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바델.”“예, 전하.”“호위의 거리를 좁힐 것을 전하라. 영애가 장부의 진실을 망각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기사들의 존재감을 상기시키도록. 또한….”르세인은 잉크로 더럽혀진 보고서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그는 엘라엔이 카시안과 함께 있는 그 순간조차 자신의 시선이 닿고 있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그녀가 느끼는 그 짧은 안식은 자신의 허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모래성이라는 것을… 엘라엔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그것이 르세인이 설계한 가장 우아하고도 잔인한 질서였다.“영애에게는 카시안과 함께 찾아낸 그 오차를 저녁 식사 자리에서 논의하겠다고 전하라.”르세인은 다시 펜을 쥐었다. 그의 눈빛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아르젠트 궁의 문턱을 넘는 순간, 하역장에서 느꼈던 그 짧은 해방감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르세인이 보낸 기사들은 돌아오는 내내 엘라엔이 탄 마차를 바짝 뒤쫓았다.말발굽 소리는 마치 르세인의 심장 박동처럼 그녀를 압박해왔다.“전하께서 만찬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바델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화려하지만 온기라고는 없는 식당이었다.긴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던 르세인은 엘라엔이 들어서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동공은 한 점 요동도 없었다.“왔습니까.”르세인은 엘라엔의 얼굴을 바라보는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과, 목선을 보았다. 엘라엔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요리와 붉은 와인이 놓여 있었지만 식욕이 돋지는 않았다.르세인은 우아하게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썰어내며 입을 열었다.“그와는 즐거웠습니까. 나누는 대화가 꽤나 다정했을 텐데.”다정하다는 단어를 내뱉는 그의 입술 근육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르세인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엘라엔의 반응을 관찰했다.“…카시안은 전하께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의 흔적 말입니다.”엘라엔
“나갈 생각이군.”“책상에 앉아 이안 전하가 흘려주는 정보나 줍고 있는 건, 전하께서 말씀하신 자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 남부의 물류가 모이는 수도 외곽의 하역장으로 가보겠습니다. 그곳의 장부와 전하의 장부가 얼마나 다른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요.”르세인은 펜촉으로 책상을 톡, 톡 두드렸다. 그 규칙적인 소음은 엘라엔의 목선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을 자극했다.“좋습니다.”르세인의 허락에 옆에 있던 이안이 서둘러 끼어들었다.“영애, 혼자 보내지 않겠어요. 내 기사들을 붙여줄 테니….”“아니요, 이황자 전하.”엘라엔은 단호히 거절했다.“전하의 기사들을 배석하는 순간, 그곳의 사람들은 입을 닫고 숫자들을 더 깊이 숨길 겁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움직이겠어요.”“하지만 영애…!”“카시안과 함께 갈 생각이에요. 걱정 마세요.”엘라엔의 폭탄선언에 집무실의 분위기가 단번에 뒤바뀌었다.르세인은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의 동공은 모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질투라기엔 너무 우습고, 분노라기엔 지나치게 평온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못하다는 점이었다.“…그림자를 데리고 나가겠다.”르세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엘라엔의 곁을 지나 창가로 향하며 무심하게 금발을 쓸어넘겼다.“당신의 그 대단한 우정이 이 비릿한 장부 속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지켜보도록 하죠.”***다음 날, 수도 카르네티아 외곽의 테이즈 강 하역장.화려한 황궁의 석조 건물 대신 썩은 목재 냄새와 거친 인부들의 고함이 가득한 이곳에 엘라엔과 카시안이 섰다.카시안은 수수한 차림이었음에도 그의 맑고 다정한 눈매는 이 지저분한 하역장에서도 이질적인 기품을 내보였다.비릿한 물 비린내와 거친 인부들의 고함, 그리고 썩어가는 목재의 악취가 진동했지만 엘라엔은 그 불쾌한 공기 속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곁에 선 카시안이 자신의 보폭에 맞춰 느릿하게 걸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엘라엔, 발밑을 조심해. 이쪽은 지반이 고르지
“영애, 너무 겁먹지 마세요. 형님의 방식이 거칠긴 하지만 이 장부는 당신에게 독이 아니라 칼이 될 거예요. 당신이 이 숫자들을 지배하는 순간, 제국의 그 어떤 귀족도 당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이안은 다시금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엘라엔은 이안 역시 르세인과 다른 의미로 자신을 도구로서 탐내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르세인은 자신을 완벽한 부품으로 쓰려 하고, 이안은 제 권력을 빛낼 화려한 트로피로 삼으려 했다.엘라엔은 두 남자 사이의 팽배한 긴장감 속에서 마침내 검은 장부를 집어 들었다.“……알겠습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제국의 정세를 꿰뚫는 눈이라면 기꺼이 보여드리지요. 다만, 제가 찾아낸 오차가 전하의 질서에 상처를 입히더라도 원망하지 마세요.”르세인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다시 몸을 기대었다.“원망이라니. 나는 오차를 증오하지만 당신이 내 질서에 내는 상처라면 꽤 흥미로운 흔적이 될 것 같은데.”르세인은 펜을 쥐었다. 펜대를 만지작거리며 엘라엔의 돌아선 목덜미를 집요하게 눈으로 좇았다. 이안은 그런 엘라엔의 옆에 붙어 장부의 첫 페이지를 넘겨주며 은밀한 도움을 자처했다.화려한 황궁의 집무실 안에서 세 사람의 뒤틀린 공생이 시작되었다. 엘라엔은 차가운 종이 위에 적힌 비릿한 금전의 흐름을 보며 자신을 옭아매는 두 형제의 올가미를 어떻게 역이용할지 계산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제국 남부 영지들의 수확량과 그에 따른 세금, 그리고 황실로 귀속되어야 할 비자금의 흐름이 고대 문자와 숫자로 촘촘히 얽힌 것을 보았다.“무엇을 보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여기 적힌 수치들은 공정해 보이는걸요.”엘라엔은 일부러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르세인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엘라엔의 등 뒤로 다가왔다.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존재감이 엘라엔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르세인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뻗어 엘라엔의 어깨너머로 장부의 한 지점을 지목했다. 그가 든 만년필의 매끄러운 펜촉은 종이 위를 느릿하게 미끄러지며 특정 숫자
엘라엔이 별궁의 문을 나설 때 카시안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카시안과의 재회가 남긴 따스한 향은 별궁의 문을 나서는 순간 가을바람에 흩어졌다.엘라엔은 자신의 손바닥에 남은 온기를 애써 지우며 황궁의 질서 정연한 회랑을 걸었다.카시안은 여전히 나약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서는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고 오직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이것은 훗날 자신을 파멸로 이끌지도 모를, 치명적인 안식의 전조였다.“……!”그때, 그녀의 눈앞에 바델이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숙인 뒤 엘라엔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영애.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델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아르젠트 궁의 부속 집무실이었다. 르세인의 주된 집무실이 제국의 국방과 행정을 다루는 곳이라면 이곳은 황실의 은밀한 자금과 귀족들의 약점을 보관하는 곳이었다.집무실의 문이 열고 들어서자 그곳엔 르세인뿐만 아니라 이황자 이안이 함께 서 있었다. 평소의 다정한 미소를 지우고 날선 표정으로 서 있는 이안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위압적이었다.“형님. 굳이 영애를 이런 지저분한 일에 끌어들여야겠습니까?”이안의 음성에는 르세인을 향한 노골적인 불만이 섞였다. 그는 엘라엔이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다가왔다.“영애. 별궁에서 돌아오는 길입니까? 형님이 당신을 너무 혹사시키는군요. 폐하의 총애를 받는 당신이 이런 어두운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혀 있을 이유는 없어요.”이안은 엘라엔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르세인의 시선이 그의 손목에 내리꽂혔다.르세인은 책상에 앉아 펜대를 굴리며 이안의 방해를 무심하게 관조했다.“이안, 네가 관리하던 제국 남부의 무역 관세에서 구멍이 발견되었다. 영애는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한 유일한 눈이지. 불만이 있다면 네 무능함을 먼저 탓해야 할 거다.”르세인이 엘라엔의 앞에 두꺼운 검은 장부를 내던지듯 내려놓았다.“자재 수량이나 확인하던 요새에서의 업무는 잊으십시오. 이제부터 영애가 할 일은 제국 전역의 영지 재편
르세인의 눈동자가 비로소 엘라엔의 눈동자로 향했다.“카시안이라…. 황궁 서쪽 끝, 별궁에 박힌 그 나약한 그림자를 위해 폐하의 은혜를 낭비하다니. 효율적이지 못한 선택이 아닙니까.”“전하께 효율은 질서의 척도겠지만, 제게 카시안은 지키고 싶은 안식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으니 이제 전하께서도 제가 카시안을 만나는 것을 막을 명분은 없죠.”엘라엔은 르세인의 시선 아래에서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세웠다.“명분이라. 나는 황명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정한 질서의 궤도를 조금 수정할 뿐이지.”르세인이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그가 내뿜는 서늘한 향과 위압감은 엘라엔의 전신을 옭아매는 사슬과 같았다.그는 엘라엔의 턱 끝을 지나 긴장으로 맥박이 뛰는 목덜미를 집요하게 보았다.펜대를 문지르던 그의 손가락 끝에 힘이 실렸다.르세인은 그 만년필을 테이블 위로 툭,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그는 망토 자락을 가을바람에 휘날리며 정원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엘라엔은 그의 마지막 말을 곱씹듯 골몰히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만나러 가야 했다.***에르디엔 황궁의 화려한 중심부에서 멀어질수록 길은 거칠고 황량해졌다.잡초가 무성한 돌길을 지나 당도한 서쪽 별궁은 잊힌 섬 같았다. 한때는 누군가의 안식처였을 이곳은 이제 빛바랜 석재와 먼지 쌓인 회랑만이 남은 카시안의 거처였다.엘라엔은 홀로 그 고요한 문을 열었다. 정원 한가운데, 수국이 시들어버린 갈색 줄기 사이로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카시안!”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카시안의 어깨가 떨렸다. 천천히 몸을 돌린 그의 안색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 하지만 엘라엔을 발견한 그의 눈동자만큼은 가을 햇살을 머금은 호수처럼 다정하게 일렁거렸다.“엘라엔! 정말 너야? 정말 너 맞아?”카시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둘러 다가오려다,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듯 멈춰 섰다.엘라엔은 그 짧은 머뭇거림에 심장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먼저 그에게 달려
엘라엔이 내리깐 눈매를 들어 올려 황제를 마주 보았을 때 그녀는 황제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황제 헤이브릭의 시선은 엘라엔의 얼굴 구석구석을 면밀히도 살펴보았다. 와인빛 머리카락과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 그리고 목선까지.그의 머릿속으로 아득한 과거 기억의 편린들이 스쳐지나 갔다. 수십 년간 자신을 괴롭혀 온 단 하나의 망령… 아델라이드 폰 베르제의 모습이 지독히도 선명하게 덧씌워졌다.‘아델라이드…….’황제는 숨을 들이켰다. 세월은 그의 육신을 쇠락하게 했으나 첫사랑을 향한 연정은 심장 깊숙이 박혀 무슨 수를 써도 뽑히지 않았다. 눈앞의 소녀는 아델라이드가 남긴 가장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증거였다.황제는 홀린 듯 엘라엔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황후 로잘린의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지만 황제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라안느가의 영애인가.”“예, 황제 폐하. 엘라엔 폰 라안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과연……. 이황자가 그토록 애정을 쏟는 이유를 알겠군. 제 아비의 눈을 닮았던 게야.”“…….”“황후.”“예, 폐하.”“잠시 자리를 좀 비켜주겠소. 내 이 소녀에게 요새의 공을 치하할까 하니.”“그러하시지요, 폐하.”헤이브릭은 엘라엔의 맞은편, 황후가 앉아 있던 자리에 무겁게 주저앉았다.로잘린은 부채를 쥔 손을 얕게 떨며 먼저 자리를 떴고, 헤이브릭은 손을 휘저어 주변의 모든 영애와 시종들을 물러나게 했다. 세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엘라엔을 한 번 돌아본 뒤, 시종들의 안내에 따라 멀어졌다.정원에는 오직 황제와 엘라엔, 두 사람만이 남았다.“요새에서의 공이 혁혁하니 상을 내리고 싶은데, 무엇을 원하느냐. 보석인가, 아니면 영지인가.”황제의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엘라엔은 르세인이 쳐놓은 촘촘한 그물을 찢어발길 유일한 칼날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음을 직감했다.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뒤, 황제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황제 폐하. 저는 화려한 보석이나 땅을 원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