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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참지 못한 밤, 안 싫었던 마음 (8)

91화. 참지 못한 밤, 안 싫었던 마음 (8)집 앞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비는 조금 약해져 있었다.태준은 차를 세우고 말했다.“기다릴게.”나는 안전벨트를 풀었다.“진짜 안 따라와?”“응.”“왜.”그가 나를 보았다.“따라가고 싶어서.”나는 말문이 막혔다.태준은 시선을 내렸다가다시 말했다.“그래서 안 가.”나는 그를 한참 보았다.이 남자.정말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만든다.따라가고 싶어서 안 간다는 말.그 말이 너무 우습고,너무 아팠다.나는 결국 차에서 내렸다.편의점 안은 밝았다.너무 밝아서방금까지의 차 안이 꿈처럼 느껴졌다.나는 삼각김밥 코너 앞에 서서한참 고민했다.뭘 먹어야 하지.먹고 싶은 건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대충 고르고 싶지도 않았다.태준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선택까지 바꿔놓았다.나는 도시락 하나를 골랐다.그리고 컵라면 하나.생수.계산대에 올려놓고 보니너무 많이 산 것 같았다.계산하고 나왔을 때,태준은 정말 차 안에 있었다.내리지 않았다.약속을 지키고 있었다.그게 뭐라고.나는 문을 열고 탔다.태준이 봉투를 보았다.“도시락 샀네.”“응.”“잘했어.”나는 바로 그를 노려봤다.“나 애 아니라고.”“알아.”“근데 왜 잘했다고 해.”태준은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말하고 싶어서.”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오늘 그는 계속말하고 싶어서라는 말로 나를 무너뜨렸다.차는 다시 출발했다.오피스텔 앞까지는 금방이었다.주차장 입구에 도착하자나는 가방을 챙겼다.“여기서 내려도 돼.”태준은 차를 세웠다.시동은 끄지 않았다.그는 약속대로더 가지 않았다.나는 문을 열려다가 멈췄다.그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고마워.그건 너무 작았다.미안해.그건 너무 습관 같았다.보고 싶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아직은.나는 결국 다른 말을 했다.“오늘… 우산 고마웠어.”태준은 나를 보았다.“응.”“그리고 데리러 온 건…”나는 말을 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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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멈춘 손끝, 다가온 고백 (1)

아침이 되자마자후회가 몰려왔다.나도.그 두 글자.어젯밤엔 그게 전부였다.길게 설명한 것도 아니고,보고 싶었다고 한 것도 아니고,좋았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그냥 나도.그런데 아침에 다시 보니그 두 글자가 너무 컸다.나는 침대에 앉아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나]* 나도.그 아래로는 아무 답도 없었다.태준은 답하지 않았다.읽음은 떠 있었다.답하지 않은 게 다행일까.아니면,그 답을 보고 밤새 아무것도 못 한 걸까.나는 그 생각을 하다가휴대폰을 덮었다.이제는 정말 병이다.그가 답을 해도 문제고,안 해도 문제다.문장이 오면 흔들리고,문장이 없으면 빈자리를 상상한다.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귀찮아질 수 있지.내 마음인데도내가 감당하기 싫었다.나는 침대에서 내려와식탁 쪽을 봤다.어젯밤 사온 도시락 봉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먹지도 않았다.사놓고,안 먹었다.태준이 알면 또 뭐라고 하겠지.그건 밥 아니야.먹어.문.우산.밥.그 사람은 자꾸생활의 가장 작은 자리에 들어와 앉았다.거창하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으면서,자꾸 내가 뭘 먹었는지,집에 들어왔는지,비를 맞았는지부터 묻는다.그래서 더 무서웠다.그런 것들은 쉽게 떼어낼 수가 없다.사랑한다는 말은거절하면 그만인데,밥 먹었어? 는하루에 몇 번이고 떠오른다.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먹을 마음은 없었다.그런데 안 먹으면내가 또 그 사람에게 들킬 것 같았다.이젠 아무도 보지 않는 집에서도강태준을 의식한다.정말 큰일이다.나는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버튼을 누르자낮은 소리가 났다.돌아가는 도시락을 보고 있는데휴대폰이 울렸다.심장이 먼저 굳었다.태준이었다.[강태준]* 잤어?나는 화면을 한참 봤다.그는 어젯밤의 나도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그렇다고 바로 붙잡지도 않았다.그냥 잤냐고 물었다.그게 또 태준답게 조심스러워서짜증이 났다.나는 답장했다.[조금.]읽음.답이 늦었다.그 몇 초가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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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멈춘 손끝, 다가온 고백 (2)

회사에 도착했을 때비는 그쳐 있었다.어제 그렇게 쏟아지던 비가언제 그랬냐는 듯 길 위에 젖은 자국만 남겨놓고 사라졌다.그게 조금 얄미웠다.비가 그쳤는데도나는 여전히 젖은 사람 같았다.밤새 마르지 못한 마음을아침까지 끌고 온 기분이었다.사무실에 들어서자우진이 먼저 와 있었다.그는 모니터를 보다가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좋은 아침입니다.”평소와 같은 인사.나는 잠깐 멈췄다가 고개를 숙였다.“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그 말이 이렇게 어렵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우진은 내 얼굴을 한 번 보고,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했다.하지만 묻지 않았다.정말 지독하게 묻지 않는다.그게 이제는 배려인지,상처인지,나도 모르겠다.자리에 앉자팀장님이 회의실 쪽에서 나왔다.“한서윤 씨, 어제 최종 카피 수정본 오늘 오전 중으로 정리 가능하죠?”“네. 가능합니다.”“강 디렉터 쪽에서도 오늘 오후에 현장 가본대요. 우리도 한 명 같이 가야 할 것 같은데.”나는 손끝이 멈췄다.현장.태준.또.팀장님은 일정표를 보며 말했다.“정우진 씨가 가도 되고, 한서윤 씨가 가도 되고.”우진이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제가 가겠습니다.”너무 빠른 대답이었다.나는 그를 봤다.우진은 내 쪽을 보지 않았다.그냥 팀장님을 보고 있었다.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정우진 씨가 가고, 서윤 씨는 자료 마무리해줘요.”“네.”내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그런데 이상하게마음 한쪽이 툭 내려앉았다.안도였다.그리고 아쉬움이었다.또 둘 다였다.정우진은 나를 대신해그 자리로 가겠다고 했다.아마 그가 보기엔내가 태준과 함께 현장에 가는 게불편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맞다.불편했을 것이다.그런데 이상하게나는 그 불편함을 피하게 된 게완전히 기쁘지 않았다.나 정말 최악이다.태준을 마주치면 흔들린다고 하면서,마주치지 않게 되면 또 빈자리를 느낀다.우진은 자료를 챙기며 조용히 말했다.“카피 최종본은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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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멈춘 손끝, 다가온 고백 (3)

오전 내내 나는 자료를 정리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머문 자리마다 남아 있는 감각.두 문장을 붙여놓고 보니이상하게 균형이 맞았다.내 문장과 우진의 문장.그리고 그걸 좋다고 했던 태준.참 이상한 조합이었다.우리 셋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같은 공간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나는 최종안을 저장해우진에게 전송했다.[한서윤]최종본 보냈어요.현장에서 필요하면 이 버전으로 전달해주세요.잠시 뒤 답이 왔다.[정우진]확인했습니다.잘 전달하겠습니다.나는 그 답장을 보다가조용히 화면을 껐다.정말 깨끗한 사람이다.그래서 더 어렵다.차라리 누군가가 엉망이면미워하기라도 쉽다.우진은 그렇지 않다.그는 자기 감정을 숨기고,그러다 결국 조금씩 보여주고,그래도 내게 짐이 되지 않으려 한다.그런 사람을나는 자꾸 뒤로 밀어두고 있었다.그리고 태준은.나는 휴대폰을 들었다.태준과의 대화창을 열었다.아침 이후로 더 온 메시지는 없었다.잘 참고 있네.또 그 생각.나는 한숨을 쉬었다.왜 자꾸 그를 그런 식으로 평가하지.마치 내가 그의 기다림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아니.확인하고 싶은 게 맞다.그가 정말 기다리고 있는지.정말 변하려고 하는지.정말 예전처럼 밀고 들어오지 않는지.나는 보고 싶었다.그게 잔인하다는 걸 알면서도.점심시간이 되기 조금 전,태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오늘 현장 안 와?나는 숨을 멈췄다.그는 벌써 알고 있었다.우진이 간다는 걸.아마 일정 공유를 받았겠지.나는 답장했다.[자료 마무리 때문에.]읽음.[강태준]* 알았어.짧았다.나는 그 한마디를 오래 보았다.알았어.어제부터 그 말이 자꾸 싫다.태준이 참을 때마다그는 알았어, 라고 했다.정말 안다는 뜻인지,더 묻고 싶은 걸 삼키는 소리인지 모르겠다.이번엔 내가 먼저 물었다.[왜.]보내고 나서 손이 멈췄다.왜.그건 너무 가까운 질문이었다.몇 초 뒤 답이 왔다.[강태준]* 보고 싶어서.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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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멈춘 손끝, 다가온 고백 (4)

점심은 혼자 먹었다.회사 근처 카페에서샌드위치와 커피를 샀다.먹고 싶어서가 아니라먹었다고 말할 사람이 생겨서였다.그 사실이 조금 웃겼다.나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비는 완전히 그쳤지만창문에는 어제의 얼룩이 남아 있었다.사람들도 그랬다.끝난 일처럼 보여도,어딘가엔 꼭 자국이 남는다.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휴대폰을 들었다.태준에게 보내려다가멈췄다.왜 보내.아니,보내고 싶으면 보내면 되지.그런데 보내면너무 많이 내어주는 것 같았다.정말 별것도 아닌 점심 사진 하나에이렇게 오래 고민하는 내가 우스웠다.나는 사진 대신 짧게 보냈다.[밥 먹었어.]읽음.답이 바로 왔다.[강태준]* 뭐.나는 입술을 깨물었다.어제와 같은 질문.뭐 먹었어.그 장면이 떠올랐다.백반.혼자?정우진 씨?알았어.밥 먹었으면 됐어.가슴이 살짝 굳었다.나는 답장했다.[샌드위치.]읽음.이번엔 태준의 답이 조금 늦었다.[강태준]* 혼자?나는 화면을 보고 멈췄다.정말 같은 질문이었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나는 정말 혼자였다.그걸 말하는 게 왜 조금 서운하지.[응.]보내고 나서창밖을 보았다.몇 초 뒤 답이 왔다.[강태준]* 다행이라고 하면 나 별로지.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정말 별로다.그런데 너무 솔직해서화내기 어렵다.나는 답장했다.[응. 별로야.]읽음.[강태준]* 알아.조금 뒤.[강태준]* 그래도 다행이야.나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웃음이 나왔다.정말 어쩌지.이 사람은 요즘자기 못난 마음을 너무 숨기지 않는다.예전이었다면 그게 끔찍했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지금은차라리 낫다.좋은 척하지 않아서.괜찮은 척하지 않아서.나를 소유하려는 말을 참으면서도자기 안에서 뭐가 끓는지는 알려줘서.나는 천천히 답장을 썼다.[그런 말은 왜 해.][강태준]* 숨기면 또 망칠 것 같아서.나는 더 이상 웃지 못했다.그 문장은 이제그의 새 버릇처럼 붙어 있었다.숨기면 망친다.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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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멈춘 손끝, 다가온 고백 (5)

퇴근 시간이 됐을 때,태준에게서 메시지는 없었다.나는 괜히 휴대폰을 확인했다.또.또 이런다.오늘은 안 온다고 했잖아.그럼 안 오는 게 맞다.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하다.어제는 와서 당황했고,오늘은 안 와서 허전하다.나는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비는 그쳤고,도로는 아직 젖어 있었다.가로등이 물기 위에 번져 있었다.어제와 같은 길.그런데 오늘은 혼자였다.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편의점 앞을 지나는데어제의 차 안이 떠올랐다.보고 싶어서.그게 제일 큰 이유야.말해도 돼?보고 싶었어.나는 걸음을 멈췄다.그 목소리가 자꾸 따라왔다.휴대폰을 꺼내지 않으려고 했다.그런데 이미 손에 들려 있었다.태준과의 대화창.마지막 메시지는 점심의 잔소리였다.오늘 저녁은 제대로 먹어.나는 입력창을 눌렀다.[퇴근했어.]쓰고 멈췄다.보내도 되는 말인가.너무 자연스럽게 보고하는 사이가 되어가는 건 아닌가.하지만 어제도,그제도,우리는 이미 많은 걸 보고했다.들어왔어.잠갔어.먹는다.마셔?자?나는 결국 보냈다.[퇴근했어.]읽음.답이 바로 왔다.[강태준]* 혼자?나는 웃음이 나왔다.그 질문이 오늘은 조금 귀여웠다.아니,귀엽다는 말은 너무 위험하다.나는 얼른 답장했다.[응.][강태준]* 다행이라고 하면 또 별로지.[많이 별로야.]읽음.답이 조금 늦었다.[강태준]* 그래도 다행이야.나는 길가에서 멈춰 서서작게 웃었다.정말 못 말린다.[오늘은 안 온다며.]보내고 나서심장이 뛰었다.왜 그런 말을 했지.묻는 순간내가 기다린 것처럼 들린다.이미 보냈다.읽음.오래 답이 없었다.그 침묵이 갑자기 너무 커졌다.나는 화면을 들여다봤다.곧 답이 왔다.[강태준]* 갈까.나는 숨이 멎었다.진짜 한 단어.갈까.그게 이렇게 위험할 줄 몰랐다.나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오라고 할 수는 없다.오지 말라고 하기도 싫다.이 애매한 마음이나를 가장 못되게 만든다.나는 한참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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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멈춘 손끝, 다가온 고백 (6)

밥을 다 먹고그릇을 싱크대에 넣었다.일부러 천천히 움직였다.물도 마시고,손도 씻고,괜히 식탁도 닦았다.시간을 끌고 있었다.전화를 받고 싶어서.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게 하고 싶어서.나 진짜 나쁘다.나는 거실에 앉아휴대폰을 들었다.태준에게서 추가 메시지는 없었다.그는 정말 기다리고 있었다.그게 너무 좋아서또 싫었다.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대신 메시지를 보냈다.[먹었어.]읽음.전화가 바로 왔다.강태준.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어제보다 덜 놀랐다.그게 더 문제였다.익숙해지고 있다.나는 전화를 받았다.이번엔 내가 먼저 말했다.“먹었어.”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그리고 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했어.나는 눈을 감았다.“그 말 그만해.”— 싫어?“아니.”말하고 나서나는 입을 다물었다.아니라니.무슨 말을 이렇게 쉽게 해.태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 침묵이 귀에 붙었다.나는 괜히 말했다.“너는 먹었어?”— 아직.“왜.”— 기다리느라.“뭘.”— 네 전화.나는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바보야?”— 조금.“많이야.”태준이 낮게 웃었다.그 웃음이 어제보다 조금 더 가까웠다.나는 눈을 뜨고 천장을 보았다.방 안 조명이 희미했다.목소리는 이상하게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글자로는 잘 버텼던 말들도목소리로 오면 바로 안쪽까지 들어온다.태준이 말했다.— 오늘 안 가서 잘했어?나는 숨을 멈췄다.그는 그걸 묻고 싶었구나.하루 종일.나는 대답을 고르다가천천히 말했다.“응.”수화기 너머에서그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나는 작게 덧붙였다.“근데 조금은…”말이 멈췄다.태준은 기다렸다.정말 아무 말 없이.나는 눈을 감았다.“조금은 아쉬웠어.”말하는 순간가슴이 무너졌다.너무 많이 줬다.이번엔 정말 많이 줬다.수화기 너머가 완전히 조용해졌다.그 침묵이 너무 길어서나는 겁이 났다.“태준아.”— 응.그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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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멈춘 손끝, 다가온 고백 (7)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휴대폰 화면을 켰다.통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어제보다 짧았다.그런데 더 깊었다.나는 통화 기록을 보다가대화창을 열었다.마지막 메시지는 없었다.오늘은 전화를 끊고서로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그게 조금 아쉬웠다.그래서 내가 먼저 입력창을 눌렀다.[내일 봐.]쓰고 나서 멈췄다.아까 이미 말했다.굳이 또 보낼 필요는 없다.그런데 보내고 싶었다.나는 그대로 보냈다.읽음.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몇 초 뒤,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응.짧았다.그리고 곧 하나 더.[강태준]* 내일 봐, 서윤아.나는 화면을 오래 봤다.내일 봐.서윤아.이름이 붙은 내일.그건 생각보다 너무 컸다.나는 답장하지 않았다.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두고천장을 보았다.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도어락도 잠겨 있었다.그런데 내 안에서는이미 누군가 오래 머무는 소리가 났다.나는 그걸 막지 않았다.아니.오늘은 막고 싶지 않았다.그게 가장 무서운 변화였다.⸻【서윤의 기억 9】예전의 나는내일을 쉽게 말했다.내일 봐.다음에 가자.주말에 보자.밥 먹자.그런 말들이 전부 당연했다.태준이 내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나도 그의 내일 안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믿었다기보다,의심해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무서웠다.당연한 것들은사라질 때 더 크게 무너진다.헤어진 뒤,나는 한동안 내일이라는 말을 싫어했다.누군가와 약속을 잡는 것도,다음 주를 말하는 것도,아무렇지 않은 척 미래를 정하는 것도.그게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내일은 너무 쉽게 오고,사람은 너무 쉽게 사라지니까.그런데 오늘 나는태준에게 말했다.내일 봐.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알았다.나는 아직 겁이 난다.그런데도내일을 다시 말하고 싶어졌다.아주 조금.정말 아주 조금.그 사람과.⸻【태준의 속마음 23】오늘은 안 갔다.미칠 것 같았는데안 갔다.서윤이 퇴근했다고 했을 때,혼자라고 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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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마주친 내일, 흔들린 선 (1)

아침부터 이상하게 조용했다.비도 오지 않았고,휴대폰도 울리지 않았고,집 안도 평소처럼 비어 있었다.그런데 나는 계속 시끄러웠다.머릿속이.내일 봐, 서윤아.어젯밤 태준이 보낸 그 문장이아침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나는 세수를 하다가도,옷을 고르다가도,가방을 챙기다가도자꾸 그 문장으로 돌아갔다.내일 봐.서윤아.그냥 이름 하나 붙은 인사였을 뿐이다.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남지.나는 거울 앞에 서서머리를 묶었다가 다시 풀었다.묶으면 너무 단정해 보였고,풀면 너무 신경 쓴 사람 같았다.결국 반쯤 묶었다.이게 더 신경 쓴 사람 같다는 걸 알면서도.“진짜 가지가지 한다.”혼잣말이 나왔다.현장에 가는 날이다.업무다.그 사람이 있어도,그건 업무다.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는데잘 안 됐다.강태준은 이미 내 안에서업무라는 단어만으로 가려지는 사람이 아니었다.그게 문제였다.나는 립밤을 바르다 말고휴대폰을 봤다.아침 메시지는 없었다.태준은 보내지 않았다.어제 내가 잘했다고 해서 그런 걸까.참으려고 하는 걸까.아니면 벌써 현장에 나가 있을까.그런 생각까지 하는 내가 싫어서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그런데 몇 초 뒤 다시 꺼냈다.역시 병이다.알림은 없었다.나는 괜히 화면을 껐다.연락이 없으면 없는 대로 신경 쓰이고,오면 오는 대로 무너진다.정말 답이 없다.⸻회사에 도착하자우진이 먼저 인사를 했다.“좋은 아침입니다.”나는 고개를 들었다.“좋은 아침이에요.”어제보다 조금 더 어색했다.그는 어제 현장에 다녀왔고,나는 가지 않았다.태준과 마주치는 걸 피한 건 나였는데,정작 피한 사람은 우진이기도 했다.절반은 맞습니다.나머지 절반은 제가 불편해서입니다.그 말이 아직 남아 있었다.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어제 사진 잘 봤어요.”“도움이 됐다면 다행입니다.”“고마웠어요.”우진은 잠깐 나를 보았다.그러더니 아주 짧게 웃었다.“오늘은 직접 가시니까 더 정확할 겁니다.”“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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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마주친 내일, 흔들린 선 (2)

현장에 도착했을 때태준은 이미 와 있었다.검은 셔츠에 짙은 재킷.현장 조명 아래에서도 그는 어두웠다.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데도이상하게 혼자만 먼저 보였다.정말 싫다.나는 그를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보지 않는 게 더 부자연스러웠다.태준이 먼저 나를 봤다.정확히.사람들 너머에서,누구와도 헷갈리지 않게.그 눈이 나에게 닿는 순간어젯밤 목소리가 다시 살아났다.내일 볼게.나는 고개를 아주 작게 숙였다.태준도 그렇게 했다.그게 다였다.그런데 심장은그게 다가 아닌 것처럼 뛰었다.우진이 옆에서 말했다.“강 디렉터님.”태준의 시선이 우진에게 옮겨갔다.“오셨네요.”두 사람은 아주 평범하게 인사했다.평범해서 더 이상했다.그들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나를 사이에 두고,알고 있었다.그걸 모르는 척하고업무 이야기를 시작했다.태준이 도면을 펼쳤다.“2안 문구는 이 벽면보다 안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입구에서 바로 보이면 너무 직접적이라.”나는 자료를 보며 대답했다.“안쪽으로 들어가면 시야가 늦게 열리긴 해요. 대신 감정은 더 오래 남을 것 같고요.”태준이 나를 봤다.그 눈이 잠깐 멈췄다.“그게 낫습니다.”“네?”“늦게 열리는 쪽이요.”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늦게 열리는 쪽.업무 이야기였다.정말 업무 이야기인데,왜 내 안에서는 다른 뜻으로 들리지.나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줬다.우진이 차분하게 말했다.“그럼 문구가 보이는 각도를 다시 체크해보겠습니다.”그 덕분에 나는 숨을 돌렸다.우리는 벽면 앞에 섰다.태준은 조금 떨어져서 전체 동선을 봤고,우진은 치수를 확인했다.나는 중간에 서서문구가 들어갈 위치를 바라봤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그 문장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누가 봐도 공간 카피인데,나는 자꾸 내 이야기처럼 읽었다.태준도 그럴까.나는 옆을 봤다.그도 같은 문구 위치를 보고 있었다.무표정했다.그런데 나는 알 것 같았다.그 얼굴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 아니라는 걸.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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