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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참은 질투, 먼저 보낸 마음 (1)

“정우진 씨랑 있으면 편해?”태준의 첫마디가 그거였다.나는 회의실 문 앞에서 그대로 멈췄다.오후 네 시.비는 그쳤고,복도 끝 유리창에는 젖은 하늘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사람들이 다니는 회사 복도였다.프린터 돌아가는 소리도 들렸고,멀리서 누가 웃는 소리도 들렸다.그런데 태준은 그런 곳에서너무 사적인 말을 꺼냈다.정우진 씨랑 있으면 편해?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질문이 너무 곧장 왔다.그런데 이상하게몰아붙이는 느낌은 아니었다.예전의 태준이었다면이렇게 묻지 않았을 것이다.왜 그 사람 우산을 썼어.내 차 두고 왜.나 말고 그 사람이 편해?그런 식이었을 것이다.묻는 척하면서이미 화가 나 있는 말.그런데 지금의 태준은 달랐다.화난 얼굴은 아니었다.그냥 알고 싶은 얼굴이었다.아픈 걸 숨기다가더는 못 숨겨서 꺼내놓은 사람처럼.나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조금 세게 쥐었다.“갑자기?”“갑자기 아니야.”그가 말했다.“어제부터 계속 생각했어.”나는 시선을 피했다.어제.우진의 우산.비 오는 건물 앞.태준은 차를 가져왔다고 했고,나는 우진의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그 순간 태준의 얼굴이아직도 생각난다.붙잡지 않는 얼굴.그런데 붙잡지 않느라무언가를 삼키는 얼굴.그걸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태준은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았다.복도 벽에 등을 기대지도 않았다.그냥 내 앞에 서 있었다.조금 떨어져서.요즘 그는 자꾸그 거리를 지킨다.그게 더 어렵다.“편해.”내가 말했다.태준의 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나는 그걸 보고 바로 덧붙였다.“우진 씨는 편해.”말하고 나서숨이 막혔다.이 말은 너무 솔직했다.그리고 너무 잔인할 수도 있었다.태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내 말을 삼키듯 듣고 있었다.나는 입술을 눌렀다.“근데 그 편한 게…”말이 잘 안 나왔다.이런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우진은 편하다.정확히 말하면,내가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편함이 있다.그는 나를 몰아붙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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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참은 질투, 먼저 보낸 마음 (2)

나는 파일을 가슴 쪽으로 당겼다.진짜 못됐다.이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알았다는 말 말고.”“응.”“나도 생각해볼게, 정도.”태준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생각해볼게.”나는 숨이 막혀서시선을 돌렸다.“그렇게 바로 따라 하지 말고.”“미안.”“미안도 너무 바로 하지 말고.”태준이 멈췄다.그가 정말로 멈추자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날 뻔했다.이 사람.진짜로 배우고 있다.너무 늦게.너무 성실하게.그래서 더 위험하게.⸻회의실 안에서는오후 현장 사진 확인이 이어졌다.벽에 걸린 카피 사진이대형 모니터에 떠 있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하루가 지나도그 문장은 아직 우리를 따라다녔다.팀장님은 사진을 보며 만족한 듯 말했다.“이 정도면 분위기 괜찮네요. 문장 위치도 좋아졌고요.”우진이 차분히 설명했다.“강 디렉터님 쪽에서 한 손가락 정도 낮추는 걸 제안해주셨습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닿는 높이입니다.”팀장님이 태준을 봤다.“확실히 낮추니까 편하네요.”태준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네.”나는 노트북 화면만 보고 있었다.시선이 자연스럽게 닿는 높이.또 그 말.태준은 공간을 다룰 때 참 조심스럽다.사람이 어디서 멈추고,어디를 보고,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는지.그는 그런 걸 알고 있다.그런데 예전의 우리는 왜 그렇게 서툴렀을까.사람 마음도시선처럼 자연스럽게 닿는 높이가 있었을 텐데.우리는 늘너무 높거나,너무 가까웠다.그래서 목이 아팠고,숨이 막혔고,결국 서로를 보지 못했다.“한서윤 씨.”팀장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네.”“문장 옆에 들어갈 서브 카피는 오늘 안에 정리 가능하죠?”“네. 오후 안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너무 길지 않게요. 메인 문장이 세니까.”“알겠습니다.”회의는 짧게 끝났다.사람들이 나가고,나는 자료를 정리했다.우진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방금 복도에서 강 디렉터님과 이야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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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참은 질투, 먼저 보낸 마음 (3)

서브 카피는 잘 써지지 않았다.메인 카피 아래 붙을 한 줄.너무 길면 죽고,너무 설명하면 촌스럽고,너무 감성적이면 과했다.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빈 문서만 한참 봤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그 아래 어떤 문장을 붙여야 할까.돌아온 감각을 마주하는 순간.아니다.너무 광고 같다.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다시 머무는 곳.아니다.너무 설명한다.당신의 온도가 다시 시작되는 공간.최악.나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머리가 아팠다.문장 하나를 쓰는 일이요즘은 자꾸 마음 하나를 꺼내는 일처럼 느껴진다.원래 이러지 않았다.일은 일이었다.문장은 문장이었다.나에게 카피는정확하게 감정을 포장하는 기술이었다.그런데 요즘은포장이 자꾸 뜯어진다.안쪽이 보인다.그래서 쓰기 힘들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사무실 밖 작은 휴게 공간으로 나갔다.창가 쪽 낮은 테이블.사람이 거의 없는 시간이었다.커피머신 소리만 작게 들렸다.나는 종이컵에 물을 받고창밖을 봤다.비가 그친 뒤의 도시는이상하게 더 차갑다.젖은 것들은 마르는 동안조금 더 선명해진다.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안 써져?”태준이었다.나는 놀라지 않았다.이상하게그가 올 것 같았다.“응.”그는 내 옆으로 오지 않았다.조금 떨어진 테이블 옆에 섰다.거리.또 거리.이제 그가 거리를 지키는 게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했다.“메인 카피가 너무 세서.”내가 말했다.“밑에 뭘 붙여도 설명처럼 보여.”태준은 창밖을 봤다.“설명 안 붙이면 안 돼?”“팀장님이 서브 필요하대.”“그럼 짧게.”“알아. 그 짧게가 어렵다고.”태준이 나를 봤다.“네가 제일 잘하는 거잖아.”나는 웃었다.“오늘은 못 하겠어.”“왜.”“너무 내 얘기 같아서.”말하고 나서공기가 멈췄다.또.또 이런 식이다.나는 왜 이 사람 앞에서자꾸 말이 새는 걸까.태준은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예전 같았으면그 말 하나에 바로 파고들었을 것이다.어떤 게 네 얘기인데.나 때문이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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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참은 질투, 먼저 보낸 마음 (4)

태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계속 말했다.“네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나를 먼저 확인하는 게 보여.”“…”“불편할까 봐, 무서울까 봐, 또 도망갈까 봐.”목이 조금 잠겼다.“그렇게까지 나를 조심하는 네가 좀…”나는 말을 고르다 포기했다.“속상해.”태준의 눈이 흔들렸다.이번엔 숨기지 못했다.나는 그걸 봤다.그리고 후회하지 않았다.이건 말해야 할 것 같았다.“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너도 힘들어 보여.”태준은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그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힘들어.”짧은 대답.나는 가슴이 내려앉았다.태준은 낮게 말했다.“근데 예전처럼 편하게 굴면 너 잃을 것 같고.”“…”“그렇다고 너무 조심하면 너한테 또 짐 되는 것 같고.”그가 웃지도 못하고시선을 내렸다.“나도 잘 모르겠어.”나는 처음으로그의 조심이 사랑이 아니라 벌처럼 느껴졌다.그는 자기 자신을 벌주고 있었다.예전에 나를 놓친 사람이라서.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라서.다시 좋아하는 것도,다가가는 것도,질투하는 것도전부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그게 너무 늦은 다정함이라서나는 화가 났다.조금.아주 조금.“그렇게까지 하지 말라고 하면 못 알아듣겠지?”태준이 나를 봤다.“뭘.”“너 혼자 벌 받듯이 조심하는 거.”태준은 말이 없었다.나는 그를 똑바로 봤다.“나 아직 네가 무섭긴 해.”“…”“근데 네가 그렇게까지 네 마음을 묶어두는 것도 싫어.”말하고 나서내가 먼저 놀랐다.이건 정말 많이 줬다.너무 많이.태준은 완전히 멈췄다.종이컵에서 물방울 하나가 테이블 위로 흘렀다.그 작은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태준이 아주 낮게 말했다.“그럼 풀어도 돼?”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질문이 너무 조용해서더 위험했다.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풀어도 돼.뭘.얼마나.어디까지.그걸 내가 어떻게 정해.나는 손끝을 접었다.“한꺼번에는 안 돼.”“응.”“근데…”목이 말랐다.“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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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참은 질투, 먼저 보낸 마음 (5)

서브 카피는 그 뒤에야 나왔다.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나는 그 문장을 파일에 입력했다.너무 설명적이지 않고,너무 감정적이지도 않았다.조금 담담했다.팀장님은 바로 답을 보냈다.좋아요. 이걸로 정리하죠.나는 노트북을 닫았다.하루가 끝난 것도 아닌데뭔가 하나가 지나간 기분이었다.퇴근 시간이 가까워졌고,사무실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정리했다.태준은 다른 팀과 짧은 미팅에 들어갔고,우진은 먼저 외근 보고를 하러 나갔다.나는 혼자 자리에서 가방을 챙겼다.오늘은 누구와도 같이 나가고 싶지 않았다.태준과도.우진과도.혼자 걸어야 할 것 같았다.로비로 내려왔을 때밖은 다시 흐려져 있었다.비는 오지 않았다.다행이었다.나는 건물 밖으로 나가잠깐 숨을 들이마셨다.젖은 공기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택시를 탈까 하다가그냥 걷기로 했다.집까지는 멀었다.그래도 조금은 걷고 싶었다.답을 내리려는 건 아니었다.그냥내 안에서 너무 많은 말들이 움직이고 있어서가만히 있으면 더 시끄러울 것 같았다.횡단보도 앞에 섰다.신호는 빨간불이었다.사람들이 옆에 모였다.나는 휴대폰을 꺼내지 않았다.누가 문을 묻고,누가 밥을 묻고,내가 괜찮다고 답하고,그가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식으로하루를 닫고 싶지 않았다.오늘은 내가 먼저 고르고 싶었다.말도.거리도.돌아가는 길도.신호가 바뀌었다.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다.나도 걸었다.그때 뒤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서윤아.”나는 멈추지 않았다.횡단보도 한가운데였으니까.대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태준이 건물 앞에 서 있었다.뛰어온 건 아닌 것 같았다.숨은 흐트러지지 않았다.그런데 눈은 조금 흔들려 있었다.신호가 깜빡이기 시작했다.나는 마저 건넜다.건너편에 도착해서야뒤돌아섰다.태준은 아직 반대편에 있었다.차들이 다시 지나가기 시작했다.우리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이상한 거리였다.가깝지도 않고,멀지도 않은.건너오려면 건너올 수 있지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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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참은 질투, 먼저 보낸 마음 (6)

그 말에내 안쪽이 조용히 무너졌다.나는 고개를 숙였다.웃음이 나올 것 같았고,울 것 같기도 했다.정말 별일 아닌 말인데.안 붙잡았어.그냥 말만 했어.그게 오늘은 왜 이렇게 크게 들리는지 모르겠다.나는 한참 뒤에 말했다.“잘했네.”태준이 멈췄다.그 말 하나에그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나는 이제 안다.그런데 이번엔 일부러 말했다.잘했네.태준은 시선을 내렸다가다시 나를 봤다.“또 해줘.”나는 눈을 깜빡였다.“뭘.”“잘했다고.”너무 솔직했다.너무 어린 말 같기도 했고,너무 오래 참은 사람의 말 같기도 했다.나는 심장이 아파서시선을 피했다.“너 진짜…”“응.”“요즘 왜 그래.”“몰라.”태준이 낮게 말했다.“네가 그렇게 말해주면, 내가 다음에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아.”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그 말은 너무 무거웠다.그런데 이상하게나쁘지 않았다.내가 그 사람을 고쳐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내가 그의 전부를 책임져야 한다는 뜻도 아니었다.다만우리가 서로에게 아주 작은 방향을 알려주는 중이라는 뜻 같았다.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그리고 말했다.“오늘 잘했어.”태준은 정말 아무 말도 못 했다.나는 덧붙였다.“붙잡고 싶다고 말한 것도.”“…”“안 붙잡은 것도.”“…”“둘 다.”태준의 눈이 젖은 것처럼 보였다.비는 오지 않았다.그런데 그렇게 보였다.그는 아주 낮게 말했다.“나 지금 너 안고 싶어.”심장이 멈췄다.이번엔 내가 완전히 굳었다.태준도 그걸 봤다.그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한 걸음도.손끝 하나도.그냥 그 자리에 서서내 대답을 기다렸다.내가 싫다고 하면그는 물러날 것이다.이제는 안다.그걸 아니까더 어렵다.나는 숨을 들이마셨다.“안 돼.”태준의 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응.”이번 응은조금 아팠다.그래도 그는 물러났다.정확히 반 걸음.그 반 걸음 때문에내 가슴이 더 이상해졌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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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참은 질투, 먼저 보낸 마음 (7)

집에 도착했을 때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비는 오지 않았지만공기는 축축했다.나는 현관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비밀번호를 누르기 전에괜히 휴대폰을 봤다.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강태준.정말 안 보냈네.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신발을 벗고,가방을 내려놓고,불을 켰다.집 안이 환해졌다.혼자 사는 집의 불빛은가끔 너무 정직하다.아무도 없는 걸너무 분명하게 보여준다.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고천천히 현관 쪽으로 돌아갔다.도어락을 확인했다.잠겼다.그 소리를 듣는 순간손이 먼저 휴대폰을 찾았다.예전 같았으면 태준이 먼저 물었을 것이다.문.잠갔어?밥.먹었어?그런 식으로.오늘은 아니었다.오늘은 내가 먼저 하기로 했다.나는 입력창을 열었다.[도착했어.]거기까지 쓰고 멈췄다.너무 짧은가.아니다.짧아도 된다.그런데 이상하게하나 더 쓰고 싶었다.나는 다시 입력했다.[도착했어.][문도 잠갔어.]손끝이 멈췄다.이걸 보내면너무 많이 주는 걸까.태준은 분명히 좋아할 것이다.아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그 자리에서 무너질지도 모른다.그걸 알면서도나는 삭제하지 않았다.오늘은 내가 먼저 말하기로 했으니까.나는 전송을 눌렀다.읽음은 바로 떴다.정말 바로.나는 그걸 보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역시.계속 보고 있었네.답은 오지 않았다.5초.10초.조금 더.그 짧은 시간이 이상하게 길었다.왜 답이 없지.혹시 너무 컸나.혹시 내가 또 너무 많이 줬나.그때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잘했어.나는 화면을 보다가혼자 웃었다.이번엔싫지 않았다.정말 이상하게싫지 않았다.평소라면또 그 말이야, 하고 밀어냈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오늘의 잘했어는그가 먼저 확인한 말이 아니었다.내가 먼저 보낸 말에그가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대답이었다.나는 답장을 쓰지 않고그 문장을 조금 더 봤다.잘했어.이 말 하나가오늘은 나를 가두지 않았다.오히려내가 한 걸음을 알아봐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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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먼저 보낸 마음, 다시 마주친 거리 (1)

오후 세 시 회의실 앞에서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잠깐 멈췄다.안에 태준이 있었다.혼자.그는 창가 쪽에 서서 자료를 보고 있었다.회의 시작까지는 아직 십 분쯤 남아 있었고,회의실 안은 이상하게 조용했다.들어가야 하는데발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어젯밤 내가 보낸 문자가갑자기 손끝에서 다시 살아났다.도착했어.문도 잠갔어.내가 먼저 보낸 말.태준이 묻기 전에.그가 기다리고 있을 걸 알면서도,일부러 내가 먼저 보낸 말.그리고 그가 답했다.잘했어.기다렸어.네가 한 말이라서 믿고 기다렸어.그 문장들이 자꾸 나를 이상하게 만들었다.무슨 대단한 약속도 아니었다.집에 들어갔다는 말.문을 잠갔다는 말.그게 전부였다.그런데 왜 이렇게 민망하지.왜 이렇게 들킨 것 같지.나는 손에 든 자료를 한 번 고쳐 잡았다.현장 벽면 서브 카피 최종안.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내가 쓴 문장이었다.사라진 줄 알았던 온도 아래 붙을 문장.메인 카피보다 담담하게 쓰려고 했는데,막상 쓰고 보니 이것도 내 얘기 같았다.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돌아온다.정말 싫다.요즘 내가 쓰는 문장은왜 자꾸 나를 배신하는지 모르겠다.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문을 열었다.태준이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딱 그 짧은 순간에어젯밤의 메시지가 우리 사이에 다시 놓였다.도착했어.문도 잠갔어.잘했어.기다렸어.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너무 많은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나는 먼저 시선을 피했다.“일찍 왔네.”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멀쩡했다.태준은 자료를 내려놓았다.“응.”“자료 확인 중이었어?”“응.”짧은 대답.그런데 나는 이제 안다.저 짧은 응 안에그가 얼마나 많은 걸 삼키는지.예전엔 몰랐다.아니,몰랐다고 하고 싶었다.나는 태준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자료를 펼쳤다.그가 내 쪽으로 오지 않는 게 느껴졌다.다가오지 않았다.묻지도 않았다.어제 먼저 보내줘서 고마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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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먼저 보낸 마음, 다시 마주친 거리 (2)

태준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조심하면 안 돼?”“그런 뜻 아니야.”“응.”“또 응.”“그럼 뭐라고 해.”나는 그를 봤다.그가 정말 몰라서 묻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어쩌면 예전의 태준은이런 걸 물어본 적이 없어서정말 모를지도 모른다.나는 펜을 내려놓았다.“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태준은 잠깐 멈췄다.그러고는 아주 낮게 말했다.“모르겠어.”그 한마디가이상하게 오래 남았다.모르겠어.강태준이 이렇게 말하는 걸예전의 나는 상상도 못 했다.그는 늘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내가 뭘 원하는지,내가 왜 화났는지,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다 아는 사람처럼.그러다 결국 아무것도 몰랐다는 걸너무 늦게 알았다.그런데 지금은 모른다고 말한다.그게 좋다.슬프게도.“나도 몰라.”내가 말했다.태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나는 피하지 않았다.“네가 어디까지 조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어디까지 괜찮은지도 모르겠어.”“…”“근데.”나는 목이 조금 말랐다.“말 안 하면 더 망칠 것 같긴 해.”태준은 아무 말도 못 했다.내가 너무 많이 말한 걸 알아차린 건말하고 난 뒤였다.항상 그렇다.이 사람 앞에서는말이 먼저 나가고,후회가 뒤늦게 온다.그런데 이번엔후회가 바로 오지는 않았다.그게 더 무서웠다.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우진이었다.그는 우리를 한 번 보고,곧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왔다.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그런데 나는 안다.그가 아무것도 못 본 척해줄 때일수록사실은 많은 걸 본 사람이라는 걸.“먼저 와 계셨네요.”우진이 말했다.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자료 확인 중이었습니다.”나는 자료를 괜히 정리했다.우진은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세 사람뿐인 회의실.문은 열려 있었고,복도 소리도 들렸는데이상하게 숨이 조금 답답했다.우진이 내 자료를 보았다.“서브 카피 나왔군요.”“네.”“읽어봐도 됩니까?”“네.”우진은 자료를 들고 조용히 읽었다.“오래 머문 감각은, 다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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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먼저 보낸 마음, 다시 마주친 거리 (3)

그때 팀장님이 들어왔다.공기가 바뀌었다.나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쉬었다.회의는 짧게 끝났다.서브 카피는 그대로 확정됐다.별다른 수정도 없었다.너무 쉽게 끝나서오히려 마음이 덜 정리됐다.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는 자료를 챙기다가 펜을 떨어뜨렸다.테이블 밑으로 굴러간 펜.그걸 잡으려 몸을 숙이는데태준도 동시에 손을 뻗었다.우리 손이 닿을 뻔했다.정말 닿을 뻔했다.아주 가까이.나는 반사적으로 멈췄다.태준도 멈췄다.펜은 두 사람 손끝 사이에 있었다.웃기게도그 작은 펜 하나가우리 둘을 멈춰 세웠다.예전이었다면태준이 먼저 집었을 것이다.아무렇지 않게 내 손에 건넸을 것이다.손끝이 닿았을지도 모른다.그때의 우리는 그런 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아니.놀라는 걸 모른 척했다.지금은 아니었다.태준은 천천히 손을 거뒀다.“네가 집어.”그가 낮게 말했다.내가.내가 선택하게.그 말은 하지 않았지만그렇게 들렸다.나는 펜을 집었다.“고마워.”태준은 고개만 끄덕였다.그 순간문가에 있던 우진이 돌아보았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말 잠깐 봤을 뿐이다.그런데 나는 괜히 손에 든 펜을 더 세게 쥐었다.왜 이렇게 다 들키는 것 같지.아무 일도 없는데.정말 아무 일도 없는데.그 아무 일 없음이이제 제일 위험하다.⸻회의가 끝난 뒤나는 바로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사무실 뒤쪽 자료실로 들어갔다.좁은 공간.낡은 선반.박스와 샘플북,오래된 출력물 냄새.문을 반쯤 닫고선반 옆에 섰다.숨을 좀 쉬고 싶었다.오늘은 별일 아닌 것들이 계속 크게 느껴졌다.태준이 좋았다고 한 말.우진이 내 문장을 읽은 목소리.펜 하나를 사이에 둔 손.내가 먼저 보낸 메시지.문도 잠갔어.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들인데전부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되어버렸다.나는 선반에 등을 기댔다.종이 냄새가 났다.익숙한 냄새.일하는 사람의 냄새.이 안에서는 좀 덜 흔들릴 줄 알았다.그런데 아니었다.문밖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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