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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흔들린 시선, 남겨진 온도 (6)

그 문장을 보는 순간웃음이 멈췄다.참을게.가벼운 말처럼 왔는데가볍지 않았다.그 안에는 요즘의 태준이 있었다.보고 싶어도 참고,가고 싶어도 참고,묻고 싶어도 참고,붙잡고 싶어도 참는 사람.나는 그 참음이 고맙다가도자꾸 가슴이 아팠다.내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아니.그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지.그래도.나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태준도 더 보내지 않았다.한참 뒤,내가 먼저 보냈다.[오늘은 잘했어.]곧 답이 왔다.[강태준]* 응.그리고 조금 뒤.[강태준]* 너도.나는 화면을 보다가눈을 감았다.나도?나는 뭘 잘했을까.밥 먹은 거?맥주 전에 저녁 먹은 거?그에게 사진을 보낸 거?아니면아직 도망치지 않은 거?나는 묻지 않았다.그냥 그 말 하나를조용히 받아두었다.⸻밤이 깊어졌다.맥주는 반쯤 남았고,나는 더 마시지 않았다.머리가 조금 몽롱했다.술 때문인지,태준 때문인지,오늘 하루 때문인지 모르겠다.나는 캔을 들고 싱크대로 갔다.남은 맥주를 버릴까 하다가그냥 냉장고에 넣었다.내일 마실 것도 아닌데.버리기 아까웠다.그러다 문득 웃음이 났다.맥주 반 캔까지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하는지 모르겠다.나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휴대폰 화면은 아직 켜져 있었다.태준과의 대화창.마지막 문장.[강태준]* 너도.나는 그 문장을 보다가천천히 답장을 썼다.[나 뭐가 잘했는데.]보내고 나서아차 싶었다.조금 취했나.평소라면 안 물었을 텐데.읽음 표시가 떴다.답이 오기까지시간이 조금 걸렸다.[강태준]* 도망 안 간 거.나는 숨을 멈췄다.곧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나한테.눈가가 갑자기 뜨거워졌다.도망 안 간 거.나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한참 움직이지 못했다.오늘 나는 정말 도망가지 않았나.회의실에서도,로비에서도,메시지에서도,맥주 사진 앞에서도.완전히 다가간 건 아니었다.하지만 도망치지도 않았다.그건 내가 생각한 것보다큰일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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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닿지 못한 밤, 다시 열린 문 (1)

아침부터 몸이 무거웠다.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다.반 캔도 다 못 마셨고,잠도 아주 못 잔 건 아니었다.그런데 눈을 뜨자마자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피곤했다.어젯밤의 메시지 때문이었다.도망 안 간 거.나한테.그 문장이이상하게 잠결까지 따라왔다.나는 침대 위에 앉아한참 휴대폰을 보았다.대화창은 어젯밤 그대로였다.[강태준]* 잘 자.[나]* 너도.짧은 끝.그런데 그 위에 있는 말들이자꾸 눈에 걸렸다.그냥 오늘 좋았어.그 정도면 됐어.도망 안 간 거.나한테.나는 화면을 껐다.계속 보면 안 될 것 같았다.사람이 어떤 문장에 너무 오래 머물면,그 문장이 사실보다 더 커진다.그러면 곤란했다.나는 아직 태준에게그렇게 큰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아니.이미 내어주고 있는지도 몰랐다.그래서 더 곤란했다.씻으러 들어가면서현관 쪽을 한 번 봤다.우산이 있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빈자리가 어제보다 덜 허전했다.우산은 없어졌고,그의 발걸음도 없었고,문 앞에 놓인 봉투도 없었는데,내 안에서는 뭔가가 계속 남아 있었다.우산이 있을 때보다 더.정말 이상한 일이다.사람은 가끔사라진 뒤에 더 깊게 남는다.나는 그 생각이 싫어서세수를 오래 했다.찬물이 얼굴에 닿았다.그래도 열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출근길에 태준에게서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밥.그 한 글자가 올 줄 알았다.아침이니까.먹고 나서 말해.그런 식으로 또 올 줄 알았다.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나는 괜히 휴대폰을 확인했다.잠금 화면은 조용했다.당연히 괜찮아야 했다.어제 그렇게 많이 대화했으니까,아침까지 이어지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그런데 나는 이상하게작은 빈틈을 느꼈다.기대하면 안 되는 걸 기대한 사람처럼.나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피곤해 보였다.그리고 조금 짜증난 얼굴이었다.누구에게 짜증이 난 건지 모르겠다.연락하지 않은 태준에게?기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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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닿지 못한 밤, 다시 열린 문 (2)

오전 내내 일이 밀렸다.이번 공간 프로젝트는오픈 일정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고 했다.팀장님은 회의실과 자리를 오가며계속 통화를 했고,나는 카피 수정안과 일정표를 번갈아 봤다.정우진은 맞은편 자리에서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그는 오늘 유난히 말이 적었다.평소에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오늘은 조금 더 조용했다.나는 몇 번이나 그쪽을 보려다 말았다.어제 차 안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정우진 씨는 가끔 너무 좋은 사람 같아요.그래서 미안해요.내가 한 말이었다.진심이었다.그래서 더 나빴다.누군가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미안해지는 마음은,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이다.나는 태준을 보고 있었고,그걸 우진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나는 우진이 주는 편안함을때때로 놓고 싶지 않아 했다.나쁘다.정말 나쁘다.그때 우진이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나는 괜히 자료를 집어 들었다.우진은 모른 척했다.그 모른 척이오늘따라 더 아팠다.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때,그가 내 자리로 다가왔다.“오늘 점심은 어떻게 하십니까.”나는 고개를 들었다.“아직 생각 안 했어요.”“괜찮으시면 같이 드시겠습니까.”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예전이라면 그냥 갔을 것이다.업무 동료와 점심.그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그런데 이제는 어떤 식사도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태준이 알면 신경 쓸까.그 생각이 먼저 든 게 싫었다.우진은 내 침묵을 읽었다.“불편하시면 괜찮습니다.”늘 이렇게 먼저 빠져준다.그래서 더 미안하다.나는 천천히 말했다.“아니요. 같이 가요.”그의 눈이 잠깐 멈췄다.“괜찮으십니까?”“네.”나는 일부러 웃었다.“밥은 먹어야죠.”우진이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그 말은 맞습니다.”우리는 회사 근처 식당으로 갔다.작은 백반집이었다.사람이 많았고,테이블 간격이 좁았다.그래서 오히려 편했다.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는 평범한 공간.뜨거운 국,반찬 접시,주문을 부르는 소리.이런 곳에서는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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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닿지 못한 밤, 다시 열린 문 (3)

식당을 나왔을 때휴대폰이 울렸다.태준이었다.[강태준]* 밥 먹었어?나는 화면을 보다가 멈췄다.옆에는 우진이 있었다.아무 일도 아닌데괜히 들킨 사람처럼 손이 굳었다.우진은 내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그냥 앞을 보고 걸었다.나는 답장했다.[먹었어.]읽음.[강태준]* 뭐 먹었어.나는 잠깐 망설였다.백반.그렇게 쓰면 된다.그런데 왜 손이 멈추지.[백반.]보내고 나서심장이 조금 뛰었다.몇 초 뒤 답이 왔다.[강태준]* 혼자?나는 걸음을 멈추고 싶었다.역시.그 질문이 올 줄 알았다.나는 거짓말할까 생각했다.아주 잠깐.그러다 바로 싫어졌다.거짓말은나를 더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나는 답장했다.[아니.]읽음.조금 긴 침묵.나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우진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천천히 하셔도 됩니다.”나는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누구와 메시지하고 있는지.무슨 질문을 받았는지까지는 몰라도내가 지금 어떤 종류의 난처함 앞에 서 있는지는.나는 다시 화면을 봤다.태준의 답장이 왔다.[강태준]* 정우진 씨?숨이 막혔다.직접 이름이 나오자이상하게 일이 더 커진 느낌이었다.나는 천천히 답장했다.[응.]이번엔 읽음 표시만 뜨고한참 답이 없었다.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리는 회사 쪽으로 걸었다.날씨는 맑았는데내 속은 조금씩 흐려졌다.태준이 화났을까.질투할까.참을까.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척할까.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었다.점심 한 번 먹은 게왜 이렇게 복잡한 일이 되어야 하지.그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알았어.끝.알았어.그 한마디가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나는 화면을 들여다보다가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조금 뒤,태준에게서 다시 왔다.[강태준]* 밥 먹었으면 됐어.나는 그 문장을 보고걸음을 멈췄다.우진도 옆에서 멈췄다.나는 화면을 보며숨을 작게 내쉬었다.밥 먹었으면 됐어.그는 참았다.물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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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닿지 못한 밤, 다시 열린 문 (4)

퇴근 전,나는 후보 문구 세 개를 정리해서 메일에 넣었다.1안. 떠난 뒤에도 남아 있는 것들2안. 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3안. 오래 머문 감정의 자리나는 2안을 지울까 말까한참 고민했다.커서를 올렸다가,내렸다가,결국 그대로 보냈다.수신자에는 태준의 팀 메일과강태준의 개인 업무 메일이 함께 들어가 있었다.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순간속이 조금 내려앉았다.보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나는 의자에 기대 앉았다.왜 이렇게까지 흔들리는지 모르겠다.그냥 카피 후보일 뿐인데.아니.거짓말.그냥 카피 후보가 아니었다.그건 내 쪽에서 그에게 던진 문장이었다.업무라는 얼굴을 하고,너는 알아들을 거라는 믿음으로 보낸 문장.비겁했다.하지만 보내버렸다.몇 분 뒤,메일 확인 알림이 떴다.강태준이 메일을 열었다.내 심장이 같이 열리는 것 같았다.곧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 2안.나는 숨을 멈췄다.[왜.][강태준]* 좋다.나는 화면을 오래 봤다.또 좋다.그는 왜 자꾸이런 식으로만 말할까.좋다.짧은데,너무 많은 걸 품고 있었다.곧 다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나는 눈을 감았다.그 문장을 그가 다시 보내는 순간,정말 내 말이 그의 입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나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태준이 다시 보냈다.[강태준]* 이걸로 가자.나는 한참 뒤에야 답했다.[업무적으로?]읽음.답이 조금 늦었다.[강태준]* 그것도.나는 손끝이 차가워졌다.그것도.그럼 다른 이유도 있다는 뜻이었다.나는 화면을 내려놓았다.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그런데 이미 심장은 답을 하고 있었다.나도.나도 그 문장이 좋았다.너무 좋아서무서웠다.⸻퇴근 후,나는 바로 집에 가지 않았다.회사 근처를 조금 걸었다.머리를 식히고 싶었다.저녁 바람이 꽤 찼다.하늘은 흐렸고,비가 올 듯 말 듯했다.6월인데도 밤공기는 이상하게 서늘했다.나는 가방 끈을 고쳐 잡고길을 건넜다.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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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닿지 못한 밤, 다시 열린 문 (5)

집에 도착하자마자나는 메시지를 보냈다.[들어왔어.]이번엔 태준보다 내가 먼저 보냈다.보내고 나서잠깐 멈췄다.내가 먼저.별것도 아닌데너무 선명했다.답은 바로 왔다.[강태준]* 문.나는 피식 웃고도어락을 확인했다.[잠갔어.][강태준]* 밥.나는 삼각김밥을 꺼내며 답했다.[먹을 거야.][강태준]* 맥주보다 먼저.[알았다고.]그는 더 답하지 않았다.나는 식탁에 앉아삼각김밥을 먹었다.맛은 그저 그랬다.하지만 어제처럼너무 외롭지는 않았다.혼자인데혼자만은 아닌 밤.그런 말이 조금 웃기긴 한데,정말 그랬다.나는 삼각김밥을 다 먹고맥주 캔을 땄다.이번엔 먼저 말하지 않았다.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가만히 앉아 있었다.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 마셔?나는 웃었다.어떻게 안 물어보고도 이렇게 묻지.[응.][강태준]* 나도 하나 샀어.나는 화면을 보며한숨처럼 웃었다.[또?][강태준]* 응.[왜.]답이 늦었다.조금 뒤,메시지가 왔다.[강태준]* 같은 밤이고 싶어서.나는 맥주 캔을 든 채 멈췄다.같은 밤.그 말이 너무 곧장 들어왔다.같은 공간도 아니고,같은 집도 아니고,같은 침대도 아니고.그냥 같은 밤.각자 다른 곳에서,각자 다른 캔을 들고,같은 시간 안에 있다는 것.그것만으로도그는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나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태준이 바로 하나 더 보냈다.[강태준]* 부담스러우면 취소.나는 눈을 감았다.이 사람은 이제자기 마음에도 취소선을 긋는다.내가 무서울까 봐.그게 너무 늦게 배운 조심스러움이라마음이 아팠다.나는 한참 뒤에 답장했다.[취소하지 마.]보내고 나서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읽음.긴 침묵.그리고 답장.[강태준]* 알았어.그 한마디가오늘따라 너무 조용했다.나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쓴맛이 입안에 퍼졌다.그런데 이상하게싫지 않았다.⸻밤이 조금 깊어졌을 때태준에게서 전화가 왔다.화면에 이름이 떴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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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닿지 못한 밤, 다시 열린 문 (6)

잠들기 전,태준에게서 마지막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잘 자.나는 화면을 보며오래 망설였다.오늘은 그냥 너도, 라고 보내면 될 것이다.어제처럼.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하지만 오늘은그러고 싶지 않았다.내가 먼저 그의 이름을 불러버린 밤이었다.전화는 받지 못했지만,언젠가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한 밤이었다.나는 천천히 답장을 썼다.[잘 자, 태준아.]보내고 나서바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화면을 다시 볼 자신이 없었다.몇 분 뒤,진동이 울렸다.나는 조금 있다가 휴대폰을 들었다.[강태준]* 나 오늘 못 잘 것 같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울음도 같이.답장을 쓰지 않았다.그냥 화면을 꺼버렸다.오늘은 거기까지.정말 거기까지.그 이상 가면나는 너무 빨리 무너질 것 같았다.불을 끄고 누웠다.방 안은 어두웠다.현관은 비어 있었고,전화는 닿지 않았고,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그런데도 문 하나가조금 열린 것 같았다.닫아야 하는데.닫고 싶은데.나는 그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싫지 않았다.그게 제일 무서웠다.⸻【서윤의 기억 7】헤어진 뒤에도나는 한동안 태준의 전화를 기다렸다.울리지 않는 휴대폰을습관처럼 뒤집어놓고,혹시 진동을 못 느꼈나 싶어서다시 확인하고,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도또 기다렸다.그때는 그게 자존심이 상해서절대 인정하지 못했다.나는 네 전화를 기다린 게 아니야.그냥 습관이었어.그렇게 스스로를 속였다.그런데 오늘 알았다.기다림은 습관이 되기도 하지만,처음엔 분명 마음이었다.나는 그 마음을 너무 오래습관이라고 부르며 버텼다.오늘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한 건미워서만은 아니었다.받으면내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목소리에서 다 들킬 것 같아서였다.⸻【태준의 속마음 20】전화를 걸면 안 됐다.알고 있었다.메시지만으로 충분한 밤이었다.서윤이 나에게취소하지 말라고 했다.그 말 하나로도나는 충분히 버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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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닿은 목소리, 닫히지 않은 문 (1)

아침에 눈을 떴을 때,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젯밤 보낸 마지막 문장이었다.잘 자, 태준아.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이불 안에서 한숨부터 쉬었다.미쳤나 봐.정말 미쳤나 봐.그냥 잘 자, 라고 보내면 됐는데.어제처럼 너도, 라고 보내면 충분했는데.굳이 이름을 붙였다.태준아.그 세 글자가밤새 방 안 어딘가에 걸려 있었던 것 같았다.나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천장을 보고 있었다.휴대폰은 베개 옆에 뒤집혀 있었다.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보고 싶었다.사람이 제일 싫어지는 순간은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너무 잘 알 때다.나는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잠금 화면엔 아무것도 없었다.메시지도 없고,전화도 없고,알림도 없었다.그게 이상하게 다행이었다.그리고 아주 조금 서운했다.정말 사람 마음은 왜 이렇게 못됐을까.나는 휴대폰을 켰다.어젯밤 대화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나]* 잘 자, 태준아.[강태준]* 나 오늘 못 잘 것 같아.그리고 끝.나는 그 마지막 문장을 오래 보았다.못 잘 것 같아.장난처럼 보낼 수도 있는 말인데태준이 보내면 꼭 다르게 읽혔다.그는 정말 못 잤을 것 같았다.아니.못 자길 바랐던 건지도 몰랐다.나 때문에.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나는 얼굴을 감쌌다.정말 최악이다.나는 그가 힘들지 않길 바라면서도,내가 조금은 그의 밤을 망쳤으면 했다.정확히 그만큼.내가 밤새 흔들린 만큼.비슷하게.그런 마음을 인정하는 건생각보다 추했다.그런데 부정하기엔이미 너무 늦었다.나는 대화창을 닫았다.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씻고,옷을 고르고,머리를 말리고,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만들어야 했다.사람은 이상하다.밤에는 무너질 것처럼 흔들려도아침이 되면 다시 화장을 하고 출근한다.그게 어른이라는 건지,그냥 못난 버릇인지 모르겠다.현관 앞에서 구두를 신다가나는 문득 멈췄다.어제 태준이 한 말이 떠올랐다.문.나는 도어락을 확인했다.잠겨 있었다.그걸 보는데괜히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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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닿은 목소리, 닫히지 않은 문 (2)

오전 업무는 정신없이 지나갔다.팀장님은 어제 보낸 카피 후보에 대해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며 회의 자료를 다시 정리하라고 했다.나는 노트북 화면 앞에 앉아문장들을 다시 배열했다.1안. 떠난 뒤에도 남아 있는 것들2안. 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3안. 오래 머문 감정의 자리2안이 자꾸 눈에 걸렸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이걸 내가 왜 보냈을까.어제는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오늘 보니 아니었다.나는 그냥그가 이 문장을 봤으면 했다.알아봤으면 했다.우리가 끝난 줄 알았던 게정말 끝난 게 아니었다는 걸.그 말을직접 할 용기는 없으면서.나는 문서를 저장하다가손을 멈췄다.비겁하다.정말 비겁하다.그런데 사람은 가끔비겁한 방식으로만 진심을 보낸다.대놓고 말하면 무너지니까.다른 이름을 붙여서 보낸다.업무.카피.후보안.검토 요청.그런 말들 뒤에진짜 마음을 숨긴다.나는 그걸 하고 있었다.정말 싫다.그런데 그가 알아봐줬으면 했다.모순도 이 정도면 병이다.점심 전,우진이 내 자리로 와서 자료를 건넸다.“오후 회의 자료입니다.”“감사합니다.”나는 파일을 받아 들었다.우진은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오늘 강 디렉터님 오시는 거 맞습니까?”나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네. 그런 것 같아요.”“그렇군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표정은 평소와 같았다.그래서 더 불편했다.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정우진 씨.”“네.”“어제 점심 때… 불편했죠.”우진은 나를 보았다.“불편하지 않았습니다.”“거짓말하지 마세요.”내 말에그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조금은요.”그 솔직함에오히려 내가 할 말이 없어졌다.우진은 낮게 말했다.“그런데 한서윤 씨가 더 불편해 보였습니다.”“…”“그래서 괜찮았습니다.”괜찮았습니다.이 사람은 왜 이렇게 말할까.자기가 괜찮아서 괜찮은 게 아니라,내가 더 힘들어 보여서 괜찮았다는 말.그게 너무 우진 같아서마음이 더 무거워졌다.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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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닿은 목소리, 닫히지 않은 문 (3)

회의가 끝나고,사람들이 하나둘 회의실을 나갔다.팀장님은 전화가 와서 먼저 나갔고,우진은 자료를 정리하다가 내게 말했다.“저는 출력물 좀 가져오겠습니다.”“네.”그가 나가고,회의실엔 나와 태준만 남았다.갑자기 너무 조용해졌다.나는 노트북을 닫았다.태준은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그가 먼저 말했다.“잘 잤다며.”나는 손을 멈췄다.“…갑자기 그 얘기를 왜 해.”“거짓말한 것 같아서.”나는 그를 보았다.태준은 웃지 않았다.“너도 조금 못 잤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며 말했다.“난 거의 못 잤고.”“그걸 왜 말해.”“알아줬으면 해서.”나는 숨이 막혔다.태준은 요즘 너무 이상하다.예전 같으면 숨겼을 말들을너무 쉽게 꺼낸다.아니.쉽게가 아니다.아마 어렵게 꺼내고 있을 것이다.그런데 그 어려움이이제 내 눈에도 보인다.그래서 더 피할 수가 없다.나는 시선을 돌렸다.“그러지 마.”“뭘.”“그런 말.”“왜.”나는 입술을 눌렀다.“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태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 침묵이 이상하게 부드러웠다.그는 나를 몰아붙이지 않았다.기다렸다.그러다 낮게 말했다.“몰라도 돼.”나는 그를 봤다.“뭘 자꾸 몰라도 된대.”“지금 당장 답 안 해도 된다고.”“…”“나도 이제 알아. 네가 바로 대답 못 하는 사람인 거.”그 말에가슴 어딘가가 아프게 눌렸다.그는 나를 안다.너무 잘 알아서 아프고,이제서야 조심스럽게 아는 척해서 더 아팠다.태준이 말했다.“근데 하나는 말해야겠다.”“뭔데.”그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어제 네가 나중에는 전화를 받을 수도 있다고 했잖아.”나는 손끝이 차가워졌다.“그거…”“알아. 확답 아닌 거.”“…”“근데 나한테는 그게 거의 확답처럼 들렸어.”나는 숨을 삼켰다.태준의 목소리는 낮았다.“그래서 오늘 조심하려고 했는데.”“…”“회의실에서 너랑 정우진 씨 같이 있는 거 보니까 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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