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설야팔부 (雪夜八部): Chapter 141 - Chapter 150

275 Chapters

제141화 — 네 번째 침

"올라가겠습니다."운설이 말했다. 등 뒤의 숨들이 일제히 멎는 것이 들렸다."단 — 곁자리의 값은 제가 정합니다.""값을 네가 정한다?""어른은 딸을 원하신다 했지요." 그녀는 얼음 둑의 발치로 걸어가며 말했다. "한데 어른이 원하는 것은 딸이 아니라 — 여덟 살의 겨울입니다. 그 겨울에서 못 나온 건 따님이 아니라 어른이시고요. 그러니 곁자리에 앉기 전에, 의녀로서 먼저 하나 여쭙겠습니다."그녀는 둑을 올려다보았다."침 세 번을 맞으셨지요. 열여덟 해 동안, 제 침을. 네 번째를 — 지금 놓아 드리러 올라갑니다. 여덟에 멎은 자리에요. 그 침이 듣지 않으면, 곁자리든 저울이든 어른 뜻대로 하십시오. 한데 듣거든—""듣거든?""어른이 제 값을 치르십시오. 숨구멍은 어른 손으로 뚫고 — 어머니를 놓아주시고 — 그리고 살아서, 지워진 이름을 도로 받으십시오. 법 앞에서요."골짜기가 조용해졌다. 사람을 산 채로 흠 없이 원해 온 자가, 산 채로 흠 없이 저를 받겠다는 자를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둑의 발치로 걸어가는 그녀를, 그가 소매 한 번 잡는 것으로 배웅했다. 잡은 손은 말 대신 제 장갑을 벗겨 그녀의 손에 끼웠다. 얼음을 짚고 오를 손이 시리지 않도록 — 지금 그가 보탤 수 있는 전부였다.얼음 둑을 오르는 길은 대월이 냈다. 얼음이 계단으로 접히며 그녀의 발밑에 하나씩 놓였다. 제 발로 아가리에 드는 자를 위한, 정중한 아가리였다.오르며 그녀는 딱 한 번 아래를 보았다. 반 보 뒤에 서겠다던 사람이 둑의 발치까지 와 서 있었다. 올라오지는 않았다. 올라오지 않는 것이 그가 치르는 값이었다. 얼음 계단 하나 사이의 거리에서, 심장 뛰는 자리가 그녀의 등을 받치고 있었다.둑 위는 바람의 세상이었다.며칠 치 봄물이 등 뒤에서 검푸르게 차 있었다. 물의 낯이 이상하게 고요해서 그 고요가 더 무서웠다. 어머니가 세 걸음 밖에 서 있었다. 야윈 낯이 딸을 보며 아주 조금 웃었다. 오지 말라는 웃음도, 잘 왔다는 웃음도 아닌 — 네 고름을 존중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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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화 — 둑이 무너질 때

임자가 흔들리면 얼음이 흔들린다. 골짜기의 모두가 그 법을 한꺼번에 배웠다.심법으로 세운 둑은 심법의 임자와 한 몸 — 그 셈이 지금 골짜기 전체의 목숨줄 위에서 실증되고 있었다. 대월의 가슴에서 난 금이 둑으로 옮겨 갔다. 스무 길 얼음 벽의 한가운데를, 검은 금 하나가 번개 모양으로 타고 내려갔다."어른! 숨을 고르십시오!"운설이 소리쳤다. 노인은 제 가슴을 움켜쥔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열여덟 해 만에 울음을 그치려는 안의 물과, 그치게 두지 않으려는 임자가 한 몸 안에서 싸웠다. 그 싸움의 진동이 고스란히 둑을 탔다."막아야 — " 노인의 숨이 조각났다. "물이 — 한 번에 —"둑의 금에서 첫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화살 같은 물줄기가 골짜기 아래로 꽂히고, 금은 두 갈래 세 갈래로 새끼를 쳤다. 며칠 치 봄물이 제 감옥의 벽이 약해진 것을 알아챈 것이다. 갇힌 물은 영리하고 집요했다. 금이란 금을 다 찾아 몸을 밀어 넣었다."어머니!""알고 있다."어머니는 이미 움직인 뒤였다. 흰머리의 여인이 둑의 금 위에 손을 얹었다. 열여덟 해 치 닻의 손. 물소리 듣는 귀로 궁에서 둘째가던 손이 — 낡은 손이 — 얼음의 비명을 듣기 시작했다."설야야. 어미가 얼음을 듣는다. 너는 물을 들어라. 도련님은—" 어머니의 눈이 무너진 노인에게 갔다. "도련님은 당신 안의 것을 들으세요. 열여덟 해 만에 처음으로 — 도망치지 말고."아래에서는 아래의 판이 돌았다. 사백과 우르와 기수들이 하류 쪽 벼랑길로 사람들을 물렸고, 모용 가주의 이백이 물목마다 흩어져 목청으로 물길을 알렸다. 간수문과 한겸은 벼랑 위에서 그 모든 것을 종이에 받아 적었다. 훗날 법정이 열리면 — 열게 하면 — 이 골짜기의 반 시진이 통째로 증거가 될 것이었다. 젊은 감찰의 붓이 떨리면서도 멎지 않았다.세 사람의 물이 각자의 자리에 들었다.운설은 갇힌 봄물에게 실개천을 흘렸다. 겨루지 않았다. 네가 크다. 안다. 한데 한 번에 나가면 너는 세상을 지우고 — 지운 것을 물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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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화 — 닻의 값

어머니를 얼음 위에 눕히고, 운설은 의녀가 되었다.울음은 나중이었다. 우는 법은 배웠으나 지금은 그 법의 차례가 아니었다. 감정의 문을 하나씩 닫으며, 그녀는 손부터 움직였다. 곁의 혈비가 제 겉옷을 벗어 어머니의 몸 밑에 깔았다. 얼음의 냉기라도 한 겹 막으려는, 딸이 할 수 있는 제일 작은 일부터.바람은 선우현이 막았다. 그는 어머니의 머리맡 쪽에 등을 두고 서서 제 몸으로 바람벽이 되었다.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다만 서 있는 자리가 정확해서, 의녀의 손등에 닿는 바람이 반으로 줄었다.진맥. 눈꺼풀. 숨의 결. 손은 배운 대로 움직이는데, 배운 것들이 하나씩 고개를 저었다. 맥은 실낱이었다. 물소리를 듣는 귀로 들으니 더 참혹했다. 어머니의 강은 — 바닥이 보였다. 열여덟 해 동안 한 사람의 폭주를 누르고, 방금 반 시진 동안 며칠 치 봄물을 달랜 강이, 마른 여울처럼 잦아들고 있었다.아래에서는 물이 여전히 크게 흘렀다. 숨구멍 여남은 개로 나뉜 봄물이 밤새 흐를 소리. 세상은 살았다. 세상을 살린 값이 지금 얼음 위에 누워 있었다."물을 나눠 드리겠습니다."운설이 제 손목을 걷었다. 실개천을 흘리는 법의 역방향 — 제 강을 어머니의 강에 잇는 것. 해 본 적 없는 수였지만 지금 셈할 계제가 아니었다."안 된다."어머니의 손이 딸의 손목을 잡았다. 실낱같은 맥의 임자답지 않게, 단단한 손이었다."물은 — 그렇게 잇는 게 아니다. 이으면 네 강까지 같이 마른다. 어미가 열여덟 해 그 셈을 안 해 봤겠느냐.""그럼 무슨 수로—""수는 없다." 어머니가 웃었다. 코끝의 붉은 것을 닦지도 않고. "낡는 것에는 수가 없어. 그저 값이 있을 뿐이지. 어미는 값을 다 치렀다. 열여덟 해 치를 — 방금 아주 좋은 자리에 다."좋은 자리. 만 명의 숨과, 하류의 마을들과, 두 딸이 보는 앞. 값을 치를 자리로 그보다 나은 데가 없다는 말을, 어머니는 그렇게 했다."놓아주는 것도 물의 일이라 했지."어머니의 눈이 두 딸을 차례로 짚었다."한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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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화 — 낯 없는 등

산을 내려가는 길에서, 어머니는 혈비의 등에 업혔다. 언니가 아무에게도 그 등을 내주지 않았다. 열여덟 해 전 저를 업고 눈을 건넌 등이 있었듯, 이번에는 저의 등이 그 빚을 갚을 차례라는 듯이.붉은 달의 주인이 어머니를 업고 얼음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내려가는 것을, 골짜기 아래의 모두가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만군의 병졸들까지도. 물을 세운 여자와, 강을 처음 흘린 여자와, 그 둘을 낳은 여인이 어떤 하루를 치렀는지 — 말은 벌써 진중에 다 돌아 있었다.야영의 밤, 어머니는 화톳불 곁에서 얕게 잠들었다. 잠든 낯이 골짜기에서보다 편안해 보이는 것이 위로인지 불안인지, 딸들은 판단을 미뤘다. 맥은 실낱인 채로 버텼다. 낡은 것은 수가 없다지만, 낡은 것이 버티는 데는 까닭이 있는 법이었다. 펴 놓은 달무리 수가 그 곁에 있었다.운설은 어머니 곁에서 침으로 밤을 났다. 실낱의 맥을 붙드는 것은 힘이 아니라 정성이었다. 반 시진마다 혈을 옮겨 짚고, 어머니의 강에 실개천을 대지 않는 선에서 — 이으면 같이 마른다던 그 금을 지키는 선에서 — 물가의 온기만 곁에 두었다. 선우현이 그 곁에서 화롯불을 지켰다.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의 불을 지켰다.새벽녘, 혈을 옮겨 짚는 그녀의 손이 곱아 더디어지자 그가 말없이 그 손을 가져다 제 목덜미에 대었다. 사람의 몸에서 제일 더운 자리였다. 손이 녹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보면 길어질 참이라서.혈비는 잠들지 않았다. 언니는 화톳불 건너의 간수문을 오래 보다가, 이윽고 물었다."영감. 하나 물어도 되나.""물어라.""열여덟 해 전 — 그 아침에." 언니의 목소리가 낮았다. "벽장에서 나온 열두 살을, 눈 속에서 이틀을 업고 걸은 등이 있다. 낯을 안 보여 준 등이. 업힌 것은 기억나는데 낯이 없어. 평생 그 등을 찾다가 — 요즘 자꾸, 걸음 하나가 눈에 밟힌다."늙은 당주는 식은 차를 오래 들여다보았다."지팡이 없이 걷는, 꼿꼿한, 늙은 걸음." 혈비가 말을 이었다. "영감. 그 등이 — 영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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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화 — 이름을 돌려주는 법

만군 앞에 대월이 선 것은 사흘 뒤였다.얼음 둑은 그 사흘 동안 노인의 손으로 다 허물어졌다. 봄물은 큰 강이 되어 얌전히 남으로 흘렀고, 하류의 마을들은 젖은 발등만으로 그 며칠을 넘겼다. 물막이 부역을 하던 만군의 병졸들은 밤마다 강가에 홀로 앉은 노인을 구경했다. 세상을 지우려던 자가 세상을 도로 꿰매는 것을.무대는 여울 초입의 그 언덕이었다. 종이의 상이 다시 차려지고, 이번에는 그 곁에 사람이 섰다."명을 내린 것은 나다."대월의 목소리는 만군의 끝줄까지 갔다."침략설을 지은 것도, 열두 가문에 갈대 종이를 띄운 것도, 물길과 봉화를 판 것도 — 나다. 명부에서 긁어낸 이름의 임자가 나고, 수결의 획이 내 획이다. 형을 벤 것도, 형의 나라를 지운 것도, 십팔 년 뒤 너희 만 명을 물로 지우려던 것도 — 나다."자백은 길지 않았다. 죄가 커서 말이 짧았다.만군은 조용히 들었다. 사흘 전만 해도 이 언덕을 베러 온 만 개의 창이, 이제 한 노인의 자백을 만 개의 귀로 받고 있었다. 서기들의 붓이 바빴다. 이 자백이 남으로 내려가면 열두 줄의 시대가 끝난다. 영웅담이 도살 장부가 되고, 도살 장부가 재판 기록이 되는 데 — 열여덟 해와 물 한 골짜기가 든 셈이었다.간수문이 그 곁에서 법의 절차를 밟았다. 실각한 당주에게는 판결할 권한이 없었다. 한데 이 언덕에는 맹의 법이 미치지 않았고, 삭월의 법은 임자가 있었다.혈비가 앞으로 나섰다."삭월의 법에 제일 무거운 벌은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붉은 달의 주인이 — 삭월의 마지막 왕녀가 — 만군과 유민들 앞에서 말했다."한데 그 벌은 십팔 년 전에 이미 틀렸다. 이름을 지웠더니 지워진 자가 세상을 지우려 했지. 그러니 나는 반대로 한다." 언니는 품에서 찬 달의 패를 꺼내 들었다. "이름을 돌려준다. 죄와 함께. 지워진 채 죄만 남는 것이 아니라 — 이름 밑에 죄가 적히도록. 사람들이 두고두고 그 이름을 부르며 그 죄를 기억하도록."언니가 노인을 향해 물었다."이름을 대라. 형이 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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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화 — 귀로

궁으로 돌아가는 길은 열흘을 잡았다. 서두를 까닭이 하나도 없는 길은 다들 처음이었다.이틀이면 닿을 길이었다. 한데 어머니의 몸이 하루 두 시진 넘는 이동을 받지 못했고, 아무도 그 이상을 청하지 않았다. 열흘의 귀로는 그래서 이상한 시간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죄인이 이름을 돌려받고, 낡은 닻이 실려 가는 행렬이 — 소풍처럼 느리게 북쪽 봄을 건넜다.어머니는 수레에 누워 하늘을 보다가, 이따금 딸들을 불러 시시한 것을 물었다."저 새 이름이 뭐냐.""직박구리입니다.""남쪽에도 있느냐.""있습니다.""그럼 됐다."무엇이 됐다는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열여덟 해를 새 한 마리 마음대로 못 보고 산 사람의 셈은, 묻는 것이 아니었다.간수문과 한겸은 사흘째 갈림길에서 남으로 꺾었다. 종이 뭉치와 함께. 작별은 짧았다. 늙은 법은 젊은 법의 등을 한 번 두드렸고, 젊은 법은 서툰 절을 올렸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남쪽에서 해야 할 일이 산이었다. 왜곡보다 먼저 진실을 앉히는 일. "겨울이 오기 전에 소식을 올리겠습니다." 한겸은 그 말을 남기고 말을 몰았다.휘월은 행렬의 맨 뒤를 걸었다. 결박은 없었다. 말에서 내려 걷겠다고 한 것은 본인이었다. 이름을 돌려받은 죄인은 하루 백 리를 걷던 다리로 하루 십 리를 느리게 걸으며, 길가의 물웅덩이마다 걸음을 멈췄다. 봄물이 고인 웅덩이에 하늘이 비치는 것을, 노인은 처음 보는 것처럼 보곤 했다.사수가 그 곁을 지켰다. 손등의 상처가 아무는 동안 여자의 조롱기도 함께 아물어서, 요즘은 말수가 사냥꾼 언니를 닮아 갔다. 사백은 그 둘을 멀찍이서 지켰다. 세 사람의 거리는 열흘 내내 조금씩 줄었는데, 누구도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남궁완은 수레 곁에서 어머니의 말동무가 되는 날이 많았다. 세가의 영애와 삭월의 왕비는 이상하게 죽이 맞았다. 문갑과 반짇고리 이야기, 격과 법도 이야기, 그리고 이따금 — 두 사람이 같이 운설 쪽을 보며 웃는 일이 있어서, 운설은 그 웃음이 제일 무서웠다.진눈의 기침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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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화 — 두 개의 남쪽

궁의 봄은 완연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봄은 소문 두 개를 동시에 받았다.남쪽에서 종이가 두 갈래로 달리고 있었다. 하나는 한겸의 종이 — 얼음여울의 기록, 휘월의 자백, 만군 서기들의 증언. 하나는 격문 두 번째 판 — 북의 요녀가 물로 만군을 협박해 돌려세웠다는, 진실이 닿기 전에 먼저 달리는 왜곡."소문이 진실보다 발이 빨라요." 남궁완이 연통들을 갈래로 나누며 말했다. "한데 진실은 발이 느린 대신 숨이 길죠. 반년을 보세요. 만 명의 입이 집집으로 흩어져서 제 눈으로 본 것을 말하기 시작하면 — 격문 따위가 못 당해요."궁 안의 시간은 종이의 시간과 다르게 흘렀다.어머니는 안채에 들었다. 열여덟 해 만의 제 방이었다. 묵할멈이 그 방을 열여덟 해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쓸고 닦아 온 것을, 어머니는 문지방에서 한눈에 알아보았다. 나전 빗이 제자리에 있었다. 은방울 한 쌍이 제자리에 있었다. 시중과 왕비는 그 방에서 한나절을 나오지 않았고, 문밖으로는 손짓말이 오가는 기척만 — 소리 없는 대화의 기척만 — 이따금 흘러나왔다.흑요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부터 했다. 마마를 못 알아뵙고 산 세월을. 어머니는 노파를 일으키며 딱 한마디를 했다."자네가 궁을 지켰으니 내가 돌아올 데가 있었네."운설의 약방에는 다시 환자들이 들었다. 진눈의 폐, 더운돌의 무릎, 겨우내 미뤄 둔 궁 사람들의 잔병들. 언 손을 데워 주던 백로진의 밤들이 돌아온 것 같은 날들이었다. 다만 이제 그 손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이 그녀를 의원이라고도, 마님이라고도, 아씨라고도 제각각으로 불렀고 — 그녀는 그 제각각이 다 좋았다. 이름이 늘어나는 것이 세상이 넓어지는 일이라는 걸, 열여덟 해 걸려 배웠다.휘월의 거처는 궁 밖, 무덤 벌판이 보이는 산신당 곁 곳간으로 정해졌다. 운백천이 쓰던 그 곳간이었다. 속인 자가 속은 자의 자리를 물려받는 셈을 두고, 부수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이부자리 한 채를 더 들였다.죄인은 낮마다 벌판에 올랐다. 스물일곱 봉분의 잔돌을 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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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8화 — 열여덟 해 밀린 곡

장례의 아침은 맑았다. 곡하기 좋은 날이란 없지만, 열여덟 해를 기다린 곡이라면 맑은 날이 나았다.왕의 유해는 대전에서 무덤 벌판으로 옮겨졌다. 스물일곱 봉분의 위, 벌판이 끝나고 산이 시작되는 자리에 왕의 무덤이 마련되었다. 백성들이 묻힌 벌판을 발치에 두고, 산의 등을 베개 삼는 자리. 자리를 고른 것은 부수 노인이었다. 왕은 백성을 굽어보는 자리가 아니라 — 백성에게 발을 맡기는 자리에 눕는 법이라고.곡은 삭월의 옛 법대로 했다.만장도 곡비도 없이, 산 사람들이 저마다 제가 아는 왕의 이야기 하나씩을 무덤에 놓고 가는 것. 더운돌 영감은 젊은 왕이 온천에 몰래 들었다가 저한테 등짝을 맞은 이야기를 놓았다. 흑요는 왕이 국사를 보다 조는 버릇을 놓았다. 부수는 아무 말 없이 잔돌 하나를 놓았고, 묵할멈은 손짓말로 긴 이야기 하나를 놓았는데 여리가 옮기다 반쯤에서 울어 버려 뒷말은 하늘만 들었다.남궁완도 이야기를 놓았다. 세가의 영애는 제 가문의 창이 이 벌판에 진 빚을 다시 한 번 적어 놓고, 왕을 한 번도 뵌 적 없는 처지로 놓을 이야기가 없어 — 조부의 이야기를 놓았다. 달만 보면 울던 늙은이가 평생 지우지 못한 죄의 임자가 여기 누웠으니, 이제 두 늙은이 다 편해지시라고.선우현은 검객의 예로 곡했다. 검을 뽑아 무덤 앞에 반 호흡 세웠다가 도로 넣는 것. 베어야 했던 것을 못 베고 늦은 검이 올리는, 가장 무거운 예였다.혈비는 다섯 살의 검 이야기를 놓았다. 검이 너를 문 게 아니라 네가 검을 문 것이라던.운설은 놓을 이야기가 없었다.낳아 준 아버지에 대해 그녀가 아는 것은 전부 남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야기 대신 다른 것을 놓았다. 초승달 패. 죽어 가는 노인이 마지막 힘으로 쥐여 주던, 이야기가 시작되던 밤의 그 쇠붙이를 — 이야기의 임자에게 돌려놓았다."처음 뵙습니다, 아버지." 그것이 그녀의 곡이었다. "따님이 물을 배웠습니다."어머니는 맨 마지막이었다.부축 없이 무덤 앞까지 걸어간 어머니는, 이야기를 놓는 대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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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화 — 혼례 준비

혼례를 앞둔 궁은 열여덟 해 만에 잔치라는 것을 준비했다. 잔치 준비가 서툰 사람들이라 소동이 잦았고, 소동마다 웃음이 났다.준비는 온 궁의 일이 되었다. 타간은 잔치 국의 간을 두고 밤잠을 설쳤고, 바토는 함에 넣을 빗과 가락지를 두드렸고, 더운돌 영감은 혼례 전날 신부가 몸을 담글 탕을 벌써부터 쓸고 닦았다. 여리와 연지는 신부의 들러리 자리를 두고 하루 세 번 다투고 네 번 화해했다.수를 놓는 손은 둘이 되었다.어머니의 족두리 곁에서, 남궁완이 신부의 활옷 소매를 맡은 것이다. 세가의 수는 격이 있었고, 격이 있는 만큼 — 처음 며칠은 바늘이 자주 멎었다."이상하지 않아요?" 어느 밤 여인이 수를 놓으며 운설에게 말했다. "오 년을 정혼자로 살았던 사람의 혼례 옷을 — 파혼당한 여자가 놓고 있는 게.""이상합니다." 운설은 숨기지 않았다."그렇죠. 한데 더 이상한 건—" 부채 대신 바늘을 쥔 손이 고르게 나아갔다. "놓다 보니 알겠어요. 나는 그 사람을 잃은 게 아니라 — 격을 잃었던 거예요. 남궁완의 정혼자라는 격을. 사람은," 바늘이 실을 물고 지나갔다. "사람은 여기 있네요. 벗의 자리에. 격보다 오래가는 자리에.""아씨.""수나 마저 놓죠. 소매가 두 짝이라."혈비의 혼례 선물은 말 없이 왔다. 어느 아침 운설의 처소 앞에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물때를 다 벗겨 내고 새로 벼린 — 왕의 검이었다. 딸에게 물려주마 하셨다던 그 검을, 언니는 아우의 혼례에 내놓았다. 곁에 쪽지 한 장. 검은 신부 쪽 혼수다. 물리진 못한다.운설은 그 검을 차는 대신 벽에 모셨다. 검을 쓸 줄 모르는 신부였다. 한데 벽의 검이 방을 지키는 무게는 알 것 같았다.한겸에게서는 파발이 왔다. 남쪽의 종이 전쟁은 길겠지만 지지 않겠다는 소식과, 혼례 날에 못 가는 것을 백 번 사죄하는 문장과 — 봉서 하나. 간수문의 것이었다. 늙은 법은 혼서(婚書)의 격식을 손수 적어 보냈다. 가문 없는 신랑의 혼서에 증인 자리가 비니, 실각한 당주의 이름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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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화 — 보름의 혼례

혼례는 눈마당에서 치러졌다. 눈 없는 계절이라 궁 사람들은 흰 천을 깔았다. 삭월 신부는 눈 위를 걸어 시집가는 법이라 했다.어머니가 수놓은 족두리를 쓰고, 운설은 운백천의 손을 잡아 흰 길을 걸었다. 유민과 기수들 사이로 삭월의 축원이 낮게 흘렀다. 눈처럼 오래, 눈처럼 고요히.길 끝의 선우현은 검은 예복에 빈 허리였다. 검신은 혼례에 검을 차지 않았다.맞절과 표주박 술이 오갔다. 마지막 법식은 서로의 온전한 이름을 모두 앞에서 부르는 것이었다."설야."그가 불렀다. 위급이 고르던 이름이, 혼례상 앞에서 처음으로 위급 없이 불렸다."현."그녀가 불렀다. 김 서린 온천의 밤에 처음 넘었던 이름이, 백일하에 불렸다.우르가 울면서 웃었고, 마당의 잔치는 해까지 붙들었다. 혈비는 취하지 않는 사람이 취한 척했고, 어머니는 오늘만 반 술을 남기지 않았다. 멀리 산기슭에서는 초대받지 않은 곡간의 노인이 잔치 불빛을 보고 돌아갔다.해 질 무렵, 어머니가 딸의 족두리를 바로 씌워 주며 속삭였다."오늘로 어미 소원은 다 이뤘다." 웃는 낯이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사는 날은 — 전부 덤이다. 덤은 좋은 것이다. 셈이 없거든."밤이 왔다.신방의 등잔 앞에서, 운설은 약조한 답례를 꺼냈다."드릴 것이 비밀 하나입니다."그녀는 그의 손을 끌어 제 왼가슴에 얹었다. 심장 뛰는 자리. 그 밑에서 낮게 흐르는 강의 자리."제 강이 언제 멎는지 — 말씀드린 적이 없지요."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더운 물의 밤부터였다는 것. 당신의 곁에서 순해지고, 당신의 품에서 조용해지고, 입술이 닿으면 — 세상에서 그 순간만은 — 완전히 멎는다는 것. 맹세를 깰까 봐 열 달을 삼킨 비밀이라는 것.그는 오래 말이 없었다."그럼 그 밤들마다," 이윽고 그가 물었다.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있었다. "그대 안이 그리 조용했던 거요. 나 때문에.""예.""그걸 이제 말하오.""이제는 맹세가 없으니까요." 운설이 웃었다. "달아날 일도, 다가올 일도 없이 — 그냥 곁에 있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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