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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당신이 아니었다면 못 버텼을 싸움

흐린 새벽빛이 도시에 천천히 번져들 무렵이었다. 깊은 밤의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창가에는 희미한 물안개처럼 얇고 미세한 회색빛이 스며들었고, 유리는 가만히 침대에 앉은 채 오랜 시간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들지 못한 밤이었다. 몸은 쉬고 있었지만 마음은 한순간도 쉬지 못한 채, 끝없는 질문과 감정의 미로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먼 차량 소음, 간헐적인 새벽 뉴스의 목소리, 그리고 이따금 아파트 복도에서 울리는 엘리베이터의 짧은 기계음. 모든 것이 너무나 일상적인데, 그 일상 너머로부터 밀려오는 불안은 도리어 비현실처럼 그녀를 압도하고 있었다.유리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따뜻하게 데운 이불 위에 엎드린 채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며칠째 반복되는 이 두통,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감정의 흔적들.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 피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무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이우의 손길, 그의 시선, 그가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 준 모든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사랑을 강요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보내온 시선과 손길 속엔 명확한 마음이 담겨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하지만…’유리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이불 속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차디찬 현실이 그녀의 손끝을 다시 얼어붙게 했다. 이우가 누구인지, 어떤 가문에서 왔는지, 그리고 그 아버지 인국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다. 마치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유진의 마지막 눈빛이 그녀의 심장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우를 보면 숨이 막히도록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의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웃게 되었고, 그의 손끝 하나에 마음이 흔들리고, 그의 말 한마디에 긴장이 풀리곤 했다.그런 자신이, 한심했다. 동시에,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늦은 아침, 따스한 햇살이 거실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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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그날의 대화, 되돌릴 수 없는 고백

늦은 밤의 공기는 말수가 적었다.차가운 바람이 지하철 출입구 근처를 스치고 지나갈 때,사람들의 걸음은 바쁘지만 서로를 보지 않았고, 모두가 무언가를 향해 걷고 있었지만정작 어디로 가는지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 시간.유리는 그 한복판에 조용히 서 있었다.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고, 긴 코트 자락이 허공을 가르듯 미세하게 펄럭였다.손은 두 주머니 안에 감춰져 있었고,가슴 깊은 곳에서 느릿하게 올라오는 긴장이 목구멍 아래 어디쯤을 조용히 조이고 있었다.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낯익지 않은 얼굴, 그러나 사진으로만 보아온 실루엣.강도훈은 짧은 눈인사를 건넨 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근처의 작은 공원이었을까.가로등이 간헐적으로 불을 비추는 벤치에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사람의 그림자가 적은 그 공간에, 두 인물의 기척만이 조용히 눌어붙어 있었다.“당신이 왜 날 찾아왔는지… 대충은 짐작하고 있습니다.”강도훈의 첫 마디는 피하지도, 그렇다고 맞서지도 않는 묘한 중립의 톤이었다. 무책임할 수도 있고, 혹은 책임을 감당할 각오일 수도 있는 애매한 거리.“유진 언니와 마지막으로 통화했던 사람이 당신이었다는 것, 알고 있어요.”유리의 말은 담담했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침잠한 울림이 있었다.그 울림은 한때 언니를 사랑했을지도 모를 이 남자를 조용히 베어내는 날 선 물결 같았다.강도훈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그리고 천천히 고백처럼 말하기 시작했다.“그날… 난 그녀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하지만, 그 무너짐의 원인이 내가 될 줄은… 몰랐어요.”그 말의 끝에는 자신조차 끝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감돌고 있었다.“그녀가… 임신한 걸 알게 됐을 때,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그녀는 말하지 않았고, 난… 묻지 않았어요.”유리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그녀의 눈동자는 어두운 밤 안에서도 또렷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왜요. 그렇게 사랑했다면, 왜 묻지 않았죠?”“그게,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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