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랑에 미친 남편 조련법: Chapter 41 - Chapter 50

100 Chapters

제41화

“원지민 씨 맞죠?”직원은 얼른 립스틱을 내려놓고 손에 든 명단을 확인했다.“인사팀은 1006호예요. 복도 끝까지 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돼요.”“감사합니다.”슬비는 안쪽으로 걸어갔다.복도 양옆에는 투명한 유리로 나뉜 사무공간이 이어져 있었고, 안에서는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들었어? 주민 어제 잘렸대.”“진짜? 스타엔터 초창기부터 있던 사람 아니야? 갑자기 왜?”“누가 알아. 새 대표가 직접 지시했다던데. 봐주는 것도 없이 인사팀에서 바로 해임을 통보했고, 인수인계도 없이 바로 짐 싸서 나가라고 했대.”“와, 너무 세다. 주민이 누구한테 찍힌 거야?”“그것도 모르지. 지금 임원들 사이에서는 새 대표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만 돌아. 다들 괜히 눈 밖에 나지 말라고 난리야.”슬비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주민?’‘임서영 약혼자 주민?’전날 웨딩숍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머릿속에 한 가지 짐작이 스쳤지만, 곧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설마... 하 회장이 주민이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근데... 내가 몇 마디 비꼬는 말을 들었다고 회사 이사까지 자를 리도 없고.’슬비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내고 다시 걸었다.1006호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슬비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문을 열자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턱선까지 닿는 단정한 단발머리, 군더더기 없는 화장에 금테 안경까지. 전날 면접에서 봤던 사람이었다.“원지민 씨?”유진이 슬비를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덮었다.“앉으세요.”슬비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인사팀장 유진입니다.”유진은 서랍에서 계약서를 꺼내 슬비 앞으로 밀었다.“근로계약서예요. 수습 기간은 3개월이고 급여와 복지는 회사 기준대로 적용됩니다. 내용을 확인하고 서명하면 오늘부터 스타엔터 소속이에요.”슬비는 계약서를 받아 꼼꼼하게 읽었다.급여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업계에 처음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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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권도혁 가수는 우리 회사에서 다루기 어렵기로 유명해요.”혜림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설명했다.“성격 세죠, 지시 안 듣죠, 녹음 늦게 오죠, 리허설 펑크 내죠, 선배랑 싸우죠, 대기실에서 기타도 부쉈죠. 생각할 수 있는 사고는 거의 다 쳤다고 보면 돼요.”슬비는 사진 속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만 바라봤다.“앞에 있던 매니저 13명 중에는 울면서 나온 사람도 있고, 말싸움하고 사표 쓴 사람도 있어요.”“한 명은 위약금까지 물고 회사를 나갔대요. 임 팀장님도 일단 해 보고 정말 안 되면 다시 조정해 주겠다고 하셨어요.”혜림은 안쓰러운 눈으로 슬비를 바라봤다.슬비는 자료를 덮었다.“지금 어디 있어요?”“네?”혜림이 눈을 깜빡였다.“아마 위층 연습실에 있을 거예요. 아까 제일 안쪽 방 보여 드렸죠? 요즘 경연 프로그램 준비한다고 거의 거기서 살아요.”“알았어요. 가볼게요.”슬비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가방을 들었다.혜림이 뒤에서 급히 불렀다.“지금 바로요? 마음의 준비라도 좀 하고 가는 게 낫지 않아요?”슬비는 돌아보지 않고 손만 가볍게 흔들었다....연습실은 11층에 있었다.한 층 전체가 연습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복도 양쪽에는 방음 유리로 된 연습실이 이어졌고, 안에서는 춤을 추는 사람도, 노래하는 사람도, 둘러앉아 회의를 하는 사람도 보였다.슬비는 복도 가장 안쪽까지 걸었다. 끝에 있는 연습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가까이 가기도 전부터 거친 기타 소리가 들렸다.연주가 못한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부러 소음을 만들어 내는 것에 가까웠다.슬비는 문 앞에서 멈췄다.연습실 안에는 한 사람뿐이었다.도혁은 문을 등지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넉넉한 검은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날카로운 턱선만 드러났다.앞에는 전기기타가 놓여 있었고 피크로 줄을 마구 긁어서 귀를 찌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슬비가 문을 두드렸다.아무 반응도 없었다.한 번 더 두드렸다.여전히 쳐다보지도 않았다.슬비는 그대로 문을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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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도혁은 말을 마치고 아무렇게나 몇 개의 코드를 튕겼다.정리되지 않은 음이 연습실 안에 거칠게 퍼졌다. 듣기 힘들 정도로 날카롭고 어수선한 소리였다.슬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도혁은 슬비를 쳐다보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줄을 더 세게 튕길수록 소리는 더 엉망이 됐다. 소음으로 사람을 쫓아내려는 게 분명했다.그런데 슬비는 그대로 서 있었다. 표정은 태연했고 오히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5분.10분.15분.도혁은 손가락이 뻐근해질 때까지 기타를 긁어 댔지만 슬비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결국 도혁이 손을 멈추면서 미간을 찌푸렸다.“귀 안 들려?”슬비가 핸드폰을 내리고 바라봤다.“응. 예전에 한동안 정말 못 들었어.”도혁이 눈을 크게 떴다.“뭐?”슬비는 설명하지 않았다. 도혁 앞으로 걸어가 품에 안긴 기타를 내려다봤다.“이 기타 괜찮네. 깁슨 허밍버드. 음색이 따뜻해서 보컬이랑 잘 어울리는 모델이잖아. 그런데 아까 잡은 코드는 손가락 위치가 틀렸어.”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누가 틀렸다고?”슬비는 대꾸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기타 좀 빌려줘.”도혁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그래, 어디 한번 해 봐.’슬비가 기타를 받아 소파에 앉았다. 자세를 조금 고쳐 잡고 왼손으로 줄을 눌렀다. 오른손의 피크가 줄에 닿았다.첫 음이 울리자 도혁의 표정이 바뀌었다.빠른 손놀림을 과시하는 연주가 아니었다. 누구나 들으면 단순하다고 느낄 만큼 쉬운 선율이었다.그런데 슬비가 연주하자 전혀 다른 분위기가 생겼다. 맑고 깨끗한 음이 하나씩 이어졌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선율 사이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도혁은 곧 알아챘다.의 전주였다.자신의 노래.그런데 슬비가 연주한 전주가 원곡보다 더 좋게 들렸다.마지막 음이 끝나자 연습실은 잠시 조용해졌다.도혁은 눈을 크게 뜨고 슬비를 바라봤다.“그쪽이... 이걸 어떻게 쳐?”슬비는 기타를 돌려주며 담담하게 말했다.“네 노래. 전에 한 번 들었어.”“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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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알아.”이재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책상 위로 던졌다.“앞으로 안 먹을 수 있으면 안 먹을게.”희천이 입술을 다물었다.“농담하는 게 아니에요.”숨을 한번 고른 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형이 원래 체력이 좋으니까 지금까지 버틴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몸이 무너졌어요.” “아무리 튼튼한 사람도 계속 이렇게 버틸 수는 없어요. 그 약의 부작용은...”“됐어.”이재가 귀찮다는 듯 말을 잘랐다.“북명시에 반년 있다 오더니 왜 이렇게 잔소리가 늘었어?”희천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거의 10년 동안 이재 곁에 있었기에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재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문제일수록 오히려 설득하기 더 어려웠다.“치료 계획을 빨리 결정해야 하니까요. 늦어도 다음 달에는...”“희천아.”이재가 이름을 또렷하게 불렀다.희천이 멈췄다.“그만해.”“형...”이재는 손을 가볍게 들어 말을 막았다.“다른 거 물어볼 게 있어.”희천은 입술을 다문 채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하려던 말을 삼켰다.“뭐예요?”“친밀 불안 장애가 뭔지 알아?”희천이 눈을 깜빡였다.“갑자기 그건 왜...”“친밀 불안 장애.”이재가 다시 말했다.“왜 생기는 거지?”“친밀 불안 장애는 심리적 불안 반응의 한 형태고요...”전문 분야 이야기가 나오자 희천의 설명이 조금 빨라졌다.“타인과 가까운 관계를 맺는 상황에서 강한 불안을 느끼는 거고, 심장이 빨리 뛰거나 식은땀이 나고, 숨이 가빠질 수도 있어요. 심하면 공황 증상으로 이어지기도 해요.”희천이 이재를 한번 살폈다.“원인은 다양하고, 다만 흔하게 보이는 경우 중 하나가 친밀한 관계와 관련된 큰 심리적 외상을 겪었을 때예요.”말을 고르던 희천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강제로 성적 추행을 당했거나... 성폭력을 겪은 경우도 있고요.”마지막 말이 떨어지자 서재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형?”희천이 긴장한 표정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괜찮으세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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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곁에서 지켜보던 희천은 이재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 가는 걸 분명히 알아차렸다.“알았어.”이재는 전화를 끊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 나온 뒤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집어 들었다.희천이 미간을 찌푸렸다.“형, 나가려고요?”이재는 대답하지 않았다.희천이 다급하게 따라가려던 때 이재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정신건강의학과 쪽으로 실력 있는 전문의 한 명 알아봐 줘. 제일 잘하는 사람으로.”희천의 표정이 밝아졌다.“알았어요. 바로 알아볼게요. 형도 이번에는...”말이 끝나기 전에 이재는 등을 돌린 채 손만 한번 흔들었다.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희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기분이 풀린 것도 잠깐,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잠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찾는 게... 아까 물어본 친밀 불안 장애 때문인가?’...스타빌딩 정문 앞.성준은 차 옆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의 재가 길게 늘어졌는데도 털어 내지 않았다.벌써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있었다.우찬이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었다.“성준아, 그냥 차 안에서 기다리지 그래? 햇볕도 뜨거운데.”“됐어.”말을 자른 성준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눌러 끈 뒤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표정은 무덤덤했지만 턱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조금 전 슬비에게 맞은 뺨은 아직도 화끈거렸다.얼굴이 아픈 게 아니었다.가슴이 아팠다.성준은 27년을 사는 동안 누구에게도 뺨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여자에게 맞은 적은 더더욱 없었다.성준은 입술을 다물었다. 가슴에 꽉 막힌 감정이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다.‘어떻게 감히 나를 때려?’‘시연이 몇 번 장난친 것 때문에?’성준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뒤 무의식적으로 스타빌딩 입구를 바라봤다. 머릿속에는 슬비가 했던 말이 계속 반복됐다.‘강성준, 너 진짜 역겨워.’ ‘이건 날 속이고 기만하고, 저버린 대가야.’ ‘오늘부터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 말을 할 때 슬비의 눈빛은 예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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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그렇게 생각하자 성준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거의 다 타 들어간 담배를 끄고 슬비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대로 이야기해 볼 생각이었다.“성준아!”그때 차 안에 있던 우찬이 다급하게 소리쳤다.성준은 놀라 미간을 찌푸린 채 돌아봤다.“왜 그렇게 호들갑이야?”우찬은 이미 차에서 뛰어내려 달려오고 있었다. 핸드폰을 내미는 손이 떨려서 제대로 잡고 있기도 어려워 보였다.“성준아, 큰일 났어. 새별엔터에 일이 터졌어.”성준은 핸드폰을 빼앗듯 받아 화면을 내려다봤다.뉴스 알림 하나가 굵은 글씨로 떠 있었다.‘새별엔터테인먼트 대표 진조운, 다수의 여성 연예인 성추행·성폭행 혐의로 경찰 조사’라는 내용이었다.성준의 눈빛이 급격히 굳어지면서 손가락으로 기사를 눌렀다. 화면이 뜨는 짧은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고 귀 안쪽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기사 내용은 예상보다 훨씬 구체적이었고 치명적이었다.진조운은 이날 오전 경찰에 조사를 받으러 갔다. 어느 경로로 소식이 새어 나갔는지 오후 장이 시작되자마자 새별엔터 주가가 급락했고, 20분 만에 하한가까지 떨어졌다.하한가...“성준아...”우찬의 목소리가 떨렸다.“오늘 하루 하한가 맞은 것만으로 회사 가치가 거의 20억 원 가까이 날아갔어.”20억 원.하루 만에 사라진 돈이었다.새별엔터는 명목상 강명그룹 계열사였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실질적으로 회사를 키운 사람은 성준이었다.아버지에게 처음 회사를 넘겨받았을 때만 해도 겨우 유지되는 작은 기획사에 불과했다. 성준과 슬비가 함께 지금의 규모까지 끌어올렸다.진조운을 직접 발탁해 대표 자리에 앉힌 사람도 성준이었다.자신이 선택한 사람이었다.성준은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졌다.“성준아, 이제 어떻게 해?”우찬은 다급했다.“홍보팀에서 계속 막고 있긴 한데 일이 너무 커. 포털 실시간 이슈 상위권에 관련 검색어가 세 개나 올라갔어.”성준은 대답하지 않았다.문득 슬비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진조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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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성준아.”우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일단 변호사부터 붙일까?”“응.”성준이 짧게 대답했다.“법무팀부터 먼저 움직이라고 해. 내가 돌아가서 직접 정리할게.”“알았어.”차는 스타빌딩이 있는 거리를 천천히 빠져나갔다. 다음 교차로에서 방향을 바꿔 숙소 쪽으로 향했다.우찬은 창밖을 보다가 맞은편 차선을 지나가는 검은 세단에 시선이 멈췄다.‘저 차...’‘또 하이재 회장 차 아닌가?’우찬이 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봤지만, 차는 이미 멀리 사라져서 뒷모습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미간을 좁힌 우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하 회장 차가 왜 여기 있지?’전날 스타엔터 지하주차장에서도 봤고 오늘도 스타빌딩 근처에서 마주쳤다.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묘했다.‘설마... 스타엔터를 인수한 사람이 하 회장인가?’자신이 떠올린 가능성에 우찬도 놀랐다.성준에게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굳은 표정을 보고는 다시 닫았다.‘지금은 됐다.’‘북명시에 돌아가서 새별엔터 일부터 정리한 다음 말하자.’...점심시간.슬비가 자리로 돌아와 앉자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첫 출근은 어때?]이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느긋하고 부드러웠다.슬비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아까 만난 도혁의 반항적인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나쁘지 않아요.”전화기 너머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밥은?]“아직 못 먹었어요.”[마침 스타엔터 근처를 지나가는데, 네가 일하는 곳까지 왔으면 밥 한 끼 정도는 사 줘야 하는 거 아니야?]슬비는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지나가는 길이라고?’운서원 쪽에서 스타빌딩으로 일부러 돌아오려면 적어도 삼십 분은 더 걸렸다.‘이게 어디가 지나가는 길이...’하지만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어디 계세요?”[지하주차장.]“네, 바로 내려갈게요.”슬비가 가방을 들고 아래로 내려가자 멀리 검은 세단 한 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차창이 조금 내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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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이재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수프를 먹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눈 밑에 옅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표정만으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슬비는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줬다.‘방금 ‘슬비’라고 부른 거... 들었을까?’[슬비야, 듣고 있어?]대답이 없자 장여진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슬비는 심장이 턱밑까지 올라온 듯한 기분이었다. 급히 입을 열었다.“엄마, 나 지금 회장님이랑 밥 먹고 있어. 무슨 일이면 조금 있다가 말해.”일부러 ‘회장님’이라는 말을 또렷하게 강조했다.전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장여진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아, 그래. 지민아. 하 서방이랑 같이 있어? 그럼 오히려 잘됐네.]호칭을 바꾼 장여진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지범이가 이제 고등학교 올라가잖아. 호강시도 학교마다 차이가 큰 거 알지? 평범한 학교에 다녀서는 나중에 선택지가 좁아.][지범이 성적도 나쁘지 않으니까 세인트폴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앞으로 훨씬 유리해. 요즘은 성적표만큼 인맥도 중요하잖아.]‘세인트폴고등학교?’슬비의 미간이 좁아졌다.호강시에서도 손꼽히는 최상위 명문 사립학교였다. 오랜 역사만큼 졸업생 명단에는 호강시의 유력 가문 자녀들이 줄줄이 올라 있었다.평범한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원씨 집안 정도의 재력으로도 입학 자리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엄마...”슬비가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을 끊으려고 했다.장여진은 틈을 주지 않았다.[나도 들어가기 힘든 학교인 건 알아.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지민아, 넌 지금 하씨 집안 며느리잖아.][우리 하 서방은 어떤 사람인데? 호강시에서 하 서방이 마음먹고 못 하는 일이 얼마나 되겠어?] [세인트폴고등학교 입학 정도는 하 서방이 말 한마디만 해 주면 끝날 일이야.]슬비의 숨이 잠깐 막혔다.‘말 한마디면 끝난다고? 너무 쉽게 말씀을 하시고 있네.’슬비와 이재는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서로 필요한 걸 주고받기로 한 결혼.슬비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부탁까지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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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지범은 친동생이었다.슬비도 동생이 좋은 학교에 다니고 더 많은 기회를 얻기를 바랐다.“알았어.”하지만 슬비의 목소리는 작았다.“방법을 찾아볼게.”[그래, 그래야지.]슬비가 결국 받아들이자 장여진의 목소리는 바로 가벼워졌다.[엄마는 네가 알아서 잘할 줄 알았어. 지범이 세인트폴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나중에 잘되면 제일 먼저 누나한테 고마워할 거야.]슬비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럼 밥 먹는데 방해 안 할게.]장여진은 만족한 채 전화를 끊었다.통화 종료음이 짧게 이어졌다.슬비는 핸드폰을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핸드폰을 가방에 넣은 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무슨 일 있어?”이재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슬비가 고개를 들자 짙고 깊은 눈과 바로 마주쳤다.“아무것도 아니에요.”슬비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엄마 전화였어요. 집안 일 때문에요.”이재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슬비 앞에 놓인 수프를 바라봤다.“식었네. 새 걸로 바꿔 달라고 할까?”“괜찮아요. 이대로 먹을게요.”슬비는 고개를 숙여 한 숟갈 떠먹었다. 이미 미지근해진 수프는 입안에서 밋밋하게 느껴졌다.두어 입 더 먹고 숟가락을 내려놨다. 식욕이 완전히 사라졌다.이재는 슬비의 얼굴을 잠깐 바라봤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슬비는 정신이 다른 데 가 있어 호텔의 대표 메뉴라는 트러플 수프가 무슨 맛인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머릿속에는 장여진의 말만 계속 맴돌았다.이재가 말 한마디만 해 주면 끝날 일이라는 말.‘말 한마디... 그 한마디를 부탁할 자신조차 없은데...’슬비는 이재가 자신에게 잘해 준다는 건 알고 있었다.하지만 둘은 어디까지나 계약으로 맺어진 부부였다.이재의 친절도 슬비가 ‘원지민’이라는 전제 위에 존재했다.실제로는 아니었다.슬비는 진짜 지민이 아니었다. 대신 결혼식에 들어온 가짜였다.정체가 드러난다면 가장 먼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사람도 이재일지 몰랐다.그 생각이 떠오르자 가슴이 답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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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슬비가 이해하지 못한 듯 바라봤다.“무슨 뜻이에요?”이재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거기는 평범한 학생이 공부만 하러 들어가는 곳이 아니야.”“다니는 아이들 뒤에는 호강시에서 손꼽히는 집안들이 있어. 지범이 그 안에 들어가는 게 정말 좋은 일일지는 아무도 몰라.”슬비는 바로 말뜻을 알아들었다.그곳은 단순한 학교가 아니었다.하나의 계층이 모인 공간이었다.지범이 그 안에 들어가면 그 학생들 사이에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반대로 철저하게 밀려날 수도 있었다.장여진과 원국한은 두 번째 결과를 견디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지범이랑 먼저 이야기해 볼게요. 본인이 원하면 그때 부탁드릴게요.”“그래.”이재가 부드럽게 대답했다.“차 타. 회사까지 데려다줄게.”...그 시각 원씨 저택.장여진은 전화를 끊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던 원국한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슬비가 해 보겠대.”원국한은 미간을 좁혔다.“아까 전화할 때 너무 조심성이 없었어. 계속 슬비라고 부르다가 하 서방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입에 익어서 그랬지.”장여진은 원국한 옆으로 붙어 앉으면서 팔짱을 끼었다.원국한은 입술을 다물었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생각할수록 지민이 문제야. 돌아오기만 해 봐. 이번에는 정말 가만 안 둬.”“여보, 왜 그래?”장여진은 원국한의 팔을 살짝 흔들었다.“지민이도 아직 철이 없잖아. 사실 도망간 마음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야. 하 서방 상태가 안 좋다는 소문은 당신도 들었잖아.”“액막이 결혼까지 시킨 걸 보면 오래 못 버틸 거라고 생각했겠지. 당신은 정말 지민이 젊은 나이에 혼자 남는 걸 보고 싶어?”원국한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다.“내가 전에 하 서방을 직접 봤을 때는 멀쩡해 보이던데.”“억지로 버티는 거겠지.”장여진은 확신에 차 있었다.“며칠 전에 슬비한테 돌려서 물어봤는데 두 사람 아직 부부 관계도 없대.”원국한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슬비만 불쌍하게 됐네.”장여진이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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