겹쳐 떠올랐다.대비전에서 나올 때, 세자와 마주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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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금(裂)의 현상화

도진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궁에서는 어떤 위험은 말로 입 밖에 내는 순간 현실이 된다.그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궁의 바람이 거칠어졌사옵니다.”한참 끝에, 그는 그렇게 답했다.“빈마마께 향하는 시선이 너무 많사옵니다. 그 시선이… 언제든 칼이 될 수 있사옵니다.”세자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그 시선이 빈에게 칼이 된다면.”그는 조용히 물었다.“그 칼을 막을 사람은 누구이어야 하느냐.”그 질문은 답을 알고 하는 물음이었다.도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러나 대답만은 명확했다.“신이옵니다.”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신은 저하의 검이옵고, 저하의 곁에서 빈마마 또한 지켜야 할 책임이 있사옵니다.”세자는 잠시 침묵했다.그 침묵 안에서 많은 것들이 들렸다.오랜 세월 함께해 온 기억들,도진의 검끝이 지켜왔던 수많은 순간, 그리고, 이제 막 생겨난,그러나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은 감정의 금.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그래.”짧게 인정하는 듯한 어조였다.“너는 나의 검이다.”그 말은 오래도록 변치 않았던 사실이었다.그러나 이어진 말은 오늘에서야 처음 꺼내지는 내용이었다.“허나, 검이 주인을 향해 흔들려서는 아니 되지.”그 순간, 공기 속 온도가 한 번 가라앉았다.도진은 눈을 들지 않았으나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세자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게 가라앉았다.“너는 빈을 지켜야 한다 했다.”짧은 숨이 이어졌다.“그 지킴이…어디서 어디까지인지는 너 또한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그 말은 직접적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한 발자국 더 다가서지 말 것.보호와 감정의 사이에 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세자의 시선이 도진에게 오래 머물렀다.“내가 너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목 안에는 알 수 없는 쓰라림이 걸려 있었다.“다만, 궁이라는 곳이 너의 마음까지 믿어주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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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빛이 닿지 못한 자리들

궁의 아침이 조금씩 활기를 되찾으며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이수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천천히 낮추고 있었다.대비전에서 내려온 무거운 말들,회랑에서 마주한 도진의 눈빛,그리고 마지막에 스쳐 지나간 세자의 침묵까지그 모든 것이 마음의 바닥을 얇게 갈라놓은 듯했다.그녀는 복도 끝에 놓인 난간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햇빛이 부서진 곳이었지만, 손끝은 조금도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다.''저하께서는…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옵니까.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이 입술 사이에서 소리 없이 흩어졌다.그 순간, 뒤쪽 회랑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궁녀 두어 명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작게 숨죽이며 지나가고 있었다.이수는 그들의 눈이 잠시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그 시선에는 경계와 탐색이 묻어 있었다.마치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를 살피기라도 하듯.궁녀들이 발걸음을 재촉해 사라지자 남겨진 공간은 한층 더 적막해졌다.이수는 한참 만에 몸을 돌렸다.오늘은 대비전뿐 아니라 각 전각에서 정해진 일정이 빽빽했다.그 일정이 그녀를 쉬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지켜보는 눈을 더 많이 늘린다는 뜻이라는 것을 이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멀리서 내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빈마마! 빈마마를 뵙고자 하는 이가 있사옵니다.”누구냐 묻기도 전에 그 목소리가 이어졌다.“세자저하시옵니다.”이수의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잠시 숨이 멈춘 듯했다.세자는 회랑의 가장 끝, 햇빛이 닿지 않는 그늘쪽에 서 있었다.빛이 닿지 않는 자리였지만 그의 존재는 그림자를 밀어내는 듯 선명했다.그는 이수를 보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그 거리는 길지 않았다.그러나 그 몇 걸음 사이에 이수의 심장은 두 번, 세 번 더 뛰었다.“빈.”세자의 목소리는 단정했다.그러나 단정함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굳은 선처럼 느껴졌다.이수는 조심스레 예를 갖추었다.“저하를 뵙사옵니다.”세자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주 미세하게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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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장막의 잔향

도진의 목소리가 회랑 한쪽에 닿아왔을 때,이수는 아직도 세자의 마지막 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그 울림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고,마치 얇은 장막처럼 마음을 덮어 숨을 쉽게 내쉬지도, 들이쉬지도 못하게 했다.“…괜찮으시옵니까.”그 한 줄의 물음은 마치 누군가 문틈 사이로 손을 내밀어조심스레 그녀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도진은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너무 가까이도, 그렇다고 멀리도 아닌,자신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끝없이 계산한 끝에 도달한 듯한 위치.햇빛이 아직 그의 얼굴을 완전히 비추지 않았고,미묘한 그림자가 눈가에 걸려 표정의 진의를 더 알 수 없게 만들었다.이수는 숨을 고르듯,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경이… 어찌 여기를 찾았소.”그 말투는 자신을 낮추지 않았고, 상대만을 높이지도 않았다.궁 규범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절묘한 중심에 선 말이었다.도진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빈마마께서… 혼자 두기엔 오늘의 바람이 심상치 않아 보였사옵니다.”그 말은 ‘걱정된다’는 뜻이었고, 곁에 있고 싶다는 속마음이었으며, ‘하지만 감히 다가설 순 없다’는 절제이기도 했다.이수는 눈을 내리깔았다.“…경까지 그리 말하면 소첩이 더 흔들릴 일만 남지 않소.”자신을 낮추지 않는 어투 속에 오늘 하루 내내 간직해야 했던 무게가 살짝 새어 나왔다.그녀는 이어 말했다.“이 궁에서 빈의 자리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곳이오.경이 그런 마음을 보이면… 그 또한 소문이 되어 경을 해치게 될 것이오.”도진의 시선이 순간 미묘하게 흔들렸다.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세자의 눈빛이 자신을 향할 때의 얇은 금을.“…소문의 칼은 이미 저를 향하고 있사옵니다.”도진이 조용히 대답했다.“빈마마께서 ‘경’이라 부를 때마다, 저 또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사실만 더 분명해질 뿐이옵니다.”그 말은 경계선 위에 놓인 감정이었다.한 걸음만 더 나가면 마음이 드러날 것이고,한 걸음만 물러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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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숨은 바람이 흔드는 자리

대비전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길고, 언제나 조용했다.그러나 오늘은 그 고요함조차 속뜻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이수는 회랑의 기둥 사이를 따라 걸으면서도 단 한 번도 마음이 안정되는 순간이 없었다.발걸음은 일정했으나 가슴 속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대비마마께서… 왜 다시 부르신 것이오.'분명 아침에 뵈었다.그때의 대화도 간단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뒤로 불과 조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궁 안에서는 이미 무언가 움직인 것이다.그녀의 옷자락을 스치는 바람도 평소와는 달라져 있었다.궁은 언제나 조용히 움직이고, 움직일 때마다 가장 약한 곳을 먼저 건드렸다.그리고 오늘 약한 곳은 분명 빈이었다.대비전 앞마당을 지나 문이 열리는 순간, 이수는 스스로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었다.전각 안은 더 어둡고, 더 고요했다.방금 누군가가 속삭인 말들이 아직 공기 속에서 가라앉지 않은 것처럼미묘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대비는 방금 전과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그 눈빛에는 약간의 온도가 바뀌어 있었다.그 온도는 궁이 파악한 정보가 늘어나고 그 뜻이 보다 선명해질 때 나타나는 변화였다.이수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예를 올렸다.“대비마마, 소첩이 말씀을 듣고 다시 뵈러 왔사옵니다.”대비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그래. 빈이 와야 할 것이었다.”그 한 마디에 이수의 목 안쪽이 미세하게 조여왔다.대비는 손끝을 들어 곁에 있던 상궁에게 눈짓했다.상궁은 한 폭의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펼쳤다.그 안에는 궁인들의 보고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조각들이 정돈된 글로 옮겨져 있었다.이수는 그 문서가 무엇을 뜻하는지 읽기 전에도 이미 알 수 있었다.대비가 말했다.“금일 새벽, 네가 회랑을 지나던 길에 세자저하와 마주쳤다 하지.”이수의 숨이 뚝 멎는 듯했다.'벌써… 벌써 이 일이 대비전까지…'궁의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 오늘만큼 뼈저리게 깨달은 적은 없었다.“그리고 그 직후, 도진 경이 빈 곁에 있었음을 본 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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