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Chapter 71 - Chapter 80

182 Chapters

071화 목을 조르는 그림자(2)

"어딨어… 어딨어! 이 미친 새끼야, 이걸 던지면 어떡해!"서아의 치맛자락에 시커먼 먼지가 묻어났다. 막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얼굴에 흘러내렸다. 우아하고 기품 넘치던 갤러리 관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바람난 사실을 들킬까 봐 벌벌 떠는, 추악하고 가련한 여자의 밑바닥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이안은 그 모습을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서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찾지 마." "닥쳐! 찾을 거야. 당장 찾아내!" "그딴 반지 하나 없다고 세상 안 무너져. 내가 새걸로 사줄 테니까 당장 일어나." "네가 무슨 돈으로 사! 도진 씨가 맞춘 거야. 도진 씨가 나한테 준 거라고! 네가 감히 나한테… 흑…."결국 서아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두컴컴한 작업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반지를 찾는 그녀의 손끝이 시커먼 물감 떼로 엉망이 되어갔다.그녀의 눈물은 이안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긁어놓았다. 이안은 성큼성큼 다가와 바닥에 엎드린 서아의 허리를 거칠게 끌어올렸다."일어나라고 했지!" "놔! 놓으라고!"이안은 버둥거리는 서아를 번쩍 들어 올려 다시 소파 위로 내동댕이쳤다. 서아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안이 곧바로 그녀의 위로 올라타 허벅지로 그녀의 다리를 짓눌렀다."이안… 제발 이러지 마. 나 무서워. 나 진짜 늦었단 말이야."서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그녀의 하얀 얼굴에 검은 먼지가 묻어 엉망이었다. 이안은 서아의 양볼을 두 손으로 꽉 쥐고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다."백서아. 내 눈 똑바로 봐." "흐윽…." "네가 그렇게 벌벌 떠는 그 완벽한 남편. 강도진. 그 새끼가 진짜 널 사랑하는 것 같아?"이안의 목소리는 낮고 집요했다. 서아의 정신을 헤집어놓으려는 듯, 뱀처럼 교활한 속삭임이었다."도진 씨는 날 사랑해. 나한테 한 번도 화낸 적 없어. 나를 끝까지 지켜준다고." "화낸 적이 없는 게 아니라, 화낼 가치가 없는 거겠지. 그 새끼 글 쓰는 꼬라지 봐.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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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화 목을 조르는 그림자(3)

"컨실러로 떡칠을 하든, 스카프를 두르든 알아서 해. 그게 내 마킹이니까."이안이 여유롭게 소파에서 내려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찾는 게 이거야?"그의 손가락 사이로 은빛으로 빛나는 백금 반지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던진 척 연기를 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반지는 이안의 손안에 있었다."너, 너 진짜…!" "가져가."이안이 서아의 가슴팍 위로 반지를 툭 던졌다. 서아는 황급히 반지를 움켜쥐고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쑤셔 넣듯 끼웠다.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오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가서 또 고상한 사모님 연기 열심히 해봐. 남편 밥도 떠먹여 주고, 와인도 마시고. 대신."이안이 허리를 숙여 서아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그 새끼가 널 안으려고 하면, 내 생각 해. 내가 네 안에 어떻게 박아 넣었는지, 네가 내 밑에서 어떻게 울었는지 뼛속까지 기억하라고. 알았어?"서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었다."대답 안 해?" "…알았어. 명심할게."치욕스러운 대답을 내뱉은 서아는 도망치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뜯어진 블라우스 단추를 가리기 위해 코트를 목끝까지 여미고, 엉망이 된 머리를 대충 틀어 올렸다.작업실을 빠져나오기 직전, 서아는 남은 흔적부터 확인했다.작업실 문을 나서기 전 서아는 가방 속을 한 번 더 뒤졌다. 휴대전화와 열쇠, 지갑은 있었지만 손끝이 계속 허공을 더듬었다. 몸 어딘가에 놓고 나온 것이 있는 듯한 불안이었다."뭘 그렇게 찾아?"이안이 뒤에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서아는 즉시 가방을 닫았다.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 집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했다. 교통이 막히면 도진이 먼저 도착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옷깃을 여미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했다.이안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결국 또 그 집으로 돌아가서, 아무 일 없던 사모님 흉내를 내겠다는 거네?"서아의 얼굴이 굳었다.그 말이 싫었던 이유는 모욕적이어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잃을 수 있는 것들을 너무 정확히 건드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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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화 친절이라는 이름의 단두대(1)

따뜻한 물줄기가 정수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짙은 수증기 속에서 서아는 샤워기 아래에 웅크린 채, 이안의 손길이 남은 곳을 짧고 거칠게 훑어 씻었다. 이미 몇 번이나 비누 거품을 헹궜는데도 손목과 허벅지에 남은 감각만은 사라지지 않았다."하아… 아앗…."결국 울음이 터졌다. 물소리가 그 소리를 삼켰다.두 시간 전. 이안의 낡은 소파 위에서 헐떡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구역질이 치밀었다. 바닥에 뒹굴며 반지를 찾던 그 비참하고 추악했던 순간들. 짐승처럼 자신의 몸을 탐하던 이안을 밀어내기는커녕, 들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오히려 그에게 매달렸던 자신의 밑바닥.'쓰레기. 백서아, 넌 진짜 쓰레기야.'수치심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서아를 더욱 미치게 만드는 것은, 거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남편 도진의 존재였다."서아야. 다 씻었어?"불쑥, 욕실 문 너머로 도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아는 흠칫 놀라며 급하게 울음을 삼켰다."어, 응! 다 씻었어. 금방 나갈게."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은 서아는 급하게 샤워기를 끄고 가운을 걸쳤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서아는 심호흡을 크게 내쉬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어색하고 기괴한 미소였다.달칵. 욕실 문을 열고 나가자, 도진이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서아가 나오는 소리에 책을 덮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머리 안 말리고 나왔네. 이리 와, 감기 걸려."도진의 손에는 헤어드라이어와 부드러운 수건이 들려 있었다. 그는 서아를 화장대 앞 의자에 앉히고는, 익숙한 손길로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내가 할게, 여보." "가만히 있어. 하루 종일 갤러리에서 시달리고, 작가 비위 맞추느라 피곤했을 텐데. 집에서라도 내가 챙겨야지."도진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드라이어의 따뜻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서아는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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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화 친절이라는 이름의 단두대(2)

거짓말. 또 거짓말. 서아는 이제 입을 열 때마다 튀어나오는 거짓말들에 구역질이 났다.그때, 도진이 식탁 너머로 손을 뻗어 서아의 왼손을 가볍게 덮어 쥐었다."어?" "어제부터 신경 쓰였는데."도진의 시선이 서아의 네 번째 손가락에 머물렀다. 정확히는, 어제 이안이 억지로 반지를 빼앗으려다 긁힌 붉은 상처 자국 위였다."손가락이 왜 이렇게 빨갛게 부었어? 여기 긁힌 자국도 있고." "아…!"서아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도진은 다정한 힘으로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서아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어디 긁힌 거야? 아팠겠다. 연고 발라야겠는데." "아, 아니야!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반지 빼다가 쓸렸어? 아니면 뭐에 걸렸나?"서아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요동쳤다. 어제 이안이 반지를 던졌다고 착각하게 만든 그 날카로운 금속음이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이 반지를 찾던 자신의 비참한 모습. 그리고 반지를 돌려주는 대가로 이안에게 바쳤던 치욕스러운 굴복.그 더럽고 끔찍한 사연이 담긴 반지를, 도진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어제… 갤러리 화장실에서 손 씻다가…. 비누에 미끄러져서 세면대 모서리에 좀 세게 부딪혔어." "조심 좀 하지. 이 반지, 내가 당신한테 프러포즈하려고 석 달을 고민해서 직접 디자인한 거 알잖아. 이 세상에 당신이랑 나, 우리 둘만 가지고 있는 반지인데. 다치면 내가 속상해."도진이 서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닿는 순간, 서아는 속에서 무언가 왈칵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욱…."서아는 급히 입을 틀어막고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났다."서아야? 왜 그래!" "잠, 잠깐만…!"서아는 다이닝 룸을 빠져나와 안방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를 붙잡고 방금 먹었던 전복죽을 고스란히 게워냈다. 위액이 섞인 쓴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오며 눈물이 핑 돌았다."우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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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화 친절이라는 이름의 단두대(3)

스카프 매듭을 지어주는 도진의 손길은 다정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서아는 그 스카프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처럼 느껴졌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고, 고마워… 예쁘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나 먼저 내려가서 차 시동 걸어놓을게.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도진이 서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고 방을 나갔다.문이 닫히고 혼자 남겨진 서아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최고급 스카프로 목을 가린 우아한 갤러리 관장. 그리고 그 스카프 아래에 숨겨진, 젊은 애인이 남긴 난잡한 짐승의 흔적.서아는 세면대를 두 손으로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아…." 참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기만 속에 살고 있는지. 남편의 순수한 사랑을 이렇게 짓밟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차 안에는 잔잔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이 흐르고 있었다. 도진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조수석에 앉은 서아의 손을 깍지 껴 잡고 있었다."이번 전시회 끝나면, 우리 여행 갈까?" "어…?" "당신 너무 무리했잖아. 하와이나 몰디브 쪽으로, 아무 생각 없이 푹 쉴 수 있는 곳으로 가자. 내가 항공권이랑 풀빌라 다 알아볼게. 당신은 몸만 와."도진이 서아를 향해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당신은 참 내 복에 겨운 사람이야. 내가 슬럼프 빠져서 몇 년씩 글도 못 쓰고 방황할 때, 묵묵히 내 옆에서 내조해 주고 갤러리까지 훌륭하게 키워내고. 당신 아니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도진 씨…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서아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그 헌신적인 사랑 고백이 그녀를 난도질하고 있었다."왜 그래. 부부 사이에 고맙다는 말도 못 하나." "나는… 나는 당신한테 그런 과분한 사랑 받을 자격 없는 사람이야." "자격이 왜 없어. 당신은 내 세상의 중심이고, 내 유일한 뮤즈인데."'뮤즈'.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서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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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6화 적색(赤色)의 각인(1)

전시 준비가 한창이던 오후였다.전시 준비 도중 직원이 서아의 소매를 보며 손을 뻗었다."관장님, 여기 뭐가 묻었는데요."서아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소매 끝에 아주 작은 붉은 얼룩이 있었다."물감 샘플 확인하다 묻었나 봐요. 작품 설치부터 마무리하세요."직원은 대수롭지 않게 돌아섰다.서아는 혼자 남은 뒤 얼룩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전시장에서 흔히 묻을 수 있는 얼룩인데도, 전날의 기억이 겹치자 사적인 공간의 흔적처럼 느껴져 섬뜩했다.서아는 직원이 떠난 뒤 소매를 접어 얼룩을 안쪽으로 숨겼다. 전시장에는 다시 흰색과 회색만 남았다. 붉은 흔적은 그녀의 옷 안으로 들어갔다.오후 2시. 청담동에 위치한 ‘갤러리 도아’의 메인 전시실은 차가운 백색 조명 아래 고요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관장님. 메인 파티션 쪽 조명 조도, 이 정도면 괜찮으실까요?"큐레이터 최 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아는 팔짱을 낀 채,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캔버스를 응시했다. 기괴하게 얽힌 인체의 형상들이 캔버스 위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안의 신작이었다."아니. 핀 조명 각도를 15도만 더 내려요. 캔버스 우측 하단에 유화 질감이 죽어 보이잖아. 그림자가 지게 만들어서 질감을 더 도드라지게 해야 해." "아, 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서아의 지시에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완벽주의자였다. 적어도 이 갤러리 안에서 백서아는 빈틈없는 안목을 가진 유능한 관장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자였다."관장님, 오전 VVIP 프라이빗 뷰잉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벌써 두 작품은 홀딩 요청이 들어왔고요." "당연한 결과야. 그림 자체의 에너지가 워낙 압도적이니까. 오프닝 파티 케이터링 업체는 컨펌 났어?" "네. 관장님이 지시하신 대로 샴페인 리스트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맞췄습니다."보고를 받는 서아의 얼굴은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하지만 속은 달랐다. 그녀는 지금 살얼음판 위를 맨발로 걷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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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7화 적색(赤色)의 각인(2)

이안은 서아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장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그는 여유롭게 주머니에서 은색 지포 라이터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찰칵, 찰칵. 라이터 뚜껑이 열리고 닫히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수장고 안을 울렸다."여긴 내 직장이야. 내 갤러리라고! 네가 함부로 와서 휘젓고 다닐 곳이 아니란 말이야." "직장? 하, 고상한 백 관장님 납셨네."이안이 라이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짐승처럼 서아에게 덤벼들었다."꺄악!"이안은 서아의 허리를 거칠게 감아안고, 그녀를 등 뒤의 거대한 미술품 보관함 쪽으로 밀어붙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서아의 등이 딱딱한 나무 상자에 부딪혔다."아파…! 놔!" "누가 준 거야." "뭐, 뭘…!" "그 목에 두른 개목걸이 말이야. 누가 줬냐고 묻잖아!"이안의 손이 서아의 목을 감싸고 있는 스카프를 꽉 움켜쥐었다. 그의 두 눈이 질투와 광기로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도, 도진 씨가… 남편이 사준 거야. 감기 걸렸다고…." "남편?"이안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내가 어제 네 몸에 똑똑히 내 거라고 마킹을 해놨는데, 그 새끼가 준 천 쪼가리로 그걸 덮어? 네가 무슨 포장육이야? 이놈 저놈 라벨지 번갈아 붙이게?" "말 함부로 하지 마! 아침에 도진 씨가 직접 매준 거야. 이거 안 매고 나왔으면 들켰을 거라고! 네가 어제 미친 짓만 안 했어도…!" "들키라 그래!!"이안이 폭발하듯 소리치며 서아의 스카프를 확 찢어버릴 듯 낚아챘다."아앗! 안 돼!"서아가 사색이 되어 이안의 손을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에르메스 스카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서아의 숨을 조여왔다."이거 풀면 안 돼… 도진 씨가 절대 풀지 말랬단 말이야. 직원들이 내 목덜미를 보면 어떡하려고 그래! 제발 이러지 마, 이안!"서아는 거의 울먹이며 애원했다. 남편이 준 선물을 지키기 위해, 아니, 남편에게 철저하게 속이고 있는 자신의 완벽한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녀의 모습.그 필사적인 태도가 이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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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화 적색(赤色)의 각인(3)

"이거… 이거 어떻게 지우라고… 흐흑. 도진 씨가 보면…." "지우지 마."이안이 피 묻은 손처럼 변해버린 자신의 손가락을 서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집에 가서 그 고상하고 완벽하신 남편한테 당당하게 보여줘. 당신 아내 목에 어떤 새끼가 지워지지 않는 붉은 물감을 떡칠해 놨는지. 그리고 당신 아내가 그걸 숨기려고 얼마나 발악했는지." "악마… 넌 악마야…!" "악마가 어울리지. 우아한 백조 연기나 하는 위선자 부부보다는."이안은 서아의 뺨을 가볍게 톡톡 치고는 몸을 뒤로 물렸다. 그는 벽에 걸려 있던 작업용 수건에 대충 물감 묻은 손을 닦아냈다."디스플레이는 아주 훌륭하네. 메인 작품 조명만 15도 내리면 완벽하겠어." "……." "전시회 날 봅시다. 백 관장님. 그때도 그 스카프, 예쁘게 매고 와."이안은 휘파람을 불며 여유롭게 수장고 철문을 열고 나갔다.철컹-!무거운 철문이 다시 닫히고, 수장고 안에는 깊은 적막이 찾아왔다."하아… 하아아…."다리에 힘이 풀린 서아는 보관함 벽을 타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는 스카프를 조심스럽게 벌려 보았다."아… 아아…."절망적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보리색 실크 스카프의 안쪽은 이미 새빨간 피를 토해낸 것처럼 끔찍하게 물들어 있었다. 스카프 안쪽 피부는 더욱 참혹했다. 쇄골부터 귀밑까지 이어지는 목덜미 전체에, 끈적이는 알리자린 크림슨 물감이 넓게 펴 발라져 있었다.마치 누군가에게 목을 졸려 피가 터진 듯한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모습이었다."어떡해… 이거 어떡해…."서아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수장고를 뛰쳐나왔다. 그녀는 직원들의 눈을 피해, 갤러리 가장 안쪽에 있는 프라이빗 화장실로 숨어 들어갔다.문고리를 걸어 잠근 서아는 세면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헝클어진 머리, 눈물로 번진 화장. 무엇보다 아이보리색 스카프 겉면까지 스멀스멀 번져 나온 붉은 핏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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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화 다정한 도축(屠畜)(1)

갤러리 앞 도로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검은색 벤츠 세단의 조수석 문이 열리고, 서아가 도망치듯 차 안으로 파고들었다."하아…."문을 닫자마자 서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창밖의 서늘한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도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많이 기다렸어? 차가 좀 막히더라고." "아, 아니야. 나도 방금 나왔어."서아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트렌치코트의 깃을 목 끝까지 바짝 세우고, 두 손으로 옷깃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목을 졸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필사적인 방어 자세였다.도진은 차를 출발시키며 조수석에 앉은 아내를 힐쩍 곁눈질했다.창백하게 질린 얼굴. 초점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 무엇보다 아침에 자신이 직접 매어주었던 아이보리색 에르메스 스카프가 사라진 휑한 목덜미. 그리고 코트 깃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테레빈유와 알리자린 크림슨 유화 물감의 냄새.도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찰나의 순간 호선을 그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근데 여보." "어? 으, 응?"도진의 차분한 부름에 서아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스카프는 어쩌고 코트 깃을 그렇게 세우고 있어. 목 춥다며." "아… 그게."서아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헤매기 시작했다."그… 갤러리 화장실에서 손 씻다가, 실수로 세면대에 떨어뜨렸어. 물바다가 되어 있던 참이라 엉망으로 젖어버려서…." "그래? 아깝네. 당신한테 참 잘 어울렸는데." "미안해. 진짜 조심하려고 했는데…." "미안할 게 뭐 있어. 스카프야 다시 사면 그만이지. 당신이 감기 안 걸리는 게 더 중요해."도진은 핸들에서 한 손을 떼어 서아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따뜻한 손길이 닿을 때마다 서아는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끔찍한 오한을 느꼈다.'다행이다. 의심하지 않아.'서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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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화 다정한 도축(屠畜)(2)

"수장고에서… 전시할 작품을 체크하고 있었어. 그런데 스태프 하나가 실수로 유화 물감 튜브를 밟아서 터뜨렸거든. 그게 하필 내 목 쪽으로 튀었어. 닦아내려고 했는데, 기름이라 잘 안 지워져서…."거짓말. 너무나도 조악하고 형편없는 거짓말이었다. 어떻게 바닥에 있는 물감을 밟아 터뜨렸는데, 그게 정확히 사람의 쇄골 안쪽과 목덜미 전체에만 펴 발라질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블라우스의 겉면이 아니라, 옷 안쪽의 맨살에만 교묘하게 묻어 있는 이 기괴한 형태를.도진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백서아. 당신은 거짓말에 소질이 없어. 이렇게 허술한 핑계를 대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게, 나와의 가정일까 아니면 그 천박한 화가의 성기일까.'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도진의 표정은, 오직 아내를 걱정하는 남편의 애틋함뿐이었다."하아… 난 또 뭐라고. 진짜 피인 줄 알고 심장이 멎는 줄 알았잖아."도진이 과장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아를 품에 꽉 안았다."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미, 미안해. 놀라게 해서." "스태프들이 칠칠맞게 조심 좀 하지. 당신 스카프도 그거 때문에 더러워져서 버린 거지?" "응….""어휴, 바보. 그걸 왜 숨겨. 혼자 얼마나 찝찝했을까. 피부도 약한 사람이 유화 물감을 맨살에 묻히고 몇 시간을 있었던 거야."도진은 서아를 안은 채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서아의 뺨을 타고 결국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남편을 감쪽같이 속여 넘겼다는 안도감과, 이렇게 순진한 남편을 기만하고 있다는 참담한 죄책감이 뒤섞인 눈물이었다."이리 와. 얼른 지워야지. 독한 물감이라 피부 다 상해."도진은 서아의 손을 이끌고 안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대리석으로 마감된 고급스러운 욕실. 서아는 세면대 앞의 작은 스툴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도진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지런히 움직였다.그는 따뜻한 물을 대야에 받고, 최고급 이집트산 면 수건을 적셔 물기를 짜냈다. 그리고 서아의 화장대에서 클렌징 오일과 화장 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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