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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화

그제야 보람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지금 신고라도 하겠다는 거야? 하나뿐인 동생을?”“오늘부터 내 동생은 영이 하나야. 조사 잘 받고, 다신 찾아오지 마.”턱을 놓는 순간 보람이의 몸이 휘청였다. 하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등을 돌린 준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오빠!”“안 놔?”“신고하기만 해.. 오빠 진짜..! 진짜 미쳤어?”“놓으라고 했어.”팔을 거칠게 떼어내고,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잘못했다는 말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후회하는 기색이라도 내비칠 줄 알았다. 후회는 무슨, 신보람은 생각보다 더 악랄한 쓰레기였다.다시 차에 올라타 핸드폰을 들었다.목소리가 유난히 낮게 깔렸다.“이 팀장. 신보람 얼굴 각도별로 스캔 떠서, 당장 출입자 제한 명단에 등록해.”“알겠습니다.”“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같이.”“네.... 대표님.”“CCTV 영상은 법무팀에 넘겨. 협박, 상해죄로 당장 소장부터 접수하고.”다음 통화 상대는 석현이었다. “어. 우리.. 방금 막 집에 도착했어.”“영이는.”“아까부터 너 좀 말리라고 난리야.”“상처는? 상처는 좀 어떤데.”“꿰맨 상처가 6개래. 나머지도 가벼운 상처가 아니라 거즈랑 붕대랑 소독약도 잔뜩 받아왔고.”“금방 가.”한숨이 절로 나왔다. 유리가 잔뜩 박혀 피가 흐르던 그 다리가, 붉게 물든 손이 뇌리에 박힌 듯 잔상처럼 떠다녔다. 동시에 답답했다. 남의 미래는 그렇게나 보면서, 볼 때마다 구하려고 애를 쓰면서.왜 자기 미래는, 자기 불행은 늘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건데. 시동은 걸었지만 이상하게 이곳에 올 때와는 속도가 달랐다. 영이의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힘이 들 것 같았다. 영이에게는 늘 미안한 일만 생긴다. 지켜준다고 약속했는데, 한 번도 지키지 못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석현이 다가왔다.“영이는.”“막 잠들었어.”준호는 차마 영이의 방문은 열지 못하고,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석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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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순간, 영이의 눈동자게 눈물이 그렁하게 맺혔다.“나는.... 중장님이랑, 사모님.. 그리고 언니한테는 화 못내.”“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뭐가 다른데? 뭐가 그렇게 특별한 인간들인데?”“버려진 나를 거둬주셨고 키워주셨어. 근데도 나는... 단란했던 가족 사이를 늘 틀어지게만 만들잖아.”역시나였다. 영이는 그래서 늘 우리 가족 앞에서 약해진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 잘못된 생각이다. 이제라도 바꿔 먹어야 하는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그게 왜 너 때문이냐고. 그리고 뭐? 거둬주고 키워줘?”“오빠.”“웃기지 마. 지하실에 가둬두고 이용만 했어. 넌.. 그 인간들한테 내내 이용만 당한 거야.”그렁그렁 맺힌 방울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나도 똑같아. 아니? 어쩌면 더 비열하고 못된 방관자였지. 그러니까 남매 사이도 내 멋대로 끊어버렸고.”멋대로? 아니다. 분명 자신이 먼저 원한 거였다.오빠를 사랑해서, 세상에 자기 편이라고는 오빠 밖에 없었어서.이상하게 준호의 말이 영이에게는 심장을 찌르는 상처였다.“나 오늘은.. 오빠가 조금 미워.” 어깨를 붙잡았던 손에 힘이 스르륵 빠졌다.그 순간, 영이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게 마지막 대화였다.영이는 그대로 뒤를 돌아 방 안으로 모습을 감췄고, 준호는 자책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똑똑.조심스레 영이의 방문을 두드렸다. “영아, 밥 먹자. 밥 먹어야 약 먹지. 약 먹고 자야 얼른 낫지.”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불빛 하나 없이 컴컴했던 방 안에 거실 빛이 새어 들어 흐릿한 실루엣만 보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실루엣.단단히 화가 났나 보다. 그 생각이 들어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아까는 오빠가 말이 심했어. 너무 속상해서.. 감정 조절이 잘 안됐나 봐.”살금살금 다가가 무드등을 키고 이불을 살짝 내려보았다.얼마나 울었는지, 머리카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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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영이는 침대 아래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커다란 애벌레 한 마리가 누워있는 게, 설마 이상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이 분명 오빠였다. “오.. 오빠!”“아... 어! 영아! 괜찮아?”“그게 다 뭐야? 왜 이상한 꾸러미 안에 들어가 있어?”“이불 깔기엔 귀찮아서, 그냥 침낭 하나 펼치고 잤어.”아.. 저게 침낭이구나. 영이는 자신도 모르게 키득키득 작은 웃음을 흘렸다.“왜 웃어.”“오빠. 왕 꿈틀이 애벌레 같아.”“뭐?”“눈동자랑 입술만 움직이는 것도 엄청 웃겨.”준호가 고개를 숙이며 턱으로 지퍼를 내렸다.뒤이어 머리부터 어깨, 허리, 다리까지 빠져나오자 영이가 더 크게 웃었다.“우와! 탈피했어!”“이제 좀 멀쩡해졌어?”“오빠는.. 알렉산드라 비단 제비나비야.”“응..? 그게 뭐야?”“세상에서 가장 큰 나비.”순진한 말투와 표정에 준호도 웃었다. 영이한테 나는 꽤나 커다란 존재였구나. 아마도 그건 체격 차이뿐만이 아닐 테고.“배 안 고파?”“고파.”“아침 먹고 좀 더 쉬자. 오늘은 출근하지 말고.”영이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나 회사 갈 거야.”“영아. 하루는 쉬어도 돼.”“멀쩡한데 왜..? 너튜브 보니까 사람들은 막 홍수가 나도 물길을 헤치고 출근하던데?”“그.. 그건....”준호가 어물쩡거리는 사이, 영이는 씩씩하게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출근이 저렇게나 좋을까? 아직 많이 아플텐... 아! 잠깐만! 상처에 물 닿으면 안 되는데!“영아!”다급히 영이를 따라가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당연히 깜짝 놀란 영이의 눈에 휘둥그레졌다.“응? 왜?”“상처에 물 닿으면 안 돼. 오빠가 머리 감겨줄게.”영이는 결국 욕조에 고개를 숙이고 준호의 손길에 모든 걸 맡겼다.따뜻한 물이 머리칼을 적시고, 부드러운 거품에선 향기가 났다.“괜찮아? 안 뜨거워?”“으응. 근데 오빠. 머리카락 끝까지 조물조물해야지.”투박한 손길이 한참 동안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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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석현 역시 준호의 편이었다.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명백한 상해를 입혔는데, 이대로 넘어가는 건 참을 수 없었다.“유 비서. 얼른 와서 앉아.”“싫어요. 이건 제 일이에요. 제가 당사자예요. 근데 왜.. 물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결정해요?”모두의 입이 다물렸다.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물러서기도 싫었다. 영이가 이렇게 나올 거라곤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저 때문에 가족끼리 자꾸 싸운다는 건, 진짜 문제가 저한테 있다는 거겠죠.”“영아.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고소하지 마세요. 만약에 하시면요....”“...”“그때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갈 거예요. 저한테 가장 어울리는 자리로요.”“유영!”준호의 목소리가 거칠게 터졌다. 책상 위에 올려진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니까 하지 마세요. 싫어요. 죽을 만큼 싫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영이는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석현이 곧바로 따라 일어섰다.“신준호. 일단 스톱해."영이는 복도를 빠르게 걸어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석현 역시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레 문이 열리고, 계단에 쪼그려 앉은 영이의 모습이 보였다.“영아.”석현의 목소리에 영이는 고개도 들지 않고 입을 열었다.“이사님. 제 삶은요.. 늘 끈적거려요.”“그게 다 무슨 소리야..”“너무 끈적거려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요. 오빠한테는.. 찝찝한 설탕물만 끼얹는 존재예요."덤덤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말투에 마음이 아려왔다. 무슨 말을 해줘야 위로가 될까. 어떤 말을 해줘야 받아들일까. 너무도 어려워 쉽사리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준호도 화가 나서 그러지. 오빠니까, 영이가 다쳤으니까.”“보람 언니도 동생이에요. 어쩌면... 저보다 더 확실한 관계요.”“둘 다 똑같은 동생이야. 확실하고 불확실하고. 그런 단어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아.”아니다. 지금이야 어차피 남매라는 벽은 허물어버렸고, 생각해보면 사는 내내 언니랑은 너무나 달랐다. 한 번도 중장님을 아빠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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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조금 더 용기를 낸 혀가 영이의 입술을 벌렸을 때,벌컥!비상구 문이 거칠에 열리더니 석현의 몸이 거칠게 떨어져 나갔다.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목격한 준호가 석현의 멱살을 휘어잡아 벽 쪽으로 밀쳐버린 것. “강석현.”석현은 보았다. 코앞에서 이를 부득부득 가는 신준호의 표정을, 살기 어린 눈빛을. “놓고 말해.”“미친 새끼야,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줄 알아?”“멱살 잡힐 짓까진 아니지 않나.”영이가 달려와 준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아무래도 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자, 그 단단한 팔에 매달려 낑낑거렸다. “이거 놔..! 오빠 왜 그래!”“비켜.”문득 영이의 머릿속에 지난 일이 스쳤다.회식 날, 석현 오빠가 자신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다며 질투 어린 화를 내던 오빠의 모습. 이건 석현 오빠가 진실을 몰라서 벌어진 일이다. 아무나라면 상관 없었겠지만 석현오빠는 오빠랑 가장 친한 친구니까. 차라리 진실을 알려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지 마. 나 그냥... 석현오빠한테 사실대로 이야기 할래.”두 사람의 고개가 영이에게로 향했다. 동시에 멱살을 움켜쥔 손에서 스르륵 힘이 풀렸다.영이가 석현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석현 오빠, 저랑 준호오빠... 더는 남매 아니에요."멍한 표정을 짓던 석현이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유전자 검사까지 끝낸 거, 내가 다 알고 있는데."준호는 갑작스러운 영이의 고백에 당황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영이와 같은 생각이 들어버렸다.강석현이 마음을 정리할 방법은 이거 하나 뿐이니까.입을 맞추는 장면 따위는 두 번 다신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상관 없어. 그딴 증명서 따위.""뭐?""나랑 영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래서 남매같은 거 더는 안 하기로 했어."이번에는 석현이 준호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그동안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던 의심들이 얼마나 한심했는데. 그게 다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 정말 현실이라고? "너 지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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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주차장으로 향한 석현은 막무가내였다.영이를 차에 태우고 운전대를 잡더니, 여전히 진정 되지 않은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영이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어깨를 잔뜩 움츠렸고, 최대한 석현을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내리 깔았다."오빠.... 일단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시면....""유영, 똑바로 이야기 해. 너 신준호랑 어디까지 갔어.""네...?""잤어?"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당당하지 못할 사이라는 건 진작에 알았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내뱉든 비난의 화살이 돌아올 것 같았다.그리고 그 대답같은 침묵에 석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신준호가 어떻게 이래? 영이가 그 산 속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뻔히 알면서.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가? 더러운 피를 물려받아서, 고소는 커녕 똑같은 짓이나 하고 앉아 있는 거냐고."오빠...""내가 지금 경찰서를 가야 하나, 방송국을 가야 하나 굉장히 고민 중이거든? 그러니까 조용히 해줄래?"머릿속에는 자꾸만 근친상간이라는 그 더러운 단어가 아른거렸다.끊는다고 끊어지는 관계야? 혼인신고도 못하는 사이에, 뭐? 사랑?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꾸역꾸역 참아냈다.지금은 영이의 마음을 돌리는 게 우선이다. 하루 빨리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 평범한 사랑을 하고, 평범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물론 그 평범한 사랑은 나랑 하게 될 거고.***무슨 정신으로 차를 몰았는지도 모른 채 도착한 곳은 집이었다. 지금 당장 영이를 데리고 향할 곳은 집 말고는 딱히 없었으니까.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영이를 소파에 앉히고, 찬물을 벌컥벌컥 마셔댔다.그리고는 새 컵에 물을 따라 영이에게 건넸다."마셔.""저.... 갈래요...""아니, 못 가. 그러니까 포기하고 물부터 마셔."영이가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건네 받았다.왜 이렇게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이 나는지, 석현 오빠는 평소답지 않게 왜 이렇게 무서운 분위기만 풍기는 건지. "저랑 오빠가 그렇게 잘못한 거예요....?"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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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준호의 손에 들린 위스키잔이 불안하게 떨렸다. 석현은 그 손을 빤히 응시하면서도 차가운 냉기만을 뿜어댔다."그동안은 그냥 여동생을 아끼는, 유난스러운 오빠인 줄 알았거든?""내 얘기 좀 들어줘라.""아니. 넌 쓰레기야. 영이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척하면서 이용한 쓰레기라고."준호가 위스키를 한 모금 넘겼다. 쓴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석현의 말이 더 쓰게 느껴졌기 때문일까.그래도 억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멋대로 판단하지마. 난 영이를 이용한 적도, 그 어떤 척도 한 적 없으니까.""똑똑한 신준호가 몰랐을 리 없었을 텐데. 아무리 이복남매여도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수 없을 뿐더러 아이를 낳는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너무 간다, 강석현.""벌써 잔거 같던데 뭘? 내 말이 틀려?"설마 영이가 말한 건가? 아니지, 사랑을 외치는 성인 남녀가 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 모르면 더 이상한 거지.이상하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석현의 눈동자에 경멸이 담겨 있어서. 이런 눈빛은 처음이어서."그런 계산은 할 여유도 없었어. 나도 참을만큼 참아 봤는데, 이미 확신이 들어버린 걸 어떡해."석현 역시 위스키를 비워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눈앞에 있는 신준호가 너무너무 미운데, 표정이며 말투며 하나같이 다 진심같아서. 그게 더 가슴을 옥죄어왔다."하... 영이한테도 그딴 말로 가스라이팅이나 해댔겠지."잠시 침묵하던 준호가 석현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적어도 너 만큼은 내 편이 되어줄 순 없는 거냐."석현이 기가 찬 듯 실소를 터뜨렸다."어, 없어. 친구니까 더 뜯어 말리는 거고, 내가 영이를 여자로 본다는 사실에 감사나 해라.""강석현...!""영이한테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어? 세상에 너 하나 밖에 없을 때랑 아닐 때랑. 그때도 과연 마음이 똑같을까?"이상했다. 자꾸만 석현의 말에 동요가 되어버렸다. 정말로 영이의 세상에 남자라고는 나밖에 없었어서 그랬던 걸까.믿는데, 분명히 믿는데. 어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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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그때였다.띵동─ 쾅, 쾅, 쾅!"강석현, 문 열어!"초인종 소리와 주먹으로 현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준호의 목소리가 섞여 울려 퍼졌다.영이는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준호 오빠랑은 다시 남매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안녕히계세요."그토록 원하던 말이었는데, 왜 하나도 기쁘지 않은 거지? 오히려 왜 패배자가 된 기분이지?그 사이, 현관으로 향한 영이는 아무렇지 않게 현관문을 열었다.준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영아... 괜찮아?""응, 오빠. 나 괜찮아. 집에 가자. 집에 갈래."쿵.문이 닫히고,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린 석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한마디 한마디를 또박또박 내뱉던 영이의 표정이 자꾸만 아른거렸다.내내 아무것도 몰랐던 영이가 그저 가스라이팅을 당한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진짜야...? 니들 감정이 진짜 사랑이라고?'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 남은 희망을 붙들기로 결심했다.정말로 사랑이라면, 유영은 신준호를 위해 사랑이 아닌 남매를 택해야 한다.게다가 제 입으로 노력까지 한다고 신신당부 했으니, 아직은 그 기회라는 게 있는 것이다.***집으로 돌아온 준호는 신발도 채 벗기 전, 영이부터 품안에 와락 끌어안았다.하지만 영이는 그런 준호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영아.""오빠, 오늘 석현 오빠가 화냈던 거. 나 다 이해해.""그게 무슨 말이야? 이해? 이해를 한다고?"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래도 오빠랑 나는 다시 남매사이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유영!""오늘 일을 계기로, 나도 조금은 더 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됐어. 얻는 것보다 잃는게 더 많은 사랑이라면 꾸역꾸역 끌고 갈 필요는 없는 거잖아."준호의 동공이 좌우로 흔들렸다. 꾸역꾸역? 어떻게 사랑에 그런 단어를 붙일 수 있어?"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머릿속에서 뭔 거지 같은 계산하고 있는 거냐고.""오빠와 나의 남은 인생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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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오후가 지나도 준호가 출근을 하지 않자, 답답해진 석현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이대로 감정의 골이 상해 있긴 싫었다. 사과가 필요하다면 하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도 싶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고.“어디서 또 뺑이 치고 있냐.”“바.”“갈게.”자주 찾던 바 안으로 들어서자,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준호의 모습이 보였다.표정은 굳어있었고, 그 독한 위스키가 절반이나 줄어 있었다.“얼마나 마신 거야.”“왔냐.”자리에 앉은 석현은 준호의 얼굴부터 살폈다.영이도 아침부터 눈이 팅팅 부어있던데, 이 자식의 몰골 역시도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그것도 단 하루만에.“영이, 혼자 출근했더라.”“남매로 돌아가쟤. 그것도 너무나 쉽게.""...""이제야 속이 시원하냐? 네가 바라던 게 이거였잖아?”석현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입술만을 달싹였고, 준호는 빈 잔에 위스키를 따라 석현 쪽으로 툭 밀어주었다. “모질게 군 건 미안하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 이게 맞는 거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정답이니까.”“정답...? 그런 게 있긴 한 건가.”응, 남매 사이에는 사랑이 불가능해. 그건 정해진 정답이고 앞으로도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을 거야. 석현은 그런 마음으로 힘겹게 제 마음을 털어놓았다.“영이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저 꼭 닫힌 꽃봉오리가 핀다면 얼마나 더 예쁠까. 얼마나 더 사랑스러울까.”“.....”“근데 신준호. 영이는 네 봉오리가 활짝 피길 더 바랄 거야. 그러니까 그런 결정을 내린 거고.”준호가 흐릿한 눈으로 석현을 바라보았다. “지금 와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라고...? 그게 말이 돼? 아무렇지 않게 동생처럼 대하라고?”“못 보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뭐?”“너만 힘든 거 아니야. 영이도 힘들어. 그러니까 너도 영이 결정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만이 흘렀다.쓰디쓴 알코올 향도,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도 꼭 자신들과는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그러는 너는? 네 마음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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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영아! 오빠가 신준호 딱! 붙잡아왔지롱!”“영아! 우디 영이 밥 무고떠? 뭐 무고떠? 우응~?”이게 무슨 상황이지? 다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애교가 흘러넘쳤고, 술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을 했다. “한 잔 더 하자아! 한 잔 더!”“조오치! 서켜나! 요기 앉아이써! 내가 맥주 따악 꺼내올게!”“나는 제로슈가앙!”보다 못한 영이가 냉장고로 향하는 준호의 앞을 딱 막고 섰다. “안 돼!”“잉잉..?”“여기서 더 먹으면 안 된다고!”“왜앵...!”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 지금 술이나 먹고 허우적 거릴 때야? 자신은 내내 마음을 다잡느라 한 숨을 백 번도 넘게 쉬었는데. 오빠가 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얼마나 연습했는데.고작 마주한 꼴이 제정신이 아닌 모습이라니. 하루 종일 무력하게만 만들었던 슬픔은 무슨, 열이 화르르 올랐다.“지금도 둘 다 고주망태잖아!”“힝.. 고주망태래.. 우리한테.. 고주망태래앵...”준호는 정말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등을 홱 돌리더니, 석현을 끌어안고 흐느적거렸다.“영이가 화내써어.. 소리 질러써어..”“영이가 너무했네애....”사람이 술에 취하면 다른 인격이 나온다는 사실을 영이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소파로 향해 두 사람을 억지로 떼어놓고, 준호의 팔을 들어 어깨에 감았다.“방에 가서 자.”“흐익...? 영이가 데려다줘어?”“응.”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축 늘어진 몸은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고, 한 걸음도 제대로 뗄 수 없었다.“으아.. 오빠... 조금만 걸어봐. 제발..”“우디 영이 복숭아 쩰리 사조야 대는데애.. 쩰리.. 쩰리..”그때, 중심을 잃은 준호의 다리에 힘이 풀리며, 영이 마저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턱!영이가 준호의 몸 아래에 단단히 깔려버렸다. 전신이 맞닿고, 얼굴까지도 가까운 거리.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져 민망함이 몰려왔다.“후아...”“오.. 오빠....”영이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두근거림은 이제 석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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