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안의 시선이 서아의 얼굴에서 시작해, 크림색 실크 블라우스, 단정한 슬랙스, 그리고 바닥에 닿은 뾰족한 스틸레토 힐까지 천천히, 아주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진짜 왔네."
이안이 나이프를 물감이 떡진 테이블 위로 툭 던지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이런 쓰레기장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명함을 줬다는 건, 오라는 뜻 아니었습니까?"
서아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차갑게 대꾸했다.
자신이 뿜어내던 완벽한 큐레이터로서의 위엄이, 이 비좁고 냄새나는 옥탑방에서는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안은 옆에 놓인 수건으로 얼굴과 목의 땀을 벅벅 닦아내더니, 발로 툭 차서 철제 의자 하나를 서아 쪽으로 밀어주었다.
"앉아. 차는 없어. 냉장고에 먹다 남은 맥주 정도는 있는데."
"됐습니다. 오래 있을 생각 없으니까."
서아는 물감 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그 더러운 의자를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벽증이야?"
"위생 관념이 철저한 편이죠. 특히 이런…… 통제되지 않은 공간에서는 더더욱."
"통제?"
이안이 픽 웃으며 냉장고에서 미지근한 캔 맥주 하나를 꺼냈다.
치이익-.
탁한 탄산 소리와 함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서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 움직임을 시선으로 좇고 침을 삼켰다.
"당신은 참 피곤하게 사네. 그 잘난 통제 때문에 목구멍까지 단추를 꽉꽉 채우고 있으니,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
"내 표정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마시죠. 나는 오늘 큐레이터로서 당신의 원화들을 확인하러 온 겁니다."
서아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시선을 돌렸다. 벽에 기대어 있는 거대한 캔버스들로 향했다.
포트폴리오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실물은 훨씬 더 기괴하고 폭력적이었다.
핏빛 붉은색과 심연의 검은색. 캔버스 위에서 색채들이 마치 서로를 뜯어먹고 있는 듯한 형상.
"그림들이…… 전부 공격적이네요."
"공격적이라."
이안이 남은 맥주를 바닥에 대충 내려놓으며 서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올수록 서아에게서 풍기던 낯선 랑방 향수 냄새마저 깡그리 잡아먹히고, 지독한 땀 냄새와 기름 냄새가 그녀의 폐부를 짓눌렀다.
서아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뒤에는 벽돌 기둥이 버티고 있었다.
순식간에 이안과 서아의 거리가 좁혀졌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 서아는 고개를 들어 올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거리를 좀 두시죠."
"좁은 옥탑방에서 거리를 둬봤자 얼마나 두겠어."
이안이 서아의 머리 바로 옆 벽면을 손으로 짚으며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
거대한 그의 체구가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서아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이게 공격적으로 보인다고?"
이안의 시선이 서아가 보고 있던 붉은 캔버스로 향했다.
"네. 폭력적이고, 파괴적이죠. 정돈된 미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것의 감정. 갤러리 도아의 메인 홀에 걸기엔, 관람객들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노골적입니다."
"불쾌감."
이안이 그 단어를 입술 위로 굴리며 낮게 웃었다.
그의 숨결이 서아의 뺨에 닿을 만큼 뜨거웠다.
"당신은 이 그림을 보고 불쾌감을 느꼈어? 아니면……."
이안이 서아의 눈동자를 정확히 응시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억눌려 있던 뭔가가 들켜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나?"
"……무슨 헛소리를."
"거짓말하지 마. 당신 눈동자, 지금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잖아."
이안의 말이 맞았다. 서아의 심장은 지금 비정상적인 속도로 요동치고 있었다.
이 남자의 냄새, 짐승처럼 뿜어져 나오는 열기, 그리고 퇴폐적인 그림들이 만들어내는 이 지독한 공간의 에너지가 서아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완벽하게 통제된 삶을 살아오던 그녀에게, 이 통제 불능의 옥탑방은 지독한 독약이자…… 기묘한 최음제 같았다.
어지러웠다.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눈앞이 핑 돌았다.
서아는 애써 이성을 부여잡으며 이안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비키세요. 숨 막히니까."
하지만 서아의 손이 닿기도 전에, 이안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
물감과 굳은살이 박인 거칠고 커다란 손이 서아의 가느다란 손목을 강하게 쥐었다.
뜨거웠다. 화상을 입을 것처럼 델 듯한 체온.
남편 도진의 체온은 늘 서늘하고 일정한 36.5도였다면, 이 남자의 체온은 끓는점 직전의 활화산 같았다.
"이거, 놔."
서아가 반말을 섞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안은 오히려 손목을 쥔 힘을 더 강하게 주며 그녀를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당신, 여기 내 그림 보러 온 거 아니지."
이안의 목소리가 끈적하게 서아의 귓바퀴를 감싸고 돌았다.
"……뭐?"
"나 확인하러 온 거잖아. 당신의 그 고상하고 숨 막히는 세계를 박살 내줄 수 있는 놈인지 아닌지."
정곡을 찔린 서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반박해야 했다. 미친 소리 하지 말라며 당장 이 남자의 뺨을 올려붙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야 했다.
하지만 서아의 몸은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손목을 잡힌 채 이안의 눈동자를 올려다보는 순간, 그녀는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름 모를 열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수치심.
천박하고 불결한 이 남자에게 단숨에 속을 들켰다는 수치심.
그리고 그 수치심 뒤에 따라붙는, 소름 끼치는 흥분감.
"착각하지 마."
서아가 이를 악물며 이안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당신 그림은 흥미롭지만, 당신이라는 인간은 내 기준 미달이야. 나는 길들여지지 않은 들개를 갤러리에 들일 취미가 없거든."
서아는 도망치듯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향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10센티미터 힐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걸음이 위태로웠다.
[ - 본편 끝 - ]모니터 하단의 문구는 그대로였지만 저장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작업용 파일과 외장 저장장치, 편집장에게 보낼 원고 폴더까지 세 개의 저장본이 같은 수정 시각으로 남아 있었다. 도진은 더 이상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대신 메일 창을 열었다.받는 사람 칸에는 김 편집장의 주소를 입력했다. 제목은 짧게 적었다.[신작 본편 원고 송부]첨부 버튼을 누르자 방금 완성한 본편 파일이 올라갔다. 도진은 파일명이 맞는지, 마지막 페이지가 `[ - 본편 끝 - ]`에서 끝나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새로 만들어 둔 에필로그 파일은 첨부하지 않았다. 그 파일에는 아직 한 문장도 없었다.본문에는 더 긴 설명을 쓰지 않았다.[본편까지 보냅니다. 에필로그는 마지막 장면을 확인한 뒤 보내겠습니다.]커서가 전송 버튼 위에 멈췄다. 몇 주 전 1부 1차 원고분을 보낸 적은 있었지만, 완성된 본편 전체를 편집장에게 넘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도진이 망설인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었다. 편집장이 지금까지의 일부가 아니라 이 이야기의 본편 결말까지 읽게 되는 순간, 아내의 현실을 모르는 독자 한 사람이 작품 전체를 공유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선명했다.도진은 결국 버튼을 눌렀다.전송 완료 표시가 떴다.그는 보낸편지함에서 첨부 파일의 용량과 전송 시각을 확인했다. 이제 본편은 자신의 서재 안에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도진은 메일 창을 닫았다.모니터의 전원을 껐다.파앗-.서재를 채우고 있던 푸른빛이 꺼지고, 방 안은 다시 깊은 어둠과 거실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역광만이 남았다."하아…."도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자신의 발밑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여자.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거실에 세워진 거대한 누드화 속에서 다리를 벌리고 헐떡이던 그 천박한 모습과, 지금 자신의 발밑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이 비참한 모습이 정확히 겹쳐진다는 사실을.도진은 아주 천천히,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도, 도진 씨… 쓰지 마… 제발…!"도진이 다시 타건을 시작하려 하자, 서아가 기겁하며 도진의 무릎을 마구 흔들었다. 그녀는 도진의 바지를 찢어버릴 듯 꽉 움켜쥐고 악을 썼다."쓰지 말라고 했잖아!! 그거 쓰면 나보고 죽으라는 거잖아!! 이 개새끼야, 쓰지 마!! 악!!"도진은 서아의 발악을 철저히 무시했다.오히려 그의 손가락은 더욱 경쾌하고 빠르게 키보드를 타격하기 시작했다.타닥, 타다다닥! 타다닥!『완벽하게 붕괴된 여자는 남편의 발치로 기어들어 왔다. 그녀의 눈물은 참회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얄팍한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 그 짐승 같은 생존 본능만이 남아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게 만들었다.』"흐아아악! 도진 씨! 살려줘! 제발 나 좀 살려줘!"서아가 도진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오열하며 세게 깨문 입술에서 배어난 피가 도진의 바지에 붉게 번졌다.도진의 시선은 오직 모니터 화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화면 속에서 커서가 깜빡이며,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그녀는 울부짖고 애원했지만, 남편은 그저 그녀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남편의 눈에 비친 아내는 더 이상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걸작을 완성시켜 준, 가장 아름답고 추악한
"하아……."도진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그의 눈동자는 모니터 화면에 고정된 채 미친 듯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이성이 완전히 마비된 채, 오직 창작의 희열에만 취해 있는 광신도의 그것과 같았다.『거실을 짓누르는 침묵을 찢고, 아내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앞에 전시된 것은 자신의 가장 은밀하고 추악한 타락의 증거물이었다. 붉은 물감으로 짓이겨진 화폭 속의 나체. 그것은 그녀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우아한 위선의 성벽이, 가장 천박한 방식으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도진의 길고 흰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췄다.망설임은 1초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문장들을 손가락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지경이었다.쾅! 쾅! 쾅![도진 씨! 문 열어! 제발 문 좀 열어봐!!]문밖에서 서아의 절규가 들려왔다. 손톱으로 문짝을 박박 긁는 소리, 짐승처럼 헐떡이는 숨소리,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오열하는 소리까지.그 모든 소리가 도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배경음악(BGM)이었다."그래. 그렇게 울어야지. 그렇게 철저하게 무너져 내려야지."도진의 입가에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결말부를 가로막고 있던 지독한 체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완벽한 파국의 형태를 찾지 못해 헤매던 지난날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백서아.자신의 완벽한 아내이자, 완벽한 창녀.그녀가 거실에서 내지르는 저 처절한 비명 소리 하나하나가 전부 살아 숨 쉬는 활자가 되어 도진의 모니터 위에 박제되고 있었다.『"내가 죽을게! 죽으라면 뛰어내릴 테니까, 제발 그 글만은 쓰지 마!"여자는 닫힌 문을 긁으며 짐승
서재 문은 이미 굳게 닫힌 뒤였다.문 너머에서는 도진의 타건음이 끊이지 않았다.타닥, 타닥, 타다닥-.타건음은 조금 전보다 더 빨라져 있었다. 서아에게 두려운 것은 이제 소리의 크기가 아니었다. 저 리듬이 멈추지 않는 동안, 문 너머의 파일에 자신의 파멸이 실제 문장으로 계속 쌓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진은 문을 닫고 들어간 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자신을 문장으로 바꾸고 있었다.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불빛만이, 이미 무너진 지옥의 풍경을 환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비추고 있었다."아… 아아……."서아는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목 안쪽이 막힌 것처럼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 아래로 식은땀이 번졌다. 눈을 감으면 조금 전 도진의 목소리가 되살아났고, 눈을 뜨면 거실 벽에 기대어 있는 그림이 시야를 점령했다.그녀는 가장 먼저 그림을 보이지 않게 만들려 했다. 소파 끝에 걸쳐 있던 얇은 스로를 끌어당겨 화폭 위로 던졌지만 천은 프레임 모서리에 걸렸다가 힘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다시 집어 들려던 손가락이 제대로 오므라들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캔버스 하단이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거대한 그림이 앞으로 기울자 서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프레임을 붙잡았다.쿵.프레임이 벽을 스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서아가 프레임을 붙잡은 채 뒤로 물러서자 캔버스 하단이 바닥을 긁으며 따라왔다. 결국 거대한 그림은 벽에서 떨어져 거실 한가운데에 비스듬히 세워졌다.서아는 그대로 굳었다. 저 안에서 도진이 소리를 들었을까. 문이 열릴까.하지만 서재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미 이어지고 있던 타건음도 단 한 번 끊기지 않았다.타닥. 타다닥.서아는 손에 쥔 천을
"당신은 내 소설을 완성시켜 줄 가장 이상적인 피사체인데. 피사체는 마음껏 움직여야 의미가 있지. 당신이 이안이와 뒹굴며 느끼는 그 더러운 쾌락, 그리고 들킬지도 모른다는 그 짜릿한 공포와 죄책감. 그 모든 감정의 파동이 내 소설의 훌륭한 자양분이 됐거든.""악마… 이 악마 새끼… 넌 사람도 아니야…!""사람? 예술가는 사람이 아니야. 신이지. 자신의 피조물을 창조하고, 파괴하고, 다시 조립하는 절대적인 통제자."도진이 서아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향해 걸어갔다."하지만 내 철저한 통제에도 한 가지 변수가 있었지. 바로 결말."도진이 그림 속 서아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백서아라는 위선적인 여자를 어떻게 무너뜨려야 가장 아름다울까. 가결말을 적어 놓고도 마지막 장면 하나는 끝내 비워둘 수밖에 없었어. 현실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직접 보고 싶었거든."도진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그의 시선이 바닥에 엎드려 실성한 듯 눈물을 뚝뚝 흘리는 서아에게 꽂혔다.헝클어진 머리칼.눈물로 얼룩진 창백한 얼굴.공포에 질려 파들파들 떠는 가녀린 어깨.그리고, 그 뒤로 거대하게 버티고 서 있는 천박한 나체화.현실의 껍데기와 화폭 속의 진실이 한 공간에 기괴하게 병치된 순간."아아……."도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동자에 거대한 환희의 불꽃이 일렁였다."이거였어."그가 양팔을 천천히 벌렸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모든 악기를 통제하는 듯한, 압도적이고 장엄한 제스처였다."이게 바로 내가 찾던 완벽한 파국이야!"도진의 목소리가 거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도진은 더 극적이고, 더 예술적이며, 더 끔찍한 파멸을 원했다. 독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문단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 압도적인 시각적 충격이 필요했다.며칠 밤낮을 고민해도 풀리지 않던 그 마지막 퍼즐 조각.그런데 지금.그 퍼즐 조각이 제 발로 도진의 거실 한가운데로 굴러들어온 것이다."하… 하하……."도진의 입에서 낮고 뒤틀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도, 도진 씨……?"발치에 엎드려 있던 서아가 그 소리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진창이었다. 오래 운 탓에 눈가가 붉고 퉁퉁 부어 있었고, 창백한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서아는 도진이 오열하는 줄 알았다.그렇게 끔찍이 사랑하던 아내의 추악한 진실을 마주했으니, 그 충격에 정신을 놓고 우는 것이라 생각했다."여보… 내가, 내가 다 설명할게. 저거, 저 그림…."서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하며 도진의 바짓단을 꽉 움켜쥐었다."저거 다 거짓말이야… 그 미친놈이, 이안이가 나한테 앙심을 품고… 상상해서 그린 거야…! 도진 씨, 제발 내 말 좀 믿어줘… 흑, 흐으윽……!"서아는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변명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면 자신은 정말 끝장이라는 공포가 그녀의 뇌를 마비시키고 있었다."내가 미쳤다고 저런 짓을 해? 당신도 알잖아, 나 그런 여자 아니라는 거…! 저 새끼가 나 스토킹하다가, 내가 안 만나주니까 당신한테 이런 거 보내서 나 협박하는 거야! 당장 저거 찢어버리자. 응? 칼 어딨어, 이거 당장 찢어버려!"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
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
제1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1)오전 6시 50분.정확히 조율된 스위스제 벽시계의 초침이 서늘한 거실의 공기를 갈랐다.서아는 눈을 떴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미세한 아침 햇살이 정돈된 침대 위에 일정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시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도진은 언제나 자신보다 20분 먼저 일어났고, 그가 머물던 자리는 마치 아무도 눕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서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크 가운의 끈을 단정하게 묶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흐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