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이미 궁을 완전히 삼켜버렸다.달빛은 높고 얇아서 궁의 지붕들을 희미하게 빛으로 두드릴 뿐, 회랑에는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바람조차 살금살금 스치는 듯한 고요한 밤.그 고요 속에서 한 사람의 방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세자의 처소였다.현은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등불은 작은 불씨처럼 흔들렸고, 그 불빛 아래에서 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하루 내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장면.전날 밤 회랑에서 보았던 이수와 도진의 모습.정확히 무엇을 본 것이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그 침묵 속의 떨림, 눈빛의 잔해,서로를 향한 알 수 없는 맴돌음.그 모든 것이 현의 마음 한 부분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깨워냈다.그는 하루 종일 그 감정을 억눌렀다.'빈이 흔들린 마음을 숨기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내가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인가.'그 질문은 현 자신에게조차 위험한 것이었다.그는 책상 위 술잔을 집어 들었지만 입에 대지 못했다.술보다 더 뜨겁고 더 혼란스러운 것은 이미 그의 가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그때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전하, 모실까요?”내관이었다.현은 술잔을 내려놓고 작게 일렁이는 눈빛으로 문을 향해 말했다.“들라.”내관은 조심스럽게 들어와 예를 올렸다.형식적인 절차였으나, 그 순간만큼은 공기 자체가 단단하게 굳어지는 듯한 긴장감이 있었다.내관은 재촉하지 않았고, 현은 서두르지 않았다.잠시, 둘 사이엔 침묵이 내려앉았다.그리고, 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 궁의 움직임을 어찌 보았느냐.”내관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특별한 일은 없었사옵니다. 다만… 빈마마께서 밤에 잠시 회랑을 거닐었다는 정도만…”현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 움직임은 발각될 만큼 크지 않았지만,내관은 그 미세한 흔들림이 오늘의 대화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잠시 후, 현이 낮게 말했다.“도진은… 어디에서 경계를 섰느냐.”내관은 숨을 삼키듯 대답했다.“호위관 도진
Last Updated : 2026-06-23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