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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hat ng Kabanata ng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Kabanata 51 - Kabanata 60

113 Kabanata

51. 첫 시작일 뿐

르세인이 한 걸음 다가가자 에드먼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그는 에드먼을 지나쳐 다시 엘라엔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엘라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마치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듯 읊조렸다.“가문을 지키기 위해 공작 부인의 목을 치고, 나와의 거래를 흔들겠다니. 영애, 그대는 정말 나를 많이 닮았군.”“전하와 닮았다는 말은 모욕으로 듣겠습니다.”“모욕이라…. 그대가 쥔 장부가 마레즈나를 지키는 방패가 될지, 혹은 그대의 동생들을 찌르는 칼날이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르세인은 엘라엔의 귓가를 제 입술로 스치듯 지나쳐 연회장 뒤편의 테라스로 향했다. 그는 바델에게 눈짓하며 장내의 소란을 정리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넣었다.공작 에드먼은 엘라엔을 증오 섞인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베르제의 기사단이 연회장 밖을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그는 씩씩거리며 이사벨라를 끌고 집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연회장에 남겨진 귀족들은 여전히 숨을 죽인 채 엘라엔의 동태를 살폈다. 세실은 경악한 표정으로 엘라엔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엘라엔…! 너 정말 미쳤어……? 전하와 공작님 앞에서 그런 소리를!”“미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 세실.”엘라엔은 카시안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카시안은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엘라엔을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엘라엔이 자신을 포함한 제 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잔인한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녀가 얼마나 고독해지고 있는지를 오늘에서야 제대로 체감했다.“카시안. 난 널 절대 비운의 그림자로 두게 하지 않을 거야. 친구는 첫 시작이지.”어느새 카시안에게 다가간 엘라엔은 그의 손을 잠시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르세인이 기다리고 있을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겨울의 시린 바람이 테라스의 커튼을 한껏 부풀렸다.이제부터는 사교계의 눈을 피한, 두 사람만의 진정한 담판이 시작될 차례였다.르세인이 황태자가 되기 위해 라안느 가문과 맺으려던 그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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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이토록 정교하게

르세인이 이번엔 엘라엔의 손목을 강하게 쥐어잡았다. 엘라엔의 미간이 좁혀졌다.“놓으세요, 전하.”엘라엔은 그의 강한 악력에 손목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고통을 갈무리하고 루비색 눈동자에 지성을 깔았다.르세인은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감정이 배제된 건조함만이 자리했다.“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이 영애의 취미입니까, 아니면 베르제의 성벽이 당신에게 근거 없는 용기를 주는 겁니까.”“용기가 아니라 효율을 말씀드리죠.”엘라엔의 입에서 흘러나온 효율이라는 단어에 르세인의 표정이 미세하게 돌변했다.그가 평생을 신봉해온 가치관을 그녀가 먼저 꺼내 들었기 때문이었다.엘라엔은 그 찰나의 균열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지금 전하의 방식은 질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베르제라는 거대한 방패를 적으로 돌려 제국의 안위를 흔드는 처사나 다름없습니다.”“…….”“전하께서 오늘 제 손목에 멍을 남기신다면….”“…….”“베르제의 기사들이 제게 가해진 치욕을 잊겠습니까.”엘라엔은 르세인이 자신에게 보이는 행동의 근저에는 분명 가문의 가치와 정치적 이득이라는 논리가 깔려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르세인은 움켜쥐고 있던 엘라엔의 손목을 천천히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붉게 짓무른 손목을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그녀의 눈을 보았다.“영악하군. 당신의 가치를 방패 삼아 내 행동을 멈추게 하다니.”“멈추는 것이 아니라 제안을 하는 겁니다.”“…….”르세인은 침묵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겁먹지 않고 이토록 정교하게 자신을 설득하려 드는 존재를 처음 보았다.엘라엔은 손에 쥐고 있던 베르제의 인장이 찍힌 또 다른 서류 뭉치를 꺼내 르세인의 가슴팍에 밀어 넣었다.“전하의 책봉을 막지는 않겠습니다. 전하가 황태자가 되는 것은 제국에 필요한 질서일 수도 있으니. 하지만 거래 조건을 수정해야겠어요. 아버지와 맺은 그 일방적인 약조는 잊으세요. 이제부터는 저와 거래하시죠.”르세인이 흥미롭다는 듯 높다란 코끝을 제 검지로 쓸었다.“조건이 뭡니까.”“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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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마지막 조각

“어머니, 기력이 쇠하신 모양이군요. 루시안이 아플 때 곁을 지키지 못하시더니 본인의 몸도 돌보지 못하셨나 봐요.”엘라엔의 서늘한 어투에 이사벨라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엘라엔. 네가 감히 이 자리에서…!”“아버지. 어머니께서 백작가의 명예를 언급하시니 저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제가 준비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엘라엔은 또 다른 서류, 이번에는 장부가 아닌 공증서 한 장을 꺼내 에드먼에게 내밀었다.“이건 상단이 라안느 가문의 이름으로 빌린 채무 명세서와 그 채무의 담보로 설정된 어머니 명의의 별장 및 지분 목록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가문을 위한다고 하셨지만 실상은 아버지 몰래 가문의 자산을 빼돌려 자신의 사재를 불리고 계셨더군요.”“……!”에드먼의 눈이 경악으로 뒤집어졌다. 그는 서류를 낚아채듯 가져가 세밀하게 살폈다. 거기엔 이사벨라가 자신의 친정을 부흥시키기 위해 라안느 가문의 공금을 유용한 기록들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부인. 당신이 정녕 미친 것이오!”에드먼의 일갈이 연회장을 뒤흔들었다. “고, 공작…!”이사벨라는 손을 부르르 떨며 뒷걸음질 치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이번엔 연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기반이 엘라엔이 가져온 종이 몇 장에 의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엘라엔은 주저앉은 이사벨라를 무감정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어머니. 아니, 공작 부인. 당신은 라안느가의 안주인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 가문의 명예를 생각하신다면 오늘 밤 부인을 별채로 유폐하시고 가계부의 모든 권한을 제게 넘겨주시죠. 그것이 전하와 베르제가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겁니다.”공작 에드먼은 심각하게 떨려오는 손으로 서류를 구겨 쥐었다.그는 자신의 권위가 엘라엔에게 넘어가는 것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르세인이 이 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르세인의 질서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사벨라를 도려내야만 했다.“…여봐라! 당장 부인을 별채로 모셔라. 치료가 필요해 보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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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더 단단한 담금질

한편, 솔레움 궁에서는 황제 헤이브릭과 황후 로잘린의 무거운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황태자 책봉 선언이 이토록 늦어지는 건 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헤이브릭은 창백한 안색으로 차를 마시며 앞에 앉은 로잘린을 응시했다.“황후, 일황자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오. 다만 질서가 지나치게 차갑소. 제국을 통치하는 것은 법도와 장부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니.”“폐하, 일황자는 폐하께서 바라시던 가장 완벽한 후계자입니다. 이황자가 사교계의 총아라 한들, 제국의 실무를 쥐고 흔드는 것은 결국 일황자입니다. 책봉을 더 늦추시는 것은 이황자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로잘린의 말에 헤이브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황자는 부드럽지. 백성들은 공포보다 다정함에 더 쉽게 고개를 숙이고. 내가 책봉을 미루는 것은 일황자에게 부족한 것을 채울 시간을 주기 위함이오.”“…….” “또한 라안느 영애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여 가문의 힘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제 질서를 무너뜨릴 줄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오, 황후.”황제는 알고 있었다. 르세인이 지금처럼 완벽하기만 하다면 그는 제국을 번영시킬지는 몰라도 백성을 사랑하는 황제는 될 수 없다는 것을.헤이브릭은 르세인이 엘라엔을 통해 진정한 인간의 감정을 배우길 기다리고 있었다.***그렇게 겨울은 소리 없이 깊어갔다.눈이 녹고 서리가 걷히며 대지에는 조금씩 봄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마레즈나의 정원사들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고 얼어붙었던 분수대에서는 맑은 물줄기가 솟구쳤다. 그러나 눈이 녹은 자리에 스며든 것은 따스한 온기가 아니라 축축한 냉기였다.마레즈나 내부의 권력 지도는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엘라엔은 서재의 책상 위에 쌓인 장부들을 넘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베르제에서 가져온 채무 증서들이 힘을 발휘하던 것은 초겨울 한철뿐이었다.이사벨라는 생각보다 훨씬 끈질긴 여자였다.별채에 유폐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녀는 자신의 친정인 백작가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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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심장을 찌를 날

엘라엔은 대공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입술은 단단히 다물렸다. 블러드의 가르침을 받는 동안 그녀는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며 사람의 목소리에 담긴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법을 익히기로 했다.그 배움의 시간이 끝나면 엘라엔은 어김없이 서쪽 회랑 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녀가 르세인의 질서에서 훔쳐 온 오류, 카시안이 있었다.“엘라엔…!”문을 열 때마다 들려오는 카시안의 목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생기를 되찾았다. 그는 침대 맡에 앉은 엘라엔의 자그마한 행동 하나에서도 그녀의 기분을 살폈다.엘라엔은 셔츠 사이로 비치는 그날의 흉터를 보았다. 그건 꼭 자신이 지켜내야 할 자아의 증거처럼 느껴졌다.“엘라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잘못됐어….”카시안이 조심스럽게 엘라엔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보물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카시안의 푸른 동공에는 엘라엔을 향한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감정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신분도, 법도도 잊은 채 오직 자신의 구원자를 향한 살고자 하는 본능적인 이끌림.“카시안,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나를 외면했다면… 너는 연회장에서 가장 눈부신 찬사를 받았겠지. 황자의 곁에서. 제국 모두가 우러러보는 완벽한 모습으로….”엘라엔은 대답 대신 카시안의 흘러내린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완벽이라…. 황자께서 참으로 좋아하는 말이네.”엘라엔의 목소리가 서늘한 안개처럼 낮게 깔렸다.“하지만 카시안,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 완벽한 질서 속에서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어. 화려하게 박제된 인형이 되어 그분이 그어놓은 선 위를 걷는 것만이 내게 허락된 유일한 삶일 지도 몰라.”“…….”“너를 베르제로 데려온 것은 동정이 아니었어. 그건 나를 옥죄던 그 숨 막히는 질서에 처음으로 던진 균열이었지. 너를 붙잡음으로써 나는 비로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어.”카시안은 고개를 들어 엘라엔을 보았다. 그녀가 내뿜는 분위기는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서늘했다.“곧 황태자 책봉식이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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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논리를 부술 수 있는

그는 몸을 돌려 대공저의 가장 은밀한 서재로 엘라엔을 이끌었다. 서재의 벽면을 가득 채운 오래된 고서들의 냄새는 건조했다.블러드는 책상 위에 놓인 차가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황자는 감정을 배제함으로써 질서를 세웠다. 하지만 엘라엔. 너는 지금 황자께서 가장 혐오하는 감정이라는 불순물을 이용해 반기를 들려 하고 있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는 있느냐.”“그것만이 황자 전하를 무너뜨릴 유일한 변수예요. 전하의 계산식에는 사랑도, 연민도 존재하지 않으니까요.”엘라엔은 얼굴 위로 손을 올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듯 매만졌다. “전하는 저를 완벽하게 조각된 상수로 보십니다. 하지만 제가 그 상수의 자리를 스스로 던져버리고 그분이 설계하지 않은 무질서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든다면 전하의 질서는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죠.”블러드는 엘라엔의 당찬 대답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한쪽에 놓인 거대한 제국 지도를 가리켰다.“좋다. 그렇다면 그 감정을 권력으로 바꾸는 법을 배워야겠지. 경을 단순한 대상으로 두지 말거라. 그를 네 발치에 엎드린 그림자로 만들었다면 이제는 그 그림자가 제국의 가장 어두운 곳을 파고드는 칼날이 되게 해야지.”대공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오늘부터 너는 베르제의 비밀 기사단을 움직이는 법과 정보원들의 암호를 해독하는 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카시안 경에게는 황제 폐하의 핏줄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기예를 전수할 교관을 붙여주마. 그가 다시 황궁의 문턱을 넘을 때는 더 이상 어둠 속에 숨어지내는 자가 아니어야 하니.”엘라엔은 대공의 제안 속에 담긴 무게를 느꼈다. 그건 단순히 자신을 돕는 것이 아니라 베르제의 이름으로 제국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정치가의 선포였다.르세인의 황태자 책봉이 기정사실화되었다는 소문이 카르네티아 전역에 퍼져나갈 때 황실은 기다렸다는 듯 엘라엔을 불러들였다.황태자비 후보로서의 자질을 갖추라는 명분 아래 엘라엔은 매일 숨 막히는 예법 수업과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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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무너지는 순간을

봄의 산뜻한 공기가 두 사람의 호흡을 한데 섞어 놓았다.엘라엔은 창밖을 보았다. 멀리 에르디엔 황궁의 탑이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다. 르세인은 지금쯤 자신의 완벽한 집무실에서 흐트러짐 없는 행동으로 서류를 넘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새, 엘라엔은 그의 질서를 무너뜨릴 가장 강력한 폭풍을 준비했다.“마리, 마레즈나로 갈 준비를 해.”엘라엔의 명령은 단호했다. 이건 적진의 심장부로 들어가 르세인의 완벽한 세상을 안쪽에서부터 갉아먹겠다는 첫걸음이었다.베르제의 숲은 더욱 짙은 어둠을 토해내며 엘라엔을 감싸안았다.식당으로 내려가자 베르제 대공은 굳은 얼굴로 엘라엔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라엔. 정말 완전히 라안느로 돌아갈 셈이냐. 네 아비는 지금 네가 굴복했다고 믿고 기고만장해 있어.”“알아요, 할아버지.”엘라엔은 우아하게 포크를 들어 잘게 썬 고기 조각을 입속에 넣었다. 그녀의 동작은 완벽했다.“아버지께서 저를 완벽한 조각으로 믿어야만 제가 뒤통수를 칠 때 가장 아프지 않겠어요? 저는 이제 그분이 설계한 질서대로 움직여 드리는 척할 거예요. 그게 가장 확실하게 무너뜨리는 방법이니까요.”베르제 대공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엘라엔의 목소리에서 예전의 생기나 다정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는 르세인이 주입한 차가운 논리와 배신당한 자의 지독한 악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라안느 공작저 마레즈나의 성문이 열렸다. 베르제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길가에 도열한 하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마차 문이 열리자 은빛 자수가 놓인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엘라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내딛는 걸음은 우아했다. 엘라엔은 몇 주 만에 다시 마주한 마레즈나의 풍경을 새삼 천천히 눈에 담았다.평소 그렇게 아름답다고 느꼈던 마레즈나는 우습게도 인공적이고 가식적으로 느껴졌다.이곳은 안식처가 아니었으니까. 자신을 전시하기 위해 세워진 거대한 진열장에 불과할 뿐.“오, 나의 완벽한 딸. 엘라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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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르세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는 엘라엔의 앞에 멈춰 서서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전하….”엘라엔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르세인의 녹색 눈동자는 여전히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르세인은 손을 뻗어, 물에 젖어 어깨에 달라붙은 엘라엔의 와인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겼다.“영애, 지금 당신은 지나치게 인간 같군요.”“…저는 사람입니다, 전하. 숨을 쉬고, 고통을 느끼는…!”“그 고통마저 질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까.”르세인의 손이 내려가 그녀의 목에 둘러진, 자신이 하사했던 목걸이를 건드렸다. “…하아.”엘라엔은 저도 모르게 한숨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르세인은 그 반응이 즐거운 듯 목걸이를 살짝 잡아당겨 그녀의 얼굴을 자신에게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남작 부인, 교육이 부족한 것 같군요. 영애가 아직 자신의 육체에 휘둘리고 있지 않나.”“죄송합니다, 전하. 다시 엄히 가르치겠습니다.”남작 부인의 대답에 엘라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기서 더 가혹해진다면 정말로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았다. 그런데 르세인은 의외의 행동을 보였다. 그는 엘라엔의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얹고 직접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갑작스러운 부축에 엘라엔의 몸이 그의 가슴팍에 잠시 밀착되었다. 르세인의 제복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과 규칙적인 심장 박동은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르세인은 엘라엔의 몸을 자신의 팔로 지탱했다.“직접 봐야겠어. 당신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르세인은 남작 부인에게 물 잔을 다시 가져오라 명했다. 그리고 엘라엔의 머리 위에 직접 잔을 올렸다. “자, 영애. 이제 내가 당신의 지지대가 되어주지. 나의 손안에서 당신의 흔들림을 지워보십시오.”르세인은 엘라엔의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엘라엔은 그의 팔이 자신의 몸을 옭아매는 끔찍한 사슬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이제 자신의 의지뿐만 아니라 등 뒤에서 느껴지는 르세인의 압도적인 무게감과도 싸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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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살아있는, 감정이 있는 사람임을

그 순간 엘라엔의 머릿속에 카시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르세인이 버린 얼룩이었고, 황실에서 지워진 존재였다.엘라엔이 그를 떠올린 이유는 단순했다.지금 이 세상에서 자신을 라안느 영애가 아닌 상처 받은 인간으로 봐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였기에….“후우, 후.”엘라엔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르세인과 에드먼이 만든 이 숨 막히는 질서 밖으로 잠시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본능적인 갈망이 피어올랐다.“마리, 베르제 대공가로 갈 거야.”“네? 영애님, 이 밤중에요? 공작님께서 아시면….”“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해. 아버지도 막지 못하실 거야.”엘라엔은 떨리는 손으로 겉옷을 챙겼다. 치밀한 계획에 의한 움직임이라기보다 질식하기 직전의 인간이 내뻗는 절박한 손짓에 가까웠다.그녀는 지금 카시안이 필요했다. 자신처럼 르세인에게 짓밟히고,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한 그만이 지금의 이 지독한 갈증을 이해해 줄 것이니까.*** 베르제 대공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엘라엔은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참아내야 했다.르세인이 강요한 예법 교육은 단순한 자세 교정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근육과 신경을 그의 기호에 맞게 재배치하는 고문과도 같았다.흔들리는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엘라엔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영애님….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안색이 너무….”곁에 앉은 하녀 마리가 손수건을 내밀며 물었다.엘라엔은 대답 없이 어둠이 깔린 창밖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초점이 흐릿했다.“괜찮아….”그녀가 이 밤중에 베르제로 향하는 이유는 더욱 명확해졌다. 자신과 똑같이 부서진 존재.완벽함을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르세인의 질서 밖으로 밀려난 얼룩… 카시안.유일한 동질감…….***한밤중에 도착한 베르제 대공저는 고요했다. 엘라엔은 블러드의 침소에 들르는 대신 곧장 서쪽 별채로 향했다. 기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카시안이 머무는 방 앞에 섰을 때 엘라엔은 잠시 멈춰 섰다. 심장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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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완벽한 인형의 모습으로

카시안의 목소리에 엘라엔은 떨리는 손을 올려 목에 감긴 루비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르세인이 하사했던…….“이걸… 이걸 좀 풀어줘. 더 이상 못 참겠어.”그녀의 절박한 애원에 카시안은 잠시 머뭇거리다 손을 뻗었다.“황자께서 아시면… 화를 내실 지도 몰라….”“상관없어. 지금 당장 이걸 뜯어내지 않으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으니까!”카시안의 손가락이 엘라엔의 여린 목덜미에 닿았다. 르세인의 손길이 지배와 소유의 선언이었다면 카시안의 손길은 조심스러운 탐색에 가까웠다.마침내 딸각하는 소리와 함께 목걸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아…….”엘라엔은 그제야 폐부 깊숙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붉게 쓸린 자국은 달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무너져 있는지, 자신을 바라보는 카시안의 눈에 어떤 생각이 섞여 있는지조차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카시안은 바닥에 떨어진 루비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제국의 차기 태양이 될 그가 하사한 보석. 자신은 평생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권력의 상징이 지금 자신의 발치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그는 엘라엔의 떨리는 손을 잡으며 생각했다.‘엘라엔은 지금 나를 구원자로 여기고 있구나.’카시안은 그녀의 목에 선명한 압박 자국이 낙인처럼 새겨진 것을 보며 말없이 일어나 탁상 위에 놓인 작은 약병을 가져왔다.“잠시 실례할게, 엘라엔.”카시안은 손에 고약을 묻혀 그녀의 목덜미에 조심스럽게 펴 발랐다. 엘라엔은 고개를 숙였다.고약을 다 바른 카시안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엘라엔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충혈된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곧 카시안은 자신의 얇은 겉옷을 벗어 엘라엔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 배려 깊은 행동에 엘라엔의 마음 한구석이 툭, 하고 끊어졌다.르세인 앞에서는 죽어도 보이기 싫었던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달빛 아래 오롯이 드러난, 눈물로 젖어 반짝이는 그 눈은 포식자의 정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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