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실 봉인이 찍힌 붉은 종이가 물그릇 위로 펼쳐졌다.황실 판관은 월하 조각을 모두 수도 약방으로 옮겨 보호하겠다고 했다. 아래에는 조각 주인 여덟의 이름 대신 병인 여덟이라고만 적혀 있었다.혈비의 신하도 푸른 문권을 내놓았다. 삭월 왕가가 조각을 맡아 북방 성지에 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으나 수결 자리는 맨 아래 작았다. 가장 위에는 혈비의 왕인이 크게 찍힐 자리부터 비워져 있었다.“둘 다 보호를 말하는군.” 여리가 붉은 종이를 읽었다.“둘 다 우리한테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안 물었고.” 진눈이 피리를 무릎에 놓았다.판관이 말했다.“병인이 위험을 판단할 수 없으니 나라가 대신해야 하오.”누리가 소매를 걷었다. 살 안에 남은 푸른 쇳조각이 빛났다.“이것 때문에 제 정신까지 없어졌습니까?”“그 힘이 다시 날뛰면 마을 하나가 잠긴다.”“그럼 마을 사람과 함께 정하죠. 수도 얼굴도 모르는 어른 혼자 말고.”마르간은 붉은 종이 한 귀퉁이를 접었다. 조각을 가지고 서쪽으로 돌아가겠다는 자기 조건이 어디에도 적히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황실 약방에 가면 내 그릇을 언제 돌려주나?”판관은 병이 나을 때까지라고 답했다.“누가 나았다고 정하지?”“의원이 정한다.”“그 의원이 당신이라면 나는 평생 병인이겠군.”흑요는 삭월 문권을 들었다. 자기 이름 옆에 왕실 칼이라고 덧붙인 획을 손톱으로 긁었다.“내가 다시 혈비의 칼이 되겠다고 말한 적 있습니까?”혈비는 그 글을 처음 보았다. 신하를 나무라기 전에 흑요에게 답했다.“없다.”“그런데도 왕인은 찍으려 했지요.”혈비의 손이 빈 인장 자리에서 내려왔다. 황실과 다른 문권을 내놓았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것은 옳으리라 믿은 순간이 드러났다.혈비는 자기 신하가 내민 왕인을 받지 않았다. 푸른 문권에 적힌 이름을 처음부터 읽었다. 더운돌의 아내와 누이는 남편 이름 뒤에 딸린 식솔로 묶여 있었다. 묵할멈 이름은 글을 못 읽는 여인이라 줄여 적혀 있었다.“누가 썼느냐?”기록관이
회장 한복판에는 의자가 셋 놓였다.첫째에는 피해자, 둘째에는 죄를 함께 지은 자, 셋째에는 증거라 쓴 나무패가 걸렸다. 명주는 어느 자리에도 앉지 않았다.“사람 하나를 셋으로 찢어 놓고 어디에 앉을지 고르라니 편리하네요.”황실에서 온 판관은 고윤이 딸의 몸을 강제로 쓴 때만 물으려 했다. 그렇게 적으면 황실은 미친 의원 하나에게 속은 셈이 되었다. 삭월 신하는 명주가 흑요 조각을 삼킨 뒤 일만 묻고 싶어 했다. 왕가가 만든 그릇의 세월은 지울 수 있었다.운설이 빈 의자 세 개를 한 줄로 붙였다.“한 자리에 앉혀요. 물을 때마다 어느 때인지 함께 적고.”판관이 붓을 세웠다.“고명주는 열세 살에 월하수를 받아들였는가?”“받아들인 적 없습니다. 잠든 사이 아버지가 넣었습니다.”“스무 살에는 흑요의 조각을 삼켰는가?”“제가 청했습니다.”“그 힘으로 두 관졸의 팔을 부러뜨렸는가?”“한 사람은 제가 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정무가 제 몸을 움직였습니다.”목발을 짚은 관졸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왔다. 전날 명주에게 값을 적게 한 사내였다.“내 팔은 이 여자가 밀어 부러졌소. 하지만 그 전에 내가 이 여자 목에 쇠고리를 걸었소. 판관 나리는 그건 왜 묻지 않습니까?”판관이 눈을 찌푸렸다.“명에 따른 집행이었다.”“그 명을 내린 쪽은 자리에 없고, 맞선 사람만 셋 중 하나를 고릅니까?”관졸은 피해자 의자에 목발을 기대고, 죄를 함께 지은 자 의자에 자기 이름패를 놓았다. 명주를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같은 날 한 사람이 피해를 입히고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자리로 보여 주었다.정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내 아우가 사람을 해쳤다고?”“그날 저를 물에 처넣으려는 손을 막았습니다. 허락은 묻지 않았어요.”명주의 가슴 안에서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무가 다시 두드렸다. 두 숨째에 왼손이 떨렸으나 명주는 손가락을 펴지 않았다.“오늘은 제 입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판관이 비웃었다.“그럼 죽은 자 말을
노분의 손바닥이 명주의 뺨을 때렸다.쉰 해를 밭에서 보낸 손이었다. 소리는 컸으나 힘은 끝까지 들어가지 못했다. 명주는 피하지도, 맞은 자리를 감싸지도 않았다.백련제 바깥 빈 곡식창에는 세 집안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서련의 아우는 누이 이름이 적힌 처방을 들고 왔다. 정무의 형은 스무 해 전에 만든 빈 위패를 등짐에 지고 왔다. 노분은 흑수촌에서 사흘을 걸어와 오라비 물이 든 항아리 앞에 섰다.“이 안에 정말 우리 오라비가 있느냐?”“지금은 물과 기억 몇 조각뿐입니다.” 명주가 답했다.“네 가슴에는?”“없습니다.”“없어진 뒤에야 불렀구나.”두 번째 손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명주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노분은 때리지 못했다. 손등으로 명주의 뺨을 거칠게 쓸고 지나가더니 물항아리를 품에 안았다.“오라비야.”항아리 속 물이 한 번 출렁였다. 노분은 자리에 주저앉아 스무 해 동안 미뤄 둔 욕부터 퍼부었다. 왜 집을 나갔느냐, 왜 글 한 줄 없었느냐, 네가 좋아하던 무를 몇 독이나 썩혔는지 아느냐. 울음은 그 뒤에야 나왔다.서련의 아우 서청은 명주에게 절했다. 누이가 마지막 처방을 남기도록 몸을 내주어 고맙다고 했다. 명주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제가 내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넣었습니다.”“그래도 마지막에는 보내 주었다면서요.”“붙들고 싶었어요.”“붙들지 않았지요.”“그것만으로 저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마세요.”서청은 처방을 펴서 첫 줄과 마지막 줄을 나란히 짚었다. 첫 줄은 서련이 어릴 때부터 쓰던 둥근 획이었다. 마지막 약재 이름은 명주의 반듯한 글씨였다.“어디까지가 누이 뜻이오?”“저도 다 모릅니다.”“그럼 이걸 서련의 처방이라고 불러도 됩니까?”명주는 쉽게 답하지 않았다. 운설이 대신 설명하려 하자 서청이 손을 들었다. 누이가 머문 사람의 입으로 듣고 싶다고 했다.“고른 순서는 서련 님이 보여 줬고, 달인 것은 저와 운설 의원입니다. 검은 씨를 넣을지는 제가 정했습니다. 다음 사람이 쓴다면 세 이름을 모두 적어
붉은 열매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운설은 그것을 곧장 약솥에 넣지 않았다. 칼끝으로 껍질을 가르자 속살 대신 가는 흰 실이 나왔다. 한쪽은 서련의 그릇 조각에 붙고, 다른 쪽은 명주의 손목을 향해 흔들렸다.“맥을 만드는 약이군.” 고윤이 멀리서 말했다.명주가 그를 보았다.“또 먼저 이름 붙이셨네요.”고윤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말을 고쳤다.“그렇게 쓰려 했던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성공한 적은 없었다.”운설은 흰 실을 명주 손목에 대지 않고 물그릇에 띄웠다. 실은 새 맥을 만들려 달려들지 않았다. 물 위에서 서련이 남긴 처방 순서대로 당귀, 겨울쑥, 검은 씨앗 곁을 돌아다녔다. 끊어진 자리끼리 꿰매는 길을 보여 주었다.“몸이 먼저 고르게 해야 해요.”명주는 자기 손으로 약재를 하나씩 넣었다. 운설이 불의 세기만 알려 주고, 고윤은 세 걸음 밖에서 기억나는 잘못을 말했다. 너무 달이면 실이 녹았고, 덜 달이면 독이 남았다. 명주는 두 번 약을 버렸다. 세 번째 솥에서만 붉은 열매가 천천히 벌어졌다.담우는 곁에 누워 손목을 내놓았다. 그의 하루 한 번 맥은 이미 지나갔으나 명주가 불안할 때마다 손가락을 얹을 자리가 되어 주었다.“뛰지 않는데 왜 자꾸 만져요?”“안 뛰어도 여기 있잖아.”그가 웃자 명주의 굳은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노칠의 관은 북서 수로 앞에 놓였다. 연화가 고향으로 보낼 수레를 마련했고, 수레꾼들은 누구 명도 받지 않고 물항아리를 새 짚으로 감쌌다. 관이 문턱을 넘을 때 명주의 가슴에서 차가운 맥 하나가 완전히 빠져나갔다.그녀는 관 뒤를 쫓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바닥에 이마를 댔다.“노분의 오라비 노칠.”이름을 세 번 부르자 관 안에서 나무 두드리는 소리가 한 번 났다. 수레바퀴가 북서쪽 진흙길로 굴러갔다.정무는 약조대로 남았다. 명주가 약을 마시기 전 가슴 안에서 두 번 두드리고, 빌린 맥을 한 치 뒤로 물렸다. 서련이 있던 자리와 노칠이 떠난 자리는 비어 있었다. 누구도 그 빈곳에 새 이름을 밀어
흑요의 칼은 고윤의 목 한 치 앞에서 멈췄다.제방이 터진 혼란 속에서도 칼날에는 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고윤은 쇠고랑 찬 손을 무릎 위에 놓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호위도 약전도 없는 죄수의 목이었다.“지금이면 아무도 막지 못해.” 고윤이 말했다.“막히길 바라는 얼굴이군.”“끝나길 바라는 얼굴이다.”흑요의 칼끝이 살을 눌렀다. 가는 피 한 줄이 목울대를 타고 흘렀다. 한겸은 뒤늦게 칼을 뽑았으나 운설이 손을 들었다. 말리러 달려들면 흑요의 선택까지 빼앗게 될 터였다.흑요는 고윤 때문에 이름을 잃은 사람들을 세었다. 검은 고리 안에서 죽은 여섯, 조각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강에 든 둘, 살았으나 자기 몸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들. 그 가운데에는 그녀가 이름조차 묻지 않고 베어 준 사람도 있었다.“네가 죽으면 노칠은 누가 흑수촌까지 옮겼는지 말하지 못한다.”“장부에 있을 것이다.”“장부에는 길이 없다.”흑요가 칼을 더 눌렀다.“열여덟 이름이 어느 몸을 거쳤는지도 네 입에 있다. 그 입을 살려 두면 또 누군가를 속일 테고, 베면 죽은 자를 다시 잃는다.”고윤은 눈을 감지 않았다.“어느 쪽이든 네가 정해라.”그 말에 흑요의 눈빛이 바뀌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선택을 넘겨 자기 끝을 남의 손에 맡기는 버릇이었다.“내가 왜 네 마지막 의원이 되어야 하지?”칼이 움직였다.목 대신 고윤의 관복 깃이 갈라졌다. 월하 약전의 금패를 묶은 붉은 끈이 잘려 돌바닥에 떨어졌다. 흑요는 칼끝으로 금패를 물속에 밀어 넣었다.“죽을 때까지 기다려라. 이름을 전부 뱉고, 네 발로 그 길을 다시 걷고, 네가 살았다는 것이 벌이 된 뒤에.”고윤의 맨목에서 피가 한 방울 더 흘렀다. 흑요는 소매를 찢어 상처를 누르라 던졌다. 살리기 위한 손길조차 베듯 거칠었다.“오해하지 마라. 피가 모자라 말 못 한다고 핑계 댈까 봐서다.”혈비가 두 사람 사이로 다가왔다. 흑요를 벌하라는 신하들의 눈이 멀리서 따라왔다. 죄수에게 칼을 댄 자를 그대로 두면 왕법이 무너진다는
담우의 맥을 확인할 틈도 없이 동쪽 제방이 터졌다.바닥이 기울고 셋째 관이 벽으로 미끄러졌다. 명주가 물그릇을 감싸 안은 순간, 고윤이 딸의 허리를 낚아채 높은 돌계단으로 밀었다. 검은 물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한겸이 사람들을 북문으로 빼냈다. 연화와 수레꾼들은 노칠의 관을 밧줄로 묶었다. 운설은 담우를 부축하면서도 방금 뛴 맥의 자리를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살아 있어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게 몸을 눕혀요.”담우가 명주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제 발로 일어났다. 물 건너편에서 고윤이 무너진 창고 쪽을 보고 있었다. 거짓 벽 안, 두 관이 있던 자리 아래로 낡은 장부함 하나가 드러났다.“아버지!”고윤은 딸부터 보았다. 전에는 장부에 적힌 이름을 먼저 셌을 눈이었다. 그가 물살을 건너와 명주의 어깨를 붙잡았다.“계단 위로 가라.”“같이 가요.”“저것은 내가 가져와야 한다.”“또 저를 두고요?”고윤의 손이 떨렸다. 장부함에는 월하 그릇으로 만든 사람들의 처음 이름과 옮겨진 몸, 죽은 날이 적혀 있었다. 물에 잠기면 죄가 사라지는 대신 사람도 다시 번호가 되었다.그는 명주를 더 높은 계단으로 올렸다. 이번에는 강제로 밀지 않고 그녀 두 발이 돌 위에 놓이는 것을 확인했다.“네가 먼저다.”말을 마친 고윤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명주도 따라 내려가려 했다. 가슴 안에서 정무가 두 번 두드렸다. 몸을 빌리겠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풀린 밧줄을 허리에 묶고 다른 끝을 물로 던졌다.“아버지! 잡아요!”고윤은 장부함에 닿았으나 무너진 들보가 발목을 눌렀다. 손에 잡힌 것은 함의 쇠고리 하나뿐이었다. 그는 끌어당기다가 잠시 멈췄다. 장부를 놓으면 몸은 빠져나올 수 있었다.명주는 밧줄을 제 몸에 한 번 더 감았다. 담우가 기어와 뒤에서 함께 잡았다. 하루 한 번밖에 뛰지 않는 그의 맥이 목까지 거칠게 올라왔다.“놓으라고 해.” 담우가 말했다. “장부든 목숨이든, 이번에는 네가 정해.”명주는 물속 고윤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