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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닿은 목소리, 닫히지 않은 문 (4)

우진이 돌아오기 직전,태준은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나는 의자에 앉아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조금 뒤 우진이 들어왔다.그는 내 얼굴을 보고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그냥 출력물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괜찮으십니까.”오늘 두 번째였다.괜찮냐는 말.나는 웃으려다 실패했다.“괜찮게 해야죠.”우진은 나를 가만히 보았다.그는 그 대답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자료는 메일로도 보내두겠습니다.”“네. 고마워요.”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회의실 유리벽 너머로태준의 뒷모습이 보였다.그는 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완벽하게 업무적인 얼굴.조금 전 내 앞에서질투가 싫었다고 말하던 사람과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나는 그를 보다가눈을 돌렸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그 문장은 이제정말 업무 문장이 아니었다.⸻퇴근은 늦어졌다.수정 자료를 정리하고,메일을 보내고,다음 일정표까지 다시 맞추고 나니사무실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우진은 먼저 나가지 않았다.“저는 조금 더 보고 가겠습니다.”그가 말했다.나는 시계를 봤다.“늦었어요.”“한서윤 씨도 아직 계십니다.”“저는 곧 갈 거예요.”우진은 나를 보았다.“그럼 같이 나가시겠습니까.”그 말에 나는 잠깐 멈췄다.같이 나가도 된다.그냥 동료니까.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가 없다.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혼자 갈게요.”우진의 눈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하지만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미안…”말하려다가 멈췄다.미안해서 보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다.나는 말을 바꿨다.“내일 봬요.”우진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네. 내일 뵙겠습니다.”나는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휴대폰이 울렸다.태준이었다.[강태준]* 아직 회사?나는 답장했다.[이제 나가.]읽음.잠깐 뒤.[강태준]* 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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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닿은 목소리, 닫히지 않은 문 (5)

집에 도착했을 때는밤 열 시가 조금 넘었다.나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문을 잠갔다.이제는 거의 습관처럼도어락을 확인했다.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들어왔어.]보내고 나서나는 멈췄다.어제도 내가 먼저 보냈다.오늘도.이제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답은 바로 왔다.[강태준]* 문.[잠갔어.][강태준]* 밥.나는 냉장고를 열었다.먹을 게 없었다.정확히는 먹을 만한 마음이 없었다.[대충 먹을게.]읽음.한참 답이 없었다.그리고 전화가 왔다.강태준.나는 화면을 보고 굳었다.어제와 같았다.다른 건,오늘은 바로 끊기지 않았다는 것.전화벨이 계속 울렸다.나는 숨을 참았다.받을까.받지 말까.어제 나는 말했다.나중에는 받을 수도 있어.그 나중이오늘이면 안 되는 걸까.손끝이 떨렸다.벨은 계속 울렸다.나는 눈을 감고전화를 받았다.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수화기 너머도 조용했다.정말 조용했다.그 침묵이 먼저 나를 안았다.몇 초 뒤,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아.나는 입술을 다물었다.목소리.정말 목소리였다.글자보다 낮고,글자보다 가까운.어젯밤 닿지 못했던 것이갑자기 귀 옆에 와 있었다.나는 대답해야 했다.그런데 목이 막혔다.태준이 조용히 말했다.— 안 끊어도 돼?나는 눈을 감았다.그 말이 너무 조심스러워서가슴이 아팠다.나는 겨우 대답했다.“응.”수화기 너머에서작게 숨이 멈추는 소리가 났다.정말 아주 작게.그런데 나는 들었다.태준이 말했다.— 고마워.그 한마디가너무 낮았다.나는 손으로 식탁 끝을 잡았다.“무슨 말을 그렇게 해.”— 진짜라서.“전화 한 번 받은 건데.”— 나한테는 아니야.나는 더 말하지 못했다.방 안이 조용했다.냉장고 소리,창밖 차 소리,내 숨소리.그리고 그의 숨소리.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전화라는 게 이상하다.말을 하려고 거는 건데,가끔은 아무 말 없는 게 더 많은 걸 말한다.태준이 먼저 물었다.— 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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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닿은 목소리, 닫히지 않은 문 (6)

라면은 평범했다.조금 불었다.전화하면서 끓이면 뭐든 타이밍이 엉망이 된다.나는 식탁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태준은 말없이 기다렸다.“왜 조용해.”— 먹는 소리 들으려고.“변태야?”말하고 나서내가 먼저 멈췄다.너무 편하게 나왔다.태준도 잠깐 조용했다.그리고 낮게 웃었다.정말 낮게.귀에 붙는 웃음이었다.나는 괜히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뜨거워서 혀끝이 데였다.“아.”— 왜.“데였어.”— 천천히 먹어.“잔소리하지 마.”— 응.이상했다.그냥 그런 말들뿐인데방 안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 같았다.나는 혼자였는데혼자 먹는 것 같지 않았다.태준은 중간중간 아주 짧게 물었다.— 짜?“조금.”— 물 더 넣어.“이미 늦었어.”— 다음엔.다음.그 단어가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나는 젓가락을 멈췄다.다음에 또 라면을 먹는 밤이 있을까.다음에도 이 사람이 전화 너머에 있을까.나는 그런 상상을 하다가겁이 났다.태준이 물었다.— 왜 조용해.나는 라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태준아.”— 응.“너는 왜 자꾸 다음을 말해.”수화기 너머가 잠깐 멈췄다.나는 그 침묵이 무서워괜히 말을 덧붙였다.“아니,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말하고 싶어서.“…뭘.”— 다음.나는 눈을 감았다.태준은 낮게 말했다.— 예전엔 다음이 당연한 줄 알았어.“…”— 내일도 보고, 다음 주도 보고, 다음 달에도 네가 있을 줄 알았어.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놓쳤어.그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이번엔 당연하게 생각 안 하려고.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라면 국물이 식어가고 있었다.그런데 나는 그걸 먹을 수가 없었다.태준이 조용히 말했다.— 네가 허락하는 만큼만 다음이라고 생각할게.눈가가 뜨거워졌다.이 사람은 왜 자꾸늦게 배운 말을 이렇게 아프게 할까.나는 손등으로 눈 밑을 눌렀다.울면 안 된다.전화 너머로 울면다 들킬 것 같았다.“라면 불겠다.”나는 겨우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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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참지 못한 밤, 안 싫었던 마음 (1)

제일 먼저 떠오른 건라면 냄새도 아니고,자정 넘긴 통화 시간도 아니고,태준의 목소리였다.서윤아.그 한마디.나는 이불 속에서 눈을 감았다.아침부터 그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는 내가 싫었다.싫은데,밀어내지 못했다.이제 목소리까지 생겼다.문자만 있을 때는문자를 지우면 될 것 같았다.대화창을 닫고,휴대폰을 뒤집고,읽지 않은 척하면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목소리는 달랐다.어디에도 저장되어 있지 않은데자꾸 재생됐다.내가 원하지 않아도귀 안쪽 어딘가에서.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진짜 큰일 났네.”혼잣말이 너무 선명하게 나왔다.큰일.그 말 말고는 달리 표현이 안 됐다.좋다,설렌다,흔들린다,그런 말들은 너무 예쁘다.내 마음은 그렇게 예쁘게 정리되지 않았다.이건 그냥 큰일이었다.어제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아니.어제 받았어야 했다.받고 나서 알았다.내가 얼마나 그 목소리를 기다렸는지.그게 제일 문제였다.기다렸다는 걸받고 나서야 알았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대화창은 어젯밤에서 멈춰 있었다.[강태준]* 그걸로 오늘 밤은 또 못 자도 된다.그 문장은 없었다.당연하다.그건 태준이 나에게 보낸 말이 아니라,내가 모르는 그의 밤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말이었다.실제로 대화창에 남은 건 더 짧았다.[강태준]* 그럼 안 취소할게.그게 마지막이었다.나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내렸다 올렸다.무슨 답장을 지금 보낼 수 있을까.잘 잤어?못 잤어?나도 네 목소리 생각났어?미쳤다.나는 휴대폰을 그대로 덮었다.보내면 안 된다.아침에는 감정이 조금 덜 위험해 보여서더 위험하다.어젯밤의 문장을 아침에 이어받으면,그건 실수가 아니라 선택이 된다.나는 아직 그렇게까지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아니.하고 싶은데무서웠다.그 차이를 이제는 나도 안다.⸻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휴대폰은 조용했다.태준은 아무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그게 다행이어야 했다.그런데 나는 몇 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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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참지 못한 밤, 안 싫었던 마음 (2)

현관 앞에서 구두를 신는데휴대폰이 울렸다.심장이 먼저 알았다.태준이었다.[강태준]* 일어났어?나는 화면을 보고몇 초 동안 가만히 있었다.참 이상하다.이렇게 별것 아닌 말 하나가문 앞에서 발목을 잡는다.나는 답장했다.[출근하려고.]읽음.[강태준]* 잤어?이번엔 바로 답하지 못했다.거짓말을 할까.잤다고.아주 잘 잤다고.그럼 아무렇지 않아 보일까.나는 한참 화면을 보다가짧게 보냈다.[조금.]읽음.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더 웃겼다.그도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조금.그게 무슨 뜻인지.조금 잤다는 건지,조금 못 잤다는 건지,조금 네 생각을 했다는 건지.곧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나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진짜 이 사람.말을 너무 아껴서가끔은 더 많이 말한다.[그건 안 물어봤는데.][강태준]* 말하고 싶어서.나는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채한숨을 내쉬었다.어제부터 계속 이렇다.말하고 싶어서.못 참아서.그것도.안 취소할게.하나하나가 짧은데너무 오래 붙는다.나는 답장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복도의 공기가 차가웠다.잠깐 머리가 식는 것 같았다.좋다.이 정도면 괜찮다.그런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또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 오늘 비 온대.나는 창문 없는 복도 천장을 올려다봤다.[그래서.][강태준]* 우산 챙겨.나는 피식 웃었다.[이젠 네 우산 없는데.]보내고 나서심장이 딱 멈췄다.아.왜 그런 말을 했지.우산.그 말은 어제,그제,우리가 지나온 밤을 건드리는 단어였다.나는 바로 지우고 싶었다.이미 읽음이 떴다.태준의 답이 늦었다.아주 조금.그리고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다시 놓고 싶어지게 하지 마.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숨을 멈췄다.문이 열렸지만바로 타지 못했다.사람 하나가 안에서 내렸다가나를 이상하게 보고 지나갔다.나는 뒤늦게 엘리베이터에 탔다.문이 닫혔다.좁은 거울 안에 내가 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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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참지 못한 밤, 안 싫었던 마음 (3)

탕비실 창밖은 흐렸다.정말 비가 올 것 같았다.나는 종이컵에 커피를 받고창가에 기대 섰다.휴대폰을 꺼냈다.태준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그게 이상하게 좋았다.그리고 아쉬웠다.이제 이 두 감정은 항상 같이 온다.한쪽만 오면 좋겠는데.태준과의 대화창을 열었다.마지막은 아직도 그 문장이었다.[강태준]* 다시 놓고 싶어지게 하지 마.나는 화면을 보다가한 글자씩 지우듯 눈으로 읽었다.다시.놓고.싶어지게.하지 마.그 말 안에그가 얼마나 많은 걸 참고 있는지 보였다.정말 오고 싶었겠지.우산 하나 핑계로라도.문 앞에 다시 뭔가를 두고 싶었겠지.내가 비 맞지 않게.아니,내가 자기 흔적을 한 번이라도 더 보게.그런 마음까지 읽히는 내가 싫었다.너무 잘 알아서.나는 휴대폰을 잠갔다.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커피 드십니까.”우진이었다.나는 돌아섰다.“네. 잠깐.”우진은 컵을 꺼내며 내 옆에 섰다.탕비실은 좁았다.우리는 적당히 떨어져 있었는데도어쩐지 거리가 가까웠다.그가 커피 머신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오늘 비 온다고 하더군요.”나는 순간 웃을 뻔했다.비.우산.태준.오늘은 모든 말이 그쪽으로 미끄러진다.“그러게요.”“우산 챙기셨습니까.”나는 컵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아니요.”우진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그럼 퇴근하실 때 빌려드리겠습니다.”너무 자연스러웠다.선의.배려.아무 뜻 없는 말.그런데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우진은 그 침묵을 알아차렸다.그리고 먼저 말했다.“부담스러우시면 괜찮습니다.”그 말에가슴이 답답해졌다.부담스러우면.괜찮습니다.천천히.재촉하지 않겠습니다.우진의 말들은 모두 나를 편하게 하려고 만들어져 있는데,나는 왜 자꾸 그 말들 앞에서 더 불편해질까.나는 낮게 말했다.“그런 뜻 아니에요.”“네.”“그냥… 오늘은 비 안 왔으면 좋겠어서요.”우진은 커피를 들고 잠깐 창밖을 보았다.“그건 마음대로 안 되니까요.”그 말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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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참지 못한 밤, 안 싫었던 마음 (4)

오후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처음엔 아주 가늘었다.창문에 닿자마자 사라질 것 같은 비.그런데 세 시가 지나자빗줄기가 조금 굵어졌다.팀장님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퇴근길 막히겠네.”나는 모니터를 보다가괜히 휴대폰을 확인했다.태준에게서는 아직 메시지가 없었다.잘 참고 있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가스스로에게 놀랐다.잘 참고 있다.왜 그런 말을 하지.내가 뭘 기대하고 있는데.나는 휴대폰을 뒤집었다.그때 메신저 알림이 떴다.[강태준]메일 확인했습니다.서브 문장 좋네요.업무 메신저였다.개인 메시지가 아니라.나는 화면을 보다가괜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업무적으로 답하면 된다.그냥.[한서윤]네. 오늘 중 최종본 공유드리겠습니다.곧 답이 왔다.[강태준]우진 씨 문장인가요?손이 멈췄다.나는 화면을 오래 봤다.업무 메신저.업무 질문.그런데 이게 업무만은 아니라는 걸너무 잘 알았다.머문 자리마다 남아 있는 감각.그 문장을 누가 썼는지왜 궁금할까.나는 천천히 답했다.[한서윤]네. 정우진 씨 의견 반영했습니다.읽음.한참 답이 없었다.정말 한참.나는 모니터 앞에서그 침묵을 기다리고 있었다.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드디어 답이 왔다.[강태준]좋네요.또.좋네요.나는 그 짧은 말을 보고어제 회의실에서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좋은 사람인 거 알겠더라.그래서 더 싫었어.그 말이 이 답장 뒤에 숨어 있었다.나는 일부러 답하지 않았다.업무 메신저니까.그런데 곧 개인 카톡이 울렸다.[강태준]* 나 지금 유치한 거 아는데.나는 눈을 감았다.아.진짜.[강태준]* 그 문장 좋더라.[강태준]* 그래서 짜증났어.나는 화면을 보다가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이제 그는 숨기지 않는다.다만 바로 미안해하지도 않는다.짜증났어.그 말이 이상하게 좋았다.질투난다는 말을빙빙 돌리지 않고,잘난 척하지 않고,좋은 사람인 척하지 않고.그냥 짜증났다고.나는 답장을 썼다.[그걸 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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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참지 못한 밤, 안 싫었던 마음 (5)

88화. 참지 못한 밤, 안 싫었던 마음 (5)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비는 더 세졌다.유리창엔 물줄기가 길게 흘렀고,사무실 안 조명은 이상하게 더 누렇게 보였다.나는 우산이 없었다.당연히 편의점에서 사면 된다.회사 1층에도 팔 것이다.아니면 택시를 타면 된다.정우진에게 빌리면 된다.태준에게 말하면그는 정말 올지도 모른다.나는 마지막 생각을 하자마자가방을 챙기는 손을 멈췄다.말하면 안 된다.그러면 진짜 올 것이다.그 사람이 오고 싶어 한다는 걸 아니까더 말하면 안 된다.퇴근 준비를 하는데우진이 다가왔다.그의 손에는 검은 우산이 하나 더 있었다.“가져가십시오.”나는 우산을 보았다.“아니요, 괜찮아요.”“비가 많이 옵니다.”“1층에서 살게요.”우진은 억지로 건네지 않았다.그냥 우산을 든 채 나를 보았다.“제가 빌려드리는 게 불편하신 겁니까.”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정확히 말하면우산이 불편했다.우진이 아니라.우산이라는 물건이이미 다른 사람의 기억으로 너무 젖어 있어서.나는 낮게 말했다.“정우진 씨가 불편한 건 아니에요.”그는 잠깐 나를 보다가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알겠습니다.”우산을 거두는 그의 손이조금 느렸다.나는 그걸 보았다.말릴 수 없었다.말리면 또 이상해질 것 같았다.우리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말은 없었다.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비 소리가 유리문 너머로 크게 들렸다.생각보다 많이 왔다.나는 자동문 앞에서 멈췄다.우진은 옆에 섰다.“정말 괜찮으십니까.”“네.”“그럼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조심히 가세요.”우진은 우산을 펴고 비 속으로 걸어갔다.뒷모습이 금방 흐려졌다.나는 그를 보다가편의점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 1층?나는 그대로 멈췄다.심장이 낮게 떨어졌다.나는 답장하지 않고로비 밖을 보았다.비 오는 도로 건너편.검은 차 한 대가 서 있었다.너무 익숙한 차였다.정말.정말 왔다.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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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참지 못한 밤, 안 싫었던 마음 (6)

나는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로비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흔들리고 있었다.완전히.나는 천천히 자동문 쪽으로 걸어갔다.문이 열렸다.비 냄새가 안으로 밀려왔다.태준이 나를 보았다.그는 다가오지 않았다.그냥 그 자리에서 우산을 조금 들어 올렸다.나는 문 앞에 섰다.“너 진짜…”목소리가 조금 떨렸다.태준은 낮게 말했다.“알아.”“뭘 알아.”“내가 또 못 참은 거.”나는 그를 노려봤다.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비가 우산 끝에서 계속 떨어졌다.그의 셔츠 소매가 조금 젖어 있었다.“싫으면 갈게.”그가 다시 말했다.나는 그 말이 정말 싫었다.자꾸 나에게 결정권을 주는 척하지만,사실은 이미 내 마음을 시험하는 말 같아서.나는 물었다.“가라고 하면 갈 거야?”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대답이었다.나는 헛웃음을 흘렸다.“봐. 안 갈 거면서.”그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태준은 낮게 말했다.“갈게.”“…”“네가 진짜 가라고 하면.”나는 숨을 들이켰다.비 냄새가 폐 안쪽까지 들어왔다.진짜 가라고 하면.나는 그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이다.그는 그렇게 만들어주고 있었다.늦게 배운 배려.늦게 배운 거리.늦게 배운 기다림.그런데 나는.나는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시선을 피했다.“우산만 씌워.”태준의 손이 잠깐 멈췄다.“뭐?”나는 더 작게 말했다.“차까지.”그는 아주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다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응.”그 한마디가 너무 조심스러워서가슴이 아팠다.나는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태준과 어깨가 거의 닿았다.정말 거의.닿지는 않았다.그는 일부러 간격을 남겼다.딱 한 사람의 숨만큼.그 간격이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비는 우산 위로 크게 떨어졌다.차까지는 몇 걸음 안 됐다.그 짧은 거리를 걷는데나는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비 소리보다 더 잘 들리는 것 같았다.태준은 내 쪽으로 우산을 더 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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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참지 못한 밤, 안 싫었던 마음 (7)

차 안은 낮은 향이 났다.익숙한 향.태준의 향.나는 안전벨트를 매며 창밖을 보았다.그가 운전석에 올라탔다.우산을 접고,문을 닫고,잠깐 숨을 골랐다.우리는 둘 다 말이 없었다.차창 위로 빗물이 흘렀다.와이퍼가 느리게 움직였다.그 소리가 이상하게 커졌다.태준이 먼저 말했다.“화났어?”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조금.”“응.”그는 변명하지 않았다.그게 또 사람을 이상하게 했다.나는 그를 보았다.“왜 왔어.”“비 와서.”“그건 이유 아니야.”“네가 우산 없을 것 같아서.”“그것도 이유 아니야.”태준은 핸들 위에 손을 올린 채한참 앞만 보았다.그러다 말했다.“보고 싶어서.”나는 숨이 멈췄다.그는 계속 앞을 본 채 덧붙였다.“그게 제일 큰 이유야.”나는 고개를 돌렸다.비 오는 유리창에 내 얼굴이 흐리게 비쳤다.“그럼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말하고 나서 내가 놀랐다.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태준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차 안의 공기가순식간에 달라졌다.그가 천천히 나를 보았다.“말해도 돼?”나는 입술을 다물었다.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그런데 대답하지 않는 것도이미 대답 같았다.태준은 목소리를 낮췄다.“보고 싶었어.”나는 눈을 감았다.직접 들으면이렇게 된다.글자로 봤을 때보다훨씬 더 무너진다.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 한마디만 하고다시 앞을 봤다.그게 더 위험했다.더 욕심내지 않고,더 붙잡지 않고,딱 그만큼만 놓는 말.나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눌렀다.아프지 않았다.이미 다른 데가 더 아팠다.차가 천천히 출발했다.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갔다.비 오는 도로 위로불빛들이 길게 번졌다.태준은 조심스럽게 운전했다.예전의 그는 늘 빠르게 움직였다.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바로 갔고,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늦게라도 했다.그런데 지금은브레이크를 너무 자주 밟았다.차도,말도,마음도.나는 그게 보였다.그래서 더 흔들렸다.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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