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제14화 선을 넘는 온도(2)
"누가 돈 달래?"
탁-.
이안의 커다란 손이 서아의 핸드백 위를 덮었다.
"……!"
서아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턱밑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큰 체구가 가로등 불빛을 가리며 서아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뒤에는 서아의 주차된 차가 막고 있었고, 앞에는 이안이 거대한 벽처럼 버티고 섰다.
"비켜요."
서아가 목소리를 깔며 경고했다.
하지만 이안은 비키기는커녕, 상체를 살짝 숙여 서아의 얼굴과 시선을 나란히 맞췄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서아의 흔들리는 동공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당신, 오늘 회식 내내 나만 보더라."
"……뭐라고요?"
"내가 물잔을 들 때도, 나이프를 쥘 때도. 당신 시선은 계속 내 손끝에 닿아 있었잖아. 안 그래?"
정곡을 찔렸다.
서아는 회식 내내 이안을 무시하려 애썼지만, 시선은 자꾸만 그의 거친 손과 핏대 선 팔뚝으로 향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착각하지 마. 나는 당신이 또 무슨 돌발 행동을 해서 분위기를 망칠까 봐 감시한 것뿐이니까."
"감시?"
이안이 낮게 웃었다. 목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진득한 웃음소리였다.
"당신은 참 그럴싸한 변명들을 잘 만들어내. 비즈니스, 통제, 감시. 그렇게 그럴듯한 단어들로 당신의 진짜 속내를 칭칭 감아놓고 살지."
"헛소리 그만하고 비키라고 했습니다."
서아가 이안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단단한 근육질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안은 서아가 밀어낸 손을 그대로 낚아챘다.
"읏……."
이안이 서아의 얇은 손목을 꽉 틀어 쥐었다.
지난번 작업실에서 느꼈던 그 델 듯이 뜨거운 체온이, 얇은 블라우스 소매를 뚫고 서아의 피부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거 놔!"
서아가 당황하여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안의 악력은 무자비했다.
그가 서아의 손목을 쥔 채, 그녀를 자신의 몸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구두 굽이 바닥에 끌리며 두 사람의 몸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숨결이 섞였다. 서아는 산소가 부족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 그거 알아?"
이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뱀처럼 감겨들었다.
"지금 당신 맥박, 미친 듯이 뛰고 있어."
서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도무지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한 흥분감이 뒤섞여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미친 자식. 이거 안 놔?! 당장 경찰 부를 거야!"
"불러."
이안이 픽 웃으며 서아의 손목을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갤러리 아르테 수석 큐레이터가, 이 밤거리에 무명 작가랑 엉켜서 실랑이하는 꼴. 내일 아침 뉴스 기사로 나면 참 볼만하겠네. 안 그래?"
"너……!"
서아의 입에서 결국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늘 교양 있고 우아한 언어만 사용하던 그녀였다. 남편 도진 앞에서는 목소리 한 번 높인 적 없는 완벽한 아내였다.
하지만 이 야만적인 남자 앞에서는 그녀가 평생을 걸쳐 만들어온 견고한 가면이 너무도 쉽게, 속수무책으로 박살 나고 있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잡아먹고 싶어지니까."
이안의 시선이 서아의 분노에 찬 눈동자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
농염하고 노골적인 시선. 시선만으로도 이미 옷이 벗겨지는 듯한 폭력적인 감각.
서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전율이었다.
"윤서아."
이안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직함이 아닌, 오롯이 그녀라는 존재 자체를 부르는 서늘하고 묵직한 음성.
이안이 빈손을 들어 올려 서아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거친 굳은살이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를 스치는 감각에 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고상한 척, 완벽한 척 그만해. 역겨우니까."
그의 입술이 서아의 귓바퀴에 닿을 듯 다가왔다.
"당신, 그 숨 막히는 진열장 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미치겠잖아."
"……."
"나한테 전시 비즈니스 운운하면서 내 반경 안에 얼쩡거리는 거. 사실은 내 그림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이안이 서아의 손목을 쥔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그녀를 자신의 넓은 가슴팍에 완전히 밀착시켰다.
뜨거운 심장 박동이 서아의 몸으로 고스란히 전도되었다.
"나한테, 철저하게 헤집어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굳어버렸다.
정확했다.
자신조차 외면하고 억눌러왔던, 가장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던 시커먼 욕망.완벽한 남편, 완벽한 집, 완벽한 직장.
박제된 나비처럼 아름답지만 생명력이 거세된 삶에서 벗어나, 피 흘리고 찢기더라도 숨통을 트고 싶었던 그 지독한 갈증을.이 짐승 같은 남자가 단숨에 꿰뚫어 보고, 기어코 입 밖으로 끄집어내 버린 것이다.
"대답해 봐."
이안이 서아의 턱을 쥐고 강제로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내 말이 틀려?"
서아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요동쳤다.
반박해야 했다.
천박한 소리 지껄이지 말라며 그의 뺨을 올려붙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야 했다.하지만 서아의 입술은 달싹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뱉어내지 못했다. 그녀의 핏속을 흐르는 이 기묘한 흥분과 배덕감이,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 윤서아 고객님 맞으십니까!"
그때, 저만치서 뛰어오는 대리기사의 목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마법이 풀린 것처럼, 팽팽했던 공기가 탁 끊어졌다.
서아는 짐승의 덫에 걸렸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초식동물처럼, 이안을 거칠게 밀쳐내고 뒤로 물러섰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서아의 눈빛은 혼란과 수치심으로 젖어 있었다.
이안은 밀려난 채로 제자리에 서서, 그런 서아를 여유롭고 서늘한 눈빛으로 관망할 뿐이었다.
"네, 제가 불렀습니다."
서아는 대리기사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도망치듯 자신의 차 뒷좌석으로 몸을 피했다.
차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서아는 이안 쪽을 바라보지 못했다.
창문 너머로 뒷걸음질 치는 풍경 속에서, 이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서아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의 도주를 여유롭게 지켜보는 포식자처럼.
어두운 차 안.
서아는 무너져 내리듯 시트에 몸을 기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손목에는 이안이 쥐었던 악력이 붉은 멍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귓가에는 그가 내뱉은 선을 넘는 발언이 환청처럼 끊임없이 맴돌았다.
'나한테, 철저하게 헤집어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미쳤어…… 윤서아. 정신 차려."
서아는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완벽했던 세계에 금이 가는 소리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크고 선명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제18화 얄팍한 방어기제(2)"말조심해!"서아의 평정심에 쩍,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그녀는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춰 경고했다."여기는 내 직장이고, 내 구역이야. 어젯밤 일은…… 당신이 술에 취해 벌인 저급한 실수로 치부하고 덮어주기로 했어. 내 커리어에 오점 남기기 싫어서. 그러니까 당신도 주제 파악하고 내가 깔아준 판 위에서 얌전히 그림이나 쳐 그려. 쓸데없는 환상 품지 말고."독사처럼 쏟아내는 서아의 경고.그것은 이안을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세뇌시키기 위한 방어기제이기도 했다.하지만 이안의 눈에는 그 앙칼진 저항이 그저 우습고 가소롭게 보일 뿐이었다."덮어준다고?"이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그의 큰 체구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서아를 압박했다. 이안은 테이블을 돌아 서아가 앉아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오지 마. 거기 앉아."서아가 본능적으로 의자 등받이 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방금 전까지 세워두었던 날 선 권위가, 그가 다가오는 발걸음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이안은 서아의 의자 팔걸이를 양손으로 짚었다.완벽하게 퇴로가 차단되었다.가까워진 거리.오늘 아침 서아가 들이부었던 짙은 향수 냄새가 이안의 코끝을 찔렀다."독하네."이안이 서아의 목덜미 근처로 얼굴을 슬쩍 들이밀며 중얼거렸다."뭐가…….""향수 냄새. 평소에 뿌리던 무화과 향이 아니잖아.""……!""뭘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우고 싶었어? 아니면, 뭘 감추고 싶었던 건가."서아는 숨을 들이켜는 것
제17화 얄팍한 방어기제(1)완벽한 화이트 큐브.먼지 한 톨 없는 갤러리 아르테의 VIP 접견실은 서아에게 있어 일종의 성역이자 요새였다.항온 항습기가 돌아가는 미세한 백색소음.벽에 걸린 수천만 원짜리 단색화.블랙 글래스로 마감된 차가운 테이블.이 공간 안에서 서아는 철저한 지배자였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고, 오만한 작가들의 기를 꺾어 자신의 기획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수석 큐레이터."……하아."하지만 오늘 아침, 서아의 입에서 새어 나온 것은 권위 있는 지시가 아니라 억눌린 한숨이었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차가운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올려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쓴맛이 혀뿌리를 강타했지만,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오른쪽 손목.서아는 무의식적으로 재킷 소매를 끌어내려 손목을 덮었다. 어젯밤 샤워 타월로 피부가 벌겋게 일어날 때까지 문질러 씻었지만, 이안이 남긴 그 끔찍한 악력의 감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당신한테서 낯선 냄새 나.'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어젯밤, 차갑게 돌아누운 채 자신을 밀어내던 남편 도진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결국 서아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도진의 옆에 웅크려 누운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죄인처럼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남편이 출근 준비를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서아는 자는 척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자신이 왜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왜 이토록 끔찍한 죄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아니야. 난 잘못한 거 없어.'서아는 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던 문장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눈을 떴다.'그 미친
제16화 서늘한 체온, 그리고 완벽한 고립(2)"도진 씨?"거실을 향해 작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서재의 불은 꺼져 있었고, 침실 문틈으로만 옅은 무드등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벌써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서아는 현관에서 트렌치코트를 벗어 미친 듯이 털어냈다. 혹시라도 그 천박한 담배 냄새가 이 완벽한 공간에 단 한 방울이라도 떨어질까 봐 두려웠다.코트를 스타일러 안에 쑤셔 넣듯 걸어둔 서아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철컥, 문을 잠그고 세면대 앞에 섰다.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평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올림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아이라인은 미세하게 번져 있었다. 무엇보다 눈동자. 항상 차갑고 이성적이던 그 눈동자 안에, 낯선 정욕과 공포가 뒤엉켜 일렁이고 있었다.서아는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렸다.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렸다.그녀는 펌프형 핸드워시를 두 번, 세 번 거칠게 눌러 손바닥에 듬뿍 짰다. 그리고 이안이 잡았던 오른쪽 손목을 미친 듯이 문지르기 시작했다.거품이 일어나고,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씻고 또 씻었다."지워져라. 제발…… 지워져."손톱으로 긁어대듯 피부를 문지르다 보니 옅은 생채기마저 생겼다.하지만 씻어내면 씻어낼수록, 그의 손에 잡혔을 때의 그 끔찍하게 뜨거웠던 감각은 뇌리에 더욱 선명하게 달라붙었다.'내 말이 틀려?'턱을 쥐고 강제로 시선을 맞추던 그의 눈."악!"서아는 신경질적으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세면대를 양손으로 짚었다. 숨이 거칠었다.안 되겠다.도진이 필요했다. 남편의 확인이 필요했다.나는 사랑받는 아내이고, 이 견고하고 우아한 세계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을 남편의 몸을
제15화 서늘한 체온, 그리고 완벽한 고립(1)"하아, 하아……."차 문이 닫히는 순간, 서아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손님. 목적지 연남동 자이 아파트 맞으십니까?""네. 맞아요.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누르며 대답했다.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릴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대리기사가 엑셀을 밟고 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하는 그 순간까지도, 서아는 창문 너머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을 그 남자의 시선이 제 목덜미를 꿰뚫는 것만 같아 소름이 돋았다.'나한테, 철저하게 헤집어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머릿속에서 이안의 낮고 진득한 목소리가 무한 번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미친 자식……."서아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분노였다. 명백한 분노여야 했다.자신의 커리어와 사회적 지위를 알면서도 길거리에서 함부로 손목을 낚아채고, 창녀에게나 할 법한 저급한 농담을 지껄인 무례한 예술가에 대한 분노.하지만 서아의 심장 박동은 분노의 궤도를 이탈해, 지독하게 불길하고 낯선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오른쪽 손목이 화끈거렸다.이안이 꽉 움켜쥐었던 자리. 그의 거친 굳은살이 닿았던 피부에서 불이 붙은 것처럼 델 듯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손님, 에어컨 좀 틀어드릴까요? 땀을 많이 흘리시는 것 같은데."룸미러로 서아의 상태를 힐끗 살핀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 네. 부탁드릴게요. 조금 춥게 틀어주세요.""밤공기가 제법 쌀쌀한데,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괜찮습니다. 그냥 차멀미가 좀 나서 그래요."서아는 핸드백을 무릎 위에 꽉 끌어안으며 짧게
제14화 선을 넘는 온도(2)"누가 돈 달래?"탁-.이안의 커다란 손이 서아의 핸드백 위를 덮었다."……!"서아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턱밑까지 다가와 있었다.그의 큰 체구가 가로등 불빛을 가리며 서아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도망칠 곳이 없었다. 뒤에는 서아의 주차된 차가 막고 있었고, 앞에는 이안이 거대한 벽처럼 버티고 섰다."비켜요."서아가 목소리를 깔며 경고했다.하지만 이안은 비키기는커녕, 상체를 살짝 숙여 서아의 얼굴과 시선을 나란히 맞췄다.그의 까만 눈동자가 서아의 흔들리는 동공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당신, 오늘 회식 내내 나만 보더라.""……뭐라고요?""내가 물잔을 들 때도, 나이프를 쥘 때도. 당신 시선은 계속 내 손끝에 닿아 있었잖아. 안 그래?"정곡을 찔렸다.서아는 회식 내내 이안을 무시하려 애썼지만, 시선은 자꾸만 그의 거친 손과 핏대 선 팔뚝으로 향했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착각하지 마. 나는 당신이 또 무슨 돌발 행동을 해서 분위기를 망칠까 봐 감시한 것뿐이니까.""감시?"이안이 낮게 웃었다. 목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진득한 웃음소리였다."당신은 참 그럴싸한 변명들을 잘 만들어내. 비즈니스, 통제, 감시. 그렇게 그럴듯한 단어들로 당신의 진짜 속내를 칭칭 감아놓고 살지.""헛소리 그만하고 비키라고 했습니다."서아가 이안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냈다.하지만 단단한 근육질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안은 서아가 밀어낸 손을 그대로 낚아챘다."읏……."이안이 서아의
제13화 선을 넘는 온도(1)청담동의 프라이빗 다이닝 레스토랑.고급스러운 샹들리에 조명 아래, 갤러리 아르테 팀원들의 회식 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최고급 한우 오마카세와 한 병에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와인이 세팅된 테이블.평소라면 우아한 예술계의 가십이나 다음 분기 전시 기획에 대한 고상한 대화가 오갔을 자리였다.하지만 오늘따라 프라이빗 룸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원인은 단 한 사람.테이블 가장 끝자리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남자, 이안 때문이었다."……."서아는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신진 작가 발굴 기획전. 서아는 심사위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안의 그림을 메인 홀에 거는 것을 밀어붙였다. 그 기괴하고 폭력적인 붉은 캔버스가 갤러리에 가져올 파격을 확인하고 싶다는, 큐레이터로서의 오만함 혹은 호기심 때문이었다.전시를 앞두고 작가와 실무진이 얼굴을 트는 자리. 서아는 분명 비즈니스 차원에서 그를 이 자리에 불렀다.하지만 이안은 이 정제된 공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이었다."이안 작가님. 고기 더 안 드세요? 입에 안 맞으신가……."옆에 앉은 어시스턴트 윤지수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이안은 턱을 괸 채 제 앞에 놓인 최고급 안심스테이크를 나이프로 대충 쑤적거리고 있었다. 물감이 채 지워지지 않은 손톱 밑이 하얀 접시 위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보였다."됐어. 피 질질 흐르는 고기 씹는 취미 없으니까.""아…… 네에."지수가 멋쩍게 웃으며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이안은 와인잔을 옆으로 밀어내고, 웨이터를 불렀다."여기, 소주 한 병 줘요."웨이터의 얼굴에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
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