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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천년의 기억: Chapter 71 - Chapter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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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숨겨진 칼끝이 향하는 자리는

대비전을 나와 아직 충분히 밝지 않은 새벽빛 아래 서 있는 이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대비의 말은 부드러움으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칼날만큼 차갑고 날카로웠다.도진 경…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어딘가가 조심스레 아려왔다.대비는 말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라”거나 “감정을 거두라”는 그런 직접적인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대신“궁은 네가 생각한 것보다 좁다.”“그늘은 싹을 보이면 꺾는다.”“저하 외의 그늘은 단 한 줌도 허락되지 않는다.”그 말들은 정확한 명령보다도 더 무서운 심문이었다.그리고 그 심문은 이수를 향해 말 없이 속삭이고 있었다.'너를 지켜보고 있다. 네가 어디를 바라보는지누구에게 마음을 주려 하는지 모두 보고 있다.'이수의 손끝이 저도 모르게 서늘하게 떨렸다.회랑을 조금 더 걷자 도진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는 이수를 기다리며 방금 전까지도 대비전의 문을 주시하고 있었던 듯했다.걱정, 경계, 그리고 말하지 않은 충심이 그의 눈에 얹혀 있었다.“빈마마.”그는 곧바로 예를 갖추었으나 마음만큼은 숙이지 못한 듯했다.“마마의 얼굴빛이 좋지 않사옵니다.대비마마께서 혹… 마마께 어려운 말씀을 하신 것이옵니까?”이수는 그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이 말을 삼키고 싶었다.'경의 걱정이 더 아프옵니다…'그러나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경이 알 바 아니라 하였는데도 왜 자꾸 묻는 것이냐.”그 말은 차갑지 않았지만 분명한 선이었다.도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한 마디도 뱉지 못했다.그 침묵 속에서 이수는 도진이 무엇을 견디는지 진짜로 알 것 같았다.그러나 그녀는 그 선을 허물어주지 않았다.그 선은 그들 둘 모두에게 필요한 울타리였기 때문이다.이수는 도진을 지나쳐 회랑 끝으로 발걸음을 돌렸다.그녀가 떠나기 전 도진이 아주 낮게 말했다.“…빈마마. 부디 몸을 사리시옵소서.”그 한마디가 마치 밤새 묵혀둔 마음의 조각처럼 깊게 가라앉았다.이수는 뒤돌아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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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가로막힌 길, 엇갈린 숨결

궁녀의 급한 숨이 아직 방 안에 남아 있었다.이수는 조용히 서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울타리를 넘어 달리고 있었다.'도진 경이… 가로막혔다.'그 말은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명백한 경고였다.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그녀는 흔들리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등을 곧게 세우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가자.”이수는 한 단어만 남기고 방을 나섰다.궁녀들이 놀라 따라붙었고 그녀의 발걸음은 회랑을 타고 곧바로 대비전 쪽으로 향했다.그러나 그곳으로 가기도 전에 회랑 끝에서 이미 무언가 다른 기척이 밀려오고 있었다.궁 뒤편의 긴 회랑. 사람의 발길이 뜸하지만 궁중의 음영이 가장 짙게 모이는 곳.도진은 그곳에서 내명부 무사 두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그는 그들을 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궁의 무사라면 그 또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다.하지만, 그들이 누구의 명으로 움직이는지는 명확했다.도진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내 발을 막고자 한다면 이유를 듣고 싶은데, 말이 없으니 무슨 의도인지 궁금할 뿐이오.”첫 번째 무사가 말했다.“대비마마께서 도진 경을 잠시 보자 하셨사옵니다.”도진은 그 말이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으로는 날카로운 칼자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반문했다.“…대비마마께서 나를 보신다고 하셨소?”두 번째 무사가 고개를 숙였다.“경을 향한 소문이 궁 안에서 심상치 않다 하옵니다. 빈마마와 관련된 불편한 소문이오.”도진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그가 흔들리는 대신 주변의 공기가 흔들렸다.그의 기세가 아니라, 그의 침착함이 만들어내는 압박이었다.첫 번째 무사가 다시 다가오며 낮게 말했다.“대비마마께서 경을 부르신 까닭은 단순하옵니다.경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자 하시는 것이옵니다.”도진의 손끝이 칼자루 근처에서 멈췄다.그리고 그는 천천히 말했다.“내 마음을 판단하는 것은 저하께서 하실 일이오.대비마마께서 나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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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칼끝 아래 서로를 가리는 그림자

대비전은 늘 그렇듯 고요했다.고요하다는 말로는 다 담지 못하는,숨이 조여드는 듯한 정적과 무게가 방 안에 내려앉아 있었다.이수와 도진이 문턱을 넘자 대비는 이미 앉은 채로 미소를 띠고 있었다.그 미소는 온화해 보였지만 그 아래로 흐르는 의도는 너무도 선명했다.“왔느냐, 빈.”대비의 시선은 부드럽게 이수를 향했다.그러나 그 부드러움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종류의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그리고 도진 경.”그녀는 멈추지 않고 그 뒤에 서 있는 도진을 불렀다.“너 역시 와야 할 때가 되었다 생각하였다.”도진은 절을 올렸다.그러나 눈빛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이수는 그 모습을 옆에서 보며 가슴 깊이 조용한 떨림을 느꼈다.‘경을 이리 세워두는 것이… 대비마마의 뜻이옵니까.’그 생각은 그녀의 속에서만 서늘하게 흘러갔다.대비는 손가락으로 부채를 천천히 접었다.“궁에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알겠지?”이수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대비는 바로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빈과 도진 경 사이에 좋지 않은 말이 오르내린다 하기에 내가 직접 보고자 하였느니라.”도진이 입을 열었다.“대비마마. 근거 없는 말일 뿐이옵니다.신은 저하를 위해 검을 잡는 몸. 감히 빈마마를 향해… 그런 오해를 살 행동을”“오해인지 아닌지 내가 확인하겠다 하였느니라.”대비가 말을 끊었다.목소리는 부드러워 보였지만, 그 속의 단단한 의도가 공기를 갈랐다.이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대비마마.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경은 예를 지킨 충신이오며 오해를 만들 행동을 한 적이 없나이다.”대비의 미소가 아주 얇게 바뀌었다.“빈은 왜 그리 서둘러 경을 두둔하느냐.”방 안의 공기가 고요히 멈췄다.이수의 옆에서 도진의 숨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이수는 한순간 눈을 내리깔았다.‘이 자리에서 물러서면 경을 지킬 수 없사옵니다…’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마마께서 사실이 아닌 소문으로 신하의 마음을 의심하시면 저하의 권위에도 누가 될 것이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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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그림자마저 닿지 못하는 길

대비전에서 나오는 순간까지 이수의 걸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러나 문이 완전히 닫히고,대비의 시선이 더는 닿지 않는 회랑 끝에 이르자 그녀의 긴장이 아주 조용히 풀리는 듯했다.궁녀들이 숨을 죽이며 뒤를 따랐지만, 그 누구도 감히 말을 걸지 않았다.이수의 옷자락이 새벽의 찬 공기를 갈라 회랑에 희미한 울림을 남겼을 뿐이다.이수는 스스로에게 말없이 다짐했다.‘두려움은 얼굴에 비치지 말아야 하옵니다. 경에게도… 궁에게도… 누구에게도.’그러나 떨림은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서 차갑게 피어오르고 있었다.이수가 방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상궁이 먼저 보였다.“빈마마… 대비마마께서 전하실 말씀이 있어 소첩을 보내셨사옵니다.”이수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일러라.”상궁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오늘 이후로 도진 경을 빈마마의 처소 근처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 하옵니다.”궁녀들의 입술이 동시에 굳었다.한 사람은 두려움으로, 또 한 사람은 억지로 삼킨 숨으로.이수만이 변하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이유는 일러 주지 않았느냐.”“대비마마께서 이르셨사옵니다. 빈마마에게 여인을 따르는 덕목은 있으나무관 한 명 때문에 궁심이 흐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게 전하라 하셨사옵니다.”그 말은 사실상 ‘이수의 주의를 도진에게서 떼라’는 뜻이었다.이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궁이… 더 강하게 틀을 좁히는구나.’상궁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마마.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상궁이 물러난 뒤 방 안의 문이 닫히자 궁녀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마마… 어찌 하시렵니까…?”이수는 그 말을 듣고도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단지 창호 너머로 흐르는 햇빛의 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결이 떨리는 듯 묘하게 일렁였다.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속으로 말했다.‘경을 멀리하려는 것이 아니옵니다. 나를… 경에게서 떼어내려는 것이옵니다.’한편 도진은 대비전에서 돌아온 뒤 군영으로 곧장 향했다.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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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닿지 못한 발걸음이 만든 밤의 틈

저녁 햇살이 궁의 지붕 끝에 걸려 있었다.붉은 빛이 회랑 사이에 얇은 물결처럼 스며들어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이수는 그 회랑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도진이 늘 걸어오던 길.무사한 걸음, 흔들림 없는 자세,그리고 보이지 않는 충심이 묻어 있던 발걸음.하지만 오늘 그 길은 아무도 지나지 않았다.궁녀 한 명이 조심스레 다가왔다.그녀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이 떠 있었다.“마마… 오늘… 군영에서 움직임이 많았다고 하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무슨 움직임이더냐.”궁녀는 주춤하며 입술을 눌렀다.“회랑 두 곳에… 군영의 무사들이 새로 배치되었다 하옵니다. 빈마마의 처소로 이어지는 길이… 막혔다고…”그 말은 사실이었다.그러나 궁녀는 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이수 역시 말의 뒷부분을 묻지 않았다.그녀는 알고 있었다.군영 무사들이 새로 배치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발걸음을 막기 위함이라는 뜻이었다.잠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며 이수의 소맷자락을 흔들었다.그 흔들림만큼이나 조용하고 미약한 떨림이 그녀의 가슴 한쪽에서도 번졌다.‘경이… 오늘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지 못하는 것이로구나.’궁녀는 다시 조용히 말했다.“마마… 오늘은… 경의 발걸음이…이곳까지 닿지 않을 듯하옵니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알았다. 너희는 물러가라.”궁녀들이 물러가고 회랑에 혼자 남자 이수는 여전히 그 길을 향해 서 있었다.도진이 걸어오지 않는 회랑은 이상하게도 길이가 더 길게 느껴졌다.마치 그를 닿지 못할 만큼 멀리 보내버린 듯.이수는 억눌러 온 생각을 조용히 속으로 말했다.‘경을 멀리하려는 것이… 나의 뜻이 아니옵니다.’‘그대의 발걸음을 막는 이 궁이…둘 사이의 거리를 자꾸 더 벌리고 있을 뿐.’어디선가 등불이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밤이 오고 있었다.이수는 처소의 문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회랑을 돌아보았다.그 길 끝에 서 있지 못하는 도진의 부재가 오늘따라 유난히 깊게 스며들었다.방 안은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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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물빛 스며든 회랑에 서서

밤새 내린 비가 새벽녘 궁의 들창 아래로 흘러내렸다.회랑의 기둥에는 물빛이 옅게 스며들어 마치 누군가 기댄 자리처럼 희미하게 어두웠다.새벽 바람은 차고, 기척 없는 궁은 이상할 만큼 적막했다.이수는 한밤중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간신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깨어났다.밖은 조용했지만 마음속에서는 밤새도록 바람이 불어왔다.도진이 오지 못했던 회랑,그 빈자리, 그 침묵이 자꾸만 그녀의 가슴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갔다.이른 시각, 상궁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서늘한 새벽기운이 문틈으로 스며들어 들어왔고그 기운보다 더 조심스러운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마마… 평안하셨사옵니까.”이수는 머리를 돌려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밤이 조금… 길었을 뿐이오.”상궁은 잠시 망설였다.그러다 마치 결심하듯 말했다.“마마, 새벽에… 대비전에서 다시 움직임이 있었다 하옵니다.”이수의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또 무슨 움직임이더냐.”“내명부의 무사들이 군영으로 급히 왕래했다 하옵니다.군영에서는 경들 사이에 이른 순찰 조정이 있었다고…”순찰 조정. 그 말은 바로 도진의 동선을 통제하기 위한 대비의 조치였다.마치 대비가 밤새도록 마음을 굳혀 더 강한 조처를 내린 것만 같았다.이수는 목소리를 차분히 가라앉혔다.“그 뜻은… 오늘도 경이 이곳으로 올 수 없다는 말이로구나.”상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마마. 도진 경을 향한 감시가 어제보다 훨씬 더 날카롭다 하옵니다.”그 말에 이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그 숨에서 불안과 두려움과 울분이 함께 섞여 있었다.‘경에게 다가가는 내 마음을 궁이 먼저 알아차린 것이옵니까….’한편 군영에서는 새벽에 이미 무관들의 회의가 끝난 뒤였다.도진은 마당을 가로질러 새로 배치된 순찰 동선을 확인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동선은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그 순찰 동선의 목적은 하나.'세자빈에게 이어지는 길을 완전히 끊는 것.'무관이 다가왔다.“경… 새로 내려온 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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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감시 아래 더 짙어지는 그리움

비가 그친 뒤의 궁은 늘 그랬다.젖은 기와에서 묵은 물 냄새가 올라오고, 회랑 바닥에는 고인 물이 얇게 빛을 받았다.마치 누군가 오래 서 있다 떠난 자리처럼, 그 흔적만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군영 쪽 하늘은 다른 전각들보다 조금 더 탁해 보였다.그곳에서는 언제나 쇠와 땀, 흙먼지가 뒤섞인 공기가 흘렀다.그 속에서 도진은 평소와 다름없이 검을 손에 쥐고 서 있었다.표면적으로는 그랬다.오늘 새벽, 군영에는 낯선 얼굴이 하나 들어왔다.문무를 겸한 듯한 몸가짐,고개를 숙일 때도 눈을 감지 않는 습관 그 남자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내금위에서 왔사옵니다. 궁 내 순찰 체계 점검을 맡으라는 전교가 있어 잠시 몸을 의탁하게 되었사옵니다.”이름은 석윤이라 했다.도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명이라면 따를 뿐이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게 말하라.”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진의 눈빛은 그 남자의 발끝, 손끝, 숨 쉬는 결까지 살피고 있었다.‘내금위에서 군영으로 사람을 보냈다는 것 순찰 점검이 목적이 아니옵니다.’‘경계를 점검하겠다 말하지만, 실상은 사람을 점검하는 법이지요.’그가 알고 있는 것을 석윤 또한 모를 리 없었다.“듣기로는, 경께서 저하의 곁을 가장 오래 지키신 분이라 하더이다.”석윤이 낮게 말을 건넸다.“궁의 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겠사옵니다.”도진은 짧게 웃음 비슷한 것을 흘렸다.“길은 다 거기서 거기지. 다만 어디로 가느냐를 정하는 것은 걸음의 주인일 뿐.”“허나, 어떤 길은… 걸어서는 안 되는 길도 있사오니.”석윤의 말이 거기서 한 번 더 내려앉았다.“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길은 때로 궁에 독이 되기도 하지요.”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이 말을 모를 수 있는 사람은 이 궁에 없었다.도진은 대답 대신, 칼끝을 점검하듯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그래서 걷지 말라 하였느냐. 일부 회랑을 봉쇄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명이라 하였사옵니다.”석윤이 고개를 숙였다.“도진 경께서… 괜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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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바람이 실어온 옷자락 냄새

도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그러나 그가 늘 서 있던 자리에서 울리던 리듬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그 소리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조심스레 일렁였다.‘경도… 지금 이 하늘 아래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계시겠지요.’‘나를 볼 수 없더라도, 적어도 이 바람의 결을…같이 느끼고 계시면 좋으련만.’이수는 의도적으로 후원 가장자리를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제향에 쓰일 물건들을 확인하는 핑계로 한 걸음이라도 더, 군영과 가까운 쪽으로.그녀가 조금 더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으려 할 때 누군가 조용히 길을 막았다.상궁이었다.“마마, 이 안쪽은 당분간 출입을 삼가 달라 하였사옵니다.”말투는 공손했으나 내용은 명백했다.더 가까이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이수는 상궁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음 비슷한 것을 입가에 띄웠다.“제향 준비를 하려면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마마의 뜻은 알겠사옵니다만, 대비마마께서 ‘빈의 걸음이 굳이 후원 깊은 곳까지 닿을 필요는 없다’ 하시며…”상궁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대비의 말은 언제나 그랬다.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듣는 이가 나머지를 짐작하도록 만드는 방식.‘네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니 발을 더 들이지 말라.’그 뜻이 후원 초입 공기 속에도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이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구름이 옅게 흘러가고 있었다.“알겠다. 그리 전하라.”그녀는 한 발 물러났다.단지, 단 한 발. 그러나 그 한 발이 군영과의 거리를 또렷하게 갈라놓았다.같은 시각, 군영의 뒤편 담장 너머에서는 무사들이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잇따랐다.도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다.곁에는 석윤이 서 있었다.“후원 쪽이 오늘따라 조금 소란스럽군.”석윤이 무심한 듯 말했다.“제향 준비 때문인가 보오.”도진은 담장 너머로 고개를 조금 들었다.높은 담에 막혀 그 너머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바람은 막을 수 없었다.바람이 담을 넘어 꽃향과 함께 옅은 비단의 냄새를 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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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돌아오는 발소리의 전조

뒤돌아서는 순간, 그녀는 다시 한 번 담을 바라보았다.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듯,닿지 못하는 마음을 한 번 더 쓰다듬듯. 그러고 나서야 완전히 몸을 돌렸다.그날 밤, 궁은 겉으로는 평온했다.등불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경비의 발걸음은 규칙적으로 움직였다.그러나 각자의 방 안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쉬지 않고 흔들리고 있었다.이수는 누운 채 눈을 감지 못한 상태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담 너머 군영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낮에 스쳐지나간 바람이 아직도 귀 옆에서 속삭이는 듯했다.‘경도 오늘, 담 너머 어딘가에서 같은 하늘을 보고 계셨겠지요.’‘그대가 나를 보지 못해도 좋사옵니다. 그저… 무사하시기만을 바라옵니다.’그녀의 손이 이불 위에서 조용히 그러쥐어졌다.같은 시간, 군영에서는 도진이 홀로 등불 아래 앉아 있었다.석윤은 이미 자리를 비웠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는 기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낮에 담 너머에서 느꼈던 기척을 떠올렸다.확인할 수 없기에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감각.‘마마… 오늘 제 발걸음이 그대에게 닿지 못하였다 하여도…’‘이 마음까지 끊어낼 수 있다고는… 감히,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옵니다.’그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대신 검을 옆에 두고 눈을 감았다.그 밤, 담 양쪽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지 못한 채 같은 그리움을 품고 눈을 감았다.세상 어디에서도 기록되지 않을,아주 조용한 공모처럼.아침 공기가 유난히 묵직했다.이수는 창호를 반쯤 열어 둔 채 담장 너머로 흘러가는 하늘빛을 바라보고 있었다.밤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것은 담 너머의 바람이었다.보이지 않는 사람, 보이지 않는 기척,그러나 분명히 가까이에 있는 존재를 감각만으로 느끼게 만드는 바람.‘어제… 경도 저 하늘 아래에 계셨겠지요.’손끝이 이불 자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그 동작이 마치 닿지 못한 마음을 대신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문이 가볍게 두드려졌다.“마마, 상궁이 옵니다.”이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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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우연이 거듭되면 뜻이라 부르고

군영에서는 아침 훈련이 끝나갈 무렵이었다.검이 칼집에 돌아가는 소리가 줄줄이 이어졌고잔잔한 구령이 끝나자 무사들의 숨이 동시에 가라앉았다.석윤이 천천히 도진 쪽으로 다가왔다.“오늘도 군영은 엄격하옵니다.”그가 웃음을 띠며 말했다.“허나 궁의 눈은 군영 쪽으로 더 자주 향하는 것 같사옵니다.”도진은 흙바닥을 한 번 훑어보고 묻은 흙을 털었다.“눈이란 원래 가장 궁금한 곳을 먼저 향하는 법이지.”“궁금한 곳이라…”석윤의 목소리에 미묘한 햇수가 섞였다.“요사이 궁 안 쪽에서는 두 곳을 특히 궁금해 하더이다.”그는 손가락 두 개를 들어 각각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하나는 후원, 다른 하나는 경이 머무는 이 군영.”그 말은 곧 두 공간 사이에 그어진 보이지 않는 선을 누군가가 계속해서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도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두 곳 모두 저하와 관련된 곳이니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석윤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허나, 저하께서 부재하실 때 그 두 곳이 닿을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옵니다.”“…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석윤의 눈빛이 아주 잠시 날카로워졌다.“사람입니다, 경. 길이 아니라… 사람.”그는 낮게 덧붙였다.“후원에서는 빈마마가 담장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하옵니다.군영에서는 경께서 그 담 쪽을 오래 바라보고 서 계셨다 하더이다.”도진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는 단 한 번도 담 쪽을 바라보던 자신의 눈을 누군가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궁은 언제나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본다.’석윤이 한 발 더 다가섰다.“궁은 그런 우연을 오래 두지 않사옵니다. 우연이 거듭되면 곧바로 뜻이라 부르지요.”말은 조용했으나 그 속에는 분명한 경고가 있었다.“도진 경. 빈마마께 향하는 시선은 이제 경의 것이 아니옵니다.”“그게 무슨 뜻이오.”“그 시선은 이미 궁의 것이 되었다는 뜻이지요.”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도진은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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