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Chapter 71 - Chapter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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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화

‘널리고 널린 대학생 따위’라는 말을 일부러 힘을 주어 강조했다. 이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민윤서의 가장 아픈 구석을 정확히 찔렀다.민윤서가 학창 시절 뛰어난 성적으로 자교 석박사 통합 과정에 우선 선발되어 창창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그런데 민윤아가 돌아온 후 그녀의 장학금을 빼앗고 지도교수 티오를 차지했으며 진학 자원을 전부 막아버렸다. 그 바람에 민윤서는 학사 학위만 취득하고 일찍이 사회에 나와 허우적거려야만 했다.그런데 지금 그것이 그들이 민윤서를 모욕하는 빌미가 되어버렸다.민윤서는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통증이 밀려왔다. 목소리가 온기 하나 없이 차가웠다.“그럴 필요 없어.”동정 따위 필요 없었고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자와 ‘한 가족’이 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줄곧 침묵을 지키던 신태현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민윤서를 쳐다봤다.그의 시선이 굳어버린 민윤서의 얼굴을 스쳤다. 안쓰러움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었고 오직 오만한 탐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일단 얘기해 봐. 결정은 내가 할게.”“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결정하는데?”신태현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믿을 수 없다는 질문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큰 덩치에서 비롯된 그림자가 민윤서를 단숨에 집어삼켰고 숨 막히는 압박감이 덮쳐왔다.민윤서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억지를 부리는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차가웠다.“우린 부부야. 네가 운영하는 회사 일에 내가 결정권이 없다고?”그 한마디에 민윤서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것 같았다.부부.한때는 민윤서에게 가장 따스한 안식처였던 두 글자가 이제는 그녀를 죄어오는 가장 날카로운 족쇄가 되어버렸다.신태현이 부부라는 명목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당당하게 빼앗고 있었다.남편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배신자의 편에 당연하다는 듯이 서서 민윤서를 절벽 끝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민윤아가 옆에서 시선을 늘어뜨린 채 순종적인 미소를 지었지만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의기양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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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민윤서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신태현을 쳐다봤다.“못 들은 거로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그러고는 제자리에 서서 신태현을 뚫어져라 봤다.신태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고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민윤서의 추궁에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네 언니가 임신했잖아. 합병한 후에 언니가 힘들지 않게 네가 일을 좀 분담해주면 얼마나 좋아.”민윤서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그녀가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민윤아가 얼마나 더러운 짓을 했는지 신태현이 모르는 게 아니었다.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그의 아이를 가진 민윤아뿐이었다. 민윤아가 힘든지,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한지만 신경 썼다.본처인 민윤서는 신태현의 입을 거쳐 상간녀의 일거리나 덜어주는 하수인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민윤서가 눈앞의 신태현을 멍하니 쳐다봤다.오직 그녀에게만 새우를 까주겠다던 사람, 평생을 지켜주겠다던 사람, 맹세를 어기지 않겠다던 남자가 이제는 가장 다정한 말투로 그녀에게 가장 굴욕적인 삶을 강요하고 있었다.이혼하겠다는 말은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민윤서가 모욕당하는 건 이제 습관이 되어버린 듯했다.심지어 민윤서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데다 그의 아이까지 가진 여자를 수발들라며 남으라고 했다.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짓밟을 수 있는 것일까?서승재가 어두운 눈빛으로 뭐라 하던 그때 민윤서가 말렸다.“선배, 이만 가요.”신태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민윤서를 쳐다봤다.“윤서 넌 여기 있어. 승재 씨만 보내고.”민윤서가 발걸음을 멈추고 신태현을 천천히 돌아봤다.그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두 눈에 남아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차갑게 얼어붙었다.“오늘 네 언니 축하 파티인데 여기 있지 않고 가긴 어딜 가?”신태현의 목소리가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그 말에 민윤서는 가슴이 턱 막혔다. 그녀가 민윤아가 잘되는 걸 배 아파하기라도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그녀가 뭐라 하기 전에 뒤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민윤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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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신태현의 말투가 차갑기 그지없었고 비난하는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갈수록 철이 없어져.”“내가 얼마나 철들었는데.”민윤서가 차갑게 웃었다.“쟤가 죽고 나면 그때 불러. 축하하게.”그러고는 서승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신태현에게서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민윤아의 얼굴 역시 굳어졌다.민윤서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더니 이제는 제법 독설까지 서슴지 않았다.신원호가 한마디 했다.“아주 안하무인이 따로 없네!”그러고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말을 이었다.“형수, 그냥 신경 쓰지 마. 형수는 앞날이 창창하잖아. 나중에 약물 연구소의 박사님한테 논문 지도까지 받으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어.”“윤서한테 화난 거 아니야. 내가 민씨 가문으로 돌아와서 자기 걸 다 빼앗았다고 생각해서 저러나 봐.”“다 내 탓이야. 차근차근 오해를 풀었어야 했는데. 너의 집안 문제 때문일 수도 있고 나랑 태현 오빠의 관계 때문일 수도 있어.”신원호가 미간을 찌푸렸다.“민씨 가문의 핏줄은 걔가 아니라 형수잖아. 왜 이렇게 착해?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자꾸 기어오르려고 하지.”민윤아가 심호흡하며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신태현에게 시선을 돌렸다.“태현 오빠, 난 그저 내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만을 바랄 뿐이야.”신태현이 민윤아의 배를 내려다보았다.“민윤서한테 사과하라고 할게.”민윤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나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금이 생기는 거 싫어.”신원호가 참다못해 거들었다.“형수, 배 속에 있는 애가 엄연한 신씨 가문의 장손인데 뭐 하러 그렇게 눈치를 봐?”아이만 태어나면 민윤서 따위가 눌러앉을 자리가 없을 것이다.‘민윤서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이 소식이 없다니. 형이 윤서랑 잠자리도 안 한 거 아니야?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금까지 아이가 생기지 않을 수 있어?’...그 자리에서 나온 뒤 서승재는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민윤서를 데리고 가서 찬물로 손을 씻게 한 다음 서둘러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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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명세환이 붕대를 감은 민윤서의 손목을 보더니 덤덤한 말투로 물었다.“남편분이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습니까?”사건 정황을 파악하며 내내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조금 전 상담할 때 민윤서가 전혀 언급하지 않아서 먼저 물은 것이었다.민윤서가 잠시 멈칫하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다.“아니요. 이건 그냥 실수로 다친 겁니다.”명세환이 고개를 끄덕였다.“관련된 세부 사항은 전부 저한테 말씀해 주셔야 해요. 구체적이고 완벽한 증거가 있을수록 소송에서 훨씬 유리하니까요.”이혼 소송을 진행하려면 법적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 혼인 관계의 파탄, 별거 입증, 혹은 상대방의 귀책 사유 등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했다.그리고 민윤서는 그 증거들을 이미 차근차근 준비해둔 상태였다.다만 신태현의 신분을 고려하면 이혼 소송을 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그를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민윤서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명세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또 연락드리죠.”그가 나가고 나서야 민윤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승재가 민윤서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긴장돼? 명세환 변호사가 원래 좀 무뚝뚝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여. 하지만 능력 하나만큼은 믿어도 돼.”민윤서도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다.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저마다 성격이 있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명세환은 탄탄한 집안 출신으로 변호사 일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미였다.“뭐 좀 더 먹을래?”민윤서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됐어요. 집에 들어가서 서류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려고요.”서승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손 다쳤으니까 며칠 쉬어. 상처 다 낫고 출근해.”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정도 가벼운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일 정상 출근할게요. 연구소에 뒷수습거리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요. 택시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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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가뜩이나 민윤서에게 불만이 많았던 조예린이었는데 꼬투리까지 잡았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쏘아붙이는 말투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윤서 씨 때문에 회사가 구설에 올라 난리가 났어. 일 수습도 못 할 거면 차라리 출근하지 마. 집구석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팀원들한테 피해를 주지 말고.”옆에 있던 한 고참 직원이 서둘러 다가와 말렸다.“자자, 그만하고 회의실로 들어갑시다.”어차피 한 회사 안에서 한 팀인 이상 아무리 민윤서를 따돌려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갈등이 심해지면 업무에만 차질이 생길 뿐이었다.조예린이 피식 웃더니 더는 민윤서를 곤란하게 하지 않고 먼저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고참 직원이 측은한 표정으로 민윤서를 보며 나지막이 다독였다.“조 팀장님이 원래 좀 저래. 실력도 좋고 자존심도 워낙 세다 보니 이번 표절 사건 때문에 윤서 씨한테 오해가 깊어서 그런 거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마.”“제대로 된 실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해 내면 조 팀장님도 자연스레 인정할 거야. 진짜 실력만 있다면 계속 윤서 씨를 괴롭힐 사람은 아니야.”민윤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고마워요.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요.”청림바이오에 들어온 후 민윤서는 딱히 능력을 과시하려 들지 않았고 그저 서승재의 밑에서 일했다.지난 몇 년간 삶의 무게중심이 온통 신씨 가문에 쏠려 있었기에 회사에서의 명성 따위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었다.그러다 보니 서승재를 제외하고는 민윤서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다들 민윤서를 그저 흔한 연구원 정도로 생각할 따름이었다.민윤서의 태도가 겸손하고 뒷배를 믿고 설치는 구석이 전혀 없는 걸 본 고참 직원은 내심 호감이 생겼는지 몇 마디를 덧붙여 당부했다.“정 힘들면 말을 아끼고 가급적 조 팀장님 눈에 띄지 마. 깐깐하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사람이거든.”...민윤서가 회의실로 들어가 보니 각자 앞에 프로젝트에 관한 서류가 놓여 있었다.외부에서 민윤서가 핵심 아이디어를 표절했다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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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민윤서가 내용을 대형 스크린에 띄운 뒤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빠르게 누르며 조작했다.“우선 외부에서 표절을 주장하는 핵심 근거는 기본적인 로직부터 틀렸습니다.”민윤서의 목소리가 또렷하고 냉철했다.“전체 프레임워크의 설계 방향, 핵심 구간, 알고리즘 로직 모두 상대측의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형태만 비슷할 뿐이에요. 의도적으로 여론을 조작한 게 틀림없어요.”조예린이 즉시 반박했다.“자기변명에 불과해. 직접 증명도 못 하면서 로직이 틀렸다고 말하면 다야?”이 프로젝트의 큰 틀을 서승재가 잡고 있었기에 조예린은 민윤서가 이를 뒤엎고 재설계할 능력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민윤서가 조예린의 의구심 어린 시선을 개의치 않고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외부의 허점을 정확히 짚어내 하나하나 비교 분석하는가 하면 완벽한 타임라인과 초안 기록을 제시해 독창성을 입증했다.나아가 여론 파장에 휩쓸려 엉망이 된 프로젝트 부분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모두가 생각지도 못한 한 차원 높은 최적화 방향까지 제시했다.회의실 안, 사람들의 표정이 멸시와 의구심에서 점차 경악으로, 이내 충격으로 바뀌었다.조예린 역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민윤서가 보여준 논리적 사고, 프레임워크 설계 역량, 프로젝트 통제력이 조예린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그제야 조예린은 민윤서가 결코 허울뿐인 명예를 지닌 게 아니고 지난 표절 스캔들이 민윤서를 매장하기 위한 모함이었음을 깨달았다.“윤서 씨... 진짜 학사 학위만 취득한 거 맞아?”조예린이 미간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학력을 위조한 거 아니야?”민윤서가 마우스를 내려놓고 허리를 곧게 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제 학력은 조회하면 다 나옵니다. 위조한 거 아니에요.”회의실에 적막이 흘렀고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인터넷에서 표절범이라 욕을 먹던, 아무 배경도 없던 사람이 홀로 모두가 골머리를 앓던 문제를 완벽히 정리했고 프로젝트 전체를 심폐 소생시켜 놓았다.누군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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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이런 내부 정리는 원래 회의를 열지 않아요.”민윤서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흘러나왔다.“굳이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건 나한테 스스로 증명할 기회를 줘서 선입견을 완전히 없애게 하기 위해서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기대에 부응해야죠.”서승재가 다정하게 말했다.“아무튼 상황을 참 잘 꿰뚫어 본다니까. 난 그저 네가 계속 따돌림을 당해서 일하기 힘들어질까 봐 그랬지.”“사실 시간이 지나면 다들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텐데요.”“아니야. 편견이라는 건 한번 뿌리 내리면 매사에 걸림돌이 돼. 한 번에 해결해야 앞으로 일하기가 훨씬 수월해져.”민윤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선배는 기술적인 일을 하는 것보다 대표 자리가 훨씬 잘 어울리네요.”서승재가 실소를 터뜨렸다.“칭찬으로 받아들일게.”...여론의 파장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프로젝트가 중단된 상황을 해결하려면 다각도의 협력과 해명 작업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의료 기기를 교체하는 일이었다.하지만 그 기회마저 신태현이 중간에서 채가 민윤아에게 넘겨버렸다. 결국 이 일을 공식적으로 바로잡을 판을 따로 마련해야 했다.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민윤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업무를 마치고 차를 타기 위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민윤서의 앞을 막아섰다.민윤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상대가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차에 타시라고 하십니다.”그녀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가슴속에서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솟구쳤다.앞을 막아선 사람은 다름 아닌 신태현의 보좌관 진현수였다. 진현수가 깍듯하게 허리를 살짝 숙인 채 절제된 미소를 띠고 있었다.민윤서는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바빠서 안 돼요.”싸늘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차 문을 열려는데 진현수가 다시 막아섰다.진현수의 얼굴에 여전히 정중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태도만큼은 완강했다. 오늘 그녀가 따라나서지 않는다면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세였다.“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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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민윤서는 이런 오만한 동정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는 기회 따위와 그녀의 자존심을 바꿀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신태현이 민윤서가 단칼에 거절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두 눈에 뜻밖이라는 기색도, 분노의 기색도 없었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말투는 여전히 차분했다.“강요하진 않을게.”신태현이 계약서를 거두어들이더니 두 사람 사이의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계약서는 일단 내가 보관하고 있을게.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찾아와.”민윤서가 고개를 돌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차 안이 몇 초간 침묵에 휩싸였다. 신태현이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무심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며칠 뒤면 우리 결혼 3주년 기념일이야. 집에서 소규모 연회를 열 거니까 어울리는 드레스를 하나 골라 입고 제시간에 참석해.”아주 지극히 평범한 통보를 내리듯 덤덤한 말투였다. 의사를 묻지도, 상의하지도 않았다.민윤서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굳은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연회는 할머니와 유은영이 준비했다. 참석하지 않았을 때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민윤서는 잘 알고 있었다.이혼 절차가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꾹 참고 맞춰줘야 했다. 다만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재벌가의 결혼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다 체면과 체면이 얽힌 일이었다.진현수가 차에서 내리는 민윤서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사모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습니다.”신태현이 멀어져 가는 민윤서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언젠가는 깨달을 거예요. 내가 다 윤서를 위해서 이러는 거라는 걸. 가요.”진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사모님께서 요즘 대표님과의 이혼을 준비 중이시라는 소문이 있던데 알아볼까요?”신태현이 미간을 주물렀다.“됐어요. 윤서는 절대 나랑 이혼하지 않아요.”...다음 날.민윤서는 청림바이오로 가지 않고 결혼기념일 연회 때 입을 옷을 고르기로 했다.신태현과 함께 가는 건 진작에 거절했다. 이제는 그와 1분 1초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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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민윤서의 몸이 순간 굳어버렸고 숨도 턱 막혔다.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말투였다.돌아보지 않아도 민윤서에게 한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신태현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민윤아의 편만 들었다.배짱이 두둑해진 민윤아는 기세등등하면서도 너그러운 척하며 드레스를 민윤서에게 건넸다.“괜찮아, 윤서야. 네가 마음에 든다면 양보할게. 난 다른 거 고르면 돼...”민윤아가 손을 뻗었지만 민윤서가 받지 않고 되레 손을 거두어들였다.바로 그 순간 민윤아가 손을 놓아버린 바람에 드레스가 카펫에 툭 떨어지고 말았다.“어떡해...”민윤아가 일부러 당황한 척하자 민윤서가 차가운 얼굴로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됐어. 남이 손댄 물건 따위 탐나지 않아.”뼈가 있는 한마디였다. 이런 양보 따위는 생각만 해도 싫었다.민윤아의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신태현을 돌아봤다.“오빠, 윤서... 아직도 나한테 앙금이 남았나 봐.”신태현이 민윤서를 보며 말했다.“적당히 해. 주제를 잊지 말고.”민윤서의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온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예전에도 민윤아에 대한 민윤서의 태도가 좋지 않다 싶으면 신태현은 매번 민윤아를 감싸고 돌며 그녀를 속 좁고 질투가 심한 여자로 몰아가곤 했었다.이제는 그녀가 아끼는 것들을 빌미로 고개를 숙이라 강요하고 있었다. 민윤서의 가정배경과 지금의 지위로는 그에게 반기를 들기조차 부족하단 말인가?민윤서가 손톱이 살점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신태현이 무심하게 시선을 거두고 민윤아를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마음에 들면 가서 입어 봐.”민윤아가 바로 환하게 웃었다. 조금 전 속상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그럼 가서 입어볼게. 양보해줘서 고마워.”그러고는 드레스를 들고 직원과 함께 싱글벙글 피팅룸으로 들어갔다.민윤서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지난 세월 신태현에게 쏟아부었던 마음과 집착이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맹목적으로 집착하며 결혼이라는 굴레에 갇혀 혼자 감동했지만 결국 남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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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무슨 얘기를 해? 이혼 얘기를 꺼냈을 땐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면서.’집안 체면만 아니었다면 민윤서가 굳이 여기서 이런 수모를 감내할 이유가 없었다.결국 아무 말 없이 드레스를 움켜쥐고는 피팅룸으로 들어갔다....피팅룸 안의 방음이 그다지 잘되지 않았다. 민윤아의 목소리가 옆 칸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와, 사모님. 손목에 차신 팔찌 정말 너무 예뻐요.”점원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아까 보니까 국장님도 똑같은 팔찌를 하고 있던데 커플 팔찌 맞죠?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실까!”민윤서가 멈칫했다가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신태현이 손목에 줄곧 심플한 팔찌 하나를 하고 있었다. 디자인이 요란하지 않아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도 어려운 팔찌였다.민윤서가 과거 몇 번이고 커플 팔찌를 맞추자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심플한 디자인이라도 상관없다고 했다.하지만 그때마다 신태현은 액세서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필요 없다는 말로 거절하곤 했었다.알고 보니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필요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미 누군가와 커플 팔찌를 나눠 꼈던 것이었다.묵직한 통증이 가슴에 퍼져나가더니 호흡마저 씁쓸하게 느껴졌다.이미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고 호흡이 맞는 상대가 있었으면서 왜 민윤서와 결혼한 것일까?타협이자 책임감 따위로 포장된 아무런 의미도 없는 혼인에 불과했다.민윤서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드레스를 입어볼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피팅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문을 열자마자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온 민윤아와 딱 마주쳤다.조명 아래서 은은하게 빛나는 민윤아의 팔찌가 눈에 띄었다.민윤서를 본 민윤아가 다가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해명했다.“오해하지 마. 나랑 태현 오빠가 차고 있는 이 팔찌 해외에서 아이들이 선물로 준 거야. 커플 팔찌 같은 거 절대 아니야. 진짜 커플 팔찌였으면 두 사람이 결혼할 일도 없었겠지.”민윤아가 아무런 사심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지만 민윤서는 지독한 비아냥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두 사람의 관계가 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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