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Bab 91 - Bab 100

116 Bab

91. 뜨거운 열망으로

마레즈나의 겨울은 유독 길었다.창밖의 정원은 르세인이 하사한 백색 조각상들로 채워져 있었지만 눈 덮인 그 풍경은 전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엘라엔은 르세인이 보낸 건강 관리 지침에 따라 배정된 은제 식기 앞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영양학적으로 완벽하게 계산된 소량의 가금류 요리와 따뜻한 차가 놓였다.“엘라엔, 전하께서는 제국의 차기 안주인이 가장 우아한 균형을 유지하길 원하시지. 조금도 남기지 말거라.”이사벨라는 엘라엔의 식탁 옆에 서서 그녀의 식사 과정을 하나하나 검사했다. 그녀의 눈은 엄격한 관리인의 것이었다.엘라엔은 맛이 느껴지지도 않는 고기 조각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사사로운 모든 것들을 통제 받는 상황 자체가 고역이었으나 엘라엔은 무너지지 않았다. 여기서 무너지는 것은 르세인에게 틈을 보이는 것이었고, 그건 곧 테르시아에 있는 그에게 닿는 길이 영원히 끊김을 의미했으니까.식사가 끝난 뒤, 엘라엔은 다시 거울 앞에 서야 했다. 오늘 도착한 르세인의 선물은 제국 북부의 만년설을 닮은 백색 실크 드레스였다. 드레스의 허리선은 이전보다 더 좁게 재단되었고 가슴께에는 르세인의 눈동자를 닮은 에메랄드 보석이 차갑게 박혔다.“전하께서는 네가 이 옷을 입고 내일 있을 황궁 연회에 참석하길 바라셔. 남부의 부패를 척결하신 전하의 공적을 기리는 자리이니, 넌 전하의 가장 눈부신 훈장이 되어야지.”이사벨라가 코르셋 끈을 자비 없이 잡아당기자, 엘라엔의 잇새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숨이 막혀오는 고통 속에서 엘라엔은 거울 너머의 자신을 보았다.루비빛 눈동자는 깊은 수렁에 빠진 듯 위태로웠음에도 그 이면에는 르세인이 결코 읽어낼 수 없는 뜨거운 불꽃이 일렁였다.그날 밤, 이사벨라와 예법 선생의 감시가 잦아든 깊은 새벽. 엘라엔은 침대 밑에 숨겨두었던 검은 망토를 꺼내 몸을 감쌌다. 르세인이 보낸 근위대원들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마레즈나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알게 된 하수구 근처의 작은 구멍은 아직 그들의 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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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첫 번째 일격

엘라엔이 돌아간 뒤, 카시안은 책상 위에 펼쳐진 거대한 제국의 지도를 내려다보았다.지도에는 황후 로잘린이 폰테 후작가를 멸문시킨 뒤, 르세인이 장악한 남부 소금 길과 곡창지대의 보급로가 붉은 선으로 강고하게 그어져 있었다.자신의 논리가 제국의 혈맥을 완벽히 지배했다고 믿으며, 엘라엔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상수를 자신의 곁에 박제하기 위한 다음 수순을 밟고 있는 르세인.카시안은 지도 위, 르세인이 완벽이라 명명한 그 견고한 성벽 한가운데에 시커먼 돌을 툭, 놓았다.“르세인, 넌 모든 것을 숫자로 계산하지. 하지만 숫자는 결코 인간의 굶주림과 광기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해.”카시안의 눈동자에는 평소 엘라엔 앞에서 보여주던 나약하고 선량한 빛이 없었다. 오직 차갑게 가라앉은 명징함과 제국을 통째로 뒤흔들 파괴적인 지략만이 휘몰아쳤다.그는 곁에 서 있는 옌스에게 짧은 서신 뭉치를 건넸다. 제국의 귀족들과 대상단들의 은밀한 치부가 적힌 장부를.“르세인은 소금을 풀어 민심을 잡았다고 믿겠지. 하지만 그 소금이 평민들의 식탁에 오르기 전, 탐욕스러운 중간 관리자들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는 그 비논리적인 욕망까지는 통제하지 못했어.”“…….”“옌스, 이 기록들을 지금 즉시 황후의 정적인 황실 감찰관들에게 흘려라. 르세인의 완벽한 구휼책이 실상은 하급 관리들의 배를 불리는 부패의 온상이었다는 추문이 황궁에 번지게 하란 말이다.”카시안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위력적이었다. 이건 그가 준비한 첫 번째 일격이었다. 르세인이 세운 정의로운 질서를 내부에서부터 썩게 만들어, 그가 가장 신뢰하는 자신의 논리적 완벽함에 스스로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것.그는 다시 창가로 다가가 마레즈나 쪽을 바라보았다.“엘라엔, 조금만 기다려. 그가 자신이 세운 법도에 의해 난도질당하는 꼴을 보게 될 테니.”엘라엔이 가진 것과 쌍을 이루는 작은 나무 새를 만질 때 그의 눈빛에 아주 잠시 부드러운 연민이 스쳤지만 이내 서늘한 살의로 덮였다.르세인이 빛의 제단을 쌓는 동안, 카시안은 그
last updateTerakhir Diperbarui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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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논리적 완벽함의 치욕

르세인이 침전을 나서자, 회랑 끝에서 그를 기다리던 황후 로잘린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드레스에서 풍기는 독한 향이 솔레움 궁의 향을 단번에 지워버렸다.“황태자, 폐하께 조언을 구하러 간 것은 아니겠지? 폰테의 잔당들이 남긴 쓰레기를 치우는 데 자비는 필요 없습니다. 제국의 기강을 세우는 것은 오직 피의 숙청일 뿐이야.”로잘린의 눈동자에는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하게 뻗어져 나갔다.르세인은 로잘린의 그 뒤틀린 욕망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폐하, 폰테 일을 잊으셨습니까. 저는 더 효율적인 방식을 택할 겁니다.”로잘린을 뒤로하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르세인은 즉각 바델을 호출했다.“부패에 연루된 관리들을 전원 압송하라. 하지만 처형하지는 않겠다.”바델의 눈은 의아함으로 커졌고, 르세인의 입술은 완만한 호선을 그리며 열렸다. “그들의 전 재산을 몰수하여 남부의 소금 산지에 기부한다는 명목을 공표해. 그들을 죽이는 대신, 자신들이 가로챘던 소금을 직접 채취하는 강제 부역형에 처하도록. 단, 그들의 목에 황실의 자비를 훔친 개라는 낙인을 찍어 백성들 앞에 세워라.”이건 자비가 아니라 사형 선고보다 더 끔찍한 논리의 산물이었다.르세인은 펜을 들어 명단의 이름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죽음은 단 한 번의 고통으로 끝나지. 하지만 평생을 백성들의 돌팔매질 아래에서 소금을 캐며 살게 하는 것은 황실을 농락한 대가가 무엇인지 매 순간 증명하는 살아있는 교본이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택한 효율이고.”르세인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바델, 테르시아 사저의 감시를 두 배로 늘려라. 폰테의 잔당들이 혹시라도 그 유약한 분가 핏줄을 이용해 황실의 자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르세인은 카시안을 위험한 적이 아니라 그저 폰테의 잔당들이 이용하기 딱 좋은 나약한 도구로 규정하며 비웃었다.철저한 오만이었다. 황실의 정점에 선 그는 자신의 발치에서 조용히 독을 갈고 있는 뱀의 정체를 보지 못한 채, 제국의 기강을 잡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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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기묘한 전율

르세인은 엘라엔을 거칠게 이끌고 연회장을 가로질러 나갔다. 귀족들은 황태자의 기세에 길을 재빠르게 터주며 숨을 죽였다.르세인은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지도를 신경질적으로 헤집으며 바델에게 소리쳤다.“당장 기사단을 남부로 급파하라. 반항하는 자는 누구든 밭의 거름으로 써도 좋다.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면 오직 압도적인 공포만이 답이겠지.”르세인의 광기 어린 효율성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엘라엔은 자신의 드레스 주머니 속에 숨겨진 작은 나무 새를 꽉 쥐었다. 르세인이 분노할수록, 그녀의 마음속 지하실에는 카시안을 향한 연모와 승리의 열망이 루비처럼 붉게 타올랐다.집무실의 공기는 르세인이 내뱉는 가쁜 숨결마다 얼어붙는 듯했다.창밖으로는 연회장의 화려한 음악 소리가 여전히 떠돌았으나, 내부는 오직 지도를 긁어대는 르세인의 거친 펜 소리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르세인은 폰테 잔당들이 감히 자신의 효율을 비웃으며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꼈다.“영애, 보십시오. 내가 세운 이 완벽한 수치들이 저들의 광기 어린 횃불 하나에 일그러지는 꼴을.”르세인은 고개를 돌려 소파에 있는 엘라엔을 보았다. 그의 녹색 눈동자에는 평소의 고결함 대신 자신의 논리를 부정당한 자가 내뿜는 지독한 살의가 일렁였다.그는 다가와 엘라엔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가느다란 목에 걸린 에메랄드 펜던트가 그의 손등에 차갑게 부딪혔다. “남부로 갈 겁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논리가 통하지 않는 짐승들에게는 오직 압도적인 힘만이 유일한 언어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지. 그리고 영애, 당신도 나와 함께 갑니다.”르세인의 말에 적잖이 당황한 엘라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전하…. 저, 저는 몸이 좋지 않습니다. 그 여정을 견디기엔…”“약한 소리는 집어치우십시오. 그대는 나의 비이자, 내가 이룬 질서의 증인입니다. 내가 남부를 다시 내 발밑에 무릎 꿇리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깨닫게 될 겁니다.”“…….”“그대가 기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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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지독한 냉기 속에서

“전하…. 그들을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까. 그들도 제국의 백성들이 아닙니까.”엘라엔의 가냘픈 물음에 르세인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그는 엘라엔의 얼굴을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르세인의 숨결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향은 엘라엔의 감각을 지배하는 듯했다.“백성은 통치자의 논리 안에서 숨 쉴 때만 존재 가치를 가집니다. 그 궤도를 벗어난 순간, 그들은 제국의 기계를 망가뜨리는 녹슨 나사못일 뿐이죠.”“…….”“영애, 그대의 그 비논리적인 자비심이야말로 내가 도려내야 할 가장 큰 오점임을 잊지 마십시오.”르세인은 그녀를 밀쳐내듯 놓아주었다. 다시금 마차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엘라엔은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서리에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응시했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드레스 주머니 안, 나무 새를 꽉 쥐고 있었다.르세인이 강요하는 이 지독한 냉기 속에서 유일하게 체온을 나누어 주는 것은 카시안이 남긴 투박한 나뭇조각뿐이었다.*** 행렬이 남부와 중부의 경계인 협곡의 초입에 다다랐을 무렵, 마차가 급정거했다. 길목을 가로막은 거대한 낙석 때문이었다.근위대원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틈을 타, 르세인은 직접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마차 밖으로 나섰다.홀로 남겨진 마차 안에서 엘라엔이 가쁜 숨을 몰아쉬던 때였다. 마차 뒤편의 작은 환기창 사이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향이 섞인 바람이 훅 끼쳐 들어왔다.“영애님.”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르세인의 기사가 아닌, 테르시아에서 들었던 적 있는 낯설지 않은 사내의 음성이었다.엘라엔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환기창 쪽을 바라보았다. “경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협곡의 불길이 가장 높이 치솟는 밤, 영애님을 데려갈 사냥개들을 보낼 것입니다.”사내는 짧은 전언만을 남긴 채 그림자처럼 사라졌다.엘라엔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자연스레 떠올리며 숨을 들이켰다.‘기다려. 여름이 오기 전에 그 차가운 사파이어를 스스로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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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다음은 없어

엘라엔은 창살 틈새로 입술을 바짝 들이대고 르세인이 들으면 기절할 만큼 냉혹하고 예리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카시안에게 전해요. 르세인은 지금 협곡의 정면 돌파를 노리고 있지만 그건 기만술입니다. 그는 오늘 밤, 기사단 절반을 우회시켜 남부의 엘린 강 수문을 터뜨려 폭도들의 거점을 수장시키려 합니다.” 전령의 숨소리가 멎었다. 엘라엔은 르세인이 돌아올 시간을 계산하며 말을 이었다. “수문을 지키는 기사들은 르세인이 가장 신뢰하는 정예병들이지만, 그들은 사흘간의 행군으로 보급이 바닥나 있어요. 강 상류의 보급 기지를 치라고 하세요. 그곳만 무너뜨리면 르세인의 수공은 자멸의 늪이 될 테니까. 그리고….” “…….”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요. 르세인은 내 육체를 가둘 순 있어도, 머릿속 설계도까지는 뺏지 못했으니까.” 전령은 엘라엔의 차가운 통찰에 전율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엘라엔은 마차의 시트 위로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르세인이 결코 보지 못했던 승리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에게 카시안은 연모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지금의 그는 자신의 복수를 완성해 줄 가장 유능한 집행검이기도 했다. 그가 어떻게 이 거대한 판을 짜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너무 궁금했으나 그건 추후 그와 이야기를 해야 될 문제였다. 현재는 르세인을 막고 그가 승리하길 바라는 마음만이 엘라엔의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었다. 잠시 후, 르세인이 차가운 냉기를 몸에 잔뜩 묻히고서 마차 안으로 복귀했다. 그는 엘라엔이 식은땀을 흘리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그저 병약한 영애의 기력 저하라고 판단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영애의 안색이 더 나빠졌군. 고작 이 정도 추위와 긴장에 무너지다니. 나의 비가 되기 위해선 그 연약한 심장부터 강철로 갈아 끼워야 할 것 같습니다.” 르세인은 엘라엔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이 살짝 피어오른 그녀의 신체 반응을 보며 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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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논리를 기만할

르세인은 엘라엔의 어깨를 밀쳐내듯 놓아주었다. 엘라엔은 옆으로 엎어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드레스 안감 속 들어있던 나무 새가 살결을 찔렀지만 지금 그녀를 지배하는 것은 통증보다 더 깊은 좌절과 공포였다.카시안의 부대원들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 르세인의 오만함을 이용하려 했던 자신의 지략이 오히려 카시안의 팔다리를 잘라버린 꼴이 되었다.르세인은 다시 지도를 펼치며 다음 숙청 대상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는 패배를 모르는 포식자로서 다시금 완벽한 질서를 회복했고, 엘라엔은 그 차가운 금빛 사슬 안에서 날개가 꺾인 채 몸을 떨었다.남부의 밤은 타오르는 반란군의 거점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 엘라엔은 어둠 속에서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르세인의 논리는 이제 그녀의 영혼까지 옥죄기 시작했고, 카시안과의 안식은 피로 물든 협곡 저편으로 멀어져만 갔다.엘린 강의 수면은 승전의 횃불을 받아 핏빛으로 일렁였다.르세인의 본진은 축제와 같은 환호성에 휩싸였으나 그 중심에 선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은 채 일말의 흥분도 내비치지 않았다. 르세인은 사로잡힌 반란군 지도자들의 명단을 훑으며 그들의 신분과 배후 관계를 숫자로 치환해 나갔다.“황태자 전하, 보급 기지에 매복했던 적들 중 절반 이상이 테르시아의 용병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테르시아의 그 유약한 분가가 감히 이런 거사를 도모했을 리는 없고 아마도 폰테의 잔당들이 그곳을 은신처 삼아 용병을 고용한 듯합니다.”바델의 보고에 르세인은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마차가 세워진 어두운 숲 쪽을 향했다. “테르시아라…. 바델, 생포한 놈들 중 테르시아 출신들은 따로 분류하라. 그들의 목을 베어 테르시아 사저의 정문에 효수하되 황태자의 자비를 거절한 대가라는 문구를 적어 넣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마레즈나 근처를 기웃거리지 못하도록.”르세인은 잔을 들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이 카시안의 팔다리를 잘랐다고 믿으며, 이 패배로 인해 엘라엔이 의지하던 그 가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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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승리라는 오만을 틈타

같은 시각, 엘레니르 제국의 국경 너머.안개에 잠긴 카르노스 왕국의 폐허 속에서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그들의 가슴팍에는 르세인이 그토록 경멸하던 카르노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제국의 차기 태양이 너무 높이 떴군. 높을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지는 법이지.”카르노스의 원로이자 카시안에게 접근했던 사내가 서신을 태우며 굵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서신에는 카시안이 남부에서 겪은 패배와 르세인의 잔혹한 보복 소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에는 절망이 없었다. 그들은 카시안이 제국의 심장부에 박아 넣은 쐐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경이 제 몸을 태워 길을 열고 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이지. 제국의 남부 소금 길이 막혔으니 서부의 철광산 쪽을 흔들어라. 르세인이 남부의 불을 끄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제국의 무기를 만드는 그들의 팔다리를 잘라버리는 거다.”카르노스의 가신들은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그들에게 카시안은 거대한 엘레니르 제국 르세인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 카르노스가 공들여 제련한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르세인은 명단 작성을 마친 엘라엔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자신을 보게 했다.엘라엔의 눈동자는 눈물조차 말라버린 듯 황폐했다.르세인은 그 황폐함을 복종으로 해석하며 만족스러운 듯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이제 알겠습니까, 영애. 그대가 기댈 수 있는 강함은 오직 나뿐이라는 것을.”“알겠습니다, 전하. 전하의 논리는 언제나… 무결하시군요.”엘라엔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르세인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침상으로 향했다.승전의 전리품을 취하듯 거친 손길이었으나 엘라엔은 저항하지 않았다.르세인은 엘라엔을 안으면서도 그녀의 심장 소리가 여전히 불규칙하게 뛴다는 사실에 눈매를 좁혔다.“그럼, 좋은 꿈 꾸십시오, 영애.”“…….”르세인이 떠난 뒤, 엘라엔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군영 밖으로는 효수된 시체들의 비명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녀는 귀를 막고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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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압도적인 폭력

막사 안의 공기는 르세인의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로 진득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깥에서는 자객을 쫓는 기사들의 고함과 횃불의 흔들림이 막사 벽면에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르세인은 그 혼란을 비웃듯 의자에 정좌한 채 엘라엔을 바라보았다.상처 부위에서 배어 나온 붉은 피가 그의 은색 정복을 타고 흘러 바닥의 카펫을 적셨음에도 르세인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었다.엘라엔은 떨리는 손으로 르세인의 정복 단추를 풀어냈다.“영애, 그대의 하얀 손이 내 피로 붉게 물드는 것이 꽤나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엘라엔은 물에 적신 천을 들고 그의 상처 주위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천이 상처에 닿을 때마다 르세인의 근육이 경련하듯 움찔거렸지만, 그는 엘라엔의 얼굴을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이 화살은 카르노스의 것입니다. 그들은 기어코 내 영토를 더럽히고 있죠. 영애, 혹시 알고 있습니까? 테르시아의 그 유약한 것이 어떤 내통을 하는지 말입니다.”엘라엔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카시안 경은 그저… 그저….”“오늘 밤 테르시아 사저로 내 전령을 보낼 겁니다. 내가 입은 이 상처에 대한 책임을 묻는 대신, 그들에게 충성을 증명할 기회를 주어야겠어. 카시안이 직접 내 앞에 와서 이 화살을 쏜 놈들의 수급을 바치게 하십시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테르시아는 곧 제국의 지도에서 사라지게 될 테니까.”르세인의 명령은 잔혹한 덫이었다. 카시안에게 동족의 목을 베어 오라고 강요하거나, 아니면 정체를 드러내고 반역자로 죽으라는 뜻이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품 안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공포를 느꼈다. 르세인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에게 이 상처는 적을 완전히 솎아내기 위한 가장 확실한 명분일 뿐이었다.그때, 막사 밖에서 바델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황태자 전하! 카르노스의 암살단들이 서쪽 계곡을 통해 도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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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설계한 질서 위에서

남부의 지평선 위로 핏빛을 머금은 새벽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르세인은 부상당한 어깨에 흰 붕대를 감고 그 위로 황금 자수가 놓인 정복을 걸친 채 막사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안색은 밤샘 열기와 출혈로 인해 창백했지만 표정만큼은 비정했다.그런 그의 곁에는 밤새 잠 한숨 자지 못한 엘라엔이 서 있었다.그리고 곧 안개 너머로 흐릿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호위 기사도 없이, 오직 말 한 마리에 몸을 실은 채 천천히 다가오는 그는 카시안이었다.엘라엔은 숨을 들이켜며 손목을 꽉 쥐었다.카시안의 옷차림은 평소보다 더 초라했고, 안개에 젖은 머리카락은 힘없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르세인은 그 초라한 행색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카시안은 르세인의 기사들이 겨눈 칼날 사이를 지나, 르세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엘라엔을 보았다. 슬픔과 미안함, 그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 서린 그 푸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엘라엔은 심장이 조각나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테르시아의 카시안 폰 루카르디아.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카시안은 차가운 눈 바닥 위로 무릎을 꿇었다. 그의 고개가 르세인의 구두 끝을 향해 깊게 숙여졌다.엘레니르 제국의 혈통을 이어받은 그가 수많은 병사 앞에서 개처럼 엎드린 것이다.“카시안 경. 이른 아침부터 고생이 많군. 내 친히 자네의 목을 치려 했으나… 곁에 있는 영애가 자네의 유약함을 너무나 애처롭게 호소하더군.”르세인은 카시안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을 짐승을 어루만지듯 거칠게 헤집었다.“네가 정말 그 암살자들과 무관하다면 증명해 봐. 내 어깨를 쏜 자들이 숨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부 철광산의 비밀 지도를 직접 작성해 바치라는 말이다.”“…….”“만약 그 지도가 가짜라면, 네 목 대신 라안느 영애의 손가락 하나가 잘릴지도….”“전하!”엘라엔이 비명을 질렀으나 르세인은 엘라엔을 서늘하게 보며 눈빛만으로 제압했다. 카시안은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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