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밤은 서둘러 내려오지 않았다.해가 완전히 지기 전의 공백이 도시 위에 얇게 걸려 있었고,그 틈에 사람들의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은 표정으로 머물러 있었다.이수는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고 잠시 서 있었다.불을 켜지 않은 채, 창밖에서 스며드는 빛만으로 거실의 윤곽을 확인했다.어둠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의 시간은 생각을 붙들기에 딱 알맞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까의 걸음과 그 사이에 오간 침묵이 몸에 남아 있었다.손에 남은 공기, 어깨에 얹힌 시선,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알고 있던 거리.이수는 코트를 벗어 소파에 걸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침은 언제나 같은 순서로 시작되었지만, 그날의 공기는 조금 달랐다.이수는 커피 머신 앞에 서서 물이 끓는 소리를 들었다.기다림이라는 말이 이토록 조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요즘 들어 자주 실감하고 있었다.기다린다는 것은 무언가를 붙잡고 서성이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속도를 조금 늦추는 일일지도 모른다.컵에 커피를 따르며 이수는 어제의 메시지를 떠올렸다.별다를 것 없는 안부였고, 의미를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문장이었다.그럼에도 그 문장은 밤의 끝을 부드럽게 닫아주었다.출근길, 지하철 안은 여전히 붐볐다.사람들의 어깨가 부딪히고, 휴대폰 화면이 같은 각도로 기울
도시는 언제나 빠르다.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그 속도를 늘 따라가지 못한다.이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층수를 확인하다 말고 손을 내렸다.숫자가 바뀌는 동안 자신의 호흡이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조용히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어제의 점심은 아무런 선언도 없었고, 어떠한 약속도 남기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운은 이상할 만큼 길게 남아 있었다.말하지 않은 것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다는 확신.그것이 관계의 시작인지,아니면 잠시 스쳐 가는 평온인지 아직은 판단할 수 없었다.사무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켜자 익숙한 업무 화면이 떠올랐다.이수는 의도적으로 집중하려 애썼다.집중은 생각을 밀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니까.그러나 글자 사이로 자꾸만 어제의 장면들이 스며들었다.창가 자리, 낮은 목소리, 잠시 멈췄던 시선.그 모든 것이 일처럼 쌓여 지워지지 않았다.그때 메시지 알림이 짧게 울렸다.도진.‘어제, 불편하진 않으셨죠.’질문은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려는 듯했지만,사실은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방식처럼 보였다.이수는 잠시 생각하다 답장을 썼다.‘아뇨. 오히려 편했어요.’보내고 나서 한 줄을 더 적을까 잠깐 망설였다. 그러다 멈췄다.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답장은 곧 도착했다.‘그럼 다행입니다.’그 짧은 문장에는 과한 안도도, 불필요한 기대도 없었다.그래서 더 믿음이 갔다.그날 오후, 도진은 회의실 한쪽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왔지만, 완전히 남지는 않았다.그는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도 조금 낯설게 느끼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의 여운은 곧바로 정리했을 것이다.불필요한 감정이라고 결론짓고 깔끔하게 접어두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억지로 서두르지도, 의미를 과대 해석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이 상태를 조금 더 두고 보고 싶었다.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동안 도진은 창가에 잠시 섰다.유리 너머로 보이
아침은 늘 같은 방식으로 시작되지만, 사람의 마음은 결코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이수는 눈을 뜨자마자 천장을 한참 바라보았다.빛이 스며드는 속도와 호흡이 고르게 돌아오는 감각을 의도적으로 느끼며 잠에서 현실로 천천히 옮겨왔다.어젯밤의 메시지는 이미 읽은 문장이었지만, 몸 안 어딘가에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짧았고, 담백했고, 그렇기에 더 오래 머무는 말들.그녀는 이불을 정리하고 조용히 일어났다.아침 루틴은 언제나 정확했지만, 오늘은 손의 움직임이 조금 느렸다.커피를 내리는 동안 창밖을 보았다.도시는 이미 깨어 있었고,사람들은 자신의 방향을 향해 바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시험한다.하루를 끝내기에는 너무 솔직해지고, 다음 날을 시작하기에는 아직 감정이 덜 식어 있는 시간.도진은 완전히 잠들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잠과 각성의 경계에서 의식은 가볍게 떠 있었고, 그 틈 사이로 낯설지 않은 감각이 스며들었다.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온기.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심장은 평소보다 느리게 뛰고 있었지만,그 박동 하나하나가 유난히 또렷하게 느껴졌다.이상했다. 불안은 없었다. 악몽도 없었다.가슴을 죄던 그 설명할 수 없는 통증도 오늘은 찾아오지 않았다.
저녁이 지나고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은 언제나 애매하다.하루가 끝났다고 말하기엔 아직 남아 있고,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고 하기엔 어딘가 미완의 감정들이 공기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도진은 집으로 돌아온 뒤 불을 켜지 않은 채 잠시 현관에 서 있었다.어둠 속에서 자신의 숨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그 숨에는 서두름도, 망설임도 없었지만 정리되지 않은 여운이 섞여 있었다.코트를 벗어 걸고 거실로 들어왔을 때, 창밖의 불빛이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도시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 살아 있음이 오늘은 이상하게 위로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메시지를 보낼 이유는 없었다.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