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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Chapter 111 - Chapter 120

177 Chapters

111. 논리가 무너지는 소리

그녀는 발작적으로 일어나 테라스 테이블 위에 놓인 크리스털 화병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챙그랑!날카로운 파편이 튀어 오르며 그녀의 목 부근을 스쳤으나 엘라엔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르세인이 입힌 무거운 진홍색 드레스를 거칠게 찢어발기기 시작했다.“이까짓 옷! 이까짓 사파이어! 다 가져가! 당신이 만든 이 완벽한 인형은 이제 죽었어!”목에 걸린 사파이어 목걸이를 억지로 잡아 뜯으려다 목덜미에 붉은 찰과상이 남았다. 그녀는 르세인의 멱살을 잡으려 달려들지만 르세인은 미동도 없이 엘라엔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엘라엔은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차라리 죽여줘. 당신 손으로 직접 날 부숴버리란 말이야! 더 이상 누군가의 도구로 이용당하며 말라가고 싶지 않아!”그녀는 다시 바닥으로 고꾸라져 카시안이 준 나무 새의 재를 손바닥으로 짓이겼다. 재 가루가 그녀의 하얀 손을 검게 더럽혔다. 그건 엘라엔의 무너진 자아 그 자체였다.엘라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엔 오직 타인들의 설계한 욕망의 잔해만이 어지러이 나뒹굴고 있었다.르세인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잿더미를 바라보는 엘라엔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래, 바로 그 표정입니다. 영애.”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평온했다.르세인은 그녀의 뺨에 묻은 재 가루를 엄지로 천천히 쓸어내며 가장 사랑스러운 연인을 보듯 속삭였다. “분노하고, 절망하고, 끝내 미쳐버리는 것. 그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결론이지.”르세인은 피식 웃으며 엘라엔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가장 잔인한 명령을 내뱉었다.“카시안은 지금 지하 감옥에 있어. 그가 당신을 향해 뱉었던 그 모든 진심이 카르노스의 어떤 전술이었는지… 직접 가서 확인해 봐. 그리고 그 사기극의 종지부를 당신의 손으로 직접 끝내는 거야.”르세인은 엘라엔의 손에 차갑고 날카로운 은제 단검을 쥐여주었다. 엘라엔은 단검의 서늘한 감촉에 몸을 떨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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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이 세상을 집어삼켜야 한다고

엘라엔은 르세인을 보며 생애 가장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엘라엔!”르세인의 단말마 같은 비명이 지하 감옥을 울렸다. 그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달려와 쓰러지는 엘라엔을 받아안았다. 진홍색 드레스 위로는 더 짙은 선혈이 배어 나왔다. 르세인의 하얀 장갑은 순식간에 붉게 젖어 들었다.“아니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내 계산에… 이런 건 없었어! 엘라엔! 눈 떠! 명령이다! 황태자의 명령이라고!”르세인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엘라엔의 선혈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제국의 모든 것을 통제하던 남자의 손이 단 한 여자의 생명조차 붙잡지 못해 절망하고 있었다.“당장 의관을 불러라! 당장!”르세인의 눈은 이미 이성을 잃고 뒤집혀 있었다. 그는 엘라엔의 차가워지는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며 벌벌 떨었고, 카시안 역시 사슬에 묶인 채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엘라엔은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르세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제국 최고의 포식자가, 자신의 발밑에서 무너져가는 장난감을 보며 자아를 잃어가는 광경….그건 그녀가 남은 생을 포기하고 바친 가장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복수였다.“…이제야… 당신을 이겼네….”엘라엔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르세인은 엘라엔을 품에 안고 실성한 듯 웃다가 다시 소리를 지르며 감옥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의 완벽했던 논리의 성벽은 엘라엔이 흘린 선혈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지독하게 달콤한 침향의 냄새였다. 그리고 곧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한 통증…….“하아…!”엘라엔은 그것이 자신이 찌른 단검의 흔적임을 깨닫는 순간,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그러나 그녀는 앉지 못했다. 가슴의 상처가 벌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누군가의 서늘한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억누르며 다시 침대 위로 눕혔기 때문이었다.이곳은 마레즈나가 아니었다. 르세인의 사적인 공간이자, 제국에서 가장 삼엄하고 적막한 황태자의 거처, 아르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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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보존과 수거

“영애님, 황태자 전하께서 당도하셨습니다.”하녀 마리의 목소리는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엘라엔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안색을 살폈다. 창백했던 뺨에는 이제 생기가 돌았고 루비빛 눈동자는 예전보다 훨씬 깊고 위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레즈나의 대접견실에는 라안느 공작 에드먼과 이사벨라가 유례없이 경직된 자세로 서 있었다. 자결을 시도했던 딸이 제국의 황태자비로 확정되어 돌아오는 이 기괴한 상황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보다 르세인이 풍기는 압도적인 살기에 눌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문이 열리고 르세인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평소의 집무복이 아닌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식 예복 차림이었다. 그런 르세인의 손에는 황금 인장이 찍힌 국혼 문서가 들려 있었다.“영애, 충분히 쉬었습니까.”르세인의 목소리는 감미로웠으나 그 속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제왕의 명령이 담겼다.그는 엘라엔의 앞에 서서 그녀의 손을 정중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에드먼이 보는 앞에서 그녀의 손가락에 라안느의 문양이 아닌,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반지를 끼웠다. “이 문서는 단순한 혼약서가 아닙니다. 이건 당신이 제국의 절반을 소유하며, 나의 모든 결정을 함께 집행할 유일한 동반자임을 선포하는 칙령이죠.”“하지만 황태자 전하…. 오늘 이렇게 급작스럽게……!”르세인은 고개만 살짝 돌려 말을 내뱉는 에드먼을 바라보았다. 그의 녹색 눈동자에는 일말의 당혹감도 없었다. 오히려 귀찮은 물건을 보는 듯한 건조함만이 감돌았다.“라안느 공작. 덕분에 영애는 제국의 그 어떤 추문에도 섞이지 않은 채, 오직 나만을 위한 완성품으로 보존되었습니다.”“황태자 전하…!”“이제 그 결과물을 수거해가는 것에 무슨 절차가 더 필요하겠습니까.”보존과 수거라니.엘라엔은 여전히 자신을 물건 취급하는 르세인의 단어 선택에 주먹을 쥐었으나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에르디엔 황궁의 은혜는 곧 구속이었고, 그의 자비는 곧 소유였다.“하지만 짐을 싸지도 못했습니다.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은 주셔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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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마지막 자유의 껍질

르세인이 낮게 웃었다. 즐거움보다는 흥미로움에 가까운 웃음이었다.그는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엘라엔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마레즈나의 그 어떤 장미보다 화려하고 치명적이었다.특히나 루비색의 눈동자는 어두운 마차 안에서도 기이한 빛을 내뿜었다.“내 질서라…. 마음에 드는 표현이군요.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영애. 자신의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 해서 당신의 의지대로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나의 궁에 들어온 모든 것은 나의 허락 없이는 그림자조차 경계를 넘지 못하니.”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크리스털 병을 열어 액체를 손등에 묻혔다. 그러자 르세인의 차가운 수목 향과 서늘한 민트 향이 순식간에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엘라엔의 몸에 배어 있던 진득한 장미 향기를 강제로 지워버리려는 듯한 행위였다. “이제부터 영애의 이름에 붙는 건 라안느가 아니라 루카르디아입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마레즈나의 모든 것은 당신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될 겁니다. 현실에서의 당신은 오직 나하고만 연결되어 있어야 하죠.”르세인은 엘라엔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거친 힘은 아니었으나 절대 뿌리칠 수 없는 완강한 악력이었다. 그는 그녀의 맥박이 뛰는 가느다란 손목에 코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아직 장미 냄새가 나는군. 역겹게도.”그는 엘라엔의 손목을 내팽개치듯 놓으며 차갑게 덧붙였다.“에르디엔에 도착하는 내로 씻어내십시오. 내 궁에서 내가 모르는 향기가 나는 건 참을 수 없으니. 당신의 모든 감각을 에르디엔 황실의 것으로 교체하는 작업은 오늘 밤부터 시작됩니다.”마차는 수도 카르네티아의 번화가를 지나 점점 더 찬란하고 웅장한 에르디엔 황궁으로 향했다.태양은 여전히 뜨거웠으나 엘라엔은 르세인의 눈동자 속에서 거대한 빙벽을 보았다.마차 밖의 세상은 여름의 정점이었지만 이 작은 공간 안은 이미 혹독한 겨울의 전조가 흐르고 있었다.엘라엔은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 마레즈나의 장미는 이제 전설 속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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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가장 치명적인 빛을

“마레즈나의 장미 향유는 입궁 시 금지 품목입니다. 앞으로 영애께서는 전하께서 직접 조제하신 수렴수만을 사용하시게 될 겁니다.”클로이 영애는 물을 엘라엔의 어깨 위로 흘려보내며 사무적으로 말했다.엘라엔은 물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귀족 시녀들의 손길은 정중했으나 단호했다. 그들은 엘라엔의 머리카락 한 올, 손톱 밑까지 낱낱이 검사하며 에르디엔의 질서에 맞게 재가공하기 시작했다. 가슴팍의 붉은 흉터를 본 말리트 영애의 눈이 잠시 흔들렸으나 벨모어 백작 부인의 서슬 퍼런 눈빛에 금세 고개를 숙였다. 엘라엔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마레즈나의 색채는 씻겨나가고 오직 백색의 대리석을 닮은 차가운 기품만이 감돌고 있었다.“정화는 끝났습니다. 이제 황태자 전하께서 하사하신 혼례 준비용 예복으로 갈아입으시지요.”벨모어 백작 부인이 내민 옷은 눈이 멀 것만 같은 백색의 실크였다. 엘라엔은 그 옷을 입으면서 절망하지 않았다. 되레 자신을 감시하는 시녀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벨모어 백작 부인. 전하의 질서도 좋지만 내 몸에 흐르는 베르제의 피가 뜨거워 이 물로는 잘 식지 않는군요. 앞으로의 일정이 제법 흥미로울 것 같아요.”엘라엔의 당돌한 말에 백작 부인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여름밤의 정막 속에서 엘라엔은 자신의 새로운 시녀단과 함께 레비안 전각의 깊은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에르디엔 황궁 위로 떠오른 태양은 뜨거웠으나 엘라엔이 머무르는 전각의 대리석 복도는 서늘한 냉기만을 머금었다.르세인의 질서에 따라 모든 향기와 장식을 제거당한 이 백색의 공간에서 엘라엔은 어제의 정화 의식으로 붉어진 몸을 웅크린 채 눈을 떴다.“영애, 기상하실 시간입니다. 에르디엔의 태양이 이미 아르젠트 궁을 비추고 있습니다.”문이 열리고 일정한 간격을 둔 구둣발 소리와 함께 세 여인이 내부로 들어섰다. 그들은 제국의 권력을 지탱하는 가문의 여인들이었으나 침대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자신들을 바라보는 엘라엔의 서슬 퍼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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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가장 고결한 일갈

다과회가 있을 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는 아르젠트 궁의 서늘한 정적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화려했다. 사방에 배치된 붉은 비단과 금박 장식들,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진한 향기는 이곳이 황제에게 사랑받는 여인들의 공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엘라엔은 벨모어 백작 부인을 필두로 클로이와 말리트를 거느린 채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장식 하나 없는 극광의 백색 실크 드레스였다.화려한 궁의 색채 사이에서 그녀의 무채색 기품은 오히려 이질적인 위압감을 뿜어냈다.다과회가 열리는 연회장의 문이 열리자 수십 명의 귀족 부인과 정부들의 시선이 일제히 엘라엔에게 꽂혔다. 그 중심. 상석에 앉아 있던 황후 로잘린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곳엔 황후 로잘린의 초대를 받은 여인들이 모여 있었으나, 그 배치는 서늘한 계급의 논리를 따르고 있었다.황후와 제법 떨어진 곳에는 황제와 르세인의 정부들이 줄을 지어 앉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셀레네 후작 부인은 황제의 총애를 증명하듯 가장 화려한 장신구를 휘감고 있었으나 정부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황후와 같은 테이블을 쓰지는 못했다.정부임에도 자신의 아들 라이안에게 공작의 지위를 안겨준 제국 최고의 실세. 셀레네의 눈빛은 부드러운 듯했으나 그 안에는 먹잇감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려는 독사의 독기가 서려 있었다. 셀레네는 황후의 눈치를 보면서도 황제의 총애라는 든든한 뒷배를 믿고 오만한 자태를 유지했다.엘라엔은 벨모어 백작 부인을 대동하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그녀는 황후를 향해 가장 완벽한 각도로 고개를 숙인 뒤 황후의 바로 맞은편. 정부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황태자비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라안느 양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황후 로잘린의 목소리가 연회장의 공기를 우아하게 갈랐다. 엘라엔은 찻잔의 일렁이는 수면을 보듯 차분한 눈빛으로 황후를 마주 보았다.주변의 부인들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시선을 살폈다. 이 자리는 축하가 아니라 황궁의 새로운 권력자가 어느 정도의 그릇인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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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보이지 않는 칼날

“후작 부인. 공작이 남부를 관리한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지만 부인이 말한 그 총애라는 변수는 제국의 안위라는 거대한 상수 앞에서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죠. 남부의 곡식이 풍족한들, 그것을 운송할 협곡의 통행권이 누구의 명에 의해 움직이는지 부인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엘라엔은 셀레네를 향해 상체를 조금 숙이며 서늘한 어조로 덧붙였다.“라안느 가문의 영애가 아닌, 제국의 황태자비가 될 사람으로서 한 마디 하죠. 부인의 아들인 공작이 쥔 행정권은 내 허락 없이는 곡식 한 톨도 수도로 보내지 못하는 빈 껍데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총애는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지만 내가 쥔 이 권위는 제국의 역사에 기록될 것이니.”엘라엔의 손가락에 끼워진 황실의 반지가 햇살을 받아 시린 빛을 내뿜었다.그건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르세인이 그녀에게 부여한 전권의 상징이었다.셀레네 후작 부인은 얼굴이 발갛게 변한 채 입을 다물었다. 제국의 실세라 자부하던 그녀가 이제 막 입궁한 어린 영애의 기세에 압도당해 비참한 침묵에 빠진 순간이었다.황후 로잘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셀레네 후작 부인이 엘라엔의 서늘한 경고에 입을 다물자, 연회장 한구석에서 억눌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주인공은 르세인이 황궁에 들인 정부 중 가장 오랫동안 총애를 유지해 온 레일리였다.그녀는 남부 남작 가문 출신 특유의 나른하고 육감적인 자태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 금실로 수놓인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이미 엘라엔이 어떤 사람인지는 예전 라안느 공작저를 찾아갔을 때 진즉 간파했다. 레일리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다 잡으며 입매를 비틀었다.“어머, 영애. 아니, 예비 황태자비 전하라고 불러야 할까요? 말씀이 참으로… 전하의 논리만큼이나 딱딱하고 차갑네요. 하지만 제국의 역사에서 기록되는 건 권위일지 몰라도 전하의 침소에서 기록되는 건 그보다 훨씬 부드럽고 달콤한 것들이랍니다.”레일리의 도발적인 발언에 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정부, 네르사가 맞장구를 치듯 웃음을 흘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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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

그날 밤. 레비안 전각의 정원은 시린 달빛으로 가득 찼다. 엘라엔은 르세인이 하사한 백색 실크 가운만을 걸친 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그때, 문밖에서 기계적인 보고 소리가 들렸다.“황태자 전하께서 당도하셨습니다.”문이 열리고 르세인이 들어왔다. 그는 집무복 차림 그대로였으며 평소보다 훨씬 짙은 수목 향을 풍기고 있었다.“전하.”“오늘 다과회 소식을 들었습니다. 레일리와 네르사가 울면서 내 집무실 앞을 서성거리더군. 당신이 그들을 저렴한 거울이라 칭했다지.”르세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아닌, 기묘한 흥분과 유열이 서려 있었다. 그는 엘라엔의 턱을 들어 올려 자신의 녹색 동공을 마주하게 했다.“영애. 당신은 내 논리를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 그들은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지. 당신이 그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짓밟았다는 사실은, 당신이 내 옆자리에 앉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다행이군요. 저는 전하께서 제게 질책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당신의 정부를 건드렸으니까요.”엘라엔의 당돌한 대답에 르세인은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첫 번째 과제를 드리죠. 카르노스 왕국의 군수 보급로 지도를 가져왔습니다. 당신의 그 영악한 머리로 이 지도의 오류를 찾아내보시죠.”엘라엔은 그의 옆에 서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슬픔이나 안식에 대한 갈망이 없었다.오직 제국을 제패하고 자신을 이용했던 모든 이들을 발아래 두겠다는 서늘한 야망만이 루비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전하, 이 보급로는 너무나… 효율적이지 못하군요. 제가 다시 그려드리죠.”엘라엔의 손가락이 르세인이 펼쳐놓은 양피지 위를 거침없이 가로질렀다.르세인은 촛불 아래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손가락 끝이 멈춘 곳은 카르노스 왕국의 국경을 감싸 안은 험준한 산맥 협곡이었다.“제국 군은 산맥을 우회하여 평원을 가로지르려 하고 있습니다. 보급의 편의성 때문이겠죠. 하지만 카르노스의 저항군은 그 평원을 불바다로 만들 준비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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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금사의 굴레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제 집무실에서 밤을 지새우셨습니다. 군수 보급로 수정안을 검토하시느라 말입니다.”말리트가 무심한 듯 내뱉은 말은 정보였다. 르세인이 엘라엔의 제안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황궁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는 신호.엘라엔은 거울 속 말리트와 시선을 마주했다.“전하의 열정은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넘는군요. 하지만 말리트, 그분의 밤을 걱정하기엔 이곳의 아침이 너무나 길지 않나요?”엘라엔의 서늘한 대꾸에 말리트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벨모어 백작 부인은 그 찰나의 공백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영애. 담소는 가봉 중에 나누셔도 늦지 않습니다. 황실 전속 재단사들이 이미 전각 아래에서 대기 중입니다. 전하께서는 영애의 몸 곡선 하나, 드레스에 박힐 진주 한 알의 위치까지 완벽하시길 원하십니다.”엘라엔은 그 말을 들으며 답답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자리를 옮긴 엘라엔은 다시 한번 옷을 벗어야 했다. 수십 명의 재단사와 자수장들이 늘어선 그곳에서 그들은 엘라엔을 옷을 입히기 위한 마네킹으로 대했다.“어깨선을 더 낮추어라. 황태자 전하께서는 영애의 쇄골이 드러나는 각도에 가장 신경 쓰셨으니”수석 재단사의 지시에 따라 날카로운 핀들이 엘라엔의 몸 주변을 오갔다.백색의 가공되지 않은 비단은 그녀의 몸을 칭칭 감싸안았다. 그건 축복의 예복이 아니라 그녀를 영원히 이곳에 박제하기 위한 금사의 굴레였다.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갔다. 가봉을 위해 미동도 없이 서 있어야 하는 고문 같은 시간 동안 엘라엔은 고이는 피로감을 억눌렀다.르세인은 직접 오지 않았으나 재단사들이 든 도면 위에는 그의 친필로 적힌 세밀한 수정 사항들이 가득했다.‘가슴의 흉터가 보이지 않도록 레이스의 밀도를 높일 것.’도면 구석에 적힌 글자를 발견한 순간 엘라엔은 헛숨을 내뱉었다. 르세인은 자신의 상처를 미학적 완성도를 해치는 얼룩으로 규정했다.가봉이 중반을 넘어설 무렵, 전각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정부들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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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유일하게 남은

“무겁다고 들었습니다. 내 논리가 그대를 질식하고 있다고.”“사실이지 않습니까. 이 드레스에 박힌 진주 하나하나가 저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돌덩이처럼 느껴져요.”르세인은 피식 웃으며 엘라엔의 가슴팍, 레이스가 덧대어진 부분으로 손을 뻗었다. 곧 그의 손가락이 흉터가 숨겨진 자리를 꾹 눌렀다.얇은 비단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체온은 소름 끼치도록 뜨거웠다.“흉터를 가리기 위해 레이스를 덧대라고 명한 건 나입니다. 그대의 오답을 가려주는 자애로운 처사라고 생각했는데. 영애에겐 그마저도 굴레였나 보군.”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라엔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 노출된 코르셋의 끈을 직접 잡아당겼다.“하윽…!”엘라엔의 상체가 뒤로 젖혀지며 르세인의 가슴팍에 닿았다. 르세인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영애, 이 드레스는 제국의 법도이자 나의 의지입니다. 당신이 이것을 무겁게 느낀다는 건 여전히 내 질서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이지.”그는 코르셋 끈을 더욱 단단히 조이며 속삭였다.“당신이 숨이 막혀 기절하더라도 나는 이 드레스를 입힌 채로 제단 위에 세울 겁니다. 당신의 육체는 이미 나의 수집품이고 그 안의 영혼은 내가 재조립할 부품이니.”르세인은 엘라엔의 목선에 자신의 차가운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엘라엔은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그의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묘하게 뒤섞였다.르세인은 단연코 포식자였다. 그는 엘라엔의 반항조차 즐기며 그녀가 무너지는 과정을 흥미롭게 감상했다.잠시 뒤, 르세인은 그녀를 놓아주며 다시 평소의 냉철한 얼굴로 돌아왔다.“가봉을 계속하십시오. 이번에는 내 눈으로 직접 지켜보겠습니다.”그는 근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바델이 가져온 서류 뭉치를 펼쳤다.엘라엔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르세인의 시선이 자신의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다시 백색의 감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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