بيت / 로맨스 / 미열주의 / Chapter 151 -الفصل 160

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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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화. 조금만, 허락된 마음 (7)

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진짜 말 잘 듣네.”“오늘은.”오늘은.또 오늘은.우리는 계속 오늘만 이야기하고 있었다.내일은 모르니까.다음은 모르니까.지금 이 정도만,오늘 이 정도만.그렇게 겨우 이어가고 있었다.나는 지하철역 쪽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태준은 따라오지 않았다.“나 갈게.”“응.”나는 몇 걸음 걷다가괜히 뒤돌아봤다.태준은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왜 아직 보냐고,왜 그렇게 서 있냐고,왜 사람을 불편하게 하냐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하지만 싫지는 않았다.나는 아주 작게 손을 들었다.인사인지,그만 보라는 뜻인지,나도 모르겠다.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그냥 고개만 끄덕였다.나는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역까지 가는 길에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하고 싶었다.아직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당연했다.나도 아직 역에 도착하지 않았다.그런데도 확인하고 싶었다.이런 내가 너무 낯설었다.조금만.나는 어젯밤 그 말을 보냈고,오늘 하루 종일 그 말 안에서 살았다.조금만 허락한 줄 알았는데,사실은 내가 조금씩 허락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하루.말해도 무너지지 않는 거리.싫지 않다고 인정해도당장 모든 걸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나는 그걸 오늘 처음 배운 것 같았다.지하철역 입구 앞에서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나는 바로 열지 않았다.몇 초.정말 몇 초만 참았다.그리고 열었다.[강태준]* 천천히 가.나는 그 문장을 보고작게 웃었다.조심히 가도 아니고,빨리 들어가도 아니고,왜 연락 안 하냐도 아니고.천천히 가.딱 그 정도.오늘의 우리에게 맞는 말.나는 답장을 썼다.[응.]보내려다 멈췄다.또 응.나는 지우고 다시 썼다.[너도 천천히 와.]전송.읽음.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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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화. 아직은, 닿아도 되는 순간 (1)

[너도 천천히 와.]보내고 나서나는 한참 화면을 봤다.읽음.태준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나는 가방끈을 괜히 고쳐 잡았다.답이 안 오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내가 먼저 대화를 끝낼 수도 있는 말이었다.너도 천천히 와.그냥 인사처럼 보낼 수 있는 말.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나는 개찰구 앞에서 카드를 찍고플랫폼으로 내려갔다.사람이 많았다.퇴근 시간 특유의 소리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발소리,안내 방송,열차가 들어오기 전 바람,누군가의 짧은 통화.그 속에 섞여 있으니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그래도 손은 계속 휴대폰 쪽으로 갔다.진짜 미쳤나 보다.내가 지금강태준 답장을 기다리고 있다.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웃음이 날 것 같았다.어이가 없어서.그리고 조금 좋아서.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강태준]* 응.나는 화면을 보고 멈췄다.응.또 응.그런데 이상하게 이번엔 밉지 않았다.조금 뒤,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강태준]* 천천히 갈게.나는 입술을 눌렀다.별말 아닌데.정말 별말 아닌데.그 사람이 내 말을 그대로 받아자기 말로 다시 보내는 게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천천히 갈게.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대신 화면을 한 번 더 보고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열차가 들어왔다.문이 열리고,사람들이 밀려 들어갔다.나도 그 사이에 섞였다.자리에 앉지는 못했다.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창문에 내 얼굴이 비쳤다.조금 웃고 있었다.진짜 티 난다.나는 고개를 숙였다.오늘 하루 종일 이상했다.조금만.지금은 괜찮아.오늘은 괜찮아.문자해도 돼.천천히 가.너도 천천히 와.이런 말들이 뭐라고.예전 같았으면 우스웠을 말들이다.사랑해도 아니고,다시 시작하자도 아니고,보고 싶어도 아닌데.그런데 나는 이제 안다.너무 큰 말은 도망칠 수 있다.크니까.무서우니까.못 들은 척하기도 쉽다.그런데 작은 말은 이상하다.도망치기 전에 먼저 들어온다.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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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화. 아직은, 닿아도 되는 순간 (2)

나는 휴대폰을 침대 위에 던졌다.정말.진짜.이 사람은 왜 이렇게 다 꺼내놓는 걸까.좋았으면 그냥 혼자 좋아하면 되잖아.왜 꼭 말해.왜 말해서 나까지 알게 해.나는 침대 끝에 앉아던져놓은 휴대폰을 다시 집었다.화면에는 아직 그 문장이 떠 있었다.오늘 먼저 말해줘서 좋았어.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답했다.[그런 말 하면 부담스럽다고 했잖아.]읽음.답은 조금 늦게 왔다.[강태준]* 알아.[강태준]* 그래서 짧게 했어.나는 결국 웃었다.이게 짧게 한 거라고?정말 기준이 이상하다.나는 답장을 썼다.[그게 짧은 거야?]읽음.[강태준]* 많이 참았어.가슴이 내려앉았다.장난처럼 받아칠 수 있는 말인데,그 안쪽이 너무 태준 같았다.많이 참았어.얼마나 더 말하고 싶었을까.뭐가 좋았는지,왜 좋았는지,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전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그리고 참았을 것이다.내가 도망가지 않게.나는 한참 화면을 보다가천천히 답장을 썼다.[오늘은 그 정도면 괜찮았어.]보내고 나서 심장이 뛰었다.또 줬다.또.나는 자꾸 조금씩 허락하고 있다.읽음.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이번엔 내가 기다렸다.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아니,조금 무서웠다.하지만 기다릴 수 있었다.한참 뒤 답이 왔다.[강태준]* 알았어.또 잠깐.[강태준]* 그 정도로 해볼게.나는 화면을 보고작게 숨을 내쉬었다.그 정도.그 말이 나를 안심시켰다.내일도,계속도,앞으로도 아니어서.오늘 정도의 태준.오늘 정도의 거리.오늘 정도의 마음.나는 그걸 겨우 견딜 수 있었다.답장을 더 보내지 않았다.대신 휴대폰을 가슴 쪽에 잠깐 올려두었다가바로 민망해서 내려놓았다.진짜 왜 이래.나는 혼자 중얼거렸다.“큰일 났다.”방 안은 조용했다.그 조용함이이상하게 덜 외로웠다.⸻다음 날,현장에는 오전부터 사람이 많았다.최종 설치 하루 전이라업체 직원들이 계속 드나들었고,패널 위치도 몇 번 더 조정됐다.나는 일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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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아직은, 닿아도 되는 순간 (3)

그때 우진이 옆으로 다가왔다.“무슨 일입니까?”나는 바로 대답했다.“프레임이 조금 흔들렸어요. 괜찮아요.”우진의 시선이 프레임,내 손,태준,다시 내 얼굴을 차례로 스쳤다.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자재는 뒤로 빼는 게 좋겠습니다. 사람이 계속 지나가는 자리라 위험하네요.”그 목소리는 완전히 업무적이었다.고마웠다.정말로.가끔 우진은모른 척을 해주는 방식으로 사람을 살린다.설치팀이 움직였고,공간은 다시 바빠졌다.나는 노트북 쪽으로 돌아가려 했지만다리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태준이 내 옆에 서 있었다.조금 떨어져서.그는 낮게 말했다.“놀랐지.”“조금.”“미안.”“왜 네가 미안해.”“잡으려다 멈춰서.”나는 그를 봤다.“그게 왜 미안한데.”태준은 대답하지 못했다.나는 자료를 품에 끼고 말했다.“잡았어도 괜찮았고.”“…”“멈춘 것도 괜찮았어.”말하고 나서나는 눈을 감고 싶었다.오늘 나는 왜 이렇게 자꾸말을 많이 주고 있지.그런데 이번에도 후회가 바로 오지는 않았다.태준은 한참 말이 없었다.그러다가 말했다.“기억할게.”나는 바로 말했다.“그 말 하지 말랬지.”“아.”그가 멈췄다.“그럼.”태준은 정말 고민하는 얼굴이었다.나는 어이없어서 작게 웃었다.“해볼게.”태준도 아주 작게 웃었다.“해볼게.”그 말은 괜찮았다.완벽히 지키겠다는 말보다훨씬 덜 무거웠다.해볼게.틀릴 수도 있지만,그래도 해보겠다는 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괜찮다.”태준은 나를 보았다.그 눈이 너무 조용해서나는 더 오래 마주 보지 못했다.“일하자.”내가 말했다.태준은 대답했다.“응.”이번엔 내가 먼저 웃었다.태준도 따라 웃었다.아주 잠깐.현장 한가운데에서별일 아닌 것처럼.그런데 내 안에서는별일 아닌 게 아니었다.⸻오후 내내 정신없이 흘러갔다.파일명 수정,최종 출력 확인,동선 안내 문구 체크,조명 밝기 재조정.나는 일부러 더 바쁘게 움직였다.가만히 있으면 자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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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아직은, 닿아도 되는 순간 (4)

태준이 잠깐 나를 보았다.그러고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무 때나 괜찮다는 뜻은 아니야.”그가 다시 말했다.나는 이상하게 웃음이 날 것 같았다.이 타이밍에 문법을 고치고 있는 내가 어이가 없어서.그런데 그게 또 우리 같았다.무거운 말 한가운데서도이상한 데서 멈추는 것.태준도 조금 웃었다.아주 조금.그 웃음 덕분에복도 공기가 덜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말했다.“그러니까.”“…”“그 순간은 괜찮았고, 아무 때나 괜찮다는 뜻은 아니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응.”태준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그걸 같이 들어야 하는 거였는데.”나는 목이 막혔다.이건 사과보다 더 아팠다.미안하다는 말보다훨씬 더.그가 뭘 놓쳤는지이제서야 정확히 말하는 게.나는 시선을 피했다.“너 지금 너무 잘하려고 한다니까.”“응.”“근데.”나는 한참 말을 고르다가결국 말했다.“이번 건 좀 괜찮았어.”태준의 눈이 흔들렸다.“좀.”“응.”“그 정도.”“그 정도.”태준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볼게.”나는 작게 웃었다.“그 말은 진짜 괜찮네.”그는 나를 보다가아주 희미하게 웃었다.그 웃음이오늘따라 너무 사람 같았다.완벽하게 참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멋있게 후회하는 사람도 아니고,그냥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한 발씩 더듬는 사람.그래서 더 위험했다.사람 같아지면미워하기가 어려워진다.⸻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밖에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우산을 쓰기엔 애매하고,그냥 걷기엔 금방 젖을 비였다.건물 입구 앞에서 나는 우산을 꺼냈다.태준은 차 키를 손에 들고도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태워다줄까.분명 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을 텐데,그는 끝내 묻지 않았다.나는 그게 보였다.그리고 그게,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나 지하철 타고 갈게.”내가 먼저 말했다.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응.”“오늘은 안 물어보네.”“묻고 싶었어.”나는 그를 봤다.태준은 비 내리는 바깥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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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화. 아직은, 닿아도 되는 순간 (5)

나는 답장을 쓰지 못했다.그냥 한참 화면만 봤다.사람들이 옆을 지나갔다.누군가 내 어깨에 살짝 부딪혔다.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나는 다시 걸었다.역 입구에 도착할 때쯤,태준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강태준]* 보고 싶다고 하면 아직 크지.나는 계단 앞에서 멈췄다.비가 우산 끝에서 뚝뚝 떨어졌다.보고 싶다고 하면 아직 크지.그 문장을 보는 순간가슴이 조용히 내려앉았다.크다.너무 크다.아직은.그런데.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입력창을 열었다.[응.]썼다가 지웠다.너무 차갑다.[아직은.]이것도 지웠다.너무 딱딱하다.나는 한참을 서 있다가겨우 썼다.[응. 아직 좀 커.]보내고 나서가슴이 아팠다.읽음.답은 오지 않았다.나는 곧바로 하나를 더 보냈다.안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근데.]손끝이 멈췄다.근데 뭐.싫지는 않아.그 말을 보내도 되나.이건 내가 너무 많이 주는 거 아닌가.하지만 오늘 배운 건 그거였다.앞말과 뒷말을 같이 말하는 것.안 된다고만 하면,그는 멈춘다.싫지 않다고만 하면,나는 무서워진다.그러니까 둘 다.나는 숨을 고르고 보냈다.[싫진 않았어.]전송.읽음.이번엔 답이 정말 오래 없었다.나는 계단 옆에 서서비 오는 거리를 바라봤다.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무슨 짓을 한 거지.보고 싶다는 말이 아직 크다고 해놓고,싫지는 않았다고 했다.그럼 대체 뭐냐고.나라도 모르겠다.내 마음은 요즘 너무 성가시다.밀어내면서 붙잡고,안 된다고 하면서 설명하고,무섭다고 하면서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그래도 이게 거짓말은 아니었다.보고 싶다는 말은 아직 크다.하지만 그가 나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싫지는 않았다.정말 싫지 않았다.한참 뒤 메시지가 왔다.[강태준]* 알았어.또 잠깐.[강태준]* 아직 큰 거랑.잠깐.[강태준]* 싫지는 않은 거랑.잠깐.[강태준]* 같이 들을게.나는 화면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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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한 걸음 뒤에, 남은 온도 (1)

태준의 마지막 답장은 그거였다.해볼게.나는 그 뒤로 더 보내지 않았다.잘 자.내일 봐.오늘 고생했어.그런 말들이 입력창 근처까지 갔다가 전부 사라졌다.이상했다.예전에는 그런 말을 못 해서 안 보냈다.보내면 너무 많은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그런데 어젯밤에는 조금 달랐다.더 보내지 않는 것도 하나의 대답 같았다.오늘은 여기까지.내가 정한 자리에서 멈추는 것.태준도 거기서 멈추겠다고 했으니까, 나도 더 열지 않았다.휴대폰을 뒤집어 침대 옆에 놓았다.그런데도 잠은 바로 오지 않았다.눈을 감으면 자꾸 문장들이 떠올랐다.아직 좀 커.싫진 않았어.같이 들을게.오늘만.그 순간만.해볼게.별것도 아닌 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하나씩 보면 다 별말 아닌데, 모아놓으면 너무 컸다.나는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방 안은 조용했다.창밖으로 아주 약한 빗소리가 남아 있었다.어제보다 덜 외로운 조용함이었다.그게 더 문제였다.나는 그걸 알아차리고 나서 괜히 눈을 꼭 감았다.진짜 큰일 났다.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휴대폰을 확인하는 거였다.알림은 없었다.강태준에게서도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나는 잠깐 화면을 보고 있다가, 다시 잠금 버튼을 눌렀다.없네.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서운한 건 아니었다.아니, 조금은 서운했을지도 모른다.그런데 그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진짜 멈췄네.태준은 어젯밤 내가 닫은 자리에서 더 두드리지 않았다.잘 잤어?오늘 몇 시에 나가?출근 조심해.그런 말을 보내지 않았다.예전의 태준이라면 보냈을 것이다.아니, 예전이라는 말도 웃기다.그때 그는 내가 답을 안 해도 다음 말을 보냈다.내 침묵을 기다림으로 두지 못했다.그런 사람이 오늘은 아무 말도 보내지 않았다.나는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그리고 조금 허전했다.양치하면서 거울을 보는데, 내 얼굴이 어제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잠을 못 잔 사람 얼굴이었다.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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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한 걸음 뒤에, 남은 온도 (2)

점심 전, 입구 쪽 안내 스티커를 다시 붙이는 일이 생겼다.붙인 위치가 눈높이보다 조금 낮았다.나는 의자를 끌고 가서 올라섰다.“서윤 씨, 제가 할까요?”우진이 뒤에서 물었다.“괜찮아요. 금방 끝나요.”괜찮다는 말이 입에서 너무 쉽게 나왔다.말하고 나서 혼자 조금 웃겼다.어제 그렇게 괜찮다는 말 하나 때문에 종일 흔들려놓고, 나는 아직도 습관처럼 괜찮다고 한다.의자 위에 올라서서 스티커 한쪽을 떼어냈다.생각보다 단단히 붙어 있었다.손끝에 힘을 주자 비닐이 조금 울었다.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그거, 내가 잡아줄까?”태준이었다.바로 뒤는 아니었다.한 걸음쯤 떨어진 옆.잡아도 되는지 묻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나는 스티커 끝을 잡은 채 잠깐 멈췄다.예전의 태준이라면 이미 의자를 잡았을 것이다.아니면 내 손 위로 손을 겹쳐서 비닐을 떼어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나는 놀랐을 거고, 그 놀람이 싫어서 얼굴을 굳혔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 물었다.잡아줄까.별것도 아닌 말인데, 그 한 글자 차이가 이상하게 컸다.나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의자만.”태준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내 말을 한 번 더 삼키는 사람처럼, 아주 짧게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의자만.”그는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내 발목이나 종아리에는 손끝 하나 닿지 않았다.정말 의자만 잡았다.그게 웃길 정도로 정확해서, 나는 스티커를 떼면서 입술을 눌렀다.“너무 말 잘 듣는 거 아니야?”나도 모르게 말했다.태준의 손이 의자 등받이 위에서 아주 조금 멈췄다.“헷갈릴까 봐.”그 말에 스티커가 삐끗했다.나는 다시 손끝으로 모서리를 눌렀다.“누가.”“네가.”“내가?”“아니.”태준은 잠깐 말을 멈췄다.“내가.”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그는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표정은 차분했는데, 눈은 아니었다.차분한 척하는 사람의 눈.“내가 헷갈릴까 봐.”그 말은 조용히 들어왔다.조금 아프게.나는 다시 앞을 봤다.“의자나 잘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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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한 걸음 뒤에, 남은 온도 (3)

저녁 무렵, 최종 점검이 거의 끝났다.팀장님은 업체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내일 오전 오픈 전 확인할 것들만 정리하자고 했다.다들 조금 지쳐 있었다.나도 그랬다.몸이 피곤한데, 마음은 이상하게 잠이 안 오는 상태였다.작업실 한쪽에 있던 박스를 정리하다가 손끝이 종이에 베였다.아주 살짝이었다.피도 거의 안 났다.그런데 내가 손을 움찔하자 태준이 바로 봤다.멀리 있었는데도.그는 한 걸음 다가오다가 멈췄다.나는 그 멈춤을 봤다.오지 말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는 먼저 멈췄다.“베였어?”“조금.”“밴드 있어?”“아마 가방에.”“가져올까?”그 말에도 잠깐 멈췄다.가져올까.예전 같으면 이미 내 가방을 찾으러 갔을지도 모른다.어디 있냐고 묻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을지도 모른다.나는 손끝을 살짝 눌렀다.피가 아주 작게 맺혔다.별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 상황이 웃겼다.“있어.”“응.”태준은 그대로 멈췄다.나는 가방으로 가서 파우치 안의 밴드를 꺼냈다.손끝에 붙이려는데 한 손으로는 잘 안 됐다.비닐이 자꾸 말렸다.두 번 실패하자 짜증이 났다.그때 태준이 말했다.“그건 도와줘도 돼?”나는 고개를 들었다.그는 정말 물었다.이런 것까지.밴드 하나 붙이는 것까지.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조금 나왔다.“이건 도와줘도 돼.”태준의 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그러고는 가까이 왔다.딱 필요한 만큼만.그는 내 손을 덥석 잡지 않았다.내가 손을 내밀 때까지 기다렸다.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었다.태준의 손이 내 손끝을 조심스럽게 받쳤다.따뜻했다.그 순간, 몸이 먼저 기억했다.예전에 그가 내 손을 잡던 방식.아무렇지 않게 잡고, 놓을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잡고, 내가 힘을 빼면 더 단단히 잡던 손.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싫은 날도 있었고, 싫지 않은 날도 있었다.그런데 싫지 않은 날이 있었다는 걸, 나는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말하면 전부 허락하는 것 같아서.태준은 밴드 포장을 벗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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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한 걸음 뒤에, 남은 온도 (4)

정리가 끝났을 때는 밖이 어두워져 있었다.다 같이 저녁을 먹자는 말이 나왔지만, 나는 빠지겠다고 했다.팀장님은 피곤해 보이면 쉬는 게 맞다며 더 묻지 않았다.우진도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아침에 뵐게요.”“네. 고생했어요.”나는 가방을 챙겨 현장 밖으로 나왔다.건물 입구에는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어제처럼 애매한 비였다.우산을 쓰기엔 조금 약하고, 그냥 걷기엔 결국 젖을 비.나는 우산을 꺼냈다.태준도 조금 뒤에 나왔다.차 키를 손에 들고 있었다.나는 그걸 봤다.그도 내가 봤다는 걸 알았다.잠깐 사이가 생겼다.태워다줄까.그 말이 그의 입술 근처까지 올라온 걸 알았다.그런데 그는 말하지 않았다.대신 내 우산을 한 번 보고, 내 얼굴을 봤다.“지하철?”“응.”“그래.”끝이었다.그 짧은 대답에 오늘 하루가 다 들어 있는 것 같았다.묻고 싶지만 묻지 않는 사람.다가오고 싶지만 멈추는 사람.그래도 완전히 가지는 않는 사람.나는 우산 손잡이를 쥐었다.“안 물어보네.”내가 말했다.태준은 잠깐 웃지도 못하고 나를 봤다.“물어보면 싫어할까 봐.”“그 말도 이제 좀 익숙하다.”“싫어?”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리고 아주 작게 덧붙였다.“그냥 네가 너무 한 걸음 뒤에 있는 것 같아서.”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너무 많이 줬나.또.그런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이미 나간 말이었다.태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비가 우산 위에 아주 작게 떨어졌다.톡.톡.그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태준이 낮게 물었다.“너무 뒤야?”나는 대답을 못 했다.아니라고 하면 거짓말 같고, 그렇다고 그렇다고 하면 그가 또 한 발 앞으로 올 것 같았다.나는 우산 끝을 내려다봤다.“오늘은.”말이 느리게 나왔다.“한 걸음은 괜찮은데.”태준이 나를 보고 있었다.나는 끝까지 말했다.“너무 멀리는 가지 마.”그 말을 하고 나서, 비가 잠깐 멎은 것처럼 느껴졌다.사실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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