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비가 그치고, 세상이 처음으로 볕에 말랐다.무한까지 이레 길을 앞두고, 행렬은 큰 장이 서는 고을을 지나게 되었다. 서른 기가 통째로 장을 지날 수는 없었다. 사백이 다섯씩 나누어 앞뒤로 흩어졌고, 운설과 선우현은 사백과 함께 늙은 약초 행상 셋으로 꾸며 장에 들었다. 정보를 줍기 위해서였다. 무한이 가까울수록 대회 소식이 짙어질 것이었다.장은 봄을 만난 사람들로 붐볐다. 겨우내 문을 닫았던 좌판들이 다 나와, 마른 나물과 첫 봄나물, 언 강에서 갓 잡은 물고기를 벌여 놓았다. 아이들이 진창을 튀기며 뛰고, 엿장수 가위 소리가 났다. 운설은 그 흔한 소란이 낯설고 사무쳤다. 열여덟 해를 이런 장터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이런 데를 얼굴을 반쯤 숙이고 지나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두건 밑에서 그녀는 사람들의 성한 웃음을 훔쳐보았다.장터 한복판, 국밥집 앞에 사람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이야기꾼이었다. 멍석 위에 앉아 부채로 장단을 치며, 요즘 강호에서 제일 뜨거운 이야기를 팔고 있었다. 운설은 그 목소리를 어디서 들은 것 같았다. 사람 틈으로 다가가 보고, 걸음이 멎었다.왕철이었다. 겨울 산에서 갈비가 부러졌던 사냥꾼 삼 형제의 맏이. 그때 그녀가 감아 준 가슴으로, 이제 사냥 대신 이야기를 지고 사는 모양이었다."— 하여! 삭월의 요녀가 맨손을 들자," 왕철이 부채를 활짝 폈다. "날아오던 화살 열 대가 허공에 딱 멈추었다 이 말입니다. 그 여자가 손가락을 까딱하니 화살들이 도로 돌아가 쏜 놈들 이마에 콱콱!"구경꾼들이 오, 하고 탄성을 뱉었다. 운설은 제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는 것이 이토록 다행일 수 없었다. 화살 한 대를 손으로 받은 것이, 이야기 속에서는 열 대가 되어 되쏘아지고 있었다."그 요녀 얼굴은 봤답디까?" 누가 물었다."봤고말고! 눈에서 시퍼런 불이 나온답니다. 키는 장정 둘 키에, 이빨이 늑대 이빨이라!"선우현이 그녀 곁에서 아주 낮게 말했다. "장정 둘 키라는군.""…….늑대 이빨이랍니다." 운설이 받았다.두 사람은
싸움은 짧았고, 진창이 반을 이겼다.어둠에서 일어선 자들은 스물 남짓이었다. 관병도 무림맹의 흰 무복도 아니었다. 낯을 검게 칠하고 표식 없는 가죽옷을 입은 자들 — 이름도 소속도 지워 낸 손들이었다. 사백이 낮게 뱉었다. "청부다." 값을 받고 사람을 지우는 자들. 붙잡아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그래서 부린 자가 가장 안전한 칼.빗속의 싸움에서는 잘 넘어지는 자가 이겼다.진창에 익숙한 것은 닷새를 이 길로 온 서른 기 쪽이었다. 낯 검은 자들은 마른 땅에서 익힌 걸음으로 왔다가 진창에 발이 잡혔다. 사백의 화살이 어둠 속에서 정확히 시위 소리를 좇았고, 기수들은 미끄러지는 적을 등지지 않게 반원을 유지했다. 선우현은 — 검을 받지 못한 채였으나 — 바토가 벼려 준 짧은 칼 하나로 제 몫의 어둠을 지켰다. 뽑기 전에 끝난다던 그 검법이, 짧은 칼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빗속이라 피가 보이지 않았다. 냄새로 왔다. 쇠 냄새가 빗물에 씻겨 옅어졌다가,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훅 끼쳤다. 의녀의 코는 그 냄새로 마당의 부상자 수를 셌다. 아군 셋, 적은 그보다 많았다. 죽은 자가 있는지는 냄새가 아직 말해 주지 않았다.운설은 싸우지 않았다.강은 뒤척였으나, 그녀는 물을 부수는 길로 풀지 않았다. 대신 넘어진 자들 곁으로 갔다. 아군의 것이든 적의 것이든, 진창에 쓰러져 피 흘리는 몸으로. 이것이 언니가 말한 두 길 중 그녀가 고른 길이었다. 세상이 부수는 길만 가르쳐도, 그녀는 고치는 길을 걷기로 했다.싸움이 잦아든 자리에, 낯 검은 자 하나가 옆구리를 붙들고 진창에 주저앉아 있었다. 젊었다. 칼을 놓친 손이 상처를 누르는데, 누르는 법을 몰라 피가 손가락 사이로 샜다. 운설은 그 곁에 무릎을 꿇었다."손 떼세요. 그렇게 누르면 더 샙니다.""……날 살려서 뭐 하게." 젊은 청부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당신들을 태워 죽이러 왔어.""압니다." 운설은 그의 손을 밀어내고 상처를 살폈다. 깊었으나 창자는 상하지 않았다. 살릴 수 있는 상처였다
비는 사흘을 왔다.진창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관도를 버리고, 사백은 산자락을 끼고 도는 옛 역로를 택했다. 감시가 사라진 뒤로 사백은 큰길을 믿지 않았다. 큰길이 열려 있다는 것은 큰길 어딘가에 덫이 놓였다는 뜻이라고, 스무 해 사냥꾼의 눈은 그렇게 읽었다.닷새 동안 서른 기는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번진 넷째 이름이 야영지마다 따라왔다. 누구도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나, 침묵이 오히려 이름을 키웠다. 불침번을 서로 바꿔 주던 손들이 이제 제 몫만 지켰고, 겸상하던 이들이 등을 나눠 앉았다. 혈비는 그 균열을 보면서도 막지 않았다. 억지로 봉하면 곪는다는 것을, 사람 다루기도 상처 다루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낯이었다.운설은 그 사이에서 이상한 자리에 놓였다. 붉은 달의 핏줄이면서, 중원에서 온 자였다. 선우가의 정인을 곁에 둔 자였다. 그녀를 향한 눈에도 두 겹이 있었다 — 마님의 아우님을 보는 눈과, 못 미더운 것을 보는 눈. 진눈을 고치고 노파의 허리를 편 손이 그 두 겹을 반쯤 지워 주었으나, 반쯤은 남았다.닷새째 저녁, 비에 젖은 행렬 앞에 역참 하나가 나타났다.버려진 역참이었다. 지붕은 성했으나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고, 마구간은 비어 있었다. 관에서 역을 폐한 지 여러 해 된 자리였다. 그러나 비를 피할 지붕이 있고, 마른 장작이 처마 밑에 쌓여 있었다. 서른 명이 몸을 말리기에 이만한 데가 없었다.너무 이만했다."들지 마십시오." 운설이 말했다.말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서른 개의 눈이 그녀를 보았다. 그녀 자신도 왜 그 말을 했는지 반 박자 늦게 알았다."장작입니다." 그녀가 처마 밑을 가리켰다. "폐한 지 여러 해 된 역참에, 장작만 마른 것으로 새로 쌓여 있습니다. 비가 사흘을 왔는데 젖지도 않았습니다. 누가 최근에, 우리가 이 길로 들 것을 알고 쌓아 둔 겁니다."운설이 처음 그 말을 뱉었을 때, 몇몇의 눈에 스친 것은 경계였다. 중원에서 온 계집이 하필 이 역참에 들지 말라 한다 — 그 자체가 수상하다는 눈.
남행 닷새째, 겨울이 항복했다.아침부터 하늘이 낮게 내려앉더니, 눈 대신 비가 왔다. 겨우내 눈만 맞던 어깨에 빗방울이 듣는 감촉은 낯설고, 낯선 만큼 확실했다. 계절이 넘어간 것이다. 길은 진창이 되었고, 행렬의 속도는 반으로 줄었고, 말들은 발목까지 빠지는 흙길에 예민해졌다.비는 운설의 안에서도 무언가를 건드렸다. 말 위에서 그녀는 몇 번이고 강물 소리에 귀를 대었다. 물이 들떠 있었다. 넘치려는 들뜸과 달랐다. 겨우내 얼었던 세상의 물들이 일제히 깨어나는 계절에, 몸속의 강도 제 계절을 아는 것처럼 수런거렸다. 해빙. 그 말을 그녀는 혀에 올려 보았다. 얼음이 갈라지는 철. 덮인 것들이 드러나는 철.그리고 감시가 붙었다.북관을 나선 이튿날부터였다. 동쪽 능선에 둘, 서쪽 구릉에 둘. 맹의 경기(輕騎)가 하루 종일 같은 간격으로 따라왔다. 다가오지도 물러나지도 않는, 낯익은 간격이었다. 잡으려는 그물의 간격과 달랐다. 배웅하는 그물이었다. 간수문의 서신이 말한 '험하게 오실 것 없지'가 저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신경 쓰지 마라." 사백이 말했다. "우리가 무한으로 가는 것을 저들이 확인하고, 저들이 확인하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고. 피차 셈이 끝난 동행이다."셈이 끝난 동행은 그러나 목덜미를 무겁게 했다. 진창과 비와 감시에 눌린 행렬의 어깨가 닷새 만에 눈에 띄게 처졌다.저녁 야영지에서, 선우현이 운설을 진창 마당으로 불러냈다."배울 것이 있소.""검입니까.""넘어지는 법이오."운설은 비 듣는 하늘을 한 번 보고 그를 보았다. 그는 진지했다."무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오. 내가 곁에 있을 수 있을지도. 검을 가르치기엔 날이 모자라고, 검은 그대에게 어울리지도 않소. 허나 넘어지는 법은 하루면 배우오." 그는 진창 위에 헌 멍석을 폈다. "칼 든 자들 틈에서 사람이 다치는 것은 벨 때보다 넘어질 때가 많소. 밀려서, 밟혀서, 제 몸에 제가 걸려서. 잘 넘어지는 자는 잘 일어나오."수업은 진창 한가운데서, 우스운 모양으로 시작
남행 사흘째 저녁, 하늘에서 궁의 소식이 내려왔다.남행의 사흘은 세상이 바뀌는 사흘이었다. 눈이 무릎에서 발목으로, 발목에서 길가의 그늘로 물러났다. 언 강들이 낮이면 우는 소리를 냈다. 겨우내 흰 것만 보던 눈에 검은 흙과 마른 풀빛이 들어오는 것이, 운설은 낯설고 어지러웠다. 북으로 도망치던 겨울에는 세상이 얼어붙는 속도로 그녀의 처지가 얼어붙었는데, 남으로 내려가는 지금은 녹는 세상이 마냥 반갑지가 않았다. 덮여 있던 것들이 드러나는 계절이 오고 있었고, 드러나서 좋을 것이 그녀의 길 위에는 많지 않았다.야영지 위를 두 바퀴 돌고 사백의 팔뚝에 내려앉은 전서구는 한 마리였다. 떠날 때 흑요가 한 쌍을 올리겠다 했으니, 한 마리는 오는 길 어딘가에서 매나 화살에 졌다는 뜻이었다. 살아 온 놈도 성하지 못했다. 꽁지깃이 반 넘게 빠지고, 다리에 감긴 서신통은 물에 한 번 잠겼다 마른 자국이 있었다.불가에서 통이 열렸다. 젖었다 마른 종이는 부서질 듯 얇아져 있었고, 먹은 반나마 번져 있었다. 사백이 등불을 바짝 대고 한 자씩 건져 읽었다."마르간의 물목……이다. 창고 대조를 마쳤다고." 사백의 손가락이 번진 자국을 짚어 내려갔다. "화뢰에 든 것들 — 유황 노끈, 부싯깃, 밀랍 종이. 셋 다 궁의 창고 물목과…… 결이 같다. 두 달 전 겨울 물목에서 유황 노끈 두 발과 부싯깃 한 근이 빈다. 장부에는 축난 것으로 적혔으나, 마르간은 제 장부에 축이 없다고."불가가 조용해졌다. 설한협의 눈사태가 서른 기의 머리 위로 되돌아와 앉았다. 눈시렁을 내려앉힌 화뢰가, 맹의 것도 낭인의 것도 아니라 — 궁의 창고에서 나갔다는 말이었다."창고 열쇠는." 혈비가 물었다. 목소리가 얼음장 같았다."넷이 쥡니다." 사백이 종이의 마지막 줄을 짚었다. "마르간이 적기를 — 흑요 님, 마르간 본인, 타간, 그리고……"손가락이 멎었다. 넷째 이름 위로 물자국이 지나가 있었다. 먹이 번져 획들이 서로 스며든 자리는, 두 자인지 석 자인지조차 가려지지 않았다."그리고
북관은 소문대로 열려 있었다.행렬은 관문에서 반 마장 떨어진 숲 그늘에 멈추었고, 사백이 기수 넷을 데리고 먼저 들어갔다. 한 식경 뒤에 돌아온 사백의 낯은, 함정을 확인한 낯도 함정이 아님을 확인한 낯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것을 본 낯이었다."비었습니다. 수문장도, 병졸도, 개 한 마리도." 사백이 보고했다. "화덕의 재가 이틀 전 것입니다. 이틀 전에 전원이 물러났습니다. 한데 — 문루에 서신이 있습니다. 못으로 박아 놓았습니다.""누구 앞으로." 혈비가 물었다."셋 앞으로. 마님과, 수장이었던 자와, 그리고 — 여인, 이라 적혀 있습니다."한낮인데도 관문 그늘은 이가 시리게 추웠다. 행렬은 관문을 통과했다. 서른 기의 말굽 소리가 빈 관문에 크게 울렸다. 지키는 자 없는 문을 지나는 일이 지키는 자와 싸워 지나는 일보다 목덜미가 서늘하다는 것을, 운설은 이날 배웠다. 열어 준 자의 셈을 모르는 채로 문지방을 넘는 것이었으므로.관문 안쪽은 살던 모양 그대로 비어 있었다. 병졸들의 침상에 개어 놓은 이불, 반쯤 두다 만 장기판, 벽에 걸린 채 마르는 빨래. 도망친 자리와 달랐다. 명을 받고 물러난 자리였다. 질서 있게 비워진 집이 어질러진 집보다 많은 것을 말했다. 맹은 이 문을 지킬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지키지 않기로 정한 것이다.우르가 장기판을 들여다보고 혀를 찼다. "차(車)가 죽기 직전이구먼. 두다 만 놈 속 좀 탔겠어." 케테는 빈 초소마다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긋고 다녔다. 액을 밟고 지나가지 않으려는 부적 긋기라고, 곁의 기수가 웃었다. 웃음소리가 빈 관문에 어색하게 울렸다가 금세 잦아들었다.문루 아래서 혈비가 서신을 뜯었다. 종이는 상등품이었고 글씨는 늙고 단정했다. 혈비는 소리 내어 읽었다. 감출 것 없다는 듯이, 서른 기가 다 듣도록."북방의 손님들께. 길을 열어 두었네. 어차피 오실 걸음, 험하게 오실 것 없지. 늙은이가 마중을 두 번 나가기엔 다리가 아프니, 폐막일에 무한에서 뵙세." 혈비의 목소리가 한 대목에서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