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가 바람난 날, 내 슬럼프가 끝났다: Chapter 81 - Chapter 90

182 Chapters

081화 다정한 도축(屠畜)(3)

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남편의 이 맹목적인 다정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추궁하고, 뺨을 때려주기를 바랐다."무슨 소리야. 부부 사이에 힘들 게 뭐가 있어." "당신은 항상 나한테 다 퍼주고, 이해해주고, 챙겨주는데… 나는 맨날 당신 걱정만 시키고, 거짓말… 아니, 실수만 하잖아."서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도진의 손등 위로 부딪혔다."울어? 왜 울어, 바보같이."도진이 수건을 내려놓고 두 엄지손가락으로 서아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당신이 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해. 당신은 내게 영감을 주고, 내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도진 씨… 흐흑….""그러니까 당신은 아무 걱정 하지 마. 당신한테 묻은 더러운 것들, 내가 다 이렇게 닦아줄 테니까. 당신은 항상 깨끗하고 우아한 백서아로 남아 있으면 돼."도진의 말이 서아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녀는 도진의 목을 끌어안고 어린아이처럼 오열하기 시작했다."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엉엉…."도진은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우는 서아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서아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 도진의 얼굴에는 기괴할 정도로 환희에 찬, 소름 끼치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자신이 설계한 상황 속에서 완벽하게 무너져 내리는 피사체. 이 얼마나 통쾌하고 짜릿한 예술인가."자, 이제 다 지워졌어. 한 번 볼까?"도진이 서아의 어깨를 살며시 밀어내며 그녀의 목덜미를 살폈다. 오일과 따뜻한 수건의 반복된 마찰로 인해 붉은 유화 물감은 거의 다 닦여 나갔다.하지만, 물감이 지워진 자리에는 더 끔찍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이안이 남겨두었던, 검붉게 피멍이 든 선명한 잇자국과 키스 마크. 그 불륜의 흔적이 붉은 물감이라는 방패막이를 잃고 도진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어…."도진이 그 멍 자국을 빤히 응시하며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서아는 숨을 삼켰다. 잊고 있었다. 물감을 지우면 그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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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화 발가벗겨진 뮤즈(1)

오전 10시. 청담동 갤러리 도아. 서아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오늘 그녀가 선택한 의상은 목 위까지 빈틈없이 올라오는 검은색 하이넥 실크 드레스였다. 단정하고 우아한 실루엣이었지만, 계절감이나 갤러리의 화려한 오프닝 파티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겁고 답답한 차림이었다."관장님. 오늘 의상이… 평소보다 좀 어두우시네요?"전시 브로슈어를 정리하던 최 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아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안 작가 작품들이 워낙 색채가 강렬하잖아요. 메인 컬러가 붉은색이기도 하고. 관장인 나까지 화려하게 입으면 작품에 가는 시선을 뺏을까 봐요." "아하! 역시 관장님 디테일은 못 따라가겠네요. 작가님 작품 돋보이게 하시려고 일부러 블랙으로 톤다운 하신 거구나."최 대리의 감탄 섞인 대답에 서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거짓말이었다.그녀가 이 답답한 하이넥 드레스를 입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도진이 따뜻한 오일로 닦아내 주었던 붉은 유화 물감의 흔적. 그 아래에 흉측하게 남아 있는, 이안이 짐승처럼 물어뜯어 남긴 피멍 든 잇자국을 가리기 위해서였다.화장품으로 두껍게 덮고, 그 위에 목을 조이듯 드레스 깃을 끝까지 올려 잠그고 나서야 서아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관장님, 케이터링 업체 도착했습니다. 샴페인 세팅 시작할까요?" "네. VVIP 명단 다시 한번 체크하고, 동선 꼬이지 않게 입구 쪽에 직원들 더 배치해요. 30분 뒤면 프레스(Press)랑 비평가들 먼저 들어올 테니까."지시를 내리는 서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드레스 자락을 꽉 쥔 그녀의 손바닥은 이미 차가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무사히 끝나야 해. 제발.'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오늘 오프닝 파티만 무사히 넘기면, 이안이라는 괴물과 엮인 이 지독한 늪에서 빠져나올 명분이 생긴다. 전시가 궤도에 오르면 관장으로서의 업무를 핑계로 그와의 사적인 만남을 단호하게 끊어낼 작정이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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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화 발가벗겨진 뮤즈(2)

서아는 그 그림 앞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제 수장고에서 이안이 서아의 목에 강제로 붉은 물감을 짓이겨 바르며 '메인 조명을 15도 내리라'고 지시했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사람들이 그림 앞에 둥그렇게 반원 형태로 모여들었다. 웅성거리던 소음이 일순간 잦아들며, 기묘한 정적이 갤러리 안을 감돌았다.그림은 압도적이었다. 거친 나이프 자국과 꾸덕한 유화 물감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듯한 배경 속, 한 여자의 형상이 캔버스 중앙에 묘사되어 있었다. 얼굴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오직 등 뒤에서 바라본 여자의 하얀 목덜미와 매끄러운 쇄골, 그리고 어깨의 곡선만이 극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그리고 그 여자의 하얀 목덜미 위로, 마치 피를 흩뿌려놓은 듯한 검붉은 '알리자린 크림슨' 물감이 폭력적일 만큼 짙고 거칠게 짓이겨져 있었다.아름다우면서도 기괴하고, 에로틱하면서도 잔혹한 그림이었다."세상에…."박 편집장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탄성을 내뱉었다."이건 단순한 추상이 아니군요. 철저하게 대상을 관찰하고 해체한 뒤에, 작가의 욕망을 때려 부은 느낌입니다. 이안 작가, 이 그림 속의 피사체… 실제 모델이 있는 겁니까?"편집장의 질문에 갤러리 안의 모든 이목이 이안에게 집중되었다. 서아는 숨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안 돼. 제발….' 서아의 시선이 이안을 향해 필사적으로 애원하고 있었다.이안은 샴페인 잔을 가볍게 흔들며, 서아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네. 당연히 있죠." "오! 누군지 여쭤봐도 됩니까? 이렇게 관능적이고 완벽한 선을 가진 모델이라니." "글쎄요. 비밀입니다. 제 예술에, 그리고 제 밑에서 기꺼이 완전히 타락해 준… 세상에서 가장 위선적이고 아름다운 뮤즈라는 것까지만 말씀드리죠."이안의 대답에 기자들의 수첩에 불이 나게 펜촉이 움직였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뒷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다시 그림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그런데 말입니다."가장 앞줄에서 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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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화 발가벗겨진 뮤즈(3)

이안이 과장된 몸짓으로 다가와 비틀거리는 서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이거 놔…!"서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안을 밀쳐내려 했지만, 이안의 팔은 쇳덩이처럼 단단하게 그녀의 허리를 옭아맸다."여러분, 제 모델이 누구인지에 대한 추측은 예술적 상상력으로 남겨두시죠. 백 관장님이 너무 당황하시지 않습니까. 뭐, 보는 사람 눈에 그렇게 보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요."이안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아주 교활한 화법으로, 사람들의 의심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갤러리 안의 분위기는 확신으로 굳어졌다.‘저 여자다. 강도진의 아내 백서아가, 저 젊고 미친 화가와 놀아났다.’속삭임은 이제 경멸과 흥미가 뒤섞인 노골적인 시선으로 변해 서아의 온몸에 꽂히기 시작했다. 이안의 체취가 섞인 숨결이 서아의 귓가를 스쳤다."어때. 네 그 고상한 타이틀이 박살 나는 기분이." "미친… 악마 새끼…." "내가 말했지. 타락한 백서아가 네 진짜 모습이라고. 이제 세상 사람들도 다 알게 됐네."이안의 조소가 서아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쨍그랑-! 서아의 손에 들려 있던 샴페인 잔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꺄악!" "관장님!"유리 파편이 튀고 샴페인이 쏟아지며 순식간에 난장판이 벌어졌다. 하지만 서아는 발밑에서 깨진 유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 쥐고, 공포에 질린 짐승처럼 뒷걸음질을 쳤다.사방이 벽이었다. 어딜 둘러봐도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들의 눈빛뿐이었다. 벽에 걸린 캔버스 속 붉은 물감들이 마치 진짜 피로 변해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려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숨 막혀… 그만… 다들 나를 보지 마… 제발…!"서아는 귀를 틀어막고 주저앉을 뻔했다. 정신이 완전히 붕괴하기 일보 직전. 그녀가 이 끔찍한 무대 위에서 그대로 쓰러지려던 찰나였다."무슨 일입니까. 다들 우리 아내를 왜 그렇게 괴롭히고 있죠?"낮고, 다정하며, 한없이 여유로운 목소리. 그 절대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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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화 완벽한 위로, 기만하는 관찰자(1)

갤러리 오프닝 파티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도진이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내일 오전에도 갤러리 일찍 나가?"서아는 준비하지 않았던 질문에 잠시 늦게 답했다."응. 작품 확인할 게 있어.""그래."도진은 더 묻지 않았다.서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한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자신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확인할 작품은 있었지만, 그것이 내일 일찍 나가야 할 이유는 아니었다.도진은 그 짧은 지연과 새로 덧붙은 설명을 그대로 기억했다.차가 갤러리를 벗어나기 전 도진은 서아에게 생수와 진통제를 건넸다. 필요하면 바로 집으로 데려가 쉬게 하겠다고도 했다. 서아는 미소를 만들며 약을 받지 않았다. “괜찮아. 그냥 피곤해서 그래.” 목소리는 정상적이었지만 물병을 받으려다 손끝이 한 번 미끄러졌다. 도진은 그 장면을 보았지만 손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몇 초 늦게 대답한 것과 물병 뚜껑을 두 번 돌리고도 제대로 열지 못한 것을 기억했다. 무엇이 원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서아는 도진이 더 묻지 않는 것을 구원처럼 느꼈고, 도진은 묻지 않아야 다음 변화가 더 선명해진다고 생각했다.적막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깥에는 추적추적 얇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규칙적으로 앞유리를 닦아내는 소리만이 차 안의 유일한 백색소음이었다.조수석에 앉은 서아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검은 실크 드레스 위로 걸친 코트 자락을 생명줄처럼 꽉 쥐고 있는 그녀의 손마디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많이 춥나 보네. 히터 온도 좀 올릴까?"운전대를 잡고 있던 도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적막을 깼다."아, 아니. 괜찮아. 온도 딱 좋아."서아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평소의 차분하고 기품 있던 목소리와 달리 끝이 미세하게 갈라지고 떨렸다.도진은 룸미러를 통해 아내의 창백한 얼굴을 슬쩍 살폈다."안색이 안 좋아. 갤러리 일로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그런가 봐. 아무래도… 이번 전시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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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화 완벽한 위로, 기만하는 관찰자(2)

"고마워, 도진 씨. 날 믿어줘서." "부부 사이에 믿음은 당연한 거지. 그러니까 그런 가십거리 신경 쓰지 마. 당신은 그냥 갤러리 관장으로서 그 작가를 잘 이용해 먹기만 하면 돼."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도진은 다시 운전대를 잡고 앞을 향해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서아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보지 못했다. 운전대를 잡은 도진의 입꼬리가, 차 안의 어둠 속에서 아주 싸늘하게 비틀려 올라가는 것을.'멍청하긴.'도진은 속으로 조소했다. 믿음? 완벽한 아내? 차라리 개가 똥을 끊는다고 해라. 도진은 서아의 말과 실제 흔적 사이에서 처음 균열을 감지한 날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썩어들어가는 속내와 타락의 과정을 아주 흥미진진하게 관찰해 온 유일한 관객이었다.'당신이 내뱉는 그 떨리는 거짓말 하나하나가, 내 소설의 완벽한 문장이 되고 있다는 걸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도진은 가속 페달을 살짝 더 밟았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웃음을 참느라 턱끝이 뻐근할 지경이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서아는 곧장 침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도진이 따뜻한 차를 끓이러 주방으로 간 사이였다.쾅! 욕실 문을 걸어 잠근 서아는 세면대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하이넥 드레스의 깃을 끌어내렸다."하아… 하아…."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처참했다. 창백한 얼굴, 번진 화장, 그리고 목덜미부터 쇄골로 이어지는 곳에 흉측하게 남아 있는 붉은 피멍 자국들.'이안, 이 미친 새끼.'서아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자신의 목을 거칠게 문질렀다. 그제 이안이 짐승처럼 물어뜯어 남긴 잇자국이 화끈거렸다. 컨실러와 파운데이션으로 두껍게 덮어두었던 자국들이 물에 씻겨 내려가며 다시 그 적나라한 자태를 드러냈다."더러워…."서아는 비누를 듬뿍 짜서 목을 벅벅 닦아내기 시작했다. 살갗이 벗겨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도 멈추지 않았다. 전시장 한가운데서 자신을 발가벗기듯 쳐다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떠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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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7화 완벽한 위로, 기만하는 관찰자(3)

뭐가 미안해. 바보같이.도진이 서아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그의 얼굴은 서아의 시선이 닿지 않는 뒤편에 있었다. 품에 안긴 아내가 미안함과 죄책감에 오열하며 몸을 떨고 있을 때.도진은 눈을 감고 그 진동을 온몸으로 음미하고 있었다.'아… 짜릿해.'도진의 입이 소리 없이 벌어지며, 치열을 다 드러낸 환희의 미소가 번졌다. 품 안에서 바들바들 떠는 아내의 체온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도진은 마치 최고급 와인을 시음하듯 코끝을 서아의 목덜미 쪽에 가져다 대었다.샤워 젤의 향기 너머로, 미세하게 남아 있는 붉은 유화 물감의 냄새. 그리고 젊은 수컷, 이안의 비릿한 체취가 옅게 묻어나는 듯했다.도진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기묘한 흥분감을 억누르느라 침을 꿀꺽 삼켰다.이 얼마나 잔혹한 희극인가. 자신의 밑에서 다른 남자의 씨를 받으며 뒹굴었던 여자가, 이제는 세상의 비난이 두려워 남편의 품에 숨어들어 와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모든 추악한 진실을 뼛속까지 꿰뚫어 보고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관대한 성자의 얼굴을 한 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괜찮아, 서아야. 다 지나갈 거야."도진은 짐짓 슬픈 목소리를 꾸며내며 말했다."내가 다 막아줄게. 누가 당신을 욕하든, 내가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당신은 내 완벽한 아내니까."서아는 도진의 말을 들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니면 도진의 체온에 취한 탓인지 서아의 호흡이 점차 일정한 간격으로 변해갔다."피곤했구나. 자."도진은 서아를 침대에 눕히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서아는 눈을 감은 채로도 도진의 손가락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도진은 그 손을 떼어내지 않고, 서아가 완전히 깊은 잠에 빠져들 때까지 가만히 침대 곁을 지켰다.이윽고 서아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도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아내를 위로하던 다정하고 따뜻한 남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차갑고 이성적인 관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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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화 활자 속에 갇힌 여자, 현실을 탐하다(1)

아침 햇살이 두꺼운 암막 커튼의 틈새를 뚫고 들어와 침대 발치를 비췄다.서아는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가쁘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텅 비어 있었다. 도진이 먼저 일어난 모양이었다."하아…."서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어젯밤 도진의 품에 안겨 오열하던 기억이 생생했다. 남편의 다정한 위로 속에서 그녀는 철저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이안이라는 미친 불장난은 어제로 끝이라고 다짐하며 잠들었었다.그런데 왜. 왜 꿈속에서조차 이안의 그 짐승 같은 눈빛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던 걸까.서아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선 그녀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어젯밤 벅벅 문질러 닦아낸 목덜미는 여전히 울긋불긋했다."미친년. 백서아, 이 미친년…."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서랍을 열었다. 가장 커버력이 좋은 컨실러를 꺼내 목덜미에 두껍게, 아주 두껍게 발랐다. 마치 자신의 죄악을 덮어버리려는 듯이. 가면을 써야 했다. 완벽하고 우아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도도한 갤러리 관장의 가면을.다이닝 룸으로 나가자,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일어났어?"도진이 앞치마를 두른 채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샷을 내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온화한 미소. 완벽한 남편의 표본이었다."어… 일찍 일어났네." "당신 어제 늦게까지 갤러리 일로 고생했잖아. 조금이라도 더 재우고 싶어서 안 깨웠어. 식빵 구웠는데, 버터 발라줄까?"서아는 식탁 의자에 앉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고마워. 근데 입맛이 별로 없어서 커피만 마실게." "그래도 조금 먹어. 오늘 VVIP 프라이빗 뷰잉 있다고 하지 않았어? 하루 종일 서 있으려면 든든해야지."도진이 따뜻한 커피잔을 서아의 앞에 내려놓았다.아침 식탁에서 서아는 도진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넘겼으며, 평소와 다르지 않게 오늘 귀가 시간을 물었다.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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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9화 활자 속에 갇힌 여자, 현실을 탐하다(2)

머릿속에 소설 속 여주인공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그것은 분명 서아의 얼굴이었다. H라인 스커트에 블라우스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갤러리로 출근한 백서아 관장. 사람들 앞에서는 우아하게 미술품을 설명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이안의 그 축축하고 더러운 작업실 침대를 떠올리고 있을 그녀."서아야."도진이 모니터를 향해 중얼거렸다."넌 지금쯤 그 녀석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휴대폰 진동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기대하고 있을 거야."소설을 쓰는 작가의 상상력과, 현실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시선이 하나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도진은 자신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대로, 저 밖의 현실에서 서아가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아니, 어쩌면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설계한 이 거대한 심리극 안에서, 서아는 정확히 자신의 의도대로 춤추는 마리오네트에 불과했으니까.도진은 흥분으로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타자 속도를 높였다. 소설 속 그녀가 본격적인 타락의 문을 여는 장면.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공간에서, 가장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헐떡이는 장면을 써 내려가야 했다.오후 2시. 갤러리.서아는 VVIP 고객들과의 프라이빗 뷰잉을 마치고 자신의 관장실로 돌아왔다. 구두를 벗어 던지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발바닥이 깨질 것처럼 아팠다."하아…."숨을 돌리려는데,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지잉-서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향했다.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 그러나 서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구인지.침을 꿀꺽 삼킨 그녀가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열었다.[지하 수장고로 내려와. 5분 준다. 안 오면 내가 그쪽으로 올라갈게. 관장님 체면 구기기 싫으면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텐데.]"미친…."서아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심장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협박이었다. 명백한 협박. 당장 이 메시지를 무시하고 비서에게 지시해 보안 요원을 부르면 그만이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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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화 활자 속에 갇힌 여자, 현실을 탐하다(3)

"하아… 이안…."서아의 입술 사이로 끝내 그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거부 대신 수락의 의미를 담은, 완전한 항복 선언.이안이 서아의 목을 집요하게 빨아들이며 조소했다."그래. 이게 너야. 그 가식적인 성 밖으로 기어 나온 진짜 백서아."[그녀는 이성을 포기했다. 수장고의 차가운 바닥에 그녀의 고급스러운 실크 블라우스가 처참하게 내팽개쳐졌다. 남편의 완벽한 세계를 지키겠다던 그녀의 다짐은, 젊은 사내가 주는 폭력적인 쾌락 앞에서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자신이 더럽혀지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 타락이 주는 달콤함에 미친 듯이 탐닉하기 시작했다.]"하아… 하아…."도진의 서재. 모니터 앞에서 타자를 치던 도진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모니터 화면을 뚫고 들어가 수장고의 현장을 직접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광기로 번뜩였다."그래. 그렇게 스스로 목을 조이는 거야. 더, 더 천박하게. 더 매달려 봐."도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붕괴되는 순간이었다. 도진은 지금 자신이 소설을 창작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의 서아를 원격으로 조종하여 타락시키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자신이 쓰는 활자 하나하나가 서아의 살갗에 새겨지는 낙인 같았다.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은, 남편에 대한 기만이자 스스로를 향한 사형 선고였다.]엔터 키를 세게 내리친 도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온몸의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듯한 짜릿한 탈력감이 밀려왔다."완벽한 챕터야."도진은 크리스털 잔에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자신의 소설 속 여주인공은 이제 완전히 선을 넘었다. 현실의 백서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이제 도진이 짜놓은 거미줄 한가운데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발버둥 칠수록 더 꽁꽁 옭아매어질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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