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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가까워진 내일, 참아낸 거리 (6)

택시가 도착했을 때태준은 문을 열어주려다 멈췄다.그 손이 허공에서 아주 잠깐 멈추는 걸 봤다.예전 같았으면 자연스럽게 열었을 것이다.지금은 멈췄다.내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그 짧은 멈춤이나를 또 흔들었다.나는 택시 문 손잡이를 잡았다.그러다 그를 봤다.“열어줘도 돼.”태준의 눈이 나를 봤다.정말 찰나였다.그리고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아무렇지 않은 행동이었다.그런데 내게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나는 택시에 타기 전 말했다.“고마워.”태준은 낮게 대답했다.“응.”그 응이 너무 작아서오히려 오래 남았다.문이 닫혔다.택시가 움직였다.나는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그런데 결국 봤다.태준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어제처럼.아니, 어제보다 조금 더 가까운 자리에서.그는 따라오지 않았다.그냥 보고 있었다.나는 가방 끈을 꽉 잡았다.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 들어가면 말해.나는 웃었다.정말.정말 못 고친다.그래도 이번엔 싫지 않았다.[적당히 한다며.]읽음.답이 바로 왔다.[강태준]* 이건 적당한 거야.나는 창밖을 보며 웃었다.[기준 이상해.][강태준]* 배울게.나는 그 말을 오래 봤다.배울게.그는 요즘 자꾸 배운다고 한다.나를.내가 싫어하는 것들.내가 무서워하는 것들.내가 도망치는 순간들.그리고 아마,내가 조금씩 괜찮아지는 순간들까지.나는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다.그러고는 아주 짧게 보냈다.[응.]이번엔 그가 답하지 않았다.그게 좋았다.끝없이 이어지지 않아서.그런데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아서.⸻집에 도착하자나는 신발을 벗기도 전에문부터 잠갔다.그리고 사진을 찍었다.도어락 화면.잠금 표시.보내려다 멈췄다.이건 좀 너무한가.나 정말 왜 이러지.그냥 들어왔다고 말하면 되잖아.사진까지 찍어 보내면너무 내어주는 것 같다.그런데 이상하게 보내고 싶었다.나는 결국 보냈다.[들어왔어.]그리고 사진.읽음.태준의 답이 늦었다.평소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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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가까워진 내일, 참아낸 거리 (7)

밤이 깊어졌을 때태준에게서 전화가 왔다.이번엔 놀라지 않았다.그게 제일 무서웠다.나는 화면을 보다가바로 받지는 않았다.두 번 울리고,세 번 울리고.그다음 받았다.“왜.”— 그냥.나는 웃음을 참았다.“또 그냥?”— 응. 그냥.“그냥은 아닌 것 같은데.”태준이 잠깐 조용했다.— 목소리 듣고 싶어서.이제 이런 말에도예전처럼 숨이 멎지는 않았다.아니,멎긴 한다.하지만 조금 덜 도망치고 싶어졌다.나는 침대에 앉아이불을 무릎 위로 끌어올렸다.“오늘은 빨리 말하네.”— 숨기면 망칠 것 같아서.“그 말도 이제 네 버릇이다.”— 응.“고칠 거야?”— 아니.“그건 왜 안 고쳐?”— 이건 너한테 말해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나는 말문이 막혔다.태준은 잠깐 숨을 골랐다.— 다 말하진 않을게.“…”— 근데 아예 숨기진 않을게.나는 고개를 숙였다.휴대폰을 귀에 댄 손이 조금 뜨거웠다.“그게 가능해?”— 모르겠어.“근데?”— 해볼게.나는 이불 끝을 만지작거렸다.요즘 태준은확실한 말을 잘 하지 않는다.잘할게.영원히.무조건.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대신 해볼게, 배울게, 기다릴게, 안 갈게.그런 말들을 한다.예전보다 덜 멋있는 말들.그런데 이상하게지금은 그게 더 믿고 싶어졌다.나는 아주 낮게 말했다.“오늘…”— 응.“문 열어준 거.”— 응.“그거 괜찮았어.”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나는 눈을 감았다.“그냥 그렇다고.”태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길어져서나는 조금 불안해졌다.“왜 말 안 해?”— 좋아서.“…”— 너무 좋아서.나는 입술을 다물었다.그가 아주 낮게 웃었다.— 그래서 말 아끼는 중이야.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너 진짜 이상해.”— 알아.“근데 오늘은 좀…”말이 멈췄다.태준이 기다렸다.이 사람은 이제 기다리는 걸 정말 배워가고 있다.나는 작게 말했다.“덜 싫었어.”수화기 너머에서태준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문 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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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약속 아닌 약속, 먼저 도착한 마음 (1)

아침이 됐는데도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휴대폰 화면엔어젯밤의 통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강태준.어제 밤,그가 물었다.내일은 안 봐도 돼?업무?아니.그 말.아니.그 짧은 대답 하나가밤새 머릿속을 돌아다녔다.업무가 아니면 뭐지.우리가 그냥 만난다고?왜.무슨 이름으로.친구도 아니고,연인도 아니고,완전히 남도 아니고.전 애인.이 말이 제일 정확한데,이 말로는 이제 설명이 잘 안 됐다.전 애인은 끝난 사람인데,태준은 자꾸 내 하루로 들어오고 있었다.문.밥.들어갔어?잘 자.내일 봐.그런 말들이자꾸 끝난 사람의 자리에서살아 있는 사람의 자리로 옮겨오고 있었다.나는 침대에 앉아한참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아직 태준에게서 아침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어젯밤 말한 대로.내일 아침에 말할게.응. 기다릴게.정말 기다리고 있었다.그게 더 어렵다.차라리 메시지를 보냈으면짜증이라도 낼 수 있었을 텐데.일어났어?생각해봤어?오늘 볼래?이런 식으로 왔으면“아침부터 왜 그래” 하고 물러설 수 있었을 텐데.그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내가 말할 때까지.그게 이상하게 나를 더 오래 붙잡았다.나는 이불을 걷어냈다.씻고 나와서도휴대폰은 조용했다.밥을 먹으려다가 말았다.어제 남은 밥을 데우고김을 꺼냈다.식탁 앞에 앉아 한 숟가락을 먹는데문득 웃음이 나왔다.이제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그 사람을 생각한다.먹었냐고 물을 사람이 없는데도미리 대답을 준비하듯이 먹는다.정말 큰일이다.나는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입력창을 열었다.[오늘은…]거기까지 쓰고 멈췄다.오늘은 뭐.보자?못 봐?나도 모르겠어?삭제했다.다시 썼다.[오늘 시간 있어?]너무 내가 만나자고 하는 것 같았다.삭제.[어제 말한 거.]이건 너무 애매했다.삭제.나는 한숨을 쉬었다.이 짧은 문장 하나가왜 이렇게 어렵지.예전엔 태준과 약속 잡는 게이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뭐 해.몰라.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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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약속 아닌 약속, 먼저 도착한 마음 (2)

옷을 고르는 데에말도 안 되게 오래 걸렸다.약속이 아니다.그냥 잠깐 보는 거다.그렇게 생각하면서도나는 옷장을 세 번이나 열었다 닫았다.너무 꾸민 것처럼 보이면 싫었다.그런데 아무렇게나 입고 나가면괜히 후회할 것 같았다.결국 검은 슬랙스에얇은 아이보리 니트를 입었다.자주 입는 조합이었다.너무 특별하지 않고,너무 무심하지도 않은.그런데 그걸 고르는 데 삼십 분이 걸렸다는 점에서이미 실패였다.거울 앞에 서서머리를 묶었다가 풀었다.또.이번에도 결국 풀었다.비는 오지 않았지만하늘은 흐렸다.창밖이 조금 어두웠다.날씨까지 참 눈치가 없다.이런 날씨는마음이 약해지기 좋다.나는 가방을 챙기고현관 앞에서 멈췄다.도어락을 확인했다.아직 나가지도 않았는데.문을 잠그고 나서또 태준을 떠올릴 게 뻔했다.이제는 도어락마저도 그 사람 쪽으로 이어진다.나는 고개를 저었다.정신 차려.그냥 카페다.그냥 대화다.그냥 만나는 거다.그냥.요즘 우리는 너무 많은 걸그냥이라고 부른다.아무것도 그냥이 아니면서.⸻카페에 먼저 도착한 건 나였다.이상했다.기다리는 쪽은 늘 태준이라고 생각했는데.언제나 그 사람이 먼저 와 있었고,나는 뒤늦게 그 앞에 도착했다.예전에도 그랬다.태준은 약속 시간보다 늘 조금 일찍 왔다.아무렇지 않은 얼굴로커피를 마시고 있거나,창밖을 보고 있거나,휴대폰을 뒤집어놓고 있었다.그때 나는 그걸 그냥 습관이라고 생각했다.지금 생각하면아마 그것도 그의 방식이었을 것이다.나를 기다리는 것.나를 먼저 보고 싶은 것.그런 마음을태준은 늘 습관처럼 숨겼다.나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카페는 조용했다.일요일 오후라 그런지사람이 많지는 않았다.커피를 시키고,컵을 손으로 감싸고,휴대폰을 뒤집어놓았다.그런데 자꾸 화면이 궁금했다.그가 어디쯤인지.오고 있는지.혹시 벌써 도착했는지.나는 결국 휴대폰을 다시 뒤집었다.알림은 없었다.왜 메시지를 안 보내지.아니,왜 보내야 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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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약속 아닌 약속, 먼저 도착한 마음 (3)

그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태준은 나를 똑바로 보지 않았다.그냥 테이블 위의 컵을 보고 있었다.“말 안 해도 알아주겠지. 기다리면 알겠지. 챙기면 알겠지.”그가 낮게 말했다.“근데 정작 네가 힘든 건 몰랐어.”가슴이 아팠다.그는 이렇게 너무 늦게정확한 말을 한다.정확해서 더 아프다.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이미 식기 시작했다.“오늘은 그런 얘기하려고 나온 거 아니야.”내 말은 조금 딱딱했다.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냥…”나는 말을 찾지 못했다.그냥 뭐.그냥 얼굴 보려고?그냥 밥 먹었냐고 물을 사람을 밖에서 한 번 만나보려고?그냥 네가 오지 않는 걸 기다리는 게 이상해서?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태준은 내 말끝을 기다렸다.정말 아무 말 없이.그 기다림이 요즘은 더 위험하다.나는 결국 작게 말했다.“그냥, 한번 봐도 괜찮을 것 같아서.”태준의 손이 멈췄다.컵 옆에 놓여 있던 손.정말 아주 잠깐.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괜찮아?”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아직은 모르겠어.”“응.”“근데 싫지는 않아.”말하고 나서가슴이 철렁했다.또 말했다.또.싫지는 않아.덜 싫었어.이런 말들을 나는 자꾸 그에게 준다.그 말들이 얼마나 큰지 알면서.태준은 한참 말이 없었다.그러다 낮게 말했다.“나 그 말 좋아하면 안 되는데.”“…”“좋다.”나는 컵을 쥔 손에 힘을 줬다.“너는 왜 그런 말을 바로 해.”“숨기면 망칠 것 같아서.”“그 말 진짜 너무 자주 해.”“그만할까?”나는 대답하려다가 멈췄다.그만하라고 말하면그가 또 정말 그만할 것 같았다.요즘 태준은 내가 싫다고 하면정말 멈추려고 한다.그게 고맙고,가끔은 너무 아쉽다.정말 사람 마음은 못됐다.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태준이 나를 봤다.“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내가 말했다.“그냥… 듣는 내가 이상해져서 그래.”그는 아주 작게 웃었다.“그럼 나도 조금만 할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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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약속 아닌 약속, 먼저 도착한 마음 (4)

카페 안에 사람이 조금 늘었다.테이블 하나 건너편에 앉은 커플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유리창 밖으로는 흐린 오후가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나는 시계를 봤다.우리가 앉은 지 한 시간이 넘었다.그 사실에 놀랐다.한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갔나.대단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었다.우리는 대부분 멈췄고,가끔 말했고,다시 멈췄다.그런데 지루하지 않았다.그게 더 문제였다.태준이 물었다.“피곤해?”“조금.”“갈까?”바로 물러나는 말.나는 그 말이 이제 조금 익숙해졌는데,여전히 속이 간질거렸다.“아직은 괜찮아.”태준의 눈이 나를 봤다.아직은.그 단어가 또 우리 사이에 놓였다.아직은 괜찮아.아직은 안 불편해.아직은 모르겠어.우리는 자꾸 아직에 머문다.그런데 예전과 다르게그 아직이 나쁘지만은 않았다.끝이 아니라,중간처럼 느껴졌다.태준이 낮게 말했다.“그럼 조금만 더 있을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순간,태준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화면을 보고 잠깐 표정이 굳었다.나는 묻지 않았다.그런데 그의 시선이 나에게 왔다.“업무 전화.”“받아.”그는 잠깐 망설이다가전화를 받았다.“네, 강태준입니다.”업무 목소리.낮고 건조한 목소리.나는 그 목소리를 듣다가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방금까지 나와 말하던 사람과조금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그런데 같은 사람이다.나한테는 기다리고,묻고,조심스러운 사람.일할 때는 정확하고,차갑고,틈이 없는 사람.그 차이가 이상하게 선명했다.태준은 짧게 통화를 끝냈다.“미안.”“왜 미안해.”“흐름 끊어서.”나는 웃었다.“무슨 흐름.”그가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괜히 컵을 만졌다.무슨 흐름인지 안다.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오늘은 이상한 흐름이 있었다.너무 빠르지도 않고,도망치지도 않는.그런 흐름.나는 창밖을 보았다.“일 바빠?”“조금.”“가야 돼?”“아니.”그 대답이 너무 빨라서나는 그를 봤다.태준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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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약속 아닌 약속, 먼저 도착한 마음 (5)

카페를 나올 때,밖은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비는 오지 않았지만공기는 젖어 있었다.우리는 나란히 걸었다.목적지는 없었다.그냥 카페 앞 큰길까지 같이 나왔고,그다음에도 어쩌다 보니 같은 방향으로 몇 걸음 더 걸었다.“어디 가?”태준이 물었다.“몰라.”“집?”“아마.”“걸어갈 수 있는 거리야?”“조금 멀어.”“택시 잡아?”나는 그를 봤다.“또 데려다준다는 말은 안 할게?”태준은 입술 끝을 아주 조금 올렸다.“하려다 참았어.”“잘했네.”말하고 나서내가 먼저 웃었다.태준도 웃었다.이런 대화가 가능해지는 게이상했다.예전 같았으면그는 그냥 차를 가져오겠다고 했을 것이고,나는 괜찮다고 했을 것이고,그는 결국 밀어붙였을 것이다.우리는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지금은말하고,멈추고,웃는다.아주 느리게.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나는 길가에 멈춰 섰다.“나 택시 탈게.”“응.”태준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잡을 때까지 같이 있어도 돼?”이제는 이런 것도 묻는다.나는 잠깐 그를 보다가고개를 끄덕였다.“응.”우리는 인도 가장자리에 섰다.차들이 지나갔다.하늘은 더 어두워졌다.택시는 금방 잡히지 않았다.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그런데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완전히 편한 건 아니었다.여전히 긴장됐고,가끔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그게 오늘의 가장 큰 변화였다.태준이 갑자기 말했다.“오늘 나와줘서 고마워.”나는 그를 보았다.“나도 나오고 싶어서 나온 거야.”말하고 나서정말 내가 무슨 말을 했나 싶었다.태준은 그대로 멈췄다.나는 바로 시선을 피했다.이 사람 앞에서는요즘 말이 너무 자주 새어 나온다.그런데 이번엔 수습하지 않았다.이미 나온 말이었다.태준이 아주 낮게 말했다.“그 말 좋다.”“…”“취소 안 해도 돼?”나는 한숨을 쉬었다.“응.”“좋아해도 돼?”그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나는 그 질문이 너무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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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약속 아닌 약속, 먼저 도착한 마음 (6)

집에 도착하자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신발을 벗고,가방을 내려놓고,도어락을 확인했다.잠겼다.사진은 찍지 않았다.대신 메시지를 보냈다.[들어왔어.]읽음.[강태준]* 문.나는 웃었다.[잠갔어.][강태준]* 밥.나는 냉장고를 열어봤다.먹을 건 딱히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시킬까 생각 중.]읽음.답이 바로 왔다.[강태준]* 뭐 먹을 건데.나는 배달 앱을 열었다.먹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한참 보다가국밥을 골랐다.나답지 않은 메뉴였다.아니,나답다는 게 뭔지도 모르겠다.[국밥.]답이 조금 늦었다.[강태준]* 잘했어.나는 웃으며 휴대폰을 내려놨다.이번엔 그 말이 조금 편했다.주문을 하고,옷을 갈아입고,손을 씻었다.집 안이 조용했다.그런데 오늘은 적막하지 않았다.혼자인데,조금 덜 혼자였다.이게 좋은 건지 위험한 건지아직 모르겠다.어쩌면 둘 다다.배달이 오기 전,태준에게서 전화가 왔다.나는 화면을 보고조금 웃었다.이제 놀라지도 않는다.정말 큰일이다.전화를 받았다.“왜.”— 그냥.“그냥 금지.”태준이 낮게 웃었다.— 보고 싶어서.나는 말문이 막혔다.“오늘 봤잖아.”— 봐서 더.나는 눈을 감았다.이 사람은 정말.한 번씩 이렇게 너무 솔직하다.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그런 말은 조금만 하기로 했잖아.”— 이건 조금이야.“기준 진짜 이상해.”— 배울게.“언제 다 배워.”— 오래 걸릴 것 같아.“…”— 오래 걸려도 돼?나는 숨을 멈췄다.오래 걸려도 돼?그 질문은 이상하게 컸다.그건 그냥 지금의 태준이 묻는 말이 아니었다.기다려도 되냐는 말 같았다.천천히 가도 되냐는 말.아직 내 옆에 있어도 되냐는 말.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태준도 재촉하지 않았다.수화기 너머에서그의 숨소리만 들렸다.나는 아주 오래 침묵하다가 말했다.“아직은.”태준이 숨을 멈췄다.나는 눈을 감았다.“아직은… 괜찮아.”그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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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약속 아닌 약속, 먼저 도착한 마음 (7)

나는 국밥 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손끝이 조금 떨렸다.“맨날 그거면 된대.”— 진짜라서.나는 의자에 앉았다.국밥 뚜껑을 열었다.뜨거운 김이 올라왔다.전화는 끊기지 않았다.나는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태준아.”— 응.“대답은…”목이 조금 막혔다.나는 뜨거운 국물을 보며 말했다.“오늘은 못 해.”— 응.“근데…”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무서워서 못 하는 거지, 싫어서 못 하는 건 아니야.”수화기 너머가 완전히 조용해졌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이 정도면대답이나 다름없나.아니.아직은 아니다.아직은.태준이 한참 뒤에 말했다.— 알았어.이번 알았어는처음으로 조금 떨렸다.나는 그 떨림을 들었다.“그 알았어는 싫지 않네.”내가 말했다.태준이 낮게 웃었다.— 다행이다.“좋아하지 마.”— 늦었어.나는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뜨거웠다.혀끝이 데일 뻔했다.태준이 바로 물었다.— 뜨거워?나는 멈췄다.“어떻게 알았어.”— 숨소리.미쳤다.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얼굴을 감쌌다.이 사람은정말 너무 오래 나를 봐왔다.그래서 무섭고,그래서 자꾸 무너진다.“너 진짜 징그러워.”— 알아.“근데…”말끝이 흐려졌다.태준은 기다렸다.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오늘은 조금 덜 징그러워.”태준이 웃었다.소리 낮게.그 웃음이 너무 가까워서나는 국밥 그릇만 내려다봤다.그날 밤,우리는 아주 오래 통화하지 않았다.밥을 다 먹고,물 한 잔을 마시고,그릇을 치우는 동안만.딱 그만큼.태준은 더 붙잡지 않았다.나도 더 붙잡지 않았다.그런데 통화를 끊고 나서도방 안은 전처럼 비어 보이지 않았다.테이블 위엔 빈 그릇이 있었고,휴대폰엔 통화 기록이 남아 있었고,내 안에는 아직 하지 못한 대답이 남아 있었다.오늘은 못 해.무서워서 못 하는 거지,싫어서 못 하는 건 아니야.그게 오늘 내가 줄 수 있는 전부였다.그리고 아마,그에게는 너무 많은 것이었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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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 다시 마주한 마음 (1)

답하지 않은 메시지는아침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강태준]* 오늘도 기다릴게.나는 그 문장을 지우지 못했고,대답하지도 못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망친 것 같지는 않았다.그가 기다리겠다고 했고,나는 아직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출근했다.그리고 오전 회의실에서그 문장을 다시 봤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내가 썼고,태준이 이미 봤고,나도 모르는 척할 수 없었던 문장.그 문장이 회의실 큰 화면에 걸렸을 때,나는 태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처음 보는 문장이 아니었다.내 노트북에서도 봤고,시안 파일에서도 봤고,최종 자료로도 몇 번이나 열어본 문장이었다.그런데 이상했다.작은 화면 안에 있을 때와회의실 한가운데 떠 있을 때는전혀 달랐다.내가 숨겨둔 마음이프로젝터 빛 아래에 걸린 기분이었다.팀장님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저는 2안이 제일 좋아요. 짧고, 정서가 바로 와요.”디자인팀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벽면 적용했을 때도 제일 잘 살 것 같습니다. 조명 들어가면 더 좋고요.”우진은 말없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태준도.그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놀라지는 않았다.이미 알고 있는 문장을다시 맞는 사람처럼 보고 있었다.그 얼굴이 더 힘들었다.처음이라서 흔들리는 게 아니라,알면서도 다시 흔들리는 얼굴.나는 괜히 손에 든 펜을 만졌다.그 문장은 그냥 카피다.업무고,시안이고,회의 자료다.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그런데 태준의 시선이자꾸 그 생각을 망쳤다.팀장님이 나를 봤다.“한서윤 씨, 이 문장 의도 다시 한번만 설명해줄래요? 현장팀 공유용으로도 정리해야 해서요.”목이 잠깐 말랐다.나는 화면을 보았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이 문장을 내가 설명해야 한다.내 마음을 들키지 않는 말로.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공간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가, 결국 감각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목소리는 생각보다 멀쩡했다.“빛이나 향, 온도 같은 건 시간이 지나도 몸이 먼저 기억할 때가 있잖아요.”말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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