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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hat ng Kabanata ng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Kabanata 31 - Kabanata 40

113 Kabanata

31. 편하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르세인의 눈동자가 비로소 엘라엔의 눈동자로 향했다.“카시안이라…. 황궁 서쪽 끝, 별궁에 박힌 그 나약한 그림자를 위해 폐하의 은혜를 낭비하다니. 효율적이지 못한 선택이 아닙니까.”“전하께 효율은 질서의 척도겠지만, 제게 카시안은 지키고 싶은 안식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으니 이제 전하께서도 제가 카시안을 만나는 것을 막을 명분은 없죠.”엘라엔은 르세인의 시선 아래에서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세웠다.“명분이라. 나는 황명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정한 질서의 궤도를 조금 수정할 뿐이지.”르세인이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그가 내뿜는 서늘한 향과 위압감은 엘라엔의 전신을 옭아매는 사슬과 같았다.그는 엘라엔의 턱 끝을 지나 긴장으로 맥박이 뛰는 목덜미를 집요하게 보았다.펜대를 문지르던 그의 손가락 끝에 힘이 실렸다.르세인은 그 만년필을 테이블 위로 툭,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그는 망토 자락을 가을바람에 휘날리며 정원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엘라엔은 그의 마지막 말을 곱씹듯 골몰히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만나러 가야 했다.***에르디엔 황궁의 화려한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길은 거칠고 황량해졌다.잡초가 무성한 돌길을 지나 당도한 서쪽 별궁은 잊힌 섬 같았다. 한때는 누군가의 안식처였을 이곳은 이제 빛바랜 석재와 먼지 쌓인 회랑만이 남은 카시안의 거처였다.엘라엔은 홀로 그 고요한 문을 열었다. 정원 한가운데, 수국이 시들어버린 갈색 줄기 사이로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카시안!”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카시안의 어깨가 떨렸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의 안색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 하지만 엘라엔을 발견한 그의 눈동자만큼은 가을 햇살을 머금은 호수처럼 다정하게 일렁거렸다.“엘라엔! 정말 너야? 정말 너 맞아?”카시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둘러 다가오려다,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듯 멈춰 섰다.엘라엔은 그 짧은 머뭇거림에 심장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먼저 그에게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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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가장 견고한 방어벽

엘라엔이 별궁의 문을 나설 때 카시안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카시안과의 재회가 남긴 따스한 향은 별궁의 문을 나서는 순간 가을바람에 흩어졌다.엘라엔은 자신의 손바닥에 남은 온기를 애써 지우며 황궁의 질서 정연한 회랑을 걸었다.카시안은 여전히 나약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는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고 오직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이것은 훗날 자신을 파멸로 이끌지도 모를, 치명적인 안식의 전조였다.“……!”그때, 그녀의 눈앞에 바델이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숙인 뒤 엘라엔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영애.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델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아르젠트 궁의 부속 집무실이었다. 르세인의 주된 집무실이 제국의 국방과 행정을 다루는 곳이라면 이곳은 황실의 은밀한 자금과 귀족들의 약점을 보관하는 곳이었다.집무실의 문이 열고 들어서자 그곳엔 르세인뿐만 아니라 이황자 이안이 함께 서 있었다. 평소의 다정한 미소를 지우고 날선 표정으로 서 있는 이안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위압적이었다.“형님. 굳이 영애를 이런 지저분한 일에 끌어들여야겠습니까?”이안의 음성에는 르세인을 향한 노골적인 불만이 섞였다. 그는 엘라엔이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다가왔다.“영애. 별궁에서 돌아오는 길입니까? 형님이 당신을 너무 혹사시키는군요. 폐하의 총애를 받는 당신이 이런 어두운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혀 있을 이유는 없어요.”이안은 엘라엔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르세인의 시선이 그의 손목에 내리꽂혔다.르세인은 책상에 앉아 펜대를 굴리며 이안의 방해를 무심하게 관조했다.“이안, 네가 관리하던 제국 남부의 무역 관세에서 구멍이 발견되었다. 영애는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한 유일한 눈이지. 불만이 있다면 네 무능함을 먼저 탓해야 할 거다.”르세인이 엘라엔의 앞에 두꺼운 검은 장부를 내던지듯 내려놓았다.“자재 수량이나 확인하던 요새에서의 업무는 잊으십시오. 이제부터 영애가 할 일은 제국 전역의 영지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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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예상치 못한 반응

“영애, 너무 겁먹지 마세요. 형님의 방식이 거칠긴 하지만 이 장부는 당신에게 독이 아니라 칼이 될 거예요. 당신이 이 숫자들을 지배하는 순간, 제국의 그 어떤 귀족도 당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이안은 다시금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엘라엔은 이안 역시 르세인과 다른 의미로 자신을 도구로서 탐내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르세인은 자신을 완벽한 부품으로 쓰려 하고, 이안은 제 권력을 빛낼 화려한 트로피로 삼으려 했다.엘라엔은 두 남자 사이의 팽배한 긴장감 속에서 마침내 검은 장부를 집어 들었다.“……알겠습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제국의 정세를 꿰뚫는 눈이라면 기꺼이 보여드리지요. 다만, 제가 찾아낸 오차가 전하의 질서에 상처를 입히더라도 원망하지 마세요.”르세인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다시 몸을 기대었다.“원망이라니. 나는 오차를 증오하지만 당신이 내 질서에 내는 상처라면 꽤 흥미로운 흔적이 될 것 같은데.”르세인은 펜을 쥐었다. 펜대를 만지작거리며 엘라엔의 돌아선 목덜미를 집요하게 눈으로 좇았다. 이안은 그런 엘라엔의 옆에 붙어 장부의 첫 페이지를 넘겨주며 은밀한 도움을 자처했다.화려한 황궁의 집무실 안에서 세 사람의 뒤틀린 공생이 시작되었다. 엘라엔은 차가운 종이 위에 적힌 비릿한 금전의 흐름을 보며 자신을 옭아매는 두 형제의 올가미를 어떻게 역이용할지 계산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제국 남부 영지들의 수확량과 그에 따른 세금, 그리고 황실로 귀속되어야 할 비자금의 흐름이 고대 문자와 숫자로 촘촘히 얽힌 것을 보았다.“무엇을 보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여기 적힌 수치들은 공정해 보이는걸요.”엘라엔은 일부러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르세인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엘라엔의 등 뒤로 다가왔다.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존재감이 엘라엔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르세인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뻗어 엘라엔의 어깨너머로 장부의 한 지점을 지목했다. 그가 든 만년필의 매끄러운 펜촉은 종이 위를 느릿하게 미끄러지며 특정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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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검은 그림자들

“나갈 생각이군.”“책상에 앉아 이안 전하가 흘려주는 정보나 줍고 있는 건, 전하께서 말씀하신 자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 남부의 물류가 모이는 수도 외곽의 하역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그곳의 장부와 전하의 장부가 얼마나 다른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요.”르세인은 펜촉으로 책상을 톡, 톡 두드렸다. 그 규칙적인 소음은 엘라엔의 목선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을 자극했다.“좋습니다.”르세인의 허락에 옆에 있던 이안이 서둘러 끼어들었다.“영애, 혼자 보내지 않겠어요. 내 기사들을 붙여줄 테니….”“아니요, 이황자 전하.”엘라엔은 단호히 거절했다.“전하의 기사들을 배석하는 순간, 그곳의 사람들은 입을 닫고 숫자들을 더 깊이 숨길 겁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움직이겠어요.”“하지만 영애…!”“카시안과 함께 갈 생각이에요. 걱정 마세요.”엘라엔의 폭탄선언에 집무실의 분위기가 단번에 뒤바뀌었다.르세인은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의 동공은 모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질투라기엔 너무 우습고, 분노라기엔 지나치게 평온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못하다는 점이었다.“…그림자를 데리고 나가겠다.”르세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엘라엔의 곁을 지나 창가로 향하며 무심하게 금발을 쓸어넘겼다.“당신의 그 대단한 우정이 이 비릿한 장부 속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지켜보도록 하죠.”***다음 날, 수도 카르네티아 외곽의 테이즈 강 하역장.화려한 황궁의 석조 건물 대신 썩은 목재 냄새와 거친 인부들의 고함이 가득한 이곳에 엘라엔과 카시안이 섰다.카시안은 수수한 차림이었음에도 그의 맑고 다정한 눈매는 이 지저분한 하역장에서도 이질적인 기품을 내보였다.비릿한 물 비린내와 거친 인부들의 고함, 그리고 썩어가는 목재의 악취가 진동했지만 엘라엔은 그 불쾌한 공기 속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곁에 선 카시안이 자신의 보폭에 맞춰 느릿하게 걸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엘라엔, 발밑을 조심해. 이쪽은 지반이 고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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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꽤나 다정했을 텐데

“바델.”“예, 전하.”“호위의 거리를 좁힐 것을 전하라. 영애가 장부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기사들의 존재감을 상기시키도록. 또한….”르세인은 잉크로 더럽혀진 보고서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그는 엘라엔이 카시안과 함께 있는 그 순간조차 자신의 시선이 닿고 있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그녀가 느끼는 그 짧은 안식은 자신의 허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모래성이라는 것을… 엘라엔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그것이 르세인이 설계한 가장 우아하고도 잔인한 질서였다.“영애에게는 카시안과 함께 찾아낸 그 오차를 저녁 식사 자리에서 논의하겠다고 전하라.”르세인은 다시 펜을 쥐었다. 그의 눈빛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아르젠트 궁의 문턱을 넘는 순간, 하역장에서 느꼈던 그 짧은 해방감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르세인이 보낸 기사들은 돌아오는 내내 엘라엔이 탄 마차를 바짝 뒤쫓았다.말발굽 소리는 마치 르세인의 심장 박동처럼 그녀를 압박해왔다.“전하께서 만찬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바델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화려하지만 온기라고는 없는 식당이었다.긴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던 르세인은 엘라엔이 들어서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동공은 한 점 요동도 없었다.“왔습니까.”르세인은 엘라엔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과, 목선을 보았다. 엘라엔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요리와 붉은 와인이 놓여 있었지만 식욕이 돋지는 않았다.르세인은 우아하게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썰어내며 입을 열었다.“그와는 즐거웠습니까. 나누는 대화가 꽤나 다정했을 텐데.”다정하다는 단어를 내뱉는 그의 입술 근육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르세인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엘라엔의 반응을 관찰했다.“…카시안은 전하께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의 흔적 말입니다.”엘라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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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똑같이 되돌려줄 기회

르세인과의 숨 막히는 만찬을 끝내고 돌아온 마레즈나는 가을밤이 깊게 내려앉았다.여름의 눅눅함이 가신 공기는 건조하지만 선선했다. 정원의 장미들은 이미 생명력을 잃고 메말라 가며 바람이 불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그건 꼭 르세인의 질서 아래 박제되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영애님, 목욕물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요새에서 돌아오신 뒤로 밤잠을 자꾸 설치시는 듯해 진정에 좋은 라벤더 오일을 섞었어요.”방으로 들어선 엘라엔은 마리의 걱정 가득한 말에 대답 없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하녀들이 조심스럽게 드레스의 코르셋을 풀자 억눌려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거울 속의 자신은 요새로 떠나기 전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고 그의 시선을 받아내는 얼굴은 유독 하얗게 질려 보였다.목욕물 속에 몸을 담갔으나 한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목욕을 마친 엘라엔이 실크 가운을 걸치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사벨라가 예고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눈빛은 날카로웠다.“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아 카시안 경을 만나다니. 대담해, 정말. 황자 분들의 눈이 무섭지도 않니?”이사벨라는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르세인의 장부를 흘겨보며 코웃음을 쳤다.“전하께서 네게 이런 중책을 맡기신 건 너를 믿어서가 아니란다. 네가 감당하지 못할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무너지길 기다리시는 거지. 라안느가의 가시 돋친 장미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사교계 모두가 지켜보고 있어.”“염려 마세요, 어머니. 제가 무너지면 어머니께서 그토록 아끼시는 하르만과 루시안도 함께 무너지는 거예요.”엘라엔의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서늘한 대꾸에 이사벨라는 헛웃음을 치며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섰다.엘라엔은 문 너머를 한참 응시하다 책상 앞에 앉았다.“마리, 오늘은 이만 물러가 봐. 차만 부탁해.”“하지만 영애님, 안색이 너무….”“괜찮아. 혼자 있고 싶어.”마리 역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에는 촛불이 타오르는 미세한 소리와 르세인이 던져준 검은 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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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즉각적인 숙청

엘라엔은 르세인의 목덜미 근처에서 펜대를 느릿하게 돌렸다. 닿지는 않았느나 펜 끝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긴장감이 르세인의 무언가를 자극했다.“이들을 숙청하여 전하의 질서가 무결함을 증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수족이 썩어 문드러진 것을 묵인하여 전하 스스로 그 오차가 되시겠습니까?”르세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일렁였다.분노가 아니라 자신이 길들였다고 믿었던 사냥개에게 급소를 찔린, 광기가 가득한 희열이었다.그는 엘라엔의 손에 든 만년필을 뺏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가 꽉 내리눌렀다.“…나를 시험하는 겁니까, 영애.”“시험이 아니라 증명이라 해두죠. 전하의 질서가 타인에게만 가혹한 것인지, 아니면 전하 자신에게도 칼을 들이밀 만큼 고결한 것인지.”르세인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모르게 소름을 돋게 하는 웃음이었다.그는 엘라엔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 그어놓은 장부의 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좋아. 기꺼이 내 손을 더럽히지. 내 질서에 완벽을 가하기 위해서라면 내 팔 하나쯤 잘라내는 건 일도 아니니까.”르세인은 펜을 뺏어 장부 위에 거칠게 서명했다.즉각적인 숙청의 명령이었다. 기사단 절반이 날아갈 수도 있는 결정이었지만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모든 것은 숨을 쉬는 행위처럼 반사적이었고 또 그만큼 자연스러웠다.그는 서명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으며 엘라엔의 얼굴에 자신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하지만 영애, 잊지 마십시오. 내 팔을 자르게 만든 그 대가는 당신이 감당해야 할 테니까. 오늘부터 당신을 지킬 기사단이 사라졌으니 이를 어쩌나.”르세인은 그저 그녀의 숨결이 닿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질서에 균열을 냈다고 믿었다. 하지만 르세인은 그 균열을 이용해 그녀를 겁박하고 있었다.*** 마레즈나로 향하는 카르네티아 숲길은 가을 햇살이 붉게 물든 잎들 사이로 조각난 무늬를 수놓았다. 르세인의 겁박과는 달리 모든 것이 평화로웠으나 엘라엔은 마차 안에서 초조하게 입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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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슬픔보다 더 깊은 증오

“엘, 엘라엔….”엘라엔은 자신의 몸에 묻은 카시안의 피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카시안… 카시안. 카시안!“아, 아…!”엘라엔의 입술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카시안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대신 엘라엔을 안을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르세인의 강압적인 악력과는 정반대의, 자신을 온전히 내던져 지키려는 처절한 발악과 같은 온기였다.“괜, 찮아…. 괜찮아. 엘라엔…….”카시안은 피를 흘리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그에게서 풍기던 따스한 향은 비릿한 피 냄새와 섞여 엘라엔의 콧속까지 어지럽게 만들었다.“베르제의… 베르제 대공이 이 사실을 아신다면 그대들의… 목숨은! 모두… 모두…! 그러니 제발 그만… 그만해야 해…….”카시안의 호소는 고압적이었다. 평소 그림자 아래에서 숨죽여 살던 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엘라엔을 지켜내고 있었다.엘라엔은 제 몸 위에 엎어진 카시안의 갈색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며 절규했다.“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화염과도 같은 분노가 화르르 타올랐다. 르세인이 지워버린 방패로 인해 자신의 소중한 친구인 카시안이 되레 다쳤다. 르세인이 설계한 그 지독한 질서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동시에 자신을 위해 기꺼이 부서지는 카시안을 향해 엘라엔의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균열이 일어났다. 그건 우정보다 깊은, 또 다른 감정의 시초였다.카시안이 내뱉은 베르제 대공이라는 말은 그들의 모든 행동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엘라엔은 라안느 공작가의 영애이기 전에 베르제 대공의 혈육이었다.“이, 일단 철수하라!”카시안이 황제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이들은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마차 안의 시간은 정지된 듯 느리게 흘렀다.카시안의 어깨에서 흐르는 선혈은 엘라엔의 손등을 타고 계속해서 흘러내렸다.“하아. 하.”숲의 서늘한 정적 속에 카시안의 가쁜 숨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엘라엔은 카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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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그 틈새로 정체 모를

잠시 뒤, 블러드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그는 르세인처럼 숫자를 세거나 행정적인 절차를 묻지 않았다. 베르제의 방식은 훨씬 고전적이고 잔인했다.“이들은 일황자의 질서에 희생된 자들이라 주장하며 내 손녀를 건드렸다. 일황자께서 그들을 숙청한 것은 제국의 법도였겠으나, 그들이 베르제를 건드린 것은 나에 대한 선전포고겠지.”블러드는 지도 위 카르네티아 근교의 가문지 몇 곳을 손가락으로 거칠게 찍었다.“오늘부로 이 가문들과 연줄이 닿아 있는 모든 상단의 물길을 끊어라. 베르제의 인장이 찍힌 밀서를 각 가문에 보내는 것 또한 잊지 말고. 감히 내 손녀의 목숨을 넘본 대가는 그들 가문의 작위를 반납하게 될 것이다.”“…….”“만약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베르제 기사단이 직접 그들의 영지 경계선까지 행군할 것이라 전하라.”“아버지. 그것은 황실의 권한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시어드의 우려 섞인 조언에 블러드는 이렇게 어이가 없을 수도 없다는 듯 웃었다.“이건 수습이다. 일황자께서 제 손등의 가시를 뽑겠다고 엘라엔을 미끼로 던졌다면 그 뒤처리는 응당 엘라엔의 뒷배인 우리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하지만…!”“일황자께서 설계한 그 잘난 질서가 내 손녀의 목숨을 담보로 한 유희였다면 나 또한 베르제의 무력으로 그 판을 흔들어야지.”엘라엔은 블러드의 선언을 들으며 손을 꽉 움켜쥐었다. 르세인은 자신을 고립시켜 오직 그에게만 매달리게 하려 했으나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엘라엔은 라안느의 영애이기도 하지만 베르제라는 거대한 뒷배가 있었다.“할아버지. 처단으로는 부족해요.”엘라엔의 낮은 목소리에 블러드와 시어드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꽂혔다. 엘라엔은 자신의 손등에 묻은 카시안의 마른 핏자국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그들이 감히 저를 공격한 이유는 제가 전하의 총애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 믿었기 때문이겠죠.”“…….”“곧 다가올 성인식 날 사교계의 모든 이들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저는 그 누구의 비호도 필요치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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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질서란

같은 시각, 베르제 대공저의 치료실 복도는 여전히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엘라엔은 하녀들이 건네준 새 드레스로 갈아입었으나, 손톱 밑에 말라붙은 카시안의 핏자국은 미처 다 닦아내지 못한 채였다.그녀는 카시안이 잠든 치료실 문턱에 앉아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정말… 바보같이.”엘라엔이 속상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르세인의 곁에서는 모든 것을 계산해야 했지만 카시안은 그 어떠한 계산 없이 자신을 던져 그녀를 지켜냈다. 그 무모함이, 그 비논리적인 다정함이 엘라엔의 가슴 한구석을 지독히도 아프게 할퀴고 지나갔다.문이 열리고 시어드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두꺼운 모포를 덮어주었다.“급소가 아니라 고비는 넘겼다더구나. 베르제의 의관들은 실력이 좋으니 그만 안심해도 된다, 엘라엔.”“삼촌. 카시안이 아니었다면 저는 오늘….”엘라엔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녀는 손등을 타고 흐르던 카시안의 뜨거운 피를 기억했다. 르세인이 말한 차가운 질서와 카시안이 보여준 뜨거운 희생.그 사이에서 엘라엔은 비로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했다.“삼촌, 할아버지께 말씀드린 계획… 수정할게요.”엘라엔이 고개를 들어 시어드를 보았다. 루비 같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번뜩였다.“단순히 저의 힘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부족해요. 성인식 날 전하가 설계한 이 기만적인 평화에 가장 거대한 오차를 낼 거예요. 카시안을 다치게 한 대가가 무엇인지, 황실의 질서만큼 베르제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겠어요.”시어드는 조카의 눈에서 어린 아델라이드가 아닌 초상화로만 접한, 제국을 호령하던 초대 베르제의 투지를 본 것만 같았다. ***카르네티아의 밤. 르세인이 설계한 적절한 위협은 베르제 대공의 분노라는 거대한 해일에 휩싸여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였다.베르제의 기사단은 대공의 명에 따라 단 한 명도 놓치지 않았다. 숲길을 도주하던 몰락 귀족의 잔당들은 쉽게 뒷덜미를 잡혔다. 그들에게는 재판도, 장부상의 심문도 허락되지 않았다.“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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