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애님, 황태자 전하께서 당도하셨습니다.”하녀 마리의 목소리는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엘라엔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안색을 살폈다. 창백했던 뺨에는 이제 생기가 돌았고 루비빛 눈동자는 예전보다 훨씬 깊고 위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레즈나의 대접견실에는 라안느 공작 에드먼과 이사벨라가 유례없이 경직된 자세로 서 있었다. 자결을 시도했던 딸이 제국의 황태자비로 확정되어 돌아오는 이 기괴한 상황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보다 르세인이 풍기는 압도적인 살기에 눌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문이 열리고 르세인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평소의 집무복이 아닌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정식 예복 차림이었다. 그런 르세인의 손에는 황금 인장이 찍힌 국혼 문서가 들려 있었다.“영애, 충분히 쉬었습니까.”르세인의 목소리는 감미로웠으나 그 속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제왕의 명령이 담겼다.그는 엘라엔의 앞에 서서 그녀의 손을 정중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에드먼이 보는 앞에서 그녀의 손가락에 라안느의 문양이 아닌,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반지를 끼웠다. “이 문서는 단순한 혼약서가 아닙니다. 이건 당신이 제국의 절반을 소유하며, 나의 모든 결정을 함께 집행할 유일한 동반자임을 선포하는 칙령이죠.”“하지만 황태자 전하…. 오늘 이렇게 급작스럽게……!”르세인은 고개만 살짝 돌려 말을 내뱉는 에드먼을 바라보았다. 그의 녹색 눈동자에는 일말의 당혹감도 없었다. 오히려 귀찮은 물건을 보는 듯한 건조함만이 감돌았다.“라안느 공작. 덕분에 영애는 제국의 그 어떤 추문에도 섞이지 않은 채, 오직 나만을 위한 완성품으로 보존되었습니다.”“황태자 전하…!”“이제 그 결과물을 수거해가는 것에 무슨 절차가 더 필요하겠습니까.”보존과 수거라니.엘라엔은 여전히 자신을 물건 취급하는 르세인의 단어 선택에 주먹을 쥐었으나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에르디엔 황궁의 은혜는 곧 구속이었고, 그의 자비는 곧 소유였다.“하지만 짐을 싸지도 못했습니다.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은 주셔야……”
Huling Na-update : 2026-08-16 Magbasa 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