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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 다시 마주한 마음 (2)

회의가 끝나자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디자인팀은 화면 사진을 찍고 먼저 나갔다.팀장님은 오후 일정 이야기를 하며자료를 챙겼다.우진은 출력물을 정리하다가나와 태준을 한 번씩 봤다.짧게.묻지 않는 눈.나는 그게 고마운지 불편한지요즘 자주 헷갈렸다.“저는 출력실 다녀오겠습니다.”우진이 말했다.“네.”내 대답은 조금 늦었다.문이 닫혔다.회의실엔나와 태준만 남았다.프레젠테이션 화면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그 문장이 여전히우리 앞에 걸려 있었다.나는 리모컨을 찾았다.“화면 끌게.”태준이 말했다.“잠깐만.”손이 멈췄다.나는 그를 보았다.태준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오히려너무 오래 알고 있던 것을다시 확인하는 사람처럼 보였다.나는 괜히 차갑게 물었다.“또 봐?”그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응.”“이미 봤잖아.”“그래도.”그래도.그 말이 이상하게 걸렸다.태준은 잠깐 더 화면을 보다가조용히 말했다.“큰 화면으로 보니까 더 안 빠져나가져.”나는 입술을 다물었다.빠져나가고 싶었던 건나만이 아니었구나.그런 생각이 들었다.태준이 천천히 말했다.“처음 봤을 때도 좋았어.”“…”“오늘은 좀 더 아팠고.”그런 말은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그런데 그가 쉽게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더 말리기 어려웠다.나는 겨우 말했다.“업무 카피야.”“응.”“그렇게까지 볼 필요 없어.”태준이 나를 보았다.“그렇게까지 보게 돼.”가슴이 내려앉았다.“왜.”“네가 쓴 거니까.”정말 싫다.이런 대답.너무 단순해서피할 데가 없다.나는 리모컨을 손에 쥔 채시선을 피했다.“내가 썼다고 다 의미 있는 건 아니야.”“알아.”“모르는 것 같은데.”“알아.”태준은 조용히 대답했다.“네가 다 나 생각하고 쓴 거라고 착각하면 안 되는 거.”“…”“그런데 아예 내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못 하겠어.”숨이 막혔다.그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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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 다시 마주한 마음 (3)

자리로 돌아오자우진이 이미 앉아 있었다.그는 출력물을 정리하고 있었다.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았다.그러니까 더아무렇지 않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우진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회의실에 두고 온 자료는 없습니까?”“네. 없어요.”“화면은 껐고요?”나는 잠깐 멈췄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꺼진 화면.사라지지 않은 문장.“네. 껐어요.”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더 묻지 않을 줄 알았다.그런데 잠시 뒤그가 조용히 말했다.“2안 좋았습니다.”나는 그를 봤다.“고마워요.”“한서윤 씨 문장은 가끔 너무 안쪽에서 나옵니다.”그 말에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우진은 나를 보지 않았다.그냥 자료를 가지런히 정리했다.“그래서 오래 남습니다.”나는 손끝을 접었다.태준은 그 문장 안에서자기 기억을 찾았고,우진은 그 문장이내 안쪽에서 나온 걸 알아봤다.둘 다 다르다.둘 다 맞다.그래서 더 숨을 데가 없다.“그런가요.”겨우 그렇게 말했다.우진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네.”그리고 다시 모니터를 봤다.끝.우진은 항상더 들어오지 않고 멈춘다.그게 그의 방식이다.나는 그게 고맙고,그래서 더 미안했다.⸻점심시간이 지나도태준에게서는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회의실에서 그런 말을 해놓고그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예전 같았으면 바로 왔을 것이다.그 문장 무슨 뜻이야.아까 말한 거 진심이야?나 생각한 거 맞지?그는 참지 못했을 것이다.지금은 참는다.그래서 내가 더 오래 생각한다.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탕비실로 갔다.찬물을 받았다.종이컵을 손에 쥐고 있는데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메시지였다.[강태준]* 밥 먹었어?나는 헛웃음을 흘렸다.정말.이 사람은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 얘기를 하다가도결국 밥이다.나는 답장했다.[조금.]거짓말을 하려다가 말았다.샐러드 두 입.커피 반 잔.그걸 먹었다고 하기는좀 그랬다.읽음.잠깐 답이 없었다.그리고.[강태준]* 조금은 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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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 다시 마주한 마음 (4)

나는 엘리베이터에 탔다.숫자가 천천히 내려갔다.태준이 물었다.— 밥은?“아까 먹었어.”— 진짜?“진짜.”— 뭐.“김밥.”— 김밥은 괜찮네.“허락받은 기분이다.”— 허락은 아니고 확인.“그게 더 별로야.”태준이 낮게 웃었다.그 웃음이 수화기 너머로 작게 번졌다.나는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말했다.“오늘 그 문장.”— 응.“네가 그렇게 볼 줄 알았어.”말하고 나서나도 놀랐다.몰랐어, 가 아니었다.알았어.나는 알고 있었다.태준이 그 문장을 그냥 넘기지 못할 거라는 걸.태준도 그걸 알았는지잠깐 말이 없었다.— 알고 있었어?“조금.”— 그럼 왜 썼어.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왜 썼을까.나도 알고 싶었다.문장이 먼저 나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나는 아마언젠가부터 그 말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을일이란 이름으로 꺼내놓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나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안 쓰면 더 오래 남을 것 같아서.”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번엔 내가 더 말했다.“글로 쓰면 좀 빠질 줄 알았어.”— 빠졌어?나는 로비로 걸어 나갔다.밖은 이미 어두웠다.비는 오지 않았는데길이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아니.”내가 말했다.“더 선명해졌어.”태준의 숨이 들렸다.아주 낮게.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오늘 나는 왜 이렇게 많이 말하지.정말 큰일이다.태준이 한참 뒤에 말했다.— 그 말, 내가 좋아하면 안 되지.나는 작게 웃었다.“또 물어봐?”— 이번엔 안 물어보려고 했어.“그럼?”— 이미 좋아해서.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밤공기가 차갑게 볼을 스쳤다.그런데 귀에 닿는 태준의 목소리는이상하게 따뜻했다.그게 문제였다.정말.그게 문제였다.⸻집에 도착할 때까지우리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그냥 연결돼 있었다.태준은 가끔 물었다.— 길 괜찮아?“응.”— 춥지 않아?“조금.”— 겉옷 여몄어?“응.”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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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벽에 걸린 온도, 피하지 못한 대답 (1)

그 문장은 결국 벽에 걸렸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내가 썼고,태준이 오래 봤고,우진이 너무 안쪽에서 나온 문장이라고 했던 말.그 문장이 이제는 회의실 화면이 아니라실제 공간의 벽 한가운데 붙어 있었다.임시 출력물이긴 했다.아직 최종 시공 전이라얇은 폼보드에 붙여둔 시안일 뿐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진짜보다 더 진짜 같았다.사람이 들어오기 전의 현장.전선이 바닥을 지나가고,조명은 절반쯤만 켜져 있고,벽면 일부는 아직 마감 전이라 거칠었다.그 한가운데너무 멀쩡한 문장 하나가 떠 있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나는 그 앞에 서서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문장은 내가 썼는데,이제 내 손을 떠난 것 같았다.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걸리면문장은 더 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그 안에 뭘 숨겼든,누굴 생각했든,어디까지가 업무였고 어디부터가 마음이었든.이제는 다 소용없었다.벽에 걸린 순간그 문장은 나보다 더 뻔뻔해졌다.“한서윤 씨.”우진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시공팀과 이야기를 마치고 있었다.검은 파일을 들고,늘 그렇듯 단정한 얼굴이었다.“위치는 괜찮습니까?”나는 다시 벽을 봤다.“네. 괜찮은 것 같아요.”“조명이 들어오면 더 선명해질 겁니다.”“그럼 너무 튀지 않을까요?”우진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그는 문장을 오래 보지 않았다.딱 필요한 만큼만 봤다.“튀는 문장이긴 합니다.”“역시 그렇죠.”“그런데 나쁘게 튀지는 않습니다.”나는 작게 웃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우진은 잠깐 생각하듯 벽을 봤다.“사람이 그냥 지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쪽입니다.”그 말에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지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문장.그게 좋은 건지위험한 건지아직 모르겠다.우진이 나를 보았다.“불편합니까?”너무 정확한 질문이었다.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조금요.”“왜요?”“제가 쓴 문장이 너무 크게 보이는 게 이상해서요.”“문장이 커진 겁니까, 아니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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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벽에 걸린 온도, 피하지 못한 대답 (2)

“한서윤 씨는 어떻게 보십니까?”우진이 물었다.나는 벽을 보았다.“좋아요.”내 대답이 너무 짧았는지태준이 나를 봤다.나는 괜히 덧붙였다.“아까보다 편해요.”태준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편해요.그 말이 벽 얘기인지자기 얘기인지그도 아마 헷갈렸을 것이다.나도 그랬으니까.태준은 곧 다시 업무 얼굴로 돌아갔다.“조명은 테스트해보죠.”현장 조명이 하나씩 꺼지고벽면 조명만 남았다.주변이 어두워지자문장이 더 또렷해졌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차가운 벽 위에따뜻한 말처럼 떠 있었다.웃기다.말이 따뜻할 수도 있나.있다.나는 안다.문.밥.들어갔어?기다릴게.그 짧은 말들이요즘 내 하루를 이상하게 데우고 있으니까.조명이 조금 더 낮아졌다.문장은 부드러워졌다.태준이 말했다.“이 정도가 낫습니다.”우진도 고개를 끄덕였다.“과하지 않네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과하지 않은 것.요즘 태준이 제일 애쓰는 것.조금만.천천히.더 가까이 오지 않고그 자리에 서 있는 것.나는 벽의 문장을 보다가갑자기 숨이 막혔다.이 문장은 공간을 위한 문장인데자꾸 우리를 설명한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내가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태준이 끝난 줄 알았던 것들.그리고 아직둘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이 정도면 문장이 아니라덫이다.내가 직접 만든 덫.그 안에내가 먼저 걸렸다.⸻시공팀이 다른 쪽 조명을 확인하러 가고,우진은 현장 담당자와 밖으로 나갔다.넓은 공간에나와 태준만 잠깐 남았다.벽에는 그 문장이 있었다.이번에도.꼭 우리를 일부러 둘만 남겨두는 것처럼.나는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나도 나가볼게.”태준이 말했다.“잠깐만.”또.요즘 이 사람은잠깐만이라는 말을 너무 자주 한다.문제는내가 이제 그 말을 듣고 바로 도망치지 않는다는 거다.나는 멈췄다.“왜.”태준은 나를 보지 않고벽을 봤다.“진짜 좋다.”“또 그 얘기야?”“응.”“그만 좀 좋아해.”말이 나오고 나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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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벽에 걸린 온도, 피하지 못한 대답 (3)

밖에서 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한서윤 씨.”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우진이 입구 쪽에 서 있었다.태준과 나 사이의 공기를 봤는지못 봤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팀장님이 시안 사진 요청하셨습니다.”“아, 네. 찍을게요.”나는 휴대폰을 꺼냈다.태준이 옆으로 물러섰다.나는 벽을 찍었다.한 장.조금 가까이에서 한 장.조명까지 보이게 한 장.화면 속 문장은실제보다 더 차분해 보였다.휴대폰 카메라는이렇게 비겁하다.진짜 흔들린 마음은 다 빼고그럴듯한 결과물만 남긴다.나는 사진을 확인했다.그 순간 우진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이 컷이 낫습니다.”그가 화면을 가리켰다.손가락이 내 손 가까이에 왔다.닿지는 않았다.그런데 아주 가까웠다.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조금 뒤로 뺐다.정말 아주 조금.우진은 그걸 봤다.태준도 봤다.셋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짧은 침묵이너무 선명했다.우진이 먼저 물러났다.“죄송합니다. 화면만 보려고 했습니다.”“아니에요.”내 대답이 너무 빠르게 나왔다.태준은 말이 없었다.그는 벽을 보고 있었다.벽을 보는 척하고 있었다.나는 왜 그걸 아는지 모르겠다.우진은 파일을 정리하며 말했다.“사진은 제가 팀장님께 전달하겠습니다.”“제가 보낼게요.”“괜찮습니다.”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너무 평소 같아서오히려 마음이 쓰였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사진 속 문장.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정말 지긋지긋하다.오늘 하루 종일이 문장 하나가사람 셋을 이상하게 만들고 있었다.⸻현장 확인이 끝나고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하늘이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비가 올 것 같았다.아니나 다를까몇 걸음 걷기도 전에빗방울이 떨어졌다.굵지는 않았다.그런데 충분히 젖을 정도였다.우진이 먼저 말했다.“우산 있으십니까?”나는 가방 안을 뒤졌다.없었다.분명 아침엔 흐렸는데챙기지 않았다.정말 나답다.“없어요.”우진이 자기 우산을 폈다.“역까지 같이 가시죠.”그 말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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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벽에 걸린 온도, 피하지 못한 대답 (4)

역까지 가는 길은 길지 않았다.그런데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우진은 말이 없었다.그는 정말 필요한 만큼만 우산을 기울였고,내 어깨가 젖지 않는지만 조용히 확인했다.나는 그 배려가 편하면서도 불편했다.편한 사람의 다정함은가끔 더 미안하다.태준의 다정함은 무섭고,우진의 다정함은 미안하다.둘 다 피곤하다.아니.내가 피곤한 사람인 걸지도.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강 디렉터님, 많이 참고 계시더군요.”나는 걸음을 멈출 뻔했다.“네?”“아까요.”그는 앞을 보며 말했다.“차 이야기를 하면서도,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우진은 덧붙였다.“전에는 달랐습니까?”질문은 조심스러웠다.그런데 피할 수 없었다.나는 빗물이 튀는 보도블록을 보며 말했다.“많이 달랐어요.”“지금은요?”“지금은…”나는 말을 고르다가그냥 솔직히 말했다.“너무 달라서 무서워요.”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변한 사람이 무섭습니까, 아니면 다시 믿고 싶은 마음이 무섭습니까.”나는 그를 봤다.정말.이 사람은 가끔정확한 말을 너무 조용히 한다.차라리 소리치면 덜 아플 텐데.나는 웃었다.조금 지친 웃음이었다.“우진 씨는 왜 항상 그런 식으로 물어요?”“답을 알고 계신 것 같아서요.”“제가요?”“네.”“전 모르겠는데요.”“모르는 척하시는 것 같습니다.”나는 더 웃지 못했다.우산 위로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툭.툭.툭.규칙적이고,조금 답답한 소리.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믿고 싶은 마음이 무서운 것 같아요.”말하고 나서숨이 조금 빠졌다.우진은 나를 보지 않았다.그게 다행이었다.“그럼 강 디렉터님 때문만은 아니네요.”“무슨 뜻이에요?”“한서윤 씨 마음도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뜻입니다.”나는 입술을 다물었다.맞다.이제 남 탓만 할 수 없다.태준이 변해서.태준이 기다려서.태준이 조심스러워져서.태준이 밥을 묻고,문을 묻고,좋아해도 되냐고 물어서.그렇게 말하면내가 흔들린 이유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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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벽에 걸린 온도, 피하지 못한 대답 (5)

지하철 안은 축축했다.젖은 우산 냄새.젖은 옷 냄새.사람들 사이에서 올라오는 따뜻하고 답답한 공기.나는 문 옆에 서서손잡이를 잡았다.휴대폰은 조용했다.태준에게서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아까 건물 앞에서내가 우진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는데도.그는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화났어?왜 그랬어?우산 같이 써야 했어?그런 말은 없었다.그래서 더 신경 쓰였다.진짜 화가 안 난 걸까.아니면 참는 걸까.참는 거겠지.태준은 지금 분명히혼자 참는 중일 것이다.그 생각이 들자가슴이 조금 아팠다.예전엔 그가 참지 못하는 게 싫었다.지금은 그가 너무 잘 참는 게나를 자꾸 괴롭힌다.사람 마음은 정말 못됐다.나는 휴대폰을 꺼냈다.입력창을 열었다.[비 많이 맞았어?]거기까지 쓰고 멈췄다.너무 걱정하는 사람 같다.맞잖아.걱정하잖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삭제할까 하다가그냥 보냈다.읽음.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그 몇 초가이상하게 길었다.곧 답이 왔다.[강태준]* 조금.나는 화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거짓말.그 사람은 항상 조금이라고 한다.조금 젖었어.조금 피곤해.조금 괜찮아.조금만 좋아할게.다 거짓말이다.나는 다시 썼다.[차 있다며. 왜 안 탔어.]읽음.이번엔 답이 조금 늦었다.[강태준]* 네가 갈 때까지 보고 있었어.심장이 내려앉았다.나는 지하철 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표정이 엉망이었다.왜 그런 걸 말해.왜 자꾸내가 모른 척할 수 없게 해.나는 한참 답하지 못했다.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지하철이 흔들렸다.사람들이 조금씩 밀렸다.나는 다시 화면을 봤다.강태준.그 이름 밑에내가 아직 답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네가 갈 때까지 보고 있었어.나는 겨우 썼다.[그러지 마.]읽음.곧 답이 왔다.[강태준]* 알았어.너무 순순했다.그래서 더 아팠다.나는 바로 다시 썼다.[아니.]보내고 나서내가 뭘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잠깐 눈을 감았다.읽음.태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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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벽에 걸린 온도, 피하지 못한 대답 (6)

씻고 나와 보니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하나 와 있었다.강태준.나는 잠깐 망설이다가바로 다시 걸었다.신호음이 한 번 가기도 전에그가 받았다.— 응.“전화했었네.”— 씻고 있을 것 같아서 끊었어.“그럼 왜 했어.”잠깐 침묵.— 목소리 듣고 싶어서.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오늘 봤잖아.”— 봐서 더.나는 눈을 감았다.이 말.얼마 전에도 들은 말.그때도 무너졌고,지금도 조금 무너진다.“그거 반칙이야.”— 알아.“알면서 해?”— 응.나는 웃음이 날 것 같았다.“오늘은 좀 뻔뻔하네.”— 아까 속상하다고 말해도 된다고 했잖아.“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 보고 싶다는 것도 비슷한 쪽이라서.“억지.”— 응. 조금 억지.태준이 낮게 웃었다.그 웃음이 전화기 너머에서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나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쌌다.“비 맞았어?”— 조금.“거짓말하지 말라고 내가 했지.”— 많이는 아니고.“차 있다며.”— 네가 갈 때까지 보고 있었으니까.또.나는 숨을 내쉬었다.“그런 거 하지 말라니까.”— 알았어.“또 바로 알았어.”태준이 조용히 웃었다.— 그러면 속상하다고 할까.“응.”잠깐 침묵.— 속상했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태준은 천천히 말했다.— 네가 정우진 씨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거 보니까, 속상했어.“…”— 근데 네가 불편해 보여서 더 말 못 했어.나는 손가락으로 수건 끝을 만졌다.“불편하긴 했어.”— 알아.“우진 씨 때문은 아니고.”— 응.“너 때문만도 아니고.”— 응.“그냥… 내가 이상해서.”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제 그는내가 말을 찾을 때까지 기다린다.나는 그 기다림이아직도 조금 무섭고,이제는 조금 고맙다.“누가 나한테 잘해주면 다 힘들어.”말하고 나서스스로도 놀랐다.너무 솔직했다.태준은 조용했다.나는 계속 말했다.“우진 씨는 편해서 미안하고, 너는…”목이 잠깐 막혔다.“너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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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벽에 걸린 온도, 피하지 못한 대답 (7)

태준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서윤아.“응.”— 나 지금 진짜 많이 참고 있어.그 말에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나는 얼굴이 뜨거워져서눈을 꼭 감았다.“알아.”— 몰라.“알아.”— 모르면 좋겠어.“왜.”— 알면 네가 또 무서워질까 봐.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이 사람은자기 마음이 나를 다칠까 봐계속 손끝을 말아쥐고 있다.그 모습이이상하게 아프고,이상하게 좋다.그래서 더 위험하다.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무서워.”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덧붙였다.“근데 싫지는 않아.”조용해졌다.방 안도,전화 너머도,내 안도.그 말은요즘 우리가 계속 돌려 말하던 모든 것의 가운데였다.무섭지만 싫지는 않아.태준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그 말이면 오늘 나 못 자.나는 웃음이 났다.이번엔 숨기지 못했다.“자.”— 못 잘 것 같아.“그래도 자.”— 응.그가 낮게 웃었다.— 노력할게.노력할게.배울게.기다릴게.참을게.요즘 태준의 말들은전부 어딘가로 천천히 가고 있었다.그 끝이 어디인지는 모르겠다.하지만 오늘은그 길 위에 내가 조금 서 있는 것 같았다.아주 조금.⸻전화를 끊은 뒤에도나는 한참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방 안은 조용했다.창밖에서는 비가 계속 내렸다.아까 현장 벽에 걸린 문장이자꾸 눈앞에 떠올랐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이제는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사라진 줄 알았던 건정말 사라진 게 아니었다.다만 내가 안 보는 척했을 뿐이다.태준도.그때의 나도.그때의 우리도.전부 없어진 게 아니라어딘가에 남아 있었다.좋은 기억만 남은 건 아니다.상처도 남았고,서운함도 남았고,서로를 지치게 했던 날들도 그대로 남아 있다.그런데 이상하게그 사이에 온도도 남아 있었다.비 오는 날의 우산.집 앞의 기다림.늦은 밤의 전화.잘했어.문.밥.그런 하찮고 끈질긴 말들.나는 그걸 다 지운 줄 알았다.아니었다.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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