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Chapter 21 - Chapter 30

116 Chapters

21. 모욕적인 갈증의 시작

밤이 깊어질수록 요새 건설 현장의 소음은 잦아들었지만 르세인의 집무실에 감도는 긴장감은 오히려 날카로워졌다.책상 위에 놓인 시계의 초침이 궤도를 이미 반 바퀴나 넘어서고 있었다.약속된 대면 보고 시간에서 정확히 삼십 분이 경과했다.르세인은 펜을 내려놓고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지만 평소 오차 없이 문을 두드렸을 엘라엔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열병의 후유증인가, 아니면 의도적인 태만인가.’르세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바델을 보내 확인하면 그만인 일이었다.하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질서 체계 속에서 보고 누락은 즉각적인 시정이 필요한 결함이었고, 그 결함을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모호한 충동이 그의 이성을 앞질렀다.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걷는 르세인의 굽 소리가 평소보다 무겁게 울렸다.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왜 직접 움직이는가에 대해서.효율을 중시하는 자신이 굳이 시간을 낭비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는 무엇인가.르세인은 자산의 상태를 확인하는 지휘관의 의무라는 건조한 답을 내놓았으나 가슴 한구석을 긁어대는 생소한 갈증은 그 답이 오답임을 증명했다.같은 시각, 별관의 서재는 희미한 촛불 하나만이 내부를 밝혔다.엘라엔은 책상에 엎드린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손 밑에는 오늘 하르만이 작성한 서툰 자재 장부와, 그것을 꼼꼼히 수정한 그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고요한 적막을 깨고 서재의 문이 예고 없이 열렸다.들어선 이는 르세인이었다. 그는 침묵을 깨뜨리며 들이닥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촛불 아래 흩어진 와인빛 머리칼과 고르게 내뱉는 숨소리를 마주한 순간 멈춰 서고 말았다.“…….”르세인은 숨을 죽인 채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집무실에서 보았던 오만한 영애는 그곳에 없었다. 동생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다 지쳐 잠든, 한없이 위태롭고 작은 존재만이 있었다.르세인은 그녀의 머리칼 아래로 살짝 드러난 창백한 목덜미와 여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은 듯 발그레한 뺨을 응시했다.그는 손을 뻗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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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효율적인 부품으로

창틈으로 스며든 새벽빛이 눈꺼풀 위로 드리웠다.엘라엔은 뻐근한 목을 매만지며 상체를 일으켰다. 책상 위에는 어젯밤 검토하다 잠든 자재 장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니, 그대로가 아니었다.“……!”엘라엔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적어 내려갔던 잉크 자국 옆으로 정갈하고 서늘한 필체가 덧붙여져 있었다.장부의 오차를 수정하고 다음 공정의 우선순위를 번호까지 매겨 정리해 둔 흔적.제국에서 이런 완벽한 질서의 필체를 가진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르세인.엘라엔은 소름이 돋는 팔을 감싸안았다. 그는 어젯밤 이곳에 왔다. 그리고 잠든 자신을 깨우지 않고 어둠 속에서 이 장부 위를 훑었을 것이다. 아니, 장부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무방비한 모습까지도 이 장부의 숫자처럼 건조하게 재단했겠지.‘질서 운운하더니 이렇게 무례할 수가 없어.’엘라엔은 장부를 탁, 소리가 나도록 덮어버렸다.‘왜 깨우지 않았지?’단순히 업무의 효율을 위해서라면 비효율적으로 직접 펜을 들 이유가 없었다. 바델을 시켜 자신을 깨워 집무실로 압송하는 것이 르세인다운 방식이었다.엘라엔은 르세인이 이곳에 머물며 자신을 내려다보았을 그 침묵의 시간을 상상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 계산이 뒤엉켜 나뒹굴었다. ***그날 오전, 요새 현장 지휘소.르세인은 평소보다 더욱 짙은 위압감을 뿜어내며 기사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어젯밤의 동요를 완벽하게 지워버리려는 듯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고 지시는 자비가 없었다.“공정 3구역의 지반 보강이 미흡합니다. 재시공하도록.”“전하, 그 정도는 설계상 허용 범위 내….”“내 질서에 허용 범위란 없습니다.”기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르세인은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젯밤, 서재의 희미한 촛불 아래에서 보았던 그 평온한 숨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하얀 목덜미와 잔향까지도….자신의 원칙을 깨고 직접 별관으로 향했던 그 비합리적인 행위는 스스로를 모욕하고 있었다.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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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의미심장한

정오가 지난 태양은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게 건설 현장의 흙먼지에 내리꽂혔다.엘라엔은 르세인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와 별관으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그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턱 끝에 남은 그의 손길이 닿은 감각이 좀처럼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자산의 점검.’르세인은 그 말을 내뱉을 때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엘라엔은 그가 자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제대로 실감했다.그는 요새를 세우는 돌덩이와 자신을 동일 선상에 두고 있었다. 단지 조금 더 정교하고, 조금 더 다루기 까다로운 부품일 뿐.*** 오후 무렵 갑작스럽게 날아든 황태자 책봉 예고 공문은 요새 지휘소의 분위기를 단번에 바꾸어 놓았다. 요새 완공일이 곧 제국의 차기 주인이 결정되는 날이라는 명제는 현장의 모든 인부와 기사들에게 단순한 노동 그 이상의 압박으로 다가왔다.이제 돌 하나를 쌓는 행위는 르세인의 왕좌를 공고히 하는 벽돌이 되거나 혹은 그를 실각시키는 오차가 될 터였다.르세인은 집무실의 커다란 창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드는 지평선을 응시했다.그의 손에는 바델이 전달한 황제의 친필 서신이 쥐어져 있었다. 누가 더 이 제국의 질서를 완벽하게 세우는지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내용의 서신은 격려가 아닌 경고였다. 르세인은 서신을 책상 위로 무심히 던졌다.그는 자신이 황태자가 되는 것에 단 한 번도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엘라엔이라는 변수를 요새 현장에 방치한 채 이 선언을 했다는 점이 르세인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황제는 지금 르세인에게 묻고 있었다. 이 날카롭고 위험한 여인을 길들여 제국을 지탱하는 초석으로 쓸 것인가.아니면 그녀에게 잠식당해 질서를 무너뜨릴 것인가.“바델.”“예, 전하.”“오늘부터 요새의 모든 출입 기록은 내가 직접 검수한다. 특히 이황자 측의 서신이나 인편이 별관 근처에 머무는 것이 발각된다면 그 즉시 현장에서 처단하라. 명분은 군사 기밀 유출 방지다.”르세인의 명령은 서늘했다. 그는 이안이 엘라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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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거대한 파멸의 질서 속으로

별관 서재의 촛불은 새벽이 깊도록 꺼질 줄 몰랐다.엘라엔은 르세인이 보낸 거대 성벽 설계도를 거칠게 펼쳤다. 양피지의 케케묵은 먼지가 코끝을 간질였으나 그녀의 눈빛은 설계도를 면밀히도 응시했다.르세인은 그녀에게 하르만의 피 묻은 손수건을 보내며 복종을 명했지만 되레 엘라엔의 잠자고 있던 가장 치명적인 독기를 깨운 꼴이 되었다.그녀의 손가락이 설계도의 특정 지점을 훑었다. 제국 북부의 지형은 겉으로는 단단한 암반층처럼 보였지만 특정 계절이 되면 지하수가 솟구치는 수맥이 흐르는 구간이 있었다.르세인이 앞당긴 공사 기간대로라면 보강 공사를 생략하고 성벽을 올릴 수밖에 없는 지점이었다.‘여기에 오차를 심겠어.’엘라엔은 깃펜을 들었다. 그리고 르세인이 원하는 방식대로 수치를 수정하는 척하면서 아주 미세한 각도의 뒤틀림을 계산식 사이에 끼워 넣었다.지금 당장은 성벽이 견고하게 올라가겠지만 요새가 완공되는 그 영광의 날에 이 성벽은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것이다.그건 르세인의 완벽한 질서에 가하는 엘라엔의 일격이었다.그녀의 눈동자가 등불 아래에서 붉게 일렁였다. 손끝이 떨렸으나 그건 두려움이 아닌 포식자의 목줄을 쥘 수 있다는 희열이었다.***같은 시각, 지휘소의 최상층.르세인은 창가에 기댄 채 별관 서재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엘라엔이 낮에 제출했던 보고서 사본과 그녀의 동선을 낱낱이 기록한 감시 보고서가 놓였다.“전하, 영애께서 한숨도 자지 않고 도면 수정에 매달리고 계십니다.”바델의 보고에 르세인은 대답 대신 브랜디가 든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호박색 액체가 유리벽을 타고 매끄럽게 움직였다.“수정이 아니라 덫을 놓느라 혈안이겠지.”르세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엘라엔이 북부 지형의 고질적인 수맥 문제를 이용해 설계에 장난을 칠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말하면 그는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유도했다.하르만의 피 묻은 손수건을 보낸 것도, 일부러 취약한 구간이 포함된 고대 도면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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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증오와 공포

르세인이 고개를 들어 엘라엔을 보았다. 그의 녹색 동공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지만 그 이면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잔인한 유희가 넘실대고 있었다.그는 엘라엔이 심어둔 파멸의 씨앗을 정확히 인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대기하던 바델에게 무심하게 도면을 넘겼다.“이대로 집행하라. 현장 감독들에게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 설계대로 시공할 것을 명하고.”“전하! 하지만 이 구간은 분명…!”바델이 경악하며 말을 내뱉으려 했지만 르세인의 서늘한 눈길 한 번에 입을 다물었다.엘라엔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져옴을 느꼈다.르세인은… 알고 있는 듯했다. 아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위험한 도면을 채택했다.왜?그 의문을 해소할 틈도 없이 르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엘라엔에게 한 걸음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검지로 가볍게 걸어 쓸어내렸다.“영애가 바라는 대로 요새는 완공될 겁니다. 아주 화려하고 견교해 보이는 모습으로 말이죠. 그리고 그 끝에 기다리는 보상은 영애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지독할 겁니다.”르세인은 그녀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당신이 심은 독이 누구의 목을 먼저 적실지, 인내심 있게 지켜보도록 하죠.”*** 공사는 르세인의 명령에 따라 무자비한 속도로 진행되었다.현장에서는 인부들의 비명 섞인 함성이 끊이지 않았고 엘라엔이 설계한 뒤틀린 구간에는 거대한 석재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엘라엔은 테라스에서 그 모습들을 지켜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음에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르세인은 분명 자신을 더 큰 덫으로 몰아넣고 있었다.엘라엔이 머릿속을 부단하게 굴리며 이 난제를 어떻게 타개할지 고민에 빠져있을 때 연무장 쪽에서 날카로운 채찍 소리가 들려왔다.그녀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했고 엘라엔은 곧 경악했다.르세인의 최정예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진흙 바닥을 구르고 있는 하르만의 등에는 혈흔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하르만!”엘라엔이 소리치며 뛰쳐나가려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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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자리를 내어준 이유

엘라엔은 르세인의 섬뜩한 품 안에서 덜덜 떨며 연무장을 응시했다. 하르만이 비틀거리며 다시 검을 쥐는 모습이 그녀의 동공 속에 박혀들었다. 르세인은 그 떨림을 감상하며 그녀의 귓가에 다시금 말을 흘려 넣었다.“선택하십시오, 영애. 당신의 그 치기 어린 마음으로 성벽을 무너뜨리고 동생의 시신을 수습할 것인지, 아니면 내 질서 앞에 무릎 꿇고 그를 살릴 것인지.”르세인의 손이 엘라엔의 젖은 뺨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가죽 장갑의 질감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엘라엔은 구역질 나는 공포를 느꼈다.이 남자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가장 아픈 곳에 칼을 꽂는 법만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수, 수정하겠습니다.”엘라엔의 잇새로 비참한 패배의 선언이 새어 나왔다.르세인은 그 답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녀를 옭아맸던 팔을 풀어냈다. 엘라엔은 힘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고귀한 라안느 영애가 지휘소 바닥에서 가쁜 숨을 몰아내쉬는 모습을 보며 르세인은 만족스러운 듯 바델에게 시선을 던졌다.“바델, 영애는 역시 영리하지 않나. 자신이 무엇을 저당 잡혔는지 확인하는 순간, 가장 효율적인 답을 내놓으니.”르세인은 무너진 엘라엔을 뒤로한 채 몸을 돌렸다. “내일 아침까지 수정된 도면을 가져오십시오. 만약 또다시 오차가 발생한다면 라안느 후계자의 훈련 강도는 배가 될 겁니다.”*** 별관 서재로 돌아온 엘라엔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도면을 뒤적였다.촛불이 일렁이며 그녀의 그림자를 기이하게 늘어뜨렸다.눈물은 자각 없이 자꾸만 흘렀다. 엘라엔은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닦아내며 계산식을 수정해 나갔다.‘……하르만을 지켜야 돼.’강한 의지와는 다르게 펜을 든 손길이 멈칫했다. 르세인의 말대로 완벽한 성벽을 설계한다면 하르만은 살겠지만 자신은 영원히 르세인의 부품이 되어 아르젠트 궁에 박제될 것이 분명했다. 그건 죽음보다 더한 지옥이었다.엘라엔은 도면의 가장 구석진 곳, 르세인이 수맥이라고 확신하며 비웃었던 그 지형 너머를 보았다.순간, 밤새 고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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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가장 강력한 물증

요새 현장의 새벽은 날카로운 쇳소리로 시작되었다.엘라엔은 먼지가 자욱한 공사 현장을 난간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지반은 엘라엔이 의도한 대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르세인의 명령에 따라 경이로운 속도로 성벽이 올라가고 있었지만 그 화려한 성벽 아래는 엘라엔의 계획이 차질 없이 굴러갔다.이제 곧이었다.지반이 임계점에 도달하면 르세인이 군림하는 이 오만한 집무실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진흙 속으로 박힐 것이다.그건 르세인이 그토록 신봉하던 질서의 붕괴이자 엘라엔이 쟁취할 최초의 승전보였다.그때였다. 요새 정문 너머로 황실 문양이 새겨진 칠흑색 마차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들이닥쳤다.“황실 검찰관들이다!”현장 감독관의 당황한 외침이 적막을 깼다.마차에서 내린 자들은 황실 직속의 수석 검찰관들과 무장한 기사단이었다.엘라엔의 심장이 급속도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황실 검찰관의 등장은 곧 현장의 비리와 부실 공사에 대한 전면 조사를 의미했다.‘설마…! 내 설계의 오차를 벌써 알아챈 건가…!’엘라엔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물러났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어쩌면 이건 기회였다.검찰관들에게 요새의 부실 공사와 르세인의 무리한 공사 기간 단축,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지반의 위태로움을 고발한다면…?르세인은 황태자 책봉은커녕 제국 전체의 지탄을 받을 것이 자명했다.***지휘소 접견실은 검찰관들의 드높은 기세로 가득 채워졌다.수석 검찰관 헤세는 르세인을 향해 예의를 갖추면서도 그가 들고 온 황제의 칙서를 단호하게 펼쳐 들었다.“전하, 요새 건설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 횡령과 수치 조작, 그리고 지반 설계상의 치명적인 결함이 보고되었습니다. 이에 황제 폐하의 명으로 현장을 긴급 감사하고 관련자들을 압송하겠습니다.”엘라엔은 문가에서 그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승기를 잡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서서 자신이 숨겨둔 진짜 증거들을 폭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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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완벽한 설계로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르세인의 부츠를 멍하니 응시했다.공포보다 더한 의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었다.“……왜. 왜, 왜죠?”엘라엔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르세인의 눈을 직시했다.“그 도면은 내가 그린 겁니다. 전하를 무너뜨리려 했던 건 저라고요! 그런데 왜… 왜 저들을 잡아가는 겁니까? 나를 반역죄로 처형해야 맞지 않느냐 말입니다!”엘라엔은 냉소적인 눈빛으로 항의하듯 혹은 매달리듯 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처참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르세인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보듯 엘라엔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처형이라. 영애는 참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좋아하는군요. 하지만 내 질서 속에서 영애의 역할은 반역자가 아닙니다.”르세인은 품 안에서 검찰관에게 넘기지 않은 서류 한 장을 꺼내 엘라엔의 눈앞에 펼쳤다. 그건 그녀가 어젯밤 밤새 쓴 보고서였으나 하단에는 그녀의 이름 대신…[내부 고발자 : 라안느 영애의 제보에 따른 감사 결과.]엘라엔은 황실의 공식 인장이 찍힌 그 서류를 보며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메마른 표정을 내보이면서도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이게…… 무슨….”“공병단 놈들은 영애를 협박해 지반을 조작하려 했으나, 정의로운 영애가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나에게 비리를 밀고했다. 이것이 오늘부로 제국 전역에 공표될 공식 기록입니다.”르세인의 손가락이 엘라엔의 떨리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눌렀다.“축하합니다, 엘라엔. 당신은 이제 제국의 부패를 도려낸 영웅이자, 내 곁을 지킬 가장 유능한 황태자비 후보로 칭송받게 될 겁니다. 아, 물론 숙청당한 가문의 유족들은 당신을 찢어 죽이고 싶어 하겠지만….”“……!”“적정 마. 내 곁에 있는 한,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테니.”엘라엔은 현실 감각이 너무나 떨어져서 웃음이 다 새어 나왔다.“당신은… 정말 끔찍해. 정말 끔찍해! 악마보다 더 하다고!”“악마라니. 네가 설계한 그 설계도만 할까. 우습군.”르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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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훨씬 깊고 노련한

엘라엔은 라안느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에 올랐다.“누나….”“……가자, 마레즈나로.”그녀의 목소리는 빛을 잃은 것 같았다. 르세인의 질서 아래에서 수치를 계산하고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하던 시간은… 곧 성인식을 치를 소녀에게 너무나 버겁고 끔찍한 기억만을 남겼다.호기롭게 대공저를 나서던 소녀는 어디에도 없었다.‘할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게 옳았을 지도 몰라….’엘라엔은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을 위를 내달리는 마차 속에서 눈을 감았다.*** 라안느 공작저, 마레즈나의 정문은 승전보를 들고 돌아온 영웅들을 맞이하듯 활짝 열려 있었다.공작 에드먼은 정원에서 마차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그의 곁에는 화려한 부채 뒤로 초조함을 숨긴 이사벨라와 그저 해맑기만 한 루시안이 서 있었다.마차 문이 열리고 엘라엔이 내리자 에드먼은 평소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탈피하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장하다, 엘라엔! 네가 황실 공병단의 비리를 밝혀내고 요새의 결함을 잡아냈다는 소식에 황제 폐하께서 라안느 가문의 공을 치하하셨어!”에드먼은 오직 가문의 영광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엘라엔의 창백한 안색 따위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에게 엘라엔은 가문을 황실의 정점에 안착시킬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일 뿐이었으니까.엘라엔의 뒤로 늠름하게 갑주를 갖춰 입은 하르만이 내렸다. 요새의 가혹한 훈련과 실무를 견뎌낸 하르만의 눈빛은 더 이상 이사벨라의 치맛자락 밑에서 떨던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다녀왔습니다.”하르만이 예법에 맞춰 고개를 숙이자, 이사벨라의 부채가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아들의 성장이 대견하기보다 두려웠다. 엘라엔의 영리함과 하르만의 군사적 기반까지 더해진다면 자신이 공작저에서 휘두르던 권력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것이 분명했다.‘이럴 리가 없는데…. 전하께서 사지로 몰아넣으신 줄 알았거늘…!’이사벨라는 억지로 입매를 끌어올리며 하르만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하르만은 그녀의 손을 피하며 엘라엔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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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질서의 범위를

엘라엔이 내리깐 눈매를 들어 올려 황제를 마주 보았을 때 그녀는 황제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황제 헤이브릭의 시선은 엘라엔의 얼굴 구석구석을 면밀히도 살펴보았다. 와인빛 머리카락과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 그리고 목선까지.그의 머릿속으로 아득한 과거 기억의 편린들이 스쳐지나 갔다. 수십 년간 자신을 괴롭혀 온 단 하나의 망령… 아델라이드 폰 베르제의 모습이 지독히도 선명하게 덧씌워졌다.‘아델라이드…….’황제는 숨을 들이켰다. 세월은 그의 육신을 쇠락하게 했으나 첫사랑을 향한 연정은 심장 깊숙이 박혀 무슨 수를 써도 뽑히지 않았다. 눈앞의 소녀는 아델라이드가 남긴 가장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증거였다.황제는 홀린 듯 엘라엔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황후 로잘린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지만 황제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라안느가의 영애인가.”“예, 황제 폐하. 엘라엔 폰 라안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과연……. 이황자가 그토록 애정을 쏟는 이유를 알겠군. 제 아비의 눈을 닮았던 게야.”“…….”“황후.”“예, 폐하.”“잠시 자리를 좀 비켜주겠소. 내 이 소녀에게 요새의 공을 치하할까 하니.”“그러하시지요, 폐하.”헤이브릭은 엘라엔의 맞은편, 황후가 앉아 있던 자리에 무겁게 주저앉았다.로잘린은 부채를 쥔 손을 얕게 떨며 먼저 자리를 떴고, 헤이브릭은 손을 휘저어 주변의 모든 영애와 시종들을 물러나게 했다. 세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엘라엔을 한 번 돌아본 뒤, 시종들의 안내에 따라 멀어졌다.정원에는 오직 황제와 엘라엔, 두 사람만이 남았다.“요새에서의 공이 혁혁하니 상을 내리고 싶은데, 무엇을 원하느냐. 보석인가, 아니면 영지인가.”황제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엘라엔은 르세인이 쳐놓은 촘촘한 그물을 찢어발길 유일한 칼날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음을 직감했다.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뒤, 황제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황제 폐하. 저는 화려한 보석이나 땅을 원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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