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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미열주의: Chapter 101 - Chapter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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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마주친 내일, 흔들린 선 (3)

나는 벽면을 보며 말했다.“여기 들어가면, 처음엔 안 보여.”“응.”“조금 안쪽까지 들어와야 보여.”“그래서 좋아.”“왜.”태준이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그를 돌아봤다.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처음부터 보이는 것보다,”그가 말했다.“늦게 알아차리는 게 더 오래 남으니까.”목 안쪽이 뜨거워졌다.“그거 카피 얘기야?”태준은 아주 잠깐 웃었다.“그것도.”나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이 사람은 요즘한 문장씩 사람을 흔든다.크게 밀지도 않고,잡지도 않고,그냥 던져놓는다.내가 알아서 흔들리게.나는 시선을 피했다.“강 디렉터님.”“응.”“업무 중이에요.”“알아.”“그러면 업무 얘기만 해.”태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그 말이 또 싫었다.알았어.그가 물러설 때마다 하는 말.나는 벽을 보다가나도 모르게 말했다.“그 말 좀 싫어졌어.”태준이 멈췄다.“알았어?”“응.”“왜.”나는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왜냐고.그 말이 너무 참는 소리 같아서.더 묻고 싶은 걸 삼키는 소리 같아서.나한테서 한 걸음 물러나는 소리 같아서.그런 걸 어떻게 말해.나는 결국 작게 말했다.“그냥.”태준은 더 묻지 않았다.예전이었다면그냥이 뭔데, 하고 파고들었을 것이다.지금은 아니었다.그는 고개만 끄덕였다.“그럼 덜 할게.”그 말이 더 아팠다.나는 펜으로 도면 위를 짚었다.“이쪽으로 정리하면 될 것 같아요.”갑자기 존댓말이 나왔다.나도 모르게.태준이 눈을 내렸다.“네.”그도 존댓말로 받았다.그 순간 이상하게 거리가 생겼다.나는 그 거리가 싫었다.내가 만든 건데.정말 미치겠다.⸻우진이 돌아오기 전까지우리는 거의 업무 이야기만 했다.정확하게 말하면,업무인 척했다.문구 위치,조명 각도,동선,벽면 재질.그런 것들 사이로자꾸 다른 말들이 새어 나왔다.여기 조금 어둡지 않아?응. 근데 너무 밝으면 들켜.뭐가.분위기.그것도?태준은 대답하지 않고 웃었다.그 웃음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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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마주친 내일, 흔들린 선 (4)

우진이 돌아왔을 때,나는 거의 안도했다.그리고 그 안도가 태준에게 미안했다.태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회의 모드가 되었다.우진은 현장 담당자 의견을 정리했고,우리는 최종 위치를 확정했다.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팀장님에게 보고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시계는 오후 네 시를 조금 넘고 있었다.우진이 말했다.“저는 사무실로 복귀하겠습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같이 갈게요.”그때 태준이 나를 봤다.말하지 않았다.그냥 봤다.그게 더 힘들었다.우진은 그 시선을 본 듯했다.아니,보지 않았을 리 없다.그는 조용히 말했다.“한서윤 씨, 혹시 카피 관련해서 강 디렉터님과 추가 조율 필요하시면 하고 오셔도 됩니다. 제가 먼저 복귀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또.또 이런다.우진은 자꾸 길을 비켜준다.그게 고마우면서도너무 아프다.“괜찮아요. 같이 가요.”내가 말했다.우진은 나를 보았다.그 시선은 차분했다.“정말 괜찮으십니까?”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같이 가는 게 괜찮냐는 건지,남는 게 괜찮냐는 건지.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태준도 아무 말이 없었다.그 침묵이 셋 사이에 놓였다.결국 우진이 먼저 가방을 들었다.“그럼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정우진 씨.”내가 불렀다.우진이 돌아봤다.나는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무슨 말을 해야 하지.가지 말라고?그건 아니었다.고맙다고?그 말은 너무 가볍다.미안하다고?그건 이제 하지 말라고 했다.나는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조심히 가세요.”우진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네.”그는 나갔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나는 그 소리를 오래 들었다.태준이 조용히 말했다.“불편하면 나도 갈게.”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왜 자꾸 그렇게 말해.”“네가 불편할까 봐.”“내가 불편하면 알아서 말해.”말이 조금 날카롭게 나갔다.태준은 입을 다물었다.나는 바로 후회했다.“미안.”“아니.”그가 낮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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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마주친 내일, 흔들린 선 (5)

현장을 나왔을 때하늘은 흐렸다.비가 올 것 같았지만 아직 오지는 않았다.우리는 건물 앞에 잠깐 서 있었다.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면 되는 시간이었다.그런데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태준이 말했다.“데려다준다는 말 안 할게.”“응.”“밥 먹으라는 말은 할 건데.”나는 그를 봤다.“진짜 지겹다.”“알아.”“근데 또 할 거야?”“응.”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태준도 아주 조금 웃었다.그 웃음이 너무 가까워서나는 고개를 돌렸다.“나 혼자 갈 수 있어.”“알아.”“그럼 됐어.”“근데 집 들어가면 말해.”나는 한숨을 쉬었다.“그것도 지겨워.”“그건 못 고쳐.”그는 너무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그를 쳐다봤다.“왜.”태준이 나를 똑바로 봤다.“그건 걱정이라서.”조금 치사했다.그렇게 말하면더 뭐라고 하기 어렵다.나는 시선을 내렸다.“알았어.”말하고 나서나도 웃겼다.알았어가 싫다더니결국 내가 하고 있다.태준도 그걸 아는 얼굴이었다.하지만 놀리지 않았다.“서윤아.”나는 고개를 들었다.“응.”태준이 잠깐 망설였다.그가 망설이는 건 이제 티가 난다.짧게 숨을 멈추고,눈을 한 번 내리고,다시 올린다.그 과정을 내가 보고 있었다.그가 말했다.“오늘 손.”나는 심장이 내려앉았다.펜을 주울 때.닿지 못한 손끝.나만 의식한 게 아니었다.“안 닿았잖아.”내가 말했다.태준은 낮게 웃었다.“그래서 더.”나는 숨을 삼켰다.“뭐가 더.”“생각났어.”“…”“닿았으면 핑계라도 있었을 텐데.”그 말이 너무 위험해서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태준은 나를 보다가천천히 고개를 돌렸다.“미안. 여기까지.”또 스스로 멈췄다.나는 그 옆얼굴을 보았다.비 오기 전의 습한 바람이 지나갔다.그 순간,내 입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왔다.“나도.”태준이 멈췄다.정말 완전히.나는 이미 말해놓고후회했다.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나도.어젯밤의 그 말이다시 나왔다.이번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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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마주친 내일, 흔들린 선 (6)

집에 도착했을 때비는 조금 더 굵어져 있었다.나는 옷소매에 묻은 빗물을 털고문을 잠갔다.도어락 소리가 났다.예전엔 그냥 소음이었는데,이제는 누군가에게 보고해야 할 소리처럼 느껴진다.나는 신발도 벗기 전에휴대폰을 꺼냈다.[들어왔어.]읽음.답은 바로 왔다.[강태준]* 문.나는 피식 웃었다.[잠갔어.][강태준]* 밥.[아직.][강태준]* 먹어.나는 한참 화면을 보다가답장을 썼다.[오늘은 네가 먼저 먹어.]읽음.답이 늦었다.[강태준]* 나 지금 못 먹겠는데.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왜.]답은 더 늦었다.한참 뒤에 왔다.[강태준]* 네가 나도 생각났다고 해서.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정말 못 살겠다.나는 현관 앞에 그대로 앉았다.신발도 다 벗지 못한 채로.비 냄새가 옷에서 올라왔다.집은 조용했다.그런데 내 안은 전혀 조용하지 않았다.나는 한참 뒤에 답장했다.[나도 밥 못 먹겠어.]보내고 나서얼굴이 뜨거워졌다.읽음.태준에게서 바로 전화가 왔다.강태준.나는 화면을 보다가이번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받았다.“왜.”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수화기 너머에서 태준이 숨을 내쉬었다.— 그냥.“그냥 전화했어?”— 네 목소리 들어야 밥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나는 눈을 감았다.정말 유치하다.정말 말도 안 된다.그런데 나도 그랬다.“그럼 먹어.”— 너도 먹어.“응.”— 뭐 먹을 건데.“몰라.”— 또 대충 먹지 말고.“너 진짜…”말을 하다 웃음이 났다.태준도 낮게 웃었다.그 웃음이 수화기 너머로 번졌다.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이제 조금 익숙해지고 있었다.무섭게도.태준이 조용히 말했다.— 오늘 고마웠어.“뭐가.”— 도망 안 가줘서.나는 눈을 떴다.현관 조명이 희미하게 흔들렸다.“나 도망간 거 아니야?”— 뒤돌아봤잖아.그 말에가슴이 꽉 막혔다.그걸 봤구나.당연히 봤겠지.그는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나는 작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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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마주친 내일, 흔들린 선 (7)

전화를 끊고 나서나는 밥을 먹었다.정말 대충.냉동밥을 데우고,김을 꺼내고,김치도 조금 꺼냈다.태준은 통화 너머로자기도 먹겠다고 했다.각자 다른 집에서,각자 다른 밥을 먹었다.말은 거의 없었다.숟가락 소리,그릇 내려놓는 소리,물 마시는 소리.이상하게 그런 것들이너무 가까웠다.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더 생활 같았다.그래서 더 무서웠다.전화를 끊기 전,태준이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왜.”— 더 말하면 갈 것 같아.나는 숨을 삼켰다.태준이 아주 낮게 웃었다.— 농담 아냐.나도 웃지 못했다.“오지 마.”— 응.“오늘은.”그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붙었다.오늘은.태준도 그걸 들었다.분명히.수화기 너머가 잠깐 멈췄다.— 응. 오늘은.오늘은 오지 마.그건 내일은 모르겠다는 말처럼 들릴까 봐나는 바로 덧붙이고 싶었다.그런 뜻 아니야.오해하지 마.그런데 하지 않았다.나도 모르니까.정말 모르니까.태준이 말했다.— 잘 자, 서윤아.나는 조금 있다가 대답했다.“잘 자.”그리고 작게 덧붙였다.“태준아.”그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그게 대답 같았다.통화가 끊겼다.나는 식탁에 앉아 한참 휴대폰을 봤다.오늘도 그는 오지 않았다.오늘도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그런데 또 무언가가 더 열렸다.아주 조금씩.사람이 사람에게 다시 간다는 건한 번에 뛰어드는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문 하나를 여는 게 아니라,잠금 하나를 풀고,또 하나를 풀고,그러다 어느 날이미 안쪽에 들어와 있는 걸 깨닫는 것.나는 오늘 그 소리를 들었다.내 안에서아주 작은 잠금이 풀리는 소리.⸻【서윤의 기억 10】예전의 태준은늘 먼저 왔다.내가 부르지 않아도 왔고,기다려달라고 하지 않아도 기다렸고,괜찮다고 하지 않아도 내 옆에 섰다.그때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아니,사랑이면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내가 지쳐 있어도,말하고 싶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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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가까워진 내일, 참아낸 거리 (1)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어제 내가 너무 많이 말했다.다시 좋아질까 봐 무섭다고.그 말.정확히는좋아진다고 한 것도 아니고,다시 시작하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말 안에 이미 다 들어 있었다.무섭다는 건,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니까.나는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아침부터 도망치고 싶었다.사람은 참 이상하다.어젯밤엔 분명히 내가 말했다.나도 힘들어.나도 생각났어.다시 좋아질까 봐 무서워.말할 때는 그게 진심이라서도저히 안 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아침이 되면진심은 늘 증거처럼 남는다.대화창에,통화 기록에,내가 잠 못 잔 얼굴에.나는 휴대폰을 들었다.태준과의 마지막 메시지는 없었다.어젯밤은 전화로 끝났다.문자로 남은 건그 전의 짧은 말들뿐이었다.들어왔어.문.잠갔어.밥.아직.먹어.그런 말들이 우리 사이에 이렇게 많아진 게이상했다.예전에도 우린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뭐 먹었어.들어갔어?춥지 않아?그때는 너무 당연해서귀한 줄 몰랐다.사랑이 식으면거창한 말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이런 말부터 사라진다.밥 먹었냐는 말.집에 들어갔냐는 말.잘 잤냐는 말.그런 말들이 사라지면하루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끝난다.나는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휴대폰이 울렸다.숨이 먼저 멈췄다.[강태준]* 잤어?나는 화면을 한참 봤다.또 잤어.이 사람은 정말 질리지도 않는다.그런데 이상하게그게 싫지 않았다.나는 답장을 썼다.[조금.]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조금.왜 또 솔직해.그냥 응, 이라고 하면 됐잖아.읽음.답이 바로 왔다.[강태준]* 나도 조금.나는 작게 웃었다.또 나도.그 말은 이제 우리 사이에서너무 자주 돌아다닌다.처음엔 무서웠는데,이젠 조금 익숙해지고 있었다.그게 더 무섭다.[왜 못 잤는데.]보내고 나서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을 뻔했다.미쳤나 봐.내가 왜 물어.왜 못 잤냐니.그건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이다.읽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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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가까워진 내일, 참아낸 거리 (2)

회사에 도착하자우진은 자리에 없었다.회의실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나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컴퓨터를 켰다.어제 현장 사진들이 메일로 정리되어 와 있었다.사진 속 공간은 아직 비어 있었지만이제 점점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문구가 들어갈 벽.조명이 떨어질 자리.동선.사람들이 지나가며 문장을 보게 될 위치.나는 화면을 넘기다가 멈췄다.어제 태준과 내가 같이 봤던 벽면 사진이었다.늦게 열리는 쪽이요.처음부터 보이는 것보다,늦게 알아차리는 게 더 오래 남으니까.태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나는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이제 업무 문장도 위험하다.정말 아무것도 안전하지 않다.그때 우진이 회의실에서 나왔다.눈이 마주쳤다.그는 평소처럼 고개를 숙였다.“오셨습니까.”“네.”나는 잠깐 망설였다가 말했다.“어제… 고생 많으셨어요.”“한서윤 씨도요.”짧았다.그런데 어제와는 조금 달랐다.우진은 예전처럼 완전히 깨끗하게 닫힌 얼굴이 아니었다.조금 지쳐 보였다.그게 더 사람 같았다.그래서 더 미안했다.나는 손에 든 컵을 내려놓았다.“오늘도 현장 가시죠?”“네. 오후에 한 번 더 확인합니다.”“같이요?”“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우진은 내 쪽을 보았다.“불편하시면 제가—”“아니요.”내 말이 조금 빨랐다.우진이 멈췄다.나도 놀랐다.내가 왜 그렇게 빨리 대답했지.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오늘은 같이 가요.”우진은 나를 잠깐 보았다.아주 잠깐.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 말이 차분해서내가 더 흔들렸다.그는 더 묻지 않았다.어제 현장에서 내가 태준과 남았던 일도,퇴근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내가 오늘 왜 도망치지 않겠다고 하는지도.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그게 편했으면 좋겠는데,그렇지 않았다.이 사람은 질문하지 않아서오히려 답을 하게 만든다.나는 모니터를 보며아무 의미 없는 파일을 열었다.일해야 했다.오늘은 정말 일해야 했다.⸻점심 전까지 정신없이 지나갔다.회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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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가까워진 내일, 참아낸 거리 (3)

오후에 현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우진은 어제보다 조금 더 말이 없었다.나는 조수석에 앉아자료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차 안에는 낮은 에어컨 소리만 났다.창밖은 흐렸다.비는 오지 않았지만하늘은 여전히 젖은 색이었다.우진이 먼저 말했다.“오늘은 괜찮으십니까.”나는 그를 봤다.“네?”“현장.”아.“괜찮아요.”말해놓고 조금 이상했다.괜찮다.그 말은 언제나 반쯤 거짓말이다.우진도 알 것이다.그래서인지 그는 더 묻지 않았다.나는 창밖을 보다가결국 말했다.“어제는… 고마웠어요.”“어떤 부분이요.”“자리를 비켜준 거.”우진은 앞을 보며 운전했다.“비켜준 건 아닙니다.”“그럼요?”“제가 빠진 겁니다.”“그게 그거 아니에요?”“조금 다릅니다.”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우진은 신호 앞에 차를 세웠다.“한서윤 씨가 강 디렉터님과 이야기해야 할 게 있어 보였습니다.”“…”“그리고 저는 그걸 보는 게 힘들었습니다.”그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서 더 숨이 막혔다.“그래서 빠졌습니다.”나는 손가락으로 파일 모서리를 만졌다.“그런 말을 너무 담담하게 하네요.”“담담하지 않게 말하면 한서윤 씨가 더 미안해하실 것 같아서요.”나는 입을 다물었다.정우진은 정말 반칙이다.이렇게까지 배려하는 사람이왜 자꾸 나한테 마음을 남기는지 모르겠다.아니,알고 싶지 않았다.알면 더 아플 것 같아서.나는 조용히 말했다.“나 때문에 불편한 거 알면서도, 나 자꾸 도움받고 있네요.”“도움받으셔도 됩니다.”“왜요.”우진은 잠깐 생각하듯 침묵했다.그리고 말했다.“제가 아직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요.”그 말에 가슴이 무거워졌다.아직은.그 안에는 언젠가는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 있었다.그게 당연한데,이상하게 아팠다.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우진은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현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나는 창밖을 보며 숨을 골랐다.오늘은 태준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우진도 어렵다.나도 어렵다.이 관계는 너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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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가까워진 내일, 참아낸 거리 (4)

현장 확인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문구 위치가 조금 바뀌었고,조명 톤도 다시 조정했다.공간이 어두워질수록문장은 더 오래 남았다.나는 그걸 보며 이상하게 불안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너무 잘 보였다.너무 우리 같았다.태준이 옆에서 말했다.“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 정도면 충분해요.”충분해요.그 말이 나오자태준이 아주 잠깐 나를 봤다.나는 모른 척했다.요즘 우리는 정말 별말 아닌 것들에너무 많이 걸린다.충분하다.안 간다.오늘은.나도.그런 말들.사람이 이렇게까지 단어 하나하나에 걸려 넘어질 수 있나.현장 담당자가 다른 구역 확인을 요청했고,우진이 먼저 따라갔다.나는 자료를 챙기느라 몇 걸음 뒤처졌다.태준도 남아 있었다.둘만 남은 건 아니었다.사람들이 멀리 있었다.그래도 둘만 남은 것 같았다.태준이 낮게 말했다.“아까.”나는 손을 멈췄다.“뭐.”“업무적으로요, 라고 물은 거.”아.“그냥 나온 말이야.”“응.”“신경 쓰지 마.”“신경 쓰이는데.”나는 그를 봤다.태준은 웃지 않았다.“네가 그렇게 물어보면, 나는 답하고 싶어져.”“그럼 참아.”내 말은 조금 차가웠다.그런데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참을게.”너무 쉽게 말해서오히려 마음이 아팠다.나는 파일을 닫았다.“그렇게 바로 참겠다고 하면 또…”말하다 멈췄다.또 뭐.서운하다고?이상하다고?예전 같지 않아서 흔들린다고?나는 말을 삼켰다.태준이 조용히 물었다.“또?”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그는 더 묻지 않았다.정말 더 묻지 않았다.예전의 태준이었다면분명히 물었을 것이다.아니야가 아니잖아.말해.왜 멈췄어.그런 식으로.지금은 그저 기다렸다.그게 더 못 견디게 만들었다.나는 결국 내가 먼저 말했다.“네가 너무 잘 참으면…”태준이 나를 봤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내가 이상해져.”말하고 나서심장이 떨어졌다.이 말은 대체 뭐야.태준은 움직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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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가까워진 내일, 참아낸 거리 (5)

팀장님이 늦게 현장에 합류했고,우진은 팀장님과 다른 업체 미팅을 이어가기로 했다.나는 오늘 업무를 현장에서 마무리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택시를 부르려는데태준이 옆에 섰다.“태워다준다는 말은 안 할게.”나는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말했잖아, 지금.”“안 하겠다고 말한 거야.”“그게 그거야.”태준은 아주 작게 웃었다.나는 택시 앱을 열었다.차가 잘 잡히지 않았다.퇴근 전 시간인데도 이상하게 대기 시간이 길었다.태준이 화면을 보고 말했다.“십오 분.”“기다리면 돼.”“응.”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냥 옆에 섰다.건물 앞 캐노피 아래.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바람은 눅눅했다.사람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태준과 나는 나란히 서 있었지만어깨가 닿지는 않았다.너무 가까운 것도 아니고,멀지도 않은 거리.요즘 우리 같은 거리.태준이 말했다.“배고프지 않아?”나는 그를 흘끗 봤다.“또 밥이야?”“응.”“너 진짜 집착 포인트 이상해.”“알아.”“모르는 것 같은데.”“너한테 밥 먹으라고 하는 건 못 고쳐.”“왜 자꾸 못 고친대?”태준은 잠깐 나를 보았다.“고치고 싶지 않아서.”말문이 막혔다.그는 바로 덧붙였다.“다른 건 고칠게.”“…”“밀어붙이는 거. 멋대로 오는 거. 네가 말하기 전에 정하는 거.”그 목소리는 낮았다.“근데 밥 먹었냐는 건 못 고치겠어.”나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울음도 같이.왜 그런 말이 더 위험하지.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보다,밥은 못 고치겠다는 말이더 이상하게 마음을 파고든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허락해준 적 없는데.”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물어보려고.”“뭘.”“앞으로도 물어봐도 되는지.”나는 그를 봤다.그는 정말 진지했다.밥 먹었냐고 묻는 걸 허락받으려는 사람처럼.말도 안 된다.웃겨야 하는데웃기지 않았다.나는 아주 늦게 말했다.“그건…”말이 걸렸다.밥 먹었냐는 말.문 잠갔냐는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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