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해방촌, B동 옥탑]
서아는 명함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내가 왜 거기에 가. 미친 소리.'
머릿속으로는 수십 번이고 명함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저렇게 무례하고 교양 없는 인간과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완벽한 삶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방금 전 남자가 턱을 쥐었을 때의 그 서늘하고 거친 촉감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신은 내 그림에 먹히고 싶은 거지.'
귓가에 맴도는 이안의 조롱 섞인 목소리에, 서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머리, 목 끝까지 채워진 블라우스 단추.
완벽하지만, 박제된 나비처럼 생명력이 없는 여자.
서아는 구겨진 명함을 버리기 전에 계약 담당자를 불렀다. 감정과 업무를 분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문제를 조항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권이안 작가 쪽 조건, 다시 정리해 주세요. 전시작 최종 선정 권한은 갤러리에 있고, 설치 과정에서 안전상 문제가 있으면 수정 요구할 수 있다는 문구도 넣고요."
"작가가 동의할까요?"
"동의하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서아는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서랍 가장 깊숙한 칸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도 시선은 몇 번이나 그쪽으로 돌아갔다.
잠시 뒤 이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계약서로 사람 성격까지 고칠 수 있다고 믿어요?]
서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업무와 성격은 관계없습니다. 전시를 원하면 조건을 확인하세요.]
답장은 곧 왔다.
[관장님은 모든 걸 업무라고 부르면 안전해져요?]
서아는 화면을 껐다. 삭제 버튼을 누르는 데에는 한 번의 터치면 충분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고 서류를 읽는 척했다.
이안은 무례했다. 준비도 없었고, 시간 약속도 지키지 않았으며, 갤러리의 권위를 존중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평소의 서아라면 첫 미팅에서 잘라냈을 유형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계약 담당자에게 말했다.
"미팅 일정 하나 더 잡아 주세요. 작품 실물을 봐야겠어요."
말을 끝낸 뒤 스스로가 가장 먼저 놀랐다. 그는 이미 충분히 탈락시킬 이유를 줬다. 그런데 서아는 이유를 더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전문가로서의 책임’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욕망은 잠시 업무처럼 보였다.
미팅 기록을 정리하던 직원이 서아에게 물었다.
"권이안 작가, 비고란에 뭐라고 적을까요? 협업 난이도 높음?"
서아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요. 판단 보류라고 적으세요."
"네."
직원이 나간 뒤 서아는 그 두 단어를 속으로 반복했다. 판단 보류. 탈락도, 통과도 아닌 상태.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상태였다.
서랍 속 명함을 꺼내 펼쳐 보니 구김이 더 선명해졌다. 전화번호 아래에는 작업실 주소가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서아는 주소를 읽은 뒤 다시 접었다.
버릴 수 있었다. 전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명함은 다시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가장 깊숙한 곳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바로 닿는 맨 위 칸이었다.
다음 미팅 안내 메일을 보내면서 서아는 제목을 ‘작품 실물 검토 및 전시 조건 협의’라고 적었다. 사적인 여지는 한 글자도 없었다.
전송을 누른 뒤에는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공식 메일이 존재하는 한 자신이 이안을 다시 만나는 이유도 공식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이안에게서 답장이 왔다.
[이번엔 안 늦을게. 관장님이 얼마나 화내는지 봤으니까.]
서아는 읽음 표시만 남겼다. 그러나 입가에 떠오르려던 웃음을 발견하고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서아는 다음 미팅 장소를 갤러리 회의실로 잡으려다가 이안의 작업실 주소를 다시 보았다. 작품 실물을 확인하려면 결국 그 공간에 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녀는 비서에게 일정을 확정하라고 지시했다. 공식 캘린더에 들어간 순간 선택은 개인적인 충동이 아니라 업무가 됐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미팅이 끝난 뒤 서아는 이안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펼쳤다. 작품마다 사용한 재료와 크기는 정리되어 있었지만 제작 과정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었다. 통제할 수 없는 작가라는 판단은 더 강해졌다. 그런데 그 판단이 계약 종료가 아니라 ‘직접 확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서아는 페이지를 덮고도 손을 떼지 못했다. 자신은 위험을 싫어한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어쩌면 위험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위험이 자신보다 먼저 선택하는 상황을 싫어했는지도 몰랐다.
서아는 약속 시간을 캘린더에 저장하고 알림을 한 시간 전으로 맞췄다. 평소보다 두 번 더 확인했다.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일이 이렇게 신경 쓰이는 것 자체가 이미 평소의 자신과 달랐다. 그녀는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노트북을 닫았다.
서아는 서랍을 열고, 그 구겨진 명함을 손을 뻗으면 닿는 맨 위 칸에 조심스럽게 다시 넣었다.
버려야 한다는 이성과, 버릴 수 없다는 본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이미 잡힌 작업실 방문 일정을 다시 확인한 서아는 작품 운송 가능 크기와 전시 벽면 치수, 설치 인력 여부만 별도 메모했다. 정상적인 현장 실사라면 직원에게 맡겨도 될 항목들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체크리스트의 담당자 칸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개인적인 호기심은 ‘작품 상태 확인’과 ‘운송 동선 점검’이라는 업무 문장 안에 감췄다. 그렇게 적어 두면 자신도 단순한 현장 확인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아는 명함이 들어 있는 서랍을 한 번 바라본 뒤 닫았다. 이미 결정된 방문을 다시 결정하는 대신, 이제는 그 결정을 얼마나 업무처럼 보이게 만들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단단했던 일상에, 도무지 끌 수 없는 뜨거운 불씨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 - 본편 끝 - ]모니터 하단의 문구는 그대로였지만 저장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작업용 파일과 외장 저장장치, 편집장에게 보낼 원고 폴더까지 세 개의 저장본이 같은 수정 시각으로 남아 있었다. 도진은 더 이상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대신 메일 창을 열었다.받는 사람 칸에는 김 편집장의 주소를 입력했다. 제목은 짧게 적었다.[신작 본편 원고 송부]첨부 버튼을 누르자 방금 완성한 본편 파일이 올라갔다. 도진은 파일명이 맞는지, 마지막 페이지가 `[ - 본편 끝 - ]`에서 끝나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새로 만들어 둔 에필로그 파일은 첨부하지 않았다. 그 파일에는 아직 한 문장도 없었다.본문에는 더 긴 설명을 쓰지 않았다.[본편까지 보냅니다. 에필로그는 마지막 장면을 확인한 뒤 보내겠습니다.]커서가 전송 버튼 위에 멈췄다. 몇 주 전 1부 1차 원고분을 보낸 적은 있었지만, 완성된 본편 전체를 편집장에게 넘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도진이 망설인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었다. 편집장이 지금까지의 일부가 아니라 이 이야기의 본편 결말까지 읽게 되는 순간, 아내의 현실을 모르는 독자 한 사람이 작품 전체를 공유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선명했다.도진은 결국 버튼을 눌렀다.전송 완료 표시가 떴다.그는 보낸편지함에서 첨부 파일의 용량과 전송 시각을 확인했다. 이제 본편은 자신의 서재 안에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도진은 메일 창을 닫았다.모니터의 전원을 껐다.파앗-.서재를 채우고 있던 푸른빛이 꺼지고, 방 안은 다시 깊은 어둠과 거실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역광만이 남았다."하아…."도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자신의 발밑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는 여자.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거실에 세워진 거대한 누드화 속에서 다리를 벌리고 헐떡이던 그 천박한 모습과, 지금 자신의 발밑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이 비참한 모습이 정확히 겹쳐진다는 사실을.도진은 아주 천천히,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도, 도진 씨… 쓰지 마… 제발…!"도진이 다시 타건을 시작하려 하자, 서아가 기겁하며 도진의 무릎을 마구 흔들었다. 그녀는 도진의 바지를 찢어버릴 듯 꽉 움켜쥐고 악을 썼다."쓰지 말라고 했잖아!! 그거 쓰면 나보고 죽으라는 거잖아!! 이 개새끼야, 쓰지 마!! 악!!"도진은 서아의 발악을 철저히 무시했다.오히려 그의 손가락은 더욱 경쾌하고 빠르게 키보드를 타격하기 시작했다.타닥, 타다다닥! 타다닥!『완벽하게 붕괴된 여자는 남편의 발치로 기어들어 왔다. 그녀의 눈물은 참회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얄팍한 껍데기가 벗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 그 짐승 같은 생존 본능만이 남아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게 만들었다.』"흐아아악! 도진 씨! 살려줘! 제발 나 좀 살려줘!"서아가 도진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오열하며 세게 깨문 입술에서 배어난 피가 도진의 바지에 붉게 번졌다.도진의 시선은 오직 모니터 화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화면 속에서 커서가 깜빡이며, 소설의 마지막 문단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그녀는 울부짖고 애원했지만, 남편은 그저 그녀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남편의 눈에 비친 아내는 더 이상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걸작을 완성시켜 준, 가장 아름답고 추악한
"하아……."도진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그의 눈동자는 모니터 화면에 고정된 채 미친 듯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이성이 완전히 마비된 채, 오직 창작의 희열에만 취해 있는 광신도의 그것과 같았다.『거실을 짓누르는 침묵을 찢고, 아내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앞에 전시된 것은 자신의 가장 은밀하고 추악한 타락의 증거물이었다. 붉은 물감으로 짓이겨진 화폭 속의 나체. 그것은 그녀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우아한 위선의 성벽이, 가장 천박한 방식으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도진의 길고 흰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췄다.망설임은 1초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문장들을 손가락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지경이었다.쾅! 쾅! 쾅![도진 씨! 문 열어! 제발 문 좀 열어봐!!]문밖에서 서아의 절규가 들려왔다. 손톱으로 문짝을 박박 긁는 소리, 짐승처럼 헐떡이는 숨소리,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오열하는 소리까지.그 모든 소리가 도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배경음악(BGM)이었다."그래. 그렇게 울어야지. 그렇게 철저하게 무너져 내려야지."도진의 입가에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결말부를 가로막고 있던 지독한 체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완벽한 파국의 형태를 찾지 못해 헤매던 지난날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백서아.자신의 완벽한 아내이자, 완벽한 창녀.그녀가 거실에서 내지르는 저 처절한 비명 소리 하나하나가 전부 살아 숨 쉬는 활자가 되어 도진의 모니터 위에 박제되고 있었다.『"내가 죽을게! 죽으라면 뛰어내릴 테니까, 제발 그 글만은 쓰지 마!"여자는 닫힌 문을 긁으며 짐승
서재 문은 이미 굳게 닫힌 뒤였다.문 너머에서는 도진의 타건음이 끊이지 않았다.타닥, 타닥, 타다닥-.타건음은 조금 전보다 더 빨라져 있었다. 서아에게 두려운 것은 이제 소리의 크기가 아니었다. 저 리듬이 멈추지 않는 동안, 문 너머의 파일에 자신의 파멸이 실제 문장으로 계속 쌓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진은 문을 닫고 들어간 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자신을 문장으로 바꾸고 있었다.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불빛만이, 이미 무너진 지옥의 풍경을 환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비추고 있었다."아… 아아……."서아는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목 안쪽이 막힌 것처럼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 아래로 식은땀이 번졌다. 눈을 감으면 조금 전 도진의 목소리가 되살아났고, 눈을 뜨면 거실 벽에 기대어 있는 그림이 시야를 점령했다.그녀는 가장 먼저 그림을 보이지 않게 만들려 했다. 소파 끝에 걸쳐 있던 얇은 스로를 끌어당겨 화폭 위로 던졌지만 천은 프레임 모서리에 걸렸다가 힘없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다시 집어 들려던 손가락이 제대로 오므라들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캔버스 하단이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거대한 그림이 앞으로 기울자 서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프레임을 붙잡았다.쿵.프레임이 벽을 스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서아가 프레임을 붙잡은 채 뒤로 물러서자 캔버스 하단이 바닥을 긁으며 따라왔다. 결국 거대한 그림은 벽에서 떨어져 거실 한가운데에 비스듬히 세워졌다.서아는 그대로 굳었다. 저 안에서 도진이 소리를 들었을까. 문이 열릴까.하지만 서재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미 이어지고 있던 타건음도 단 한 번 끊기지 않았다.타닥. 타다닥.서아는 손에 쥔 천을
"당신은 내 소설을 완성시켜 줄 가장 이상적인 피사체인데. 피사체는 마음껏 움직여야 의미가 있지. 당신이 이안이와 뒹굴며 느끼는 그 더러운 쾌락, 그리고 들킬지도 모른다는 그 짜릿한 공포와 죄책감. 그 모든 감정의 파동이 내 소설의 훌륭한 자양분이 됐거든.""악마… 이 악마 새끼… 넌 사람도 아니야…!""사람? 예술가는 사람이 아니야. 신이지. 자신의 피조물을 창조하고, 파괴하고, 다시 조립하는 절대적인 통제자."도진이 서아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향해 걸어갔다."하지만 내 철저한 통제에도 한 가지 변수가 있었지. 바로 결말."도진이 그림 속 서아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백서아라는 위선적인 여자를 어떻게 무너뜨려야 가장 아름다울까. 가결말을 적어 놓고도 마지막 장면 하나는 끝내 비워둘 수밖에 없었어. 현실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직접 보고 싶었거든."도진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그의 시선이 바닥에 엎드려 실성한 듯 눈물을 뚝뚝 흘리는 서아에게 꽂혔다.헝클어진 머리칼.눈물로 얼룩진 창백한 얼굴.공포에 질려 파들파들 떠는 가녀린 어깨.그리고, 그 뒤로 거대하게 버티고 서 있는 천박한 나체화.현실의 껍데기와 화폭 속의 진실이 한 공간에 기괴하게 병치된 순간."아아……."도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동자에 거대한 환희의 불꽃이 일렁였다."이거였어."그가 양팔을 천천히 벌렸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모든 악기를 통제하는 듯한, 압도적이고 장엄한 제스처였다."이게 바로 내가 찾던 완벽한 파국이야!"도진의 목소리가 거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도진은 더 극적이고, 더 예술적이며, 더 끔찍한 파멸을 원했다. 독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문단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 압도적인 시각적 충격이 필요했다.며칠 밤낮을 고민해도 풀리지 않던 그 마지막 퍼즐 조각.그런데 지금.그 퍼즐 조각이 제 발로 도진의 거실 한가운데로 굴러들어온 것이다."하… 하하……."도진의 입에서 낮고 뒤틀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도, 도진 씨……?"발치에 엎드려 있던 서아가 그 소리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진창이었다. 오래 운 탓에 눈가가 붉고 퉁퉁 부어 있었고, 창백한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서아는 도진이 오열하는 줄 알았다.그렇게 끔찍이 사랑하던 아내의 추악한 진실을 마주했으니, 그 충격에 정신을 놓고 우는 것이라 생각했다."여보… 내가, 내가 다 설명할게. 저거, 저 그림…."서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하며 도진의 바짓단을 꽉 움켜쥐었다."저거 다 거짓말이야… 그 미친놈이, 이안이가 나한테 앙심을 품고… 상상해서 그린 거야…! 도진 씨, 제발 내 말 좀 믿어줘… 흑, 흐으윽……!"서아는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변명해야 했다.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면 자신은 정말 끝장이라는 공포가 그녀의 뇌를 마비시키고 있었다."내가 미쳤다고 저런 짓을 해? 당신도 알잖아, 나 그런 여자 아니라는 거…! 저 새끼가 나 스토킹하다가, 내가 안 만나주니까 당신한테 이런 거 보내서 나 협박하는 거야! 당장 저거 찢어버리자. 응? 칼 어딨어, 이거 당장 찢어버려!"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1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1)오전 6시 50분.정확히 조율된 스위스제 벽시계의 초침이 서늘한 거실의 공기를 갈랐다.서아는 눈을 떴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미세한 아침 햇살이 정돈된 침대 위에 일정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시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도진은 언제나 자신보다 20분 먼저 일어났고, 그가 머물던 자리는 마치 아무도 눕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서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크 가운의 끈을 단정하게 묶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흐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