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폭군이 뻐꾸기 황녀에게 집착한다: Chapter 91 - Chapter 100

115 Chapters

89. 돌아오는 길

별궁을 나서는 길, 고요한 밤공기 속에서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왜 혼자 위험한 곳에 찾아온 거야.” “…미리 말하면 폐하가 절대 못 가게 하셨을 거잖아요.” “맞아. 네 말이 맞네. 당연히 못 가게 막았겠지.” “그러니까 혼자 온 거예요.” 칼리안이 걸음을 멈추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흑발적안에 담긴 걱정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하마터면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죄송해요, 걱정 끼쳐서.” “다신 이러지 마. 내 허락 없이 위험한 곳에 뛰어들지 않겠다고 해.” “…네, 알겠어요.” “약속해.” “약속할게요.” 칼리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가 쓸어내렸다. “정말 다행이야, 정말로.” “제가 그렇게 많이 걱정되셨어요?” “죽는 줄 알았어, 진심으로.” “…과장이 좀 심하시네요, 폐하.” “과장 아니야. 그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넌 몰라.” 엘로라는 그 가라앉은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느끼며, 왈칵 치솟는 감정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손을 굳게 맞잡은 채, 다시 궁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엘로라.” “네.” “오늘 내가 해준 얘기, 전부 진짜야. 의심하지 마.” “…알아요. 폐하의 그 표정을 보면 진짜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미안해. 조금 더 빨리 털어놓았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숨기지 않고 전부 인정해 주셔서…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그가 다정하게 팔을 벌려 그녀를 조용히 품에 끌어안았다. 엘로라는 그 단단하고 따스한 품 안에서, 오늘 하루 동안 몰아친 모든 진실의 무게와 피로를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폐하.” “응.” “저, 이제 정말로 제가 누구인지 완벽하게 알아야겠어요. 어설프게 남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부 다요.” 칼리안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더는 미루지 않고 전부 알려줄게.” “약속이에요, 거짓말하기 없기예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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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밝힐 결심

궁으로 돌아온 뒤, 칼리안은 오래도록 깊은 고뇌에 잠겼다. “폐하.” 단테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더는 숨길 수 없어.” “황녀님께 직접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그래.” 칼리안은 품속에서 서류 뭉치와 낡은 초상화를 꺼내 들었다. “이걸 전부 보여줘야겠어.” “각오는 되셨습니까?” “…아니.” 그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으니까.” “로웰 님도 부르시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아마 유모가 가장 많은 걸 알고 있을 테니까.” “두 분 다,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나도 그러길 바라.” 단테가 물러간 뒤에도 칼리안의 시선은 책상 한편에 묵직하게 놓인 봉투에 멈춰 있었다. 얽히고설킨 운명의 실타래를 이제는 정말로 풀어헤쳐야 할 때였다. 그것이 훗날 어떤 피바람을 몰고 오더라도, 더 이상 어린 그녀를 가짜라는 그늘 속에 방치할 수는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칼리안은 엘로라를 조용히 집무실로 불렀다. “엘로라, 할 이야기가 있어.” “…드디어요?” “그래. 이제, 전부 말해줄게.” 엘로라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크게 뛰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이 마침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지금 바로요?” “응, 지금.” “…준비가 됐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더는 미룰 수 없어.” “로웰도 같이 오나요?” “그래. 유모도 이미 불러두었어.” 엘로라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덜덜 떨리는 손끝을 감추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 집무실 문 앞에 다다르자, 그 안에는 이미 로웰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모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로웰, 왔구나.” “아가씨...” 두 사람의 시선이 깊게 부딪쳤다. 그 순간, 엘로라는 직감했다. 오늘로써 정말 모든 것이 밝혀지리라는 것을. 칼리안이 조용히 집무실 문을 닫았다. 방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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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숨겨진 진실

조용한 집무실 안에는 두 사람만의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맴돌았다. 칼리안은 품속 깊은 곳에서 문서와 낡은 초상화 한 장을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이거… 대체 뭐예요?” “네가 서고에서 직접 찾았던 흔적들과, 내가 음지에서 따로 철저하게 조사한 결과물들이야.” 엘로라는 눈앞에 펼쳐진 증거들을 바라보며 가늘게 손을 떨었다. “여기에 적힌 헬레네. 이 사람이 바로 네 생모야.” “…생모요? 저에게 어머니가 있었다고요?” “대단한 마력을 지녔던 대마법사이자 옆 나라 로이센 왕국의 2왕녀였지. 하지만 마녀사냥이 성행하던 시기 억울하게 화형당했어.” “그럼… 그럼 저는…” “그래. 너는 아버지인 그레이스 대공과 어머니인 대마법사 헬레네의 피를 이어받은 대공가의 정당한 후계자야.” 엘로자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한 파란 눈으로 칼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근친이라는 그 소문은 완전히 거짓이라는 뜻이네요. 애초에 나와 당신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이었어.” “완전한 타인은 아니지. 적어도 8촌 이상의 먼 친척이긴 하니까.” 엘로라는 책상 위에 놓인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림 속 여인의 신비로운 은발과 보라색 눈. 눈 색깔 빼고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닮았어요, 정말 저랑 똑같아요.” “나도 깜짝 놀랐어. 이상하게 낯익고 눈에 밟힌 이유가 다 있었던 거지.” “그런데 왜… 이제야 알려주신 거예요?” “확신이 필요해서. 불완전한 진실로 어설프게 널 흔들고 싶지 않았거든.” “지금은 완벽하게 확신이 서신 건가요?” “그래.” “…믿기지가 않아요. 꼭 꿈을 꾸는 것 같아요.” “나 역시 처음엔 믿기 힘들었어.” “후작도 이미 알고 있겠네요?” “아마 그렇겠지. 선황제가 널 지키기 위해 숨겼던 그 비밀을, 후작은 어떻게든 파헤쳐서 널 몰아붙이려 했던 거야.” 엘로자는 초상화 속 어머니의 따스한 눈빛을 다시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비록 한 번도 품에 안겨본 적 없는 어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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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정체를 받아들이다

“그럼 왜 아무도 진작 말해준 적이 없는 거예요.” 칼리안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위험했으니까. 대마법사 헬레네도 가진 힘 때문에 목숨을 잃었잖아.” “그럼 저도 자칫하면 어머니처럼 될 뻔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숨겨야만 했던 거야. 로웰도, 선대 황제도 널 지키기 위해 그 비밀을 필사적으로 묻어둘 수밖에 없었어.” 엘로라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럼 정말…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게 아니었네요. 아무도 절 원하지 않아서 내쳐진 게 아니었어.” “아니야, 단 한 번도 버려진 적 없어. 다 널 사랑해서 숨긴 거였으니까.” 엘로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칼리안은 그걸 안타깝게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미안. 좀 더 빨리 말해줬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폐하 잘못이 아닌걸요.” 엘로라가 눈물을 슥 훔쳐내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늦게라도 저에게 진실을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고맙다는 말은 내가 들을 자격도 없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아픔을 혼자 견디게 만들었잖아.” “그래도요. 지금이라도 제가 누구인지 진실을 알게 됐으니까, 된 거예요.” “약속하지. 앞으론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게.” “그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 “응, 반드시.” 칼리안이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부드럽게 품에 끌어안았다. “이렇게 있으니까 이상하게 앞으로는 다 괜찮아질 것 같아요.” “맞아, 내가 전부 그렇게 바꿀테니까.” “그 말, 진짜 믿어도 되죠?” “믿어. 내 모든 것을 걸고 약속할게.” “…네, 믿을게요.” 한참을 그의 품에 안겨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엘로라가 문득 생각이 난 듯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근데 로웰은 이걸 다 알고 있나요?” “당연히, 어쩌면 훨씬 오래전부터일지도 몰라.” “나중에 따로 자세히 물어봐야겠어요.” “그래, 언젠가는 꼭 들어봐야 할 테니까.” “로웰은 늘 표정이 복잡했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었네요.” “아마 매 순간마다, 진실이랑 널 지켜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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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확신이 들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해요? 후작이 가만히 있을 리 없잖아요.” 엘로라는 초조함을 누르며 칼리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장은 아무것도 하지 마.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니까.” “그럼 에녹은 어떻게 하죠?” “그들도 우리가 움직인다는 걸 알고 있어. 아마 어떻게든 우릴 이용하려 들겠지.” 엘로라는 하얗게 질린 손으로 옷자락을 꽉 움켜쥐며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이제 더 이상 숨지 않을래요. 피하는 건 질색이에요.” “…엘로라. 무모하게 나서진 마.” “이제 진짜 제 뿌리를 알았으니까요. 전 더 이상 반쪽짜리 황녀가 아니란 말이에요.” 칼리안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이제 당당히 세상 앞으로 걸어도 돼.” “도와주실 거죠?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당연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에서 지켜줄 거야.” “진짜죠? 약속이에요.” “그래, 약속할게.” “그런데 폐하, 후작을 무너뜨릴 진짜 증거는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미 그레이스 대공가로 황실의 조사대를 보냈어. 사흘 안으로 소식이 올 거야.” “같이 따라 가면 안 돼요? 저도 힘이 되고 싶어요.” “아직은 위험해. 후작의 눈이 어디에 미칠지 모르니 조금만 더 기다려줘.” “…알겠어요.” 두 사람의 마주 잡은 눈빛 속에는 앞으로 닥칠 싸움을 향한 같은 결심이 팽팽하게 담겼다. “그런데 폐하, 저 이제 공식적으로 뭐라고 불려야 해요?” “그레이스가의 대공녀, 그 호칭이 가장 정확하고 맞겠지.” “되게 낯설고 신기하게 들리네요.” “처음이라 그래. 곧 익숙해질 거야, 네 진짜 이름이니까.” “그럼 폐하는요? 앞으로 저를 뭐라고 부르실 거예요?” “…너는 언제나 내게 엘로라야.” “그거면 충분해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봄날의 햇살처럼 옅게 웃었다. 처음으로 어둠이 아닌 밝은 미래를 함께 그려보는 순간이었다. “근데 폐하, 조사대는 진짜 언제쯤 돌아온대요?” “내일 모레쯤이면 소식이 오겠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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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달라진 둘의 사이

며칠 뒤, 궁궐의 한적하고 아름다운 정원. 엘로라와 칼리안은 우연히 마주쳤다. “어라?” “네가 웬일이야, 여기까지.” “잠깐 산책 나왔는데요. 폐하도요?” “나도 마찬가지야.”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정오였다. 만개한 꽃잎들 사이로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세요, 폐하?” “그냥, 답답해서 바람 좀 쐤지.” 엘로라가 그의 곁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잠시 흘렀다. 허나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했다. 엘로라가 먼저 말을 꺼냈다. “폐하.” “응?” “요즘 보면… 옛날보다 훨씬 편해 보이세요.” “그런가. 내가 좀 편해졌나 보네.” “진짜예요. 표정이 훨씬 부드러워져서 다른 사람 같아요.” 칼리안이 낮게 허스키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억지로 지어내는 것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진짜 웃음이었다. “…왜 그렇게 빤히 봐.” “처음 봐서요. 폐하가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거.” “내가 웃는 게 그렇게 신기해? 이상해?” “아니요. 이상한 게 아니라… 예뻐요.” 칼리안의 하얀 얼굴에 살짝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불쑥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그냥 마음에서 나온 건데요.”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왜요, 저도 폐하한테 예쁘다는 말 오늘 처음 들어봤는데요.”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이니까.” “그럼 저도 지금 하는 말 진심이에요.” “이거 봐라. 아주 대답하는 게 능청스러워졌어.” “폐하를 자꾸 옆에서 닮아가나 봐요.” “내가 언제 너를 그렇게 가르쳤어. 싫으신가?” “싫다곤 안 했는데요.” “그럼 좋다는 뜻이네, 우리 황녀가.” “…뭐, 그런가 보다 해야죠.” 두 사람 사이로 잔잔하고 맑은 웃음이 핑퐁처럼 오갔다. 모처럼 세상의 근심을 모두 잊은 듯한, 걱정 없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폐하, 근데 갑자기 좀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말해봐.” “원래 이렇게 다정하고 잘 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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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예상치 못한 스킨십

“가까이 와봐.” 칼리안의 낮은 음성이 조용한 정원을 부드럽게 감쌌다. 엘로라는 그 요구에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요. 사람들도 다 보는데…” “왜라니. 그냥, 네 얼굴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망설이는 그녀를 향해 칼리안이 먼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옷자락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엘로라는 결국 조심스럽게 그의 옆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어깨가 완전히 맞닿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고도 가까운 거리였다. “…이 정도면 됐어요? 더 붙어야 해요?” “조금만 더.” “여기서 더요? 이러다 정말 품에 안기겠어요.” “응. 그게 원래 내 뜻이었는데.” 장난기가 살짝 묻어나는 칼리안의 대답에 엘로라는 뺨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의 단단한 어깨에 반쯤 기대게 된 모양새가 되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과 동시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폐하.” “왜.” “이거… 대체 무슨 의미예요? 저 놀리는 거죠?” “몰라서 물어?” “…네. 당연히 장난이신 줄 알았죠.” 엘로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리안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가 그녀의 하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닿았다가 떨어지는 순간의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온도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런 의미야. 이제 알겠어?” 엘로라의 얼굴은 그야말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런 행동을 하시는 거예요! 사람 민망하게…” “싫어?” “그, 그건 아니지만…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사람이 참 무모하게 직진하신다니까요.” “그럼 됐네. 내 마음에 들었다는 뜻으로 알게.” “이런 식으로 매번 은근슬쩍 넘어가는 거, 진짜 되게 얄미운 거 아세요?” “몰랐는데, 지금 방금 네 입으로 알려줬잖아.” “지금 알았으면 앞으로 조심하세요.” “그래서, 아까 그 입맞춤이 정말 싫었어?” 칼리안이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은근하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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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새로운 진실

다음 날 아침. 엘로라는 창가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유난히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오랫동안 그녀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한 아침이었다. “전하, 오늘따라 기분 좋아 보이세요. 어제 좋은 꿈이라도 꾸셨나 봐요.” 곁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가 맑게 웃으며 물었다. 엘로라는 거울을 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어쩐지 오늘 하루는 조금 다를 것 같아서.” 창밖으로 눈부시게 맑은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살았던 평온함이 비로소 찾아온 기분이었다.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화장대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더 이상 불안에 떨던 어린 소녀가 비치지 않았다. 엘로라는 낯설지만 놀랍도록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이제 정말, 내가 누군지 똑바로 알았으니까.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도 없어.’ 그 단단한 생각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든든함이 차올랐다. 그러나 그 평온한 환희도 잠시였다. 우다다-!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로웰이 다급한 얼굴로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가씨, 큰일 났어요! 지금 가만히 계실 때가 아닙니다.” 엘로라는 유모의 창백해진 안색을 보고 즉시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유모가 이렇게 당황하는 건 오랜만인데.” “후작이… 또다시 비공식 귀족 회의를 긴급히 소집했다고 해요. 이번엔 아가씨의 출생과 혈통에 관한 확실한 안건을 가지고서요.” 엘로라의 평온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벌써? 어제 그렇게 물러나 놓고 벌써 움직였다고?” “조사대가 그레이스 대공가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그 자도 어젯밤에 이미 손에 넣은 모양이에요.” “그럼 후작도 이제 진실이 전부 드러났다는 걸 다 아는 거네.” “아마도요. 그러니 더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마지막 발악을 준비하는 거겠죠.” ‘결국 이렇게 다시 부딪히는구나. 평화는 정말 잠깐이었어.’ 모처럼 찾아왔던 평온한 아침은, 이렇게 가차 없이 짧은 끝을 맺고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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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소집된 회의

회의장 안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거칠게 감돌았다. 높은 천장 아래, 대신들의 낮은 웅성거림은 뱀의 혀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다들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살벌한 얘기가 오갈지 짐작하는 눈치였다. “오늘 안건이 보통 심상치 않다던데, 들었나?” “황녀 전하의 혈통에 관한 얘기라던데요. 결국 터질 게 터진 거지.” “또 그 소문인가. 궁궐 안이 아주 시끄러워지겠군.” 수군거림이 점점 커지다,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레이너드 후작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던 탓이었다. 칼리안은 상석에 앉아 그 모든 탐욕스러운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오늘, 오랫동안 미뤄왔던 썩은 부위를 완전히 도려내야 한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끝을 봐야 할 때야. 더 이상 숨길 수도, 숨겨서도 안 돼.’ 곁에 선 단테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폐하, 모든 준비는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명만 내려주십시오.” “그래. 이제 시작하지.” 그의 목소리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를 소집한 이유는…” 레이너드 후작이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의 출생에 대해 명확히 짚고 넘어가기 위함입니다. 더 이상 의혹을 방치할 순 없습니다.” “근거 없는 추잡한 소문으로 회의를 소집하다니, 지나치군.” 칼리안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근거가 없다고 하시니 말인데, 폐하께서는 이미 뭔가 감추고 계신 게 있으시지 않습니까?”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석의 칼리안에게 무겁게 쏠렸다. “…무슨 뜻이지, 후작.” “그레이스 대공가, 라는 이름 말입니다. 그 혈통이 과연 지금의 황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밝혀야 합니다.” 회의장이 크게 술렁였다. 금기시되던 이름이 거론되자 대신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 그 시각, 엘로라는 문밖에서 그 위험한 대화를 숨죽여 엿듣고 있었다. “공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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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정체를 밝히다

‘더는 숨을 수 없어. 도망치는 건 오늘로 끝이야.’ 엘로라는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두려움을 꾹 눌렀다. “하아…”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무거운 회의장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황녀님?” 모두의 서늘한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날카롭게 쏠렸다. 칼리안이 예상치 못한 등장에 크게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엘로라. 네가 왜 여기에…” “괜찮아요, 폐하.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에요.” 그녀는 당당한 태도로 대신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저는 그레이스 대공가의 후계자입니다. 선대 폐하의 친딸이 아니라는 뜻이죠. 우리는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입니다.” 그러자 회의장이 순식간에 차가운 물을 끼얹은 듯 얼어붙었다. “그러니 세간을 떠돌던 근친이라는 부정한 소문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레이너드 후작의 굳은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과 초조함이 짙게 스쳤다. “그, 그런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겁니까. 증거가 있습니까?” “믿기 싫으시면 굳이 안 믿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곧 진실을 증명할 증거가 나올 거예요.” “증거요?” “그레이스가에 황실의 특별 조사대를 보냈습니다. 곧 모든 사실을 밝혀지겠죠.” 후작의 표정이 순간 사색이 되어 크게 흔들렸다. 그 당황스러운 반응이야말로, 그 어떤 말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조사대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난 들은 바가…” “말 그대로예요. 폐하께서 이미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셨거든요.” “그, 그런 얘기는 공식적으로 들은 적이…” “들으실 필요 없었겠죠. 후작님과는 애초에 상관없는 영지의 일이었으니까요.” 엘로라의 침착하고도 담담한 대꾸에, 엄숙해야 할 대신들 사이에서 참지 못한 작은 웃음소리마저 피식 새어 나왔다. 후작의 얼굴이 분노와 당황으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지금 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신을 능멸하고 조롱하시는 겁니까!” “조롱이 아니라, 그저 팩트인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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