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Chapter 11 - Chapter 20

182 Chapters

011화 불협화음의 침입자(2)

이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기뻐하거나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명백한 '불쾌함'이었다."누구 맘대로.""갤러리 도아의 공모전입니다. 수백 명의 작가들이 목숨을 걸고 지원하는 곳이죠. 작가님의 그림은 투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확실히 시선을 끄는 에너지가 있었습니다."서아는 완벽한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대를 통제하고 압도하기 위해 수없이 연습했던, 우아하고 서늘한 미소였다."하지만 우리 메인 홀에 걸기엔 너무 날것이더군요. 색채를 조금 누르고, 구도를 안정적으로 수정한다면…….""그래서, 내 그림을 당신들 입맛에 맞게 '수정'해서 걸어주겠다?"이안이 서아의 말을 툭 끊어먹었다."그게 큐레이터의 역할이니까요. 원석을 다듬어서 가장 완벽한 상태로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 그것이 상품 가치를 높이는 길입니다.""상품 가치."이안이 낮게 읊조렸다.그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번졌다.이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소파의 가죽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그는 서아의 책상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큰 체구가 다가올수록 서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이안이 책상 가장자리를 짚고 몸을 숙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서아의 시야에 이안의 목덜미와 쇄골, 그리고 지워지지 않은 붉은 물감 자국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테레빈유 냄새가 훅 끼쳐왔다. 숨이 막힐 듯한 압도감."똑똑히 들어, 관장님."이안의 시선이 서아의 눈동자를 정확히 꿰뚫었다."내 그림은 당신들 벽에 걸라고 그린 예쁜 쓰레기가 아니야.""말조심하시죠.""말조심? 당신이야말로 똑바로 봐."이안이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거칠게 펼쳤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엉켜 울부짖는 듯한 그림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이게 상품으로 보여? 당신네 그 고상한 사모님들 거실에 걸어놓고 커피 마시면서 구경할 수 있는 그림 같냐고.""예술은 결국 관람객과 소통해야 의미가…….""지랄하네."서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완벽한 세계에서 누구도 그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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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화 불협화음의 침입자(3)

[해방촌, B동 옥탑]서아는 명함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내가 왜 거기에 가. 미친 소리.'머릿속으로는 수십 번이고 명함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저렇게 무례하고 교양 없는 인간과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완벽한 삶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하지만.그녀의 심장은 방금 전 남자가 턱을 쥐었을 때의 그 서늘하고 거친 촉감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당신은 내 그림에 먹히고 싶은 거지.'귓가에 맴도는 이안의 조롱 섞인 목소리에, 서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머리, 목 끝까지 채워진 블라우스 단추.완벽하지만, 박제된 나비처럼 생명력이 없는 여자.서아는 구겨진 명함을 버리기 전에 계약 담당자를 불렀다. 감정과 업무를 분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문제를 조항으로 바꾸는 것이었다."권이안 작가 쪽 조건, 다시 정리해 주세요. 전시작 최종 선정 권한은 갤러리에 있고, 설치 과정에서 안전상 문제가 있으면 수정 요구할 수 있다는 문구도 넣고요.""작가가 동의할까요?""동의하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습니다."단호한 목소리였다. 서아는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서랍 가장 깊숙한 칸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도 시선은 몇 번이나 그쪽으로 돌아갔다.잠시 뒤 이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계약서로 사람 성격까지 고칠 수 있다고 믿어요?]서아의 미간이 좁아졌다.[업무와 성격은 관계없습니다. 전시를 원하면 조건을 확인하세요.]답장은 곧 왔다.[관장님은 모든 걸 업무라고 부르면 안전해져요?]서아는 화면을 껐다. 삭제 버튼을 누르는 데에는 한 번의 터치면 충분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고 서류를 읽는 척했다.이안은 무례했다. 준비도 없었고, 시간 약속도 지키지 않았으며, 갤러리의 권위를 존중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평소의 서아라면 첫 미팅에서 잘라냈을 유형이었다.그런데도 그녀는 계약 담당자에게 말했다."미팅 일정 하나 더 잡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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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화 완벽을 허무는 감각(1)

오후 4시 20분.해방촌의 비좁고 가파른 골목길.서아의 하얀색 포르쉐 파나메라가 불법 주차된 트럭과 전봇대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고 있었다.빠지직-.타이어가 바닥에 널브러진 깨진 소주병 조각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불쾌하게 신경을 긁었다."하아……."서아는 운전대에 얹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가죽을 두드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붉은색 점은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리고 있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녀가 아는 세계와는 너무도 달랐다.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빌라들, 얽히고설킨 시커먼 전깃줄, 그리고 골목 구석에 쌓인 쓰레기봉투들.최고급 대리석으로 마감된 한남동의 자택과 먼지 한 톨 허용하지 않는 청담동의 갤러리만을 오가던 서아에게, 이곳은 흡사 다른 차원의 빈민가처럼 느껴졌다.'내가 지금 여기서 무슨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지.'서아는 조수석에 던져둔 구겨진 명함을 곁눈질했다.[해방촌, B동 옥탑]그 무례하고 오만한 남자, 이안이 남기고 간 종이 쪼가리.어제 갤러리에서 그 수모를 겪고도 결국 이 불결한 골목까지 차를 몰고 온 스스로가 서아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냥 확인만 하는 거야. 그 그림들이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로 우리 갤러리에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원석인지. 관장으로서의 의무일 뿐이야.'서아는 애써 스스로에게 합리적인 변명을 늘어놓으며 시동을 껐다.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훅 하고 미지근하고 습한 공기가 그녀의 온몸을 덮쳤다. 정제되지 않은 매연 냄새와 하수구 냄새가 뒤섞인, 도무지 통제되지 않는 날것의 냄새.또각.10센티미터 높이의 지미추 스틸레토 힐이 금이 간 아스팔트 바닥에 닿았다.티끌 하나 없는 크림색 실크 블라우스와 정교하게 재단된 차콜색 슬랙스. 서아의 차림새는 이 허름한 골목길과 지독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무시하며, 서아는 명함에 적힌 B동을 찾아 골목 안쪽으로 걸었다."여기네."서아의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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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화 완벽을 허무는 감각(2)

이안의 시선이 서아의 얼굴에서 시작해, 크림색 실크 블라우스, 단정한 슬랙스, 그리고 바닥에 닿은 뾰족한 스틸레토 힐까지 천천히, 아주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진짜 왔네."이안이 나이프를 물감이 떡진 테이블 위로 툭 던지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이런 쓰레기장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명함을 줬다는 건, 오라는 뜻 아니었습니까?"서아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차갑게 대꾸했다.자신이 뿜어내던 완벽한 큐레이터로서의 위엄이, 이 비좁고 냄새나는 옥탑방에서는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이안은 옆에 놓인 수건으로 얼굴과 목의 땀을 벅벅 닦아내더니, 발로 툭 차서 철제 의자 하나를 서아 쪽으로 밀어주었다."앉아. 차는 없어. 냉장고에 먹다 남은 맥주 정도는 있는데.""됐습니다. 오래 있을 생각 없으니까."서아는 물감 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그 더러운 의자를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결벽증이야?""위생 관념이 철저한 편이죠. 특히 이런…… 통제되지 않은 공간에서는 더더욱.""통제?"이안이 픽 웃으며 냉장고에서 미지근한 캔 맥주 하나를 꺼냈다.치이익-.탁한 탄산 소리와 함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 움직임을 시선으로 좇고 침을 삼켰다."당신은 참 피곤하게 사네. 그 잘난 통제 때문에 목구멍까지 단추를 꽉꽉 채우고 있으니,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내 표정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마시죠. 나는 오늘 큐레이터로서 당신의 원화들을 확인하러 온 겁니다."서아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시선을 돌렸다. 벽에 기대어 있는 거대한 캔버스들로 향했다.포트폴리오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실물은 훨씬 더 기괴하고 폭력적이었다.핏빛 붉은색과 심연의 검은색. 캔버스 위에서 색채들이 마치 서로를 뜯어먹고 있는 듯한 형상."그림들이…… 전부 공격적이네요.""공격적이라."이안이 남은 맥주를 바닥에 대충 내려놓으며 서아의 곁으로 다가왔다.그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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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화 완벽을 허무는 감각(3)

등 뒤에서 이안의 나른하고 오만한 목소리가 옥탑방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도망가도 소용없어, 큐레이터님."서아의 걸음이 멈칫했다."당신은 결국 내 그림에, 나한테 발목 잡히게 될 테니까. 당신 몸에 밴 그 가짜 향수 냄새가 다 지워질 때까지."서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수 없었다.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옷자락을 움켜쥐고 도망치듯 가파른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녹슨 철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자, 쨍한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시야를 하얗게 태웠다."하아, 하아……."작업실을 나온 뒤 서아는 곧바로 차에 오르지 않았다. 골목 끝에 세워 둔 자신의 차까지 걸어가며 손목과 소매를 차례로 살폈다.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지워질 것 같은 물감 자국은 생각보다 집요하게 남아 있었다. 향도 마찬가지였다. 차 문 앞에 선 그녀는 휴대전화 전면 카메라를 켜 머리카락과 입술, 목깃을 확인했다. 누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행동이라고 인정하는 대신,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정리라고 생각했다. 손목 자국은 소매 끝을 끌어내려 가리고, 재킷은 안쪽이 보이지 않게 접었다. 이전까지 비밀은 머릿속의 감정에 가까웠다. 그날 처음으로 비밀은 차에 오르기 전부터 관리해야 하는 물리적인 흔적이 되었다. 서아는 그 변화의 의미를 끝까지 생각하지 않았다.차에 올라탄 서아는 문을 잠그고 운전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에어컨을 최대로 틀었지만, 얼굴에 오른 열기는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백미러 속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는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창백할 정도로 하얗던 뺨은 수치심과 알 수 없는 열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무엇보다, 그녀를 미치게 만든 것은 냄새였다.그녀의 말끔한 포르쉐 실내에 맴돌던 은은한 디퓨저 향은 온데간데없고, 옷자락과 머리카락에 깊게 배어버린 독한 물감 냄새와 수컷의 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미쳤어. 백서아,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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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화 박제된 천재의 비명(1)

다음 날 저녁.챙-.크리스털 샴페인 잔이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넓은 홀을 울렸다.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광화문의 5성급 호텔 최상층 연회장.매년 이맘때쯤 열리는 출판계의 가장 큰 행사, '문인의 밤'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형 출판사 대표들, 평론가들, 그리고 베스트셀러 매대에 책을 올린 작가들이 한데 모여 교양을 과시하는 자리였다.그 화려하고 웅장한 공간의 한가운데.언제나 그렇듯 중심에는 강도진이 있었다."강 작가님, 이번 유럽 판권 수출 계약 건 들었습니다. 선인세가 어마어마하던데요? 역시 한국 문단의 자랑이십니다."국내 최대 규모의 문학 출판사, 민음서관의 최 대표가 특유의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도진에게 잔을 내밀었다.도진은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노골적인 아부의 말을 여유롭게 받아넘겼다."과찬이십니다, 대표님.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죠. 번역가분이 제 문장의 뉘앙스를 아주 잘 살려주신 덕분입니다.""에이, 겸손하시기는. 원작이 훌륭하니까 번역도 빛을 발하는 거죠. 유럽 독자들도 강 작가님 특유의 그 서늘하고 날카로운 심리 묘사에 푹 빠졌다는 기사를 봤습니다."옆에 서 있던 김 평론가가 거들었다."맞습니다. 강도진 작가님의 소설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위선과 욕망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해부해 내지 않습니까? 특히 그 전작 《유리구슬》에서의 결말은 아직도 문단에서 회자되고 있죠. 완벽한 플롯이었습니다.""부끄럽습니다. 좋게 읽어주셨다니 다행이네요."도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입안으로 퍼지는 값비싼 빈티지 샴페인의 향. 최고급 맞춤 정장이 주는 부드러운 착용감. 자신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모든 것이 흠잡을 데 없었다.겉보기에는.'역겹군.'도진은 잔을 쥔 손가락에 미세하게 힘을 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찬사들이 도진의 귓가에는 마치 윙윙거리는 파리 떼의 날갯짓 소리처럼 들렸다."그래서 말인데, 강 작가님."최 대표가 목소리를 낮추며 은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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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화 박제된 천재의 비명(2)

"……""조급해하지 말고 계속 써 봐. 이번 책 좋았어. 문장만 조금 더 다듬으면 아주 훌륭해지겠더군."여유롭고 우아한 타이름. 하지만 그 속에는 상대의 알량한 재능을 깔아뭉개는 철저한 오만함이 담겨 있었다.주변에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억지웃음이 터져 나왔다."하하하! 역시 강 작가님. 후배 아끼는 마음이 각별하십니다." "태경 작가, 대선배님 조언 새겨들어야지."류태경은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이 붉어졌지만, 차마 도진의 압도적인 아우라 앞에서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도진은 잔에 남은 샴페인을 비워냈다.싸움에서는 이겼지만, 입안이 모래를 씹은 것처럼 까끌까끌했다.'다들 나를 지켜보고 있어. 내가 언제 추락할지, 언제 밑천이 드러날지.'숨이 막혀왔다. 목 끝까지 채운 와이셔츠 단추가 밧줄처럼 느껴졌다."죄송하지만,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도진은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사람들의 무리에서 빠져나왔다.연회장을 벗어나 긴 복도를 걷는 동안 도진의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여유롭고 부드럽던 가면이 벗겨지고, 신경질적이고 피폐한 본래의 얼굴이 드러났다.그는 화장실이 아니라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무거운 철문을 밀고 들어가자, 퀴퀴한 시멘트 냄새와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도진은 벽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하아…… 하아……"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도진은 재킷 주머니에서 신경안정제가 들어 있는 작은 약통을 꺼냈다. 알약 두 개를 입에 털어 넣고 침으로 억지로 삼켰다.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쓴맛.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눈을 감았다.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커서. 텅 빈 백지. 아무리 키보드를 두드려도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활자들.'나는 끝났어.'절망감이 해일처럼 도진을 덮쳤다.자신이 쌓아 올린 견고한 성이, 사실은 썩은 기둥 위에 세워진 모래성이라는 것을 매일 밤 확인하는 끔찍한 고문.그는 평생을 통제와 완벽 속에서 살았다. 그의 소설 속 세계도 마찬가지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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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화 박제된 천재의 비명(3)

조금 전 연회장에서 류태경을 짓밟을 때 지었던 가짜 미소가 아니었다. 포식자가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 짓는, 순수하고 냉랭한 환희의 미소였다.그는 비상구 철문을 열고 다시 화려한 빛이 쏟아지는 연회장 복도로 걸어 나갔다.흐트러진 넥타이를 단정하게 고쳐 매고, 옷깃을 정돈했다.도진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서아. 나의 완벽한 아내.'도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연회장으로 돌아온 도진에게 사람들이 잇달아 잔을 내밀었다. 후배 작가는 그의 데뷔작을 읽고 소설가를 꿈꿨다고 했고, 평론가는 오래전 작품의 한 문장을 아직도 강의에서 인용한다고 말했다. 도진은 적절한 각도로 웃고 잔을 부딪쳤다."신작은 언제쯤 볼 수 있습니까?"가장 흔한 질문이 나왔다."쓰고 있습니다."거짓말은 너무 매끄럽게 나왔다.옆에 있던 김 편집장이 짧게 눈을 마주쳤다.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도진을 압박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이 흩어진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선생님, 완성본 말고 한 장이면 됩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만 보고 싶어요.""방향이 없으면요?"편집장은 대답하지 못했다.그 침묵이 오히려 정확했다.행사가 중반을 넘긴 뒤, 늦게 도착한 서아가 홀 건너편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었다. 도진은 샴페인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세는 평소처럼 반듯했지만, 웃음이 끝난 뒤 표정이 돌아오는 속도가 미묘하게 빨랐다. 손목을 가리는 소매를 한 번 잡아당기는 작은 동작도 보였다.그는 그 순간을 오래 보았다.예전 같으면 ‘피곤한가 보다’ 하고 지나쳤을 변화였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철저히 닫힌 인물에게 생긴 아주 작은 균열이, 빈 문서보다 훨씬 많은 문장을 불러왔다.도진은 휴대전화를 꺼내 메모장에 한 줄을 적었다.‘숨기는 사람은 들키지 않으려 할수록 더 정확한 동작을 반복한다.’김 편집장이 화면을 보려 하자 그는 곧바로 껐다."방향이 생긴 겁니까?"도진은 서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아마도요."처음으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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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화 선을 넘는 온도(1)

청담동의 프라이빗 다이닝 레스토랑.고급스러운 샹들리에 조명 아래, 갤러리 도아 팀원들의 회식 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최고급 한우 오마카세와 한 병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와인이 세팅된 테이블.평소라면 우아한 예술계의 가십이나 다음 분기 전시 기획에 대한 고상한 대화가 오갔을 자리였다.하지만 오늘따라 프라이빗 룸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원인은 단 한 사람.테이블 가장 끝자리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남자, 이안 때문이었다."……."서아는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신진 작가 발굴 기획전. 서아는 심사위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안의 그림을 메인 홀에 거는 것을 밀어붙였다. 그 기괴하고 폭력적인 붉은 캔버스가 갤러리에 가져올 파격을 확인하고 싶다는, 큐레이터로서의 오만함 혹은 호기심 때문이었다.전시를 앞두고 작가와 실무진이 얼굴을 트는 자리. 서아는 분명 비즈니스 차원에서 그를 이 자리에 불렀다.하지만 이안은 이 정제된 공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이었다."이안 작가님. 고기 더 안 드세요? 입에 안 맞으신가……."옆에 앉은 어시스턴트 윤지수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이안은 턱을 괸 채 제 앞에 놓인 최고급 안심스테이크를 나이프로 대충 쑤석거리고 있었다. 물감이 채 지워지지 않은 손톱 밑이 하얀 접시 위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보였다."됐어. 피 질질 흐르는 고기 씹는 취미 없으니까.""아…… 네에."지수가 멋쩍게 웃으며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이안은 와인잔을 옆으로 밀어내고, 웨이터를 불렀다."여기, 소주 한 병 줘요."웨이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죄송합니다만, 손님. 저희 레스토랑에는 소주가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 비슷한 증류주로는…….""아, 그래? 그럼 그냥 맹물이나 줘."이안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거친 행동 하나하나에 테이블의 대화가 뚝뚝 끊겼다.서아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이안을 응시했다."이안 작가님. 불편하시면 먼저 일어나셔도 좋습니다. 억지로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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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화 선을 넘는 온도(2)

직원에게 경고하고 계약상 조치를 검토하는 것이 평소의 자신이라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그녀는 문제를 축소했다.왜냐는 질문에 답할 수 없어서 서아는 층수 표시만 바라보았다.숫자가 하나씩 내려갈수록, 자신이 지켜 온 선도 같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서아는 먼저 걸어 나갔다. 직원들 앞에서는 다시 관장이었다. 내일 오전 회의 시간을 확인하고 각자 귀가하라고 지시했다.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완벽한 복원에 직원들은 안도했지만, 서아 자신만은 알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화장실에서 손을 떨던 사람과 지금의 관장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레스토랑 밖으로 나온 팀원들은 저마다 대리기사를 부르거나 택시를 잡아타고 서둘러 흩어졌다. 이안이라는 불편한 존재가 여전히 레스토랑 입구 한쪽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 것이다.순식간에 텅 빈 청담동의 밤거리.차갑고 건조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서아는 트렌치코트의 옷깃을 여미며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대리기사 호출 앱에는 '기사님이 배정되었습니다. 도착 예정 시간 15분'이라는 알림이 떠 있었다.'15분이나 기다려야 한다고…….'서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했다. 완벽한 큐레이터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도, 팀원들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 저 남자의 시선을 견디는 것도."다들 도망치듯 가버리네."등 뒤에서 낮고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아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고개를 돌리자, 레스토랑 벽에 삐딱하게 기대어 있던 이안이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져 구둣발로 비벼 끄고 있었다.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피곤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나른하고 위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내가 어지간히 불편했나 봐. 당신네 팀원들.""알면 다음부터는 이런 자리에 굳이 참석하지 마시죠. 작가님 환영회도 아닌데 굳이 따라와서 분위기 망칠 필요 없지 않습니까.""당신이 불렀잖아."이안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아를 향해 느릿느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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